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요리<천수답의 일요칼럼>
아내가 코로나에 걸렸다. 어느 집이든 거쳐 가는 과정이겠지만 그동안 선방을 해왔었는데 장인어른이 코로나에 걸려서 하루 돌봐 드리고 온 것이 그냥 걸리고 만 것이다. 아내는 안방에서 격리되고 자기 생애의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내는 천성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코로나 격리는 아내에게 힘든 시간이 아니라 멋진 휴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좋아하는 뜨개질을 하며 필요한 게 있으면 문만 열고 부탁만 하면 된다. 별로 아프지도 않고 모든 것을 수발을 들어주니 코로나에 걸리고 아마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같이 사는 사람인데 사실 나도 조금 바쁜 것 외에는 별로 나쁘진 않다. 나는 원래 요리하는 걸 좋아한다. 가끔 요리하는데 요리할 때마다 요리는 설교 준비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 먹을 요리가 정해지면 레시피를 준비하고 재료를 하나씩 꺼내서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레시피는 늘 같은 것이 아니다. 된장국 하나를 끓여도 기본 재료는 같아도 양념과 조리법에 따라서 전혀 다른 맛의 된장국이 된다. 그리고 끓이는 사람에 따라서 손맛도 다르다. 그러니 설교와 비슷하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본 재료로 하는 설교도 양념을 어떻게 칠 것인지 그리고 어떤 부재료들을 섞을 것인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설교가 된다.
나는 요리할 때와 설교 준비할 때는 흥분된다. 과연 어떤 요리가 만들어질 것인가? 이것저것 조합도 하고 섞어보지만, 때론 기대하지 않았던 신비한 맛이 난다. 그럴 때면 기쁨이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설교를 들을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조리하지만 언제나 준비한 것, 이상의 뭔가가 추가되는 느낌이 있다. 말씀을 준비할 때면 성령께서 언제나 함께하신다. 사람의 기술과 재능만으로 좋은 설교가 나올 수 없다. 화학조미료를 가미한 인스탄트 설교는 피해야 한다. 재미는 있을지 모르나 성도들의 영적 건강에는 해롭기 때문이다. 약간 거칠더라도 건강에 좋은 음식 곧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오늘 아침에는 단호박 샐러드를 만들었다. 단호박 두 개, 오이 한 개, 양배추 약간, 그리고 삶은 달걀흰자, 거기에 냉장고에 있는 귤 세 개를 잘라서 마요네즈와 함께 섞었다. 약간의 단맛, 소금 조금, 브라질리언 넛 몇 개 들어가니 완벽한 영양 소스다. 통밀빵을 쪄서 잘 섞은 샐러드를 추가해 안방 문을 두드린다. 코로나 덕분에 여왕이 된 아내는 연애할 때 듣던 그 코맹맹이 소리로 “네~~엥”하고 반응한다.
아내는 요리를 하고 나면 나에게 꼭 간을 보게 한다. 그리고 “괜찮아? 맛있어?” 그러면 나는 무뚝뚝하게 “응~”하고 영혼 없는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리가 설교와 같다면 요리에도 반응이 필요할 것이다. 설교를 마치고 회중들과 인사할 때 특별히 그날의 감동을 표현하는 성도들이 있다. 물론 말은 안 해도 표정을 보면 그날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만족과 행복을 얼굴에서 읽을 수 있지만 그래도 “목사님, 왜 저를 울리고 그러세요!” “꼭 제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오늘 너무 힐링이 됩니다”라며 손을 잡는 성도들이 있다. 부족한 설교를 은혜롭게 들어준 성도들이 고마울 뿐이지만 그렇게 반응해 줄 때 용기가 난다.
삼십 년 넘게 나를 위해 요리해 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늘 감동하고 너무 맛있다고 했다면 아내는 얼마나 즐거움과 새로운 기대로 요리했을까? 코로나로 인해 삼십 년 만에 뒤늦게 깨달은 것이 있으니 코로나가 나에게 귀한 스승이 되었다. “여보, 다음부터는 좀 더 반응을 잘할게요! 그동안 수고했어요”
---(팟캐스트 방송)---
http://www.podbbang.com/ch/10726?e=24442576
---(Link-2)---
http://file.ssenhosting.com/data1/chunsd/220904.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