|
240802. 묵상글 (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
- 희망과 열망의 포르치운쿨라. 등 )
----------------------------------------------------
240802.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희망과 열망의 포르치운쿨라
포르치운쿨라 축일
어제 그리고 지난 10일간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하면서 그 의미가 무엇일까?
특히 올해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올해 축일을 지내는 곳이 이곳 아시시 마을이기 때문이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 축일을 지내기 때문입니다.
원래 올해 저는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제주에서 하려고 했는데
이곳 아시시 마을에서 서울 3개 지구 합동으로 축제를 지낸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곳을 향해 행진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곳 이름을 아시시 마을이라고 하고,
이곳에서 포르치운쿨라 축제를 지낸다고 하니
이곳이 서울 지구 형제회들의 아시시와 포르치운쿨라가 되겠구나,
아니, 더 나아가서 되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되도록 저와 우리 행진단이 일조를 해야겠구나 생각했던 것이고.
그래서 강원도 고성에서부터 여기까지 10박 11일을 걸어왔습니다.
그런 마음이었는데 행진 중간 쯤 주례와 강론을 제게 부탁하는 메일을 받고는
이런 저의 마음을 주최 측에게 들킨 것 같기도 하고, 이신전심인 것 같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엮어주시는 것 같기도 하여 마음이 묘했습니다.
아무튼 아시시 마을은 서울 지구들의 포르치운쿨라가 되면 좋겠다는
영감이 떠올랐고 그래서 회원들, 특히 초기 양성기 회원들이
프란치스칸 원천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으로서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하면 좋겠다는
구체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포르치운쿨라 축일의 의미부터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많은 회원이 이 축일을 전대사 얻는 축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대사를 얻는 축일인 것 맞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는 전대사를 얻는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칸의 고향과 원천을 찾아가 쇄신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고백성사를 본 것도 전대사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프란치스칸답지 않았던 잘못을 뉘우치고 쇄신하기 위한 것이고,
그래서 전대사는 축일을 통한 쇄신의 결과로 주어지는 은총이지
축일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전대사가 목적이라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꼴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냐 하면 이 행사 계획 당시 이곳 아시시 마을에서
이 축일을 지내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됐고,
전대사를 받을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 축일을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얘기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또 어제 걸으면서 보니 우리의 행진이 순례와 기도와 쇄신의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걷는 내내 세상 얘기만 하는 분들이 있고 그래서 기도하는 분위기가 깨어졌습니다.
더위의 고통과 발이 아픈 고통을 봉헌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일생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며 겪었던 순례자와 나그네의 불편을
같이 겪으려는 그런 마음이 부족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평한 것처럼
불편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불평으로 토해냈습니다.
그리하여 불편이 봉헌이 되지 못하고 불평으로 끝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쇄신을 하려면 자기 성찰 곧 자기를 깊이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 보기 힘들었고 어제 고백성사를 볼 때도 기다리면서
자기를 깊이 성찰해야 하는데 잡담을 하여 다른 사람의 성찰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절에 가는 의미를 묻습니다.
불공을 드리고 염불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어서 되겠습니까?
아무튼 저는 올해 이곳 아시시 마을의 첫 번째 포르치운쿨라 축제에서
희망도 보았고 실망스러운 모습도 보았습니다.
제가 첫 번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또 할 것을 전제로 한 말이고,
앞으로 할 때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부족했던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이곳이 지금 생각하는 피정의 집이 되고,
아시시 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이곳이 여러분에게 아시시가 되어야 하고
이곳을 포르치운쿨라로 만들어 가려는 열망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실망스러운 모습 대신 포르치운쿨라로 만들어가는 희망과 열망이 있기를!
오늘 강론은 경기도 마석 글라라의 집에서 있는
서울 3개 지구 합동 포르차운쿨라 미사 때 할 강론을 대신합니다.
----------------------------------------------------
240802.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확실히 알아야 힘이 된다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뿐인 나의 인생 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선입견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내면을 모른 채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802.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마태 13, 54-58)
* <오늘의 강론>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워했습니다.’(마태 13,54).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태 13,57).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대체, 왜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놀라워하면서도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마태 13,56)라고 하며,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자신들의 ‘모름’,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5-56)
이처럼, 그들은 ‘나는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이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아는 것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 곧 ‘자신이 안다.’는 사실로부터 벗어나고, 또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 곧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은 불신의 씨요,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일, 나아가 개방을 넘어서 ‘타인을 수용’하는 일, 수용을 넘어서 타인으로 하여 ‘자신의 변형’을 이루는 일,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
240802.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말이 있습니다.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를 들고 주인을 쫓아낸다는 뜻입니다. ‘굴러온 돌이 박혀있는 돌을 빼난다.’는 말도 비슷하고, ‘방귀뀐 사람이 오히려 성을 낸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사실 카인은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치미를 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수산나를 욕보이려고 했던 노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지자 오히려 수산나를 거짓으로 고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그런 노인들의 거짓과 욕망을 들추어냈습니다. 40억년이 넘는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등장한 시간은 30만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긴 지구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아주 작은 시간입니다. 그런 인간이 적반하장으로 지구에 사는 많은 생명을 못 살게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시간 머물다 가면서 마치 주인처럼 지구의 생태계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적반하장의 인간을 기다려 주시고, 용서해 주시지만, 감정이 없는 자연은 임계점이 넘게 되면 무섭게 되갚아 줄 것입니다.
배은망덕(背恩亡德)이란 말도 있습니다. 은혜를 저버리고 오히려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달라고 한다.’는 말도 비슷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는다.’는 말도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려는 인간의 배은망덕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반석이라고 하시면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걷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랬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뜻을 찾는다면 그 역시 배은망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문, 예수님의 학력, 예수님의 재산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시메온과 한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
240802.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은 비교를 만듭니다. 비교는 시기와 질투를 만들고 그 시기와 질투는 자신에게 다가온 은총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눈을 가립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자기 고향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어디서 태어나셨는지, 그분의 형제와 부모는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에 불과합니다. 또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인간적인 눈과 경험으로 본 것뿐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도 모르고, 그분께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임이 세상에 드러났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 여기며 사람들이 주님에게 보이는 관심과 사랑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비교에서 출발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비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약이다.’
비교는 자신이 가진 것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평생을 열심히 모아 멋지고 알맞은 집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 옆에 으리으리한 저택이 들어섭니다. 그때부터 자기 모습에 초라해집니다. 그렇게 우울함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자신이 가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아주 바보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 눈을 우리가 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교로 눈멀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기와 질투로 나를 우울함에 가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고마움으로 나를 아끼고 감사함으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미 다가온 은총을 우리가 받아들여 더욱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
뜨거운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누가 뜨거운 물을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뜨거운 무언가에 데어본 적 있을까요?
저는 있습니다. 어릴 적, 아주 어릴 적 뜨거운 난로에 덴 상처가 아직도 손등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뜨거운 물을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글 제목의 전체 문장은 이렇습니다.
‘삶은 돼지고기는 뜨거운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참 해학적인 말입니다. 재미있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것을 던져줍니다.
맞습니다. 뜨거운 물을 경험하고 그 뜨거움 때문에 단단하진 고기는 더 이상 뜨거운 물을 두려워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고난이라는 세상 뜨거움을 경험하고 단단해진 사람 역시 또 다른 세상의 고난이 다가왔을 때 처음보다 덜 두려워할 것입니다.
삶은 고기처럼~ 두려움 없이~ 이 뜨거운 여름과 세상을 걸어보세요.
용기를 내세요. 힘을 내세요.
----------------------------------------------------
240802.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리는 삶
“모두가 지나간다!”
새벽마다 줄기차게 울려 퍼지는 매미 찬미노래입니다. 안도현의 시, 매미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날마다 평생 줄기차게 찬미노래 바치는 수도자들은 이런 여름 매미를 닮았습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내일이면 토요일, 머리 삭발하는 날입니다. 2주마다 깎는데 2주가 순간입니다. 아주 오래전 36년전 수도원 초창기 두분 스님을 모시고 선禪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저는 보름마다 머리 깎는 재미로 살아 갑니다.”
바로 저의 심정이 그러합니다. 저 역시 2주마다 머리깎는 재미로 삽니다. 마치 ‘2주’ 단위로 사는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루하루 ‘하루’ 단위로 삽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에 공동체 형제들의 내외적 움직임도 다 다르고 눈부십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사는 수도자들도 모이면 어디나 분잡한 세속이 됩니다. 그래서 어제 게시판에 ‘8월 제 삶의 모토’를 써서 붙여 놨습니다.
“모두가 지나간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 없이 한결같이 현재의 삶에 충실하자.”
당나라 임제 선사의 말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入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은 이들로 말하면 오늘 지금 여기가 깨어 살아야 할, 주님을 만나야 할, ‘하늘 나라 꽃자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감동적인 형제의 일화도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의 60대 중반의 가장처럼 가장 힘든 위치에 있는 분들중의 한분입니다. 자신의 노부모와 처가댁 노부모를 돌봐야 했으며 자식들도 챙겨야 했고 대학교수 은퇴후에도 아들과 함께 카페 개장을 앞두고 있는 형제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무려 20여년 이상을 알콜 중독을 극복하고자 분투의 노력을 다했고 교수생활중에도 막중한 책임을 다했던 분으로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고백성사를 보는 데 만난지 16년쯤 됩니다.
공학박사로 대학교수 은퇴후, 작은 아들의 자립적 삶을 위해, 또 아버지 노릇 못다한 미안함에 빵굽는 학원에 다니며 빵굽기를 배웠고, 마침내 아들과 함께 개장될 가게에서 아들은 커피를 만드는 사장, 아버지는 빵굽는 직원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합니다. 매사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겸손하고 진실한 형제님의 삶에 감동합니다.
어제 개장을 앞두고 봉헌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만든 빵을 가져 왔는데, 미사를 봉헌할 때 부부의 모습은 흡사 청년들처럼 신선했습니다. 제2의 인생을, 청춘을, 전성기를 살게 되었다며, 이제 공학박사에서 생활박사가 되었다며 격찬했습니다. ‘데이르’(DAYRE), ‘오늘은 왕’이라는 가게 이름도 멋졌습니다. 날마다 하느님 중심에 뿌리 내린 왕다운 삶은 얼마나 멋진지요!
요즘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의 꽃말도 마음에 남습니다. 마가렛꽃은 ‘진실한 사랑’이요, 상사화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합니다. 꽃이 지면 잎이 나기에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함을 이렇게 꽃말에 담은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 어느 경우든 다 지납니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리고 흔들림없이 살아가는 것이 답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한곁같은 삶을 위해 기도, 노동, 공부가 조화된 삶에 운동 역시 필수입니다. 걷기 운동이 좋고 이에 탁구도 권합니다. 어제 파리 올림픽에서 탁구 여자 단식 신유빈 4강 진출에 앞서 경기를 잠시 봤고 얼마전 읽은 ‘탁구는 감각의 대화이다’(한경록)라는 칼럼이 생각났습니다.
필자는 탁구의 잇점을 “1.몰입할 수 있다, 2.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다, 3.많이 때림으로 스트레스 풀기에 제일이다, 4.최고의 다이어트 운동이다, 5.날씨에 제약없이 언제든지 쾌적하게 즐길수 있다.”로 꼽았습니다. 조화롭고 균형잡힌 영성생활에도 좋은 도움이 되고 심신을 동시에 연마할 수 있는 ‘감각의 대화’인 탁구는 얼마나 유익하고 멋진 운동인지요.
바로 ‘모두가 지나가는 상황에서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 흔들림없이 살아 간’, 또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삶의 대가, 삶의 달인이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예레미야입니다. 두분이 흡사 대칭을 이루듯 서로 닮았습니다. 늘 독서와 복음이 대칭을 이루는 구성입니다. 미사중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도 대칭 구조입니다. 얼마전 읽은 ‘대칭의 물리학’을 나눕니다.
“자연계의 형태를 지배하는 궁극의 규칙이다. 우리 주위에는 ‘대칭’인 것이 많다. 동식물의 형태와 패션, 건축 디자인등이다. 대칭은 사람에게 일종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만, 실은 수학이나 물리학등 다양한 자연 과학 분야에도 대칭성은 얼굴을 내민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계와 우주의 형태를 결정하는 기본 규칙이 바로 대칭성이다.”
예수님과 예레미야의 대칭을 통해서 더욱 말씀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두분 다 고립무원의 외롭고 고독한 처지였고 주변의 질시를 받고 배척을 받았던 참된 예언자였습니다. 참된 예언자들의 숙명입니다. 두분 모두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린 삶이었기에 지나가는 일들에 흔들림이 없었고 참으로 초연했고 자유로웠음을 봅니다.
예언자들은 물론 예레미아를 통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가차없이 몰아댑니다. 더불어 오늘날 언론이 예레미야처럼 과연 참된 예언자 역할에 충실한지 살펴보게 됩니다. 가짜 예언자들처럼 나라가 망하든 말든 달콤한 예언을 했다면 이런 박해도 없었을 것입니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무지에 눈 먼 온 백성이 일치하여 주님의 집에 있는 참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몰려드니 유다가 망할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무지에 눈멀기로 하면 예수님 고향 사람들도 막상막하입니다.
선입견에 질투에 눈먼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하며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런 선입견, 질투에서 자유로울 지혜로운자 몇이나 될런지요. 그대로 우리 인간의 근본적 한계를, 부정적 보편적 정서를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사건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한, 깨달은 ‘하느님의 지혜’라 일컫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초연하고 자유로울 수 있음은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삶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믿지 않음으로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지만 주님은 좌절하기 보다는 겸손히 공부와 배움의 기회로, 도약의 기회로 삼으셨을 것이며 묵묵히, 한결같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을 걸으셨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리게 하시고, 주위 상황에 집착함이 없이 현실에 충실하며 초연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240802.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조욱현 신부님.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고향 사람들은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고향은 나자렛이나 베들레헴보다도 그분을 거절한 유다 전체를 의미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57절) 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을 예수님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회당은 악의와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모였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54절) 그들은 놀랐다. 그들이 놀란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놀란 것이 아니라, 무시와 분노로 들끓었다. 놀람은 찬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시샘 때문이었다.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54절) 이렇게 말한 것은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그것을 받았다. 그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오만이 아니라, 덕으로, 교만이 아니라, 지혜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55절) 이것은 예수님을 헐뜯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간보다 더 거룩한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보면서 그러한 능력이 나올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분을 믿지 않고 못마땅해하기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불신은 진실을 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께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에 그리 마음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은 기적만큼이나 놀라운 가르침을 주셨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 말씀의 권능에 놀라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안다는 이유로 그분을 무시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나자렛에서도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흠을 잡지 못하고 그분의 가족들만 들먹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우리 이웃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주시는 주님을 거절하고 몰아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240802.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예언자는 어디에서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13,57)
누구에게나 고향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그리움과 아쉬움이 함께 교차하리라 봅니다. 아버지 장례 미사를 드린 후 20년이 넘어 제 출신 본당인 순천 저전동 성당에서 사순절 특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픈 과거의 기억과 함께 지난 세월이 한순간처럼 다가왔습니다. 미사와 특강 후 제 부모님을 기억하고 계신 몇 분의 신자 분들을 만났을 때, 아름답고 선한 기억을 잊지 않고 들려주어서 조금은 위로와 치유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고향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익명성이 통하지 않습니다. 워낙 좁은 곳이고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기에 말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 시대에도 동일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앞에 떳떳하셨지만, 고향 사람들은 현재의 예수님보다는 과거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기억과 고정화된 기억의 틀 안에서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제자매라는 범주에서 예수님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향 사람들의 고향 사람에 대한 인식과 수용의 한계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남 잘 나가는 것, 남 잘된 것을 보고 싶지 않고 인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숨은 일도 보시는”(마태6,4.6.)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13,54)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랍니다. 여기서 말한 지혜란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을 의미합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잘 판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지,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사리 판단력을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세상적인 지혜를 갖추고 계신 분이셨고, 사실은 바로 지혜 자체인 분이셨지요.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집1,1~10)하고 집회서는 강조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13,56~57)하고 예수님을 대하는 고향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고향 사람들만의 반응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은 타인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어떤 누군가가 옳지 못한 모습을 보였을 때,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고향 사람들의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 밑바탕에는 내재된 타인에 대한 고정관념, 선입견과 편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어제와 달리 변화되었거나 성장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과거의 낡은 틀 속에서 상대방을 보고서 거부하고 부정하려고 합니다. 이보다 더 깊은 거부 반응의 다른 요인은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에서 기인한 치명적인 거부 행위입니다. 이는 타인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 어둠과 상처를 인정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부정이며 자신에 대한 거부 행위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보다 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은 없으며, 이런 고향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꿰뚫어 보셨기에 안타까워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13,58)하고 오늘 복음은 표현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적의 시작은 닫힌 마음을 여는 것으로 시작하며, 기적으로 말미암아 어제의 그 상처받고 어둠으로 짓눌린 세월의 무게에서 내적 자유를 체험하고, 무지에서 참된 하느님의 지혜로 세상을 슬기롭게 행복하게 살며, 하느님 안에서 생명을 얻고 더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13,57)라는 말씀을 던지시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고향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13,58) 그 어디에서보다 고향에서 먼저, 그 누구에게 보다 고향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하늘나라를 함께 공유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함께 실현하고자 했지만, 끝내 거부와 배척을 받으시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마음을 저는 알 것 같습니다. 혹여 우리도 우리 자신의 편견과 열등감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시려는 믿음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고 끝내는 하루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103,2)
---------------------------------------------------
240802.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 나자렛 그 고향 사람들마저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024-08-01 ㅣNo.174683
예수님께서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저 이는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는가? 저이는 그 목수의 아들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아니냐?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이지! 또 그의 누이들도 다 지금 우리와 함께 이곳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도대체 저 이는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작은 시골에서 위대한 인물이 탄생하면 마을 사람들은 커다란 자긍심을 갖는다. 그가 고향을 방문하면 모두 모여 환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서는 못마땅하게 여김을 받는다. 예수님의 기적의 힘에 대해 다들 궁금해 한다. 사람들은 그분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들을 떠올리며 예수님의 그 권위를 의심으로 가득차서 결코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끝내 예수님을 배척한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유독 ‘고향의 친족’에게는 반대를 받는 신세이다.
그렇다. 그들은 겉모습에 매달려 예수님의 본모습을 정녕 보지 못하기에 불신한다. 편견을 깨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속속들이 그 본질을 못 본다. 편견은 그만큼 무섭다. 그러기에 숱한 시행착오다. 예수님의 고향 분들 역시 편견을 지녔다. 그래서 기적마저 이상한 행동으로 여겼다. 그만큼 편견은 무섭기 그지없다. 편견의 또 다른 모습은 고정관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편견을 깨고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나가자.
이제 그 시선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우리에게로 한번 돌려 보자. 예수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노골적 거부는 아니더라도, 우리 또한 보이지 않는 교묘한 생각과 방식으로 복음이 우리를 이끌지 못하게 혼돈의 모습으로 만들기도 한다. 복음이 우리를 ‘비켜 가게’ 함으로써 예수님 말씀을 거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 또 은근히 복음의 기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그 기쁨은 예수님 뜻에 따른 삶에서의 기쁨이지만, 눈앞의 이익이나 세상 흐름의 가치관에 따른 천상이 안기는 안락을 포기하는 것이리라. 더군다나 성경을 안다는 이들이 오히려 말씀에 대한 더 강한 적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곳저곳서 간혹 듣곤 한다. 이러한 자세는 비록 양상은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들 또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가끔은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게다.
주님께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이들에게 찾아드는 유혹은 남들의 인정과 칭찬이란다. 그분을 섬기는 이는 그분 영광만을 드러내야지, 자기에게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되니까. 사실 예수님의 삶의 터전인 나자렛 고향 사람들도 그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를 못하였다. 기껏해야 목수 일을 해야 할 그이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감추지 않았다. 단지 한쪽만을 생각하고 그곳만을 편견으로 바라보았기에. 영적인 이들도 때로는 이처럼 너무 쉽게 인간적인 것에 빠져 들기도 한단다.
이따금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일에 맞서려는 마음을 갖는다. 그러기에 나자렛 사람들은 같은 고향 사람인 예수님께서 위대한 예언자이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단순한 목수의 아들로만 여기고 만다. 우리도 이웃이 잘되는 것에 기뻐하는지, 아니면 시기하는 마음을 지니는지 성찰해 보자. 주님은 지금도 들릴락 말락 시도 때도 없이 온종일 우리를 부르시며 당신 말씀을 건네신다. 은총은 영적으로 있을 때에 더욱 강해진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겉모습을 뛰어넘는 영적 시각에 매달리는 삶을 살아야만 할게다. 그래야 기적의 힘을 만날 수 있다.
----------------------------------------------------
240802.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자기 고항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우리는 이 말이 모든 예언자에게 해당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예언자들이 하나같이 자기 고향에서만 굴욕을 당했다는 뜻입니끼? 아니면, 굴욕을 당한 예언자는 모두 자기 고향에서 굴욕을 당했다는 뜻입니까? 또는 이 표현이 단수로 되어 있으니, 이 말은 한 사람에게만 해당합니까? 이 말이 한 사람에게만 해당한다면, 구원자에 관해 쓰인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만 뜻이 통합니다. 그러나이 내용을 모든 예언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로 보려면,역사적으로 입증하기기 어렵습니다. 엘리야는 길앗의 티스베에서, 엘리사는 아벨 므홀라에서, 사무엘은 라마타임에서, 예레미야는 아나톳에서 굴욕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이는 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유대아는 예언자들의 고향으로, 그 잘난 이스라엘은 그들의 친족으로, 몸은 그들의 집안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 니다. 모든 예언자가 그들이 아직 육신 안에 있을 때 유대아에서 육에 따른 이스라엘로부터 굴욕을 당했습니다.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사도 7,52)라는 사도행전의 말씀대로 입니다 바오로도 태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비슷한 말을 합니다 “형제 여러분, 사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유다의 하느님 교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곳 신자들이 유다인에게서 받은 것과 똑같은 고난을 여러분도 여러분의 동족에게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주 예수님을 죽이고 예언자들도 죽였으며 우리까지 박해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이고 모든 사람을 적대하는 자들로서”(1테살 2,14 –15).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이어서 비유를 들려 주셨다.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시오. 그 눈트는 것을 보고서 이미 여름이 다가온 줄을 압니다. 이처럼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 29-31).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하느님 나라의 근접을 가리키는 “잎새”를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엑카르트는 루카 복음 몇몇 장에 언급되어 있는 하느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왜냐하면 엑카르트는 이렇게 잘라 말하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훌륭 알아야 하고, 그다음에는 언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곁에 다가오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어디에 언제 오느냐 하는 물음은 예수에게 던진 물음과 같아 보인다.(214)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7월 4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콜로1-4장/ 필레1장 / 1베드1-2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교부들의 격언
영적 삶의 원칙들
화를 내지 말고 - 복수도 말아라
나일로(Neilos) 아빠스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형제가 너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해서 그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행한 모든 것은 네가 기도할 때 마음속에서 떠오르게 된다"
마카리오(Makarios)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네가 어떤 사람을 나무랄 일이 있는데 화를 내면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단지 너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 행위이다. 그러면 너는 그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파멸시킬 뿐이다."
판단들
어떤 사람도 심판하지 마라
포이멘 아빠스가 요셉 아빠스께 여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수도자가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요셉 아빠스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여기에서나 저기에서, 어디에서나 고요함을 누리고 싶거든 행동할 때마다 다음과 같이 말해라. '나, 내가 누구지?’ , 그리고 어떤 사람도 심판하지 마라."
크상티아스(Xanthias)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 악인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단 한마디 말씀만으로도 의롭게 되었다(루카 23,42). 유다는 사도들 중 한 사람이었지만 하룻밤 만에 그가 행한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되고 지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마태 27,1-10; 사도 1,16) . 그러므로 지금 좋은 형편에 놓여 있는 사람은 자신을 자랑하며 떠들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내세운 사람은 모두 넘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213)
----------------------------------------------------
240802.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당신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예레 26,2) 전하라고 하시고,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이 실로처럼 되리라고 선포합니다.
실로에는 여호수아 시대와 판관 시대에 성소가 있었지만, 심판을 받아 버려졌습니다.
이제 예루살렘도 그렇게 멸망하고 황폐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라고 비난하며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멸망을 선포하실 수는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하느님의 뜻을 자신들이 결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구원을 선포하실 뿐, 심판을 말씀하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유를, 하느님의 행동 범위를 인간이 제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상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움직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착각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그들의 착각이 깨지려면 성전이 무너져야 하였던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집인 그 성전을 무너지게 두셨습니다.
복음서의 나자렛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부모와 형제를 자신들이 다 알고 있는 그 평범한 사람, 목수의 아들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될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나에게 오는 통로를 내가 결정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명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으려 한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어떤 경로로 말씀하시더라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