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06
3월24일[주님 수난 성지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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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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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황중호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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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장면을 한번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갈 때 타고 들어갈 동물을 선택하시는데, 엄청 웃깁니다.
이제 마지막인데, 이왕이면 좀 있어 보이게, 코끼리 정도는 타고 들어가시면 참 좋았을 텐데. 코끼리가 아니라면 키 큰 낙타나 멋진 백마 정도는 괜찮았을텐데...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선택하신 동물은 어린 나귀였습니다. 나귀는 말과에 속하지만 그 모습이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왜소합니다.
생긴 것도 생뚱맞습니다. 어린 나귀! 창조주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만왕의 왕으로 오신 그분께서 타시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과 권세와 능력긍 겸비한 초강력 세속 왕권을 학수고대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의 그릇된 기대감에 ‘빅 엿’ 하나를 제대로 먹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그분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마음껏 발휘하셨습니다.
인류 전체의 구원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머릿속에 명료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의식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의 마음을 따뜻이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 사이로 내려가야 하고, 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중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바탕으로 가시는 곳마다 백성을 웃음의 도가니, 그리고 감동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는 메시아, 한잔 술에 기분이 좋아져 죄인인 인간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메시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메시아, 우리와 마주 앉아 썰렁한 아재 개그를 연발하시는 메시아...
우리의 하느님은 이처럼 따뜻하고 친근한 분이십니다.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키작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키를 낮추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낯설어할까 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의 메시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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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LQxyO11OH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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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교환: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라는 증거>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일과 같습니다. 종이에 성체가 피로 변해 스며든 카시아의 성체 기적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스며드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을 입어 에덴동산에서 가죽옷을 입은 아담과 하와처럼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라고 합니다. 마치 야곱이 이사악 앞에서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이 에사우라고 우기기만 하면 상속을 받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도 무언가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도 하느님을 잉태하시기 위해 신 인성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기 겉옷을 깐 이유와 같습니다. 겉옷은 그들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당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교부들은 이를 ‘거룩환 교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사야서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에도 나와 있고, 신약의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1코린 8,9)에도 잘 표현됩니다.
가장 완전한 거룩한 교환은 성모 마리아에게서 실현되었습니다.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육화론 54,3)라고 표현했고, 성무일도 제1권,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 제2 저녁기도, 후렴 1에도 위 교부들의 신학을 받아들여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협력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케 하셨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제가 본당신부를 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희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고비에 있어 병자성사를 간 적이 있습니다. 바이러스 감염 환자의 모습을 처음 본 저는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온몸이 노란색이었고 얼굴은 부어 눈도 제대로 깜빡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눈동자는 거의 흰자만 보였습니다. 그 청년에게 병자 성유를 바르는데 얼핏 바이러스가 저에게 옮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이 닿지 않으면 어떻게 성유를 바를 수 있겠습니까? 살이 닿으려면 상대의 바이러스가 내게 옮겨올 수 있음을 감수해야 합니다. 뭔가를 주려면 필연적으로 상대를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거룩한 하느님께서 신성을 내어주시기 위해 인간의 인성을 받아들이신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좋아서 인간의 인성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시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 인성과 죄를 내어드리고 그분의 신성을 받아 하느님 앞에 의로운 모습으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당에 앉아 있을 때마다 십자가에서 저에게 푸르고 맑은 물과 같은 것이 들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또 저에게서는 똥과 같이 더러운 것이 예수님께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는 ‘거룩한 교환’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거룩한 교환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상황은 부모와 자녀 사이입니다. 자신을 잔인하게 살해한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고 도망쳐라.”라고 하신 어머니나,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을 교통사고로 죽이려 한 아들의 선처를 바라며 경찰서로 휠체어를 타고 찾아온 어머니를 보십시오.
저도 채변봉투를 재래식 화장실에 빠뜨렸을 때 아버지께서 그냥 아버지라는 이유로 손과 옷에 똥을 묻혀가며 그 봉투를 건져 올려주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생각해야겠습니까? 그분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알아보는 방법은 이 거룩한 교환의 방법밖에 없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토요타 차량을 리콜하고 있다면 그 회사는 토요타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집니다.
이제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가 우리 구원을 결정합니다. 노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비웃은 함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눈물의 겉옷으로 나의 모든 더러움을 짊어지신 분을 덮어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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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 생활을 하면서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본당의 물품과 자기의 물품을 구분하지 못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성당에 있어야 할 사다리가 없어서 찾아보니 형제님이 자기 집 일에 쓰려고 잠시 가져갔다고 합니다. 전화해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대학교도 나오고, 말도 잘 하는데 셈이 좀 흐린 것이 늘 문제였습니다. 먹는 자리, 생색이 나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데 힘든 일, 봉사하는 자리에는 늘 이유가 있어서 빠지는 분이 있었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늘 밝아서 좋긴 하지만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본당에서는 열심히 봉사하는데 아파트 단지에서는 비난 받는 분도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신자라면 성당 밖에서도 신자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겉과 속이 다른 것 같아서 아쉬웠습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큰 목소리로 비난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먼저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좋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지나간 자리는 늘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뒷수습이 힘들었습니다. 솔선수범하고, 추진력이 있어서 좋았는데 혼자서 모든 것을 하려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지나친 음주 때문에 공든 탑을 무너트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말도 없고 얌전하고, 봉사도 잘 하는데 그만 술이 과하면 사람이 변하였습니다. 술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사람이 술을 위해서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제게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사제관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이 자전거를 타고 성당으로 왔습니다. 성당의 문을 다 닫고, 하수구에 있던 오물을 다 꺼냈습니다. 그리고 성모상 앞에서 고개 숙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33년이 지났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방앗간을 하면서 설날이나 추석이면 어르신들을 위해서 떡을 드리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서 장학금을 주는 형제님이었습니다. 저는 몰랐는데 면장님이 그 형제님을 위해서 표창장을 준다고 제게 연락해서 알았습니다. 말보다는 늘 먼저 봉사하던 형제님의 따뜻한 마음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큰 바위 얼굴처럼, 동네에 있던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언제나 본당을 지켜 주시던 어르신이 있습니다. 성탄에는 손수 새끼를 꼬아서 구유의 지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제가 어디를 다녀 올 때면 잘 다녀왔는지 안부를 물었습니다. 어르신의 집에는 늘 기도의 향내가 났습니다. 집 안의 중심에는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하도 읽어서 낡고 낡아진 성경책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동네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늘 앞장서서 힘을 보태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아픈 분이 있으면 찾아가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예비자 인도를 많이 하셔서 대자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사명을 실천하는 분이셨습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제가 사제 생활을 33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런 분들의 기도와 봉사 그리고 헌신과 열정 때문입니다.
예수님 수난의 길에도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배반은 절친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들 봅니다. 많은 것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들 봅니다. 본당에서도 보면 그렇습니다. 단체의 간부들끼리도 없는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흉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배반은 사제/ 수녀/ 평신도 모두에게서 나타나곤 합니다. 저는 교구에 있었기 때문에 때로 본당에서 ‘투서’를 보내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잘못을 지적하고, 본당 신부님을 비난하는 그 사람은 사실 본당 신부님과 늘 가까운 자리에 함께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예수님을 팔아 넘겼던 그 유다와 비교해서 “나는 아니죠!”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종종 봅니다. 늘 모범생이었고, 남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고, 기도도 공부도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계셨는데, 나는 주님이 힘들어하실 때, 주님께서 함께 기도하자고 하실 때, 어쩌면 늘 주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 수난의 길에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5처에는 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길을 지나가는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우게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십자가를 지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성서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갑자기 아프시거나, 여행을 가게 될 경우가 있죠. 그럴 때 보좌신부는 본당 신부님이 하셔야 할 미사를 하게 되고, 여러 단체의 모임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하는지, 아니면 의무감으로 하는지, 저 자신을 돌아보면 기쁜 마음으로 하기보다는 의무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길 제 6처는 성녀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의 얼굴 씻어 드림을 묵상합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는 내용은 없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녀 베로니까는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으로 십자가를 기고 가실 때, 예수님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땀을 닦아 준 예루살렘의 어느 부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옷으로 성면을 씻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거기에 주님의 모습이 박혀있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그 여인은 베로니까로 알려졌는데, "베로" 는 라틴어로 "베라"(참 진실한) 이고, "이까"는 "아이콘" 즉 성화상을 뜻하므로, 그녀의 이름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참 모습" 이란 뜻이 됩니다. 이 사건이후 그녀의 운명은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른 전설로 전해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나는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께 위로를 드리고 있는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들도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면 좋겠습니다.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아 드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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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5,1-47: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오늘의 전례는 분위기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것 같으면서 그것은 순간적으로 지나가고, 모든 것이 수난과 죽음을 향한 비탄이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오늘을 성지주일 혹은 수난주일이라고 하였다. 오늘의 전례는 기쁨과 슬픔이 혼합되어 있다. 구약에서 야훼의 종은 비록 혹심한 능욕을 당하여 자신의 사명이 실패하는 것 같은 상황으로 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39절) 하고 말하였다. 복음에는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38절)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구약의 성전 기능이 이미 끝났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분의 신비의 베일을 찢고서 내부를 열어 보임으로써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의미이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서 계시된 나자렛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이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서, 또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축성해주는 사건이다. 이것은 권능의 행위가 아니라, 나약함의 행위, 자신을 철저히 봉헌하는 사랑의 행위이다. 이 나약함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와 번민에 휩싸여(14,33) 계셨고, 빌라도 앞에서의 침묵(15,5), 고발에 대한 무응답(15,5), 십자가를 질 기력이 없어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으로 십자가를 지심(15,21), 십자가 밑에서의 조롱 즉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15,31-32)로써 그분의 나약성이 극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은 바로 극한에 이르는 나약성에서 나타난다. 백인대장이 이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15,39)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이 나약성은 권능으로 바뀔 것이다.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14,61)라고 물었던 대사제에게 당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14,62)라고 대답하시며, 마지막 심판자로서의 당신의 품위와 권능을 말씀하신다.
이제 자신의 나약성을 통하여 권능이 드러나는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도전이 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도전에 합당한 응답을 하도록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십자가의 도전은 복음에서 예수님의 주위가 비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14,71),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난 제자들(14,50), 환호하던 군중이 바랍바를 선택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친다.(15,6-15) 이러한 배반의 분위기 속에서 용기 있는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여자들의 더 큰 사랑과 충실성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기민한 통찰력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품위를 회복하고 있다.(15,40-41)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 때에, 참담한 고통의 때에 홀로 남아 계셨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14,27) 십자가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한다는 것은 곧 신앙 때문에 수치를 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받아들일 용기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 우리의 사회, 즉, 뱃속에 든 아이를 살해하거나, 남편이나 아내를 배신하거나, 자기를 거슬러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참히 짓밟아 없애고, 수단과 방법을 다해 자기의 쾌락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풍토에서는 대단히 힘들다. 우리는 십자가의 찬란한 징표를 세상에, 그리고 가치관의 혼돈 속에 헤매고 있는 오늘에 다시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을 통하여 모든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인간 생활의 맛을 더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요청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를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육화하셨을 뿐 아니라, 그런 사실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8절) 철저한 비움의 보상으로 얻게 되는 영광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2,9-11)
이제 성주간을 지낸다. 오늘 전례의 환호와 비탄이 함께 있는 것같이 이 성주간에도, 또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나약성과 십자가의 도전이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서 갈 때 구원을 전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그래서 구원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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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마르코 복음서는 그 시작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1)이라고 할 정도로 ‘예수님의 신원’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의 입을 통하여 이를 다시 한번 선언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사실 이 고백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무력한 죽음’, 그러나 ‘무력한 죽음’을 통한 ‘영광’이라는 십자가 신학의 총체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역설적 신비는 성주간 내내 좀 더 명확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성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말씀은 이 십자가 사건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예수님의 사랑과 순명에 기초하였음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죽기까지 순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라고 언급하고,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결국 이것으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십자가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린 자리라고 고백합니다.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엄청난 수난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할지 황망해집니다. 어쩌면 답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촘촘히 드러나는 시간이니, 눈과 마음을 열어 그 사랑을 알아보면 됩니다. 우리가 금욕적 실행을 결심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결연한 사랑과 그 완성을 알아보고 그 사랑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면, 이번 부활 시기에도 우리의 신앙은 구체성과 깊이를 얻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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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지 주일, 성주간>
“그들이 가서 보니, 과연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바깥 길 쪽으로 난 문 곁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푸는데, 거기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말하였더니 그들이 막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그리고 앞서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4-10)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그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많은 이’라는 말이 루카복음에는 ‘제자들의 무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19,37) ‘제자들의 무리’는 사도들과 신자들을 가리키는데, 신자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행렬은 최고의회나 로마 당국에서 주목하지도 않았고, 관심을 갖지도 않았으니, 소규모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할 때, 예루살렘 입성 행렬은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신앙인들에게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요한 12,16)
2)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의 앞뒤에서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나중에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서 예수님의 재판 때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입성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이고, 재판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한 자들은, 사제들의 부추김을 받은(마르 15,11) 예루살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입니다. <물론 몇 명 정도는 배반자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떠나서 박해자들 쪽으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수난 때의 상황을 보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마르 14,66-72), 다른 사도들은 모두 달아나서 숨어버렸고(마르 14,50), 신자들도 흩어져서 숨었거나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호산나!’를 외치다가 태도를 완전히 바꿔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친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한데, 겁에 질려서 흩어져서 숨는 것과 배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신자들이 흩어진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하게 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모두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3)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재현하는 전례를 거행하면서, 예수님 뒤를 잘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성주간 전례를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고 재현하고 묵상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고통과 헌신에 동참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성주간 예식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성주간의 의미를 묵상하지 못하고 피곤함만 느끼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 예수님 수난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주간 전례도, 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전 과정도,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바라보아야 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지나치게 감상(感傷)에 빠지는 것도 옳지 않고, 또 부활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5)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또 신앙생활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 여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십자가의 길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고통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과정이고 방법이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도 ‘기쁜 일’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힘들어도 억지로 참는 생활이 아니라, 기쁨이 가득하기 때문에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는 생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았다는 믿음, 또는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희망과 기쁨이 생기고, 그 희망과 기쁨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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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조재근 마르코 신부님]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주님께서 성대한 환호 속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오늘입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하고 외치던 목소리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며 그분을 죽이라는 목소리에 묻혀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주님의 종’으로서 우리를 위해 수난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이사 50,7)
이사야가 노래하는 주님의 종은 수난을 당하는 와중에도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하느님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하고 부르짖을 정도로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히 버림받았음을 느끼셨습니다. 희망이 사그라진 듯 보였으나 예수님은 소리쳐 부르짖었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를 신뢰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예수님에게서 이사야가 노래한 ‘주님의 종’의 모습을 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고난받는 종’을 자처하셨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표적이 되어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십자가는 구원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고,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순종하는 삶이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인생에서 마주하는 고통과 불행 앞에서 쉽사리 좌절하거나 절망하며 주저앉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님께 청합시다.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은혜로운 성주간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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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교동 베드로 신부님]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교회는 전례 주년 중 가장 의미 깊은 주간을 맞이합니다. 이 주간에 구원사의 절정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게 됩니다.
그 첫날인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며 성지 가지를 들고 환호함에 이어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수난 복음을 읽고 묵상합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인간의 죄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거룩한 주간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 첫 구절에서 선포되었던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이제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 정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백인대장은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며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아주 무기력하게, 아무런 힘도 없이 계십니다. 인간의 손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져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힘도 없으신 이 무기력은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철저히 사랑하시기에, 인간의 죄나 반항에 대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당신의 전능으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인간이 그 죄를 버리고 다시 당신께 돌아오기를 무기력하게 기다리실 뿐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본 것은 이방인이었던 백인대장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고백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철저히 인간을 사랑하시는지,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도록 하시면서까지 인간의 죄를 무력으로 다스리지 않았다는 고백입니다.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다 내어주시며, 우리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세력들을 당신의 권능으로 다 멸망시킬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그들의 멸망보다는 구원을 원하셨고, 그래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입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고백한다면, 이는 십자가의 죽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분명히 드러나는 십자가는 또한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지만, 하느님에게서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가장 귀한 피조물입니다.
이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가 모두 드러나는 파스카 성삼일 동안 우리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전례에 꼭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면서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 그리고 외아들을 제물로 삼으시면서까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묵상하는 거룩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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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강유빈 도미니코 신부님]
<당신 편입니다>
부제품을 앞둔, '대품 피정' 때의 일입니다. 여러 선·후배 신부님들이 그러하셨듯이, 저 역시 신학교 에 입학하면서부터 고대했던 순간이었음에도, 정작 부제품을 받을 때가 다가오자 마음이 산란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자매님들이 '내가 이 남자와 한 평생 살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는 마음과 비슷할까요? 제게 그런 마음이 든 건 부제품·사제품을 받고 도중에 포기하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두려움과 부담감으로 다가와 제 마음을 짓눌렀기 때문입니다.
한편, 대품 피정에 참석하기 전,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들어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동기들은 각자 부모님께 편지를 쓴 후 피정에 임했고 피정 중 어느 날, 부모님께서 저희를 찾아오셔서 '답장'을 전해주시고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에, “사제직을 지향하고 살다가 중간에 포기하게 되면 어쩌죠? 그러면 괜히 저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어질 텐데, 그러면 안되는데..."라고 썼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이런 답장을 하셨습니다. “아들! 아니, 이제 아들 부제님, 다른 사람들이 그래선 안 된다.'라고 해도, 행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생긴다고 해도, 엄마 아빠는 '늘 아들 편이에요.”
이 편지를 받은 후에도 제 마음 한쪽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남았지만 다시 한 번, 저는 '사랑받는 존재임을 떠올리며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늘 저의 편'이라고 말씀하시는 부모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루살렘'은 솔로몬 임금 시대에 '하느님이 머무시는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곳은 점차 '세상의 이익에 눈먼 장소', '인간의 나약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곳에,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빌라도'가 군대를 앞세워 자신의 세력과 힘을 과시하며 입성한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평화'와 '겸손' 을 상징하는, 달리 보면 '초라해 보이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끝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 모습을 떠올릴 때면 안셀름 그린 신부님의 '예수님이 두 팔을 벌려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유는 그 두 팔로 우리를 안아주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이 맴돕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이기심, 욕심, 나약함이 있는 곳에 가셔서, 두 팔을 벌려 십자가 위에 매달리심은 “나는 언제나 당신 편입니다.”라고 말씀하시기 위함은 아닌지 묵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받는 이에게 모든 고통의 이유를 밝혀 주시지는 않지만, 고통에 함께하시는 현존으로 응답하십니다.“ [신앙의 빛 57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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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이 지난 라자로를 소생시키신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놀랍고도 충격적인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으며 따르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직접 보기 위해 그분께로 몰려 들었지요. 그러자 그 소식을 전해들은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큰 걱정에 빠집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은 한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힘으로 다른 이들 위에 억지로 군림하는 이들은 자기가 지배하는 이들이 힘을 모으고 세력이 커지는걸 경계하는 법이지요. 그런 상태가 계속되어 소요사태가 벌어지고 반란이 일어나면 상황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피지배국의 사람들이 한장소에 모이고 시끄러워지면 즉시 군대를 파견해 해산시키곤 했습니다. 강력한 힘으로 초장에 찍어 누름으로써 반란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한 겁니다.
그런 로마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었기에 예수님 주변에 많은 군중들이 모여드는 상황을 우려합니다. 만약 그들이 이스라엘의 자유와 번영을 먼저 생각하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로마라는 적을 몰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 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지금 누리는 기득권과 특권을 계속 유지할 수만 있다면 로마의 지배가 계속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기적들이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분명한 ‘표징’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메시아를 따르려 하지 않고 배척하며 심지어 제거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에게는 언제 올지 모르는 ‘하느님 나라’보다 지금 누리는 세속적 가치들을 지키는게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기들의 시커먼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게 모두 다 이스라엘의 영토와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댑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지키고 보호하고자 했던 것은 조상대대로 살아온 거룩한 땅과 백성들이 아니라,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토지와 재산,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의 안전이었는데도 말이지요. 그런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믿는 이들과 그분을 믿지 않는 이들 사이의 큰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들입니다. 즉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자신 또한 바라는 겁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주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 이들입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기만을 원하지요. 그래서 더러운 영이 그랬듯 주님께서 내 일에 ‘상관’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분을 적대시하고 배척하게 됩니다.
성주간을 눈 앞에 둔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정작 마음으로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고 있는지요?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는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그분의 능력과 힘을 이용하여 자기가 원하는걸 이루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지는 않은지요? 세상이 주는 즐거움들을 많이 누릴 수 있는 지금 상태가 더 좋고, 주님 뜻을 따르기 위해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부담스럽고 싫게만 느껴지지는 않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이 나에게는 너무나 공포스러운 일이 될 겁니다. 그분께서 다시오시는 그 날이 나에게는 너무나 두렵고 걱정스러운 날이 될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정신 번쩍 차리고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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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단어는 βασταξειν(바스타제인)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첫 번째 의미는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어머니가 아기를 품고 갈 때, 이 동사를 씁니다. 복음을 보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에서 ‘배었던’이 바로 바스타제인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그 무게에 눌려 힘들게 버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고 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 삶의 일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과 시련을 거부하고 없어지기만을 바라는 우리입니다. 이때는 십자가에 눌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안는 사람은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힘차게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마태 5,4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당대 로마법을 기억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로마 병사는 언제든지 식민지 백성을 붙들어 짐을 나르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 거리가 천 걸음, 약 1.5km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도 이 법에 따라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진 경우였습니다.
식민지 백성이 이런 명령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나서서 천 걸음을 더 가겠다고 합니다. 처음 천 걸음은 명령이지만, 두 번째 천 걸음을 나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끌려가는 삶이 아닌 이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거룩한 성주간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교회의 명령이라면서 성주간 예식에만 참여하면 그만일까요? 아닙니다. 바스타제인이라는 단어의 뜻인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라는 의미를 기억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 의지를 앞세워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끌려가는 삶이 아닌 자기 삶을 이끌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칠곡 할머니들이 모여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할머니 래퍼 그룹 영상을 보았습니다. 평균 연령 85세의 8인조 칠곡 할매 래퍼 그룹 ‘수니와 칠공주’입니다. 팔십 넘은 할머니들이 이제야 글을 배우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래퍼 그룹도 만들었습니다.
억지로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늦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나이이지만, 자기 의지를 앞세워서 이끄는 삶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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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길>
마르코 11,1-10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마르코 14,1-15,4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사람길>
사람이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의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고자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 사이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을 만나러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을 잇는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을 이으러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과 함께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열기에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막아도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기쁨이기에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슬픔이어도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희망이기에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아픔이어도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살림이기에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이 죽임이어도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사람을 살리려
길을 걸으니
사람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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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언제나 변치 않길 희망합니다. 아울러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도 항구하길 기도합니다.
‘굶주리면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가며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채근담)이 사람의 약점 중 하나입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으면 좋겠는데 인간의 마음은 흔들비쭉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에 올라 앉으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1-10) 정말 군중들은 가장 소중한 것을 길바닥에 깔아 놓으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마르 15,1)
빌라도는 군중에게 “여러분이 유다인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그러자 유다인들은 거듭 소리를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르 15,13) 빌라도가 다시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고 묻자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 15,14) 하고 외쳤습니다. 열렬히 환영하던 마음은 어디 가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만 반복하였습니다.
유다인의 명절인 과월절 기간에, 로마 총독이 정치범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절 특별사면’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이 기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선동에 많은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고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 예수를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 주었습니다.(요한 15,15)
소신 있게 판결해야 함에도 군중의 목소리에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소위 여론정치요, 인기 정치였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마르 15,31-32) 하며 예수님을 더욱 조롱했습니다.
모욕과 조롱을 일삼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켕기는 무엇인가가 있기에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떳떳하고 당당하면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림이 없고 그저 침묵하며 진실의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켕기는 것이 있으면 더 큰 소리를 내며 변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도 주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일상 안에서 나를 모함하고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침묵하며 기다릴 수 있을까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엉뚱한 구설에 오르게 될 때 묵묵히 소문을 낸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도 회개해야 하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침묵하고 그저 그 뜻을 살아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고서 도리어 발길로 채이고 맙니다. 사실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멀리 안 보이면 괜찮은데 늘 가까이에서 보니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그러나 힘이 드는 만큼 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힘든 상황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마르 15,34. 시편22,2) 하시며 더 간절히 아버지의 뜻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거기에 서 있던 백인 대장이 그분이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8) 하고 고백합니다. 그분의 정체를 모두가 안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여인들이 그분의 임종을 지켜 드렸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신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복됩니다. 그리고 임종을 지킨 여인들도 주님의 임종을 지켰으니 복이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이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주님을 지킨 이들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끝까지 주님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뒤늦게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본 백인대장처럼 늦게나마 주님의 정체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배신의 삶은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를 내려놓을 수 있길 희망합니다.
농담 삼아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배신자’라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도 일상 안에서도 결코, 배신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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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 주간은 성주간입니다. 거룩한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성목요일은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을 하시면서 성체성사를 설정해 주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던 세족례를 행하고 성찬례를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낮에는 성유축성 미사를 봉헌합니다.
성금요일에는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오후 3시경에 십자가 길을 하고 저녁에는 십자가 경배 예절을 합니다.
성토요일 부활을 준비하는 날 입니다.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기에 토요일 밤부터 주일 새벽에 걸쳐 빛의 예식과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한 주간 특별히 주님의 부활을 잘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통해서 왔습니다. 일상 안에서 내적 비움을 이루는 만큼 부활의 기쁨이 커질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헌신과 사항, 희생, 봉헌이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는 밑거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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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신망애(信望愛)의 삶-
"배워라, 비워라, 닮아라"
“사람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은 한결같음이다.”
어제 어느 자매로부터 받은 그림과 더불어 위 짧은 말마디가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일희일비하지 않는 한결같은 삶입니다. 깊은 내공의 믿음을 반영하는 한곁같음입니다. 이런 한결같은 사람을 만나면 신뢰와 더불어 참 편안함을 느낍니다. 다산 어른의 다음 3월24일 오늘 말씀도 이런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믿음의 삶에서 가능합니다.
“높은 지위에 매달리며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마라. 그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일도 빛나고 나도 빛난다.”
“맡은 일을 부지런히 행했을 뿐, 그 밖의 일은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이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오늘 가톨릭신문 글로벌칼럼 난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대한 로버트 미켄스의 글에서도 교황님의 한결같은 모습이 참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장애물을 넘어 계속 전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나이들면서 건강 약해져도 오히려 더 큰 결단 보이는 중, 반대 세력과 급진 세력 모두 교황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주눅들지 않고 교회 이끌어”
이런 어려움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한결같이 늘 미소띈 얼굴 표정을 짓는 교황님이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가톨릭신문에서 소개된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한 가톨릭교회 26분의 사제와 사제서품 60주년 “회경축”을 맞이한 3분 사제 역시 한곁같은 삶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삶은 흡사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예전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때 장애물 경기는 보는 이들에게 얼마나 흥미진진했는지요! 일상의 삶에서 이런저런 장애물을 온갖 지혜와 용기로 타개해 나가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한결같은 신망애 정주의 삶도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성지주일부터 시작된 성주간은 가톨릭교회에서 파스카 신비가 실현되는 절정에 속하는 전례시기입니다. 성지주일의 긴 복음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한결같음이 어둠을 밝히는 빛같습니다. 가톨릭 굿뉴스에 한결같이 제 강론을 올려주는 형제의 댓글도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아마 이 글을 쓰시기 위해 전날 하루의 성찰과 고백과 감사와 찬미의 삶의 결정판을 우리에게 매일 주십니다. 항상 신부님의 묵상글을 보면서 어두운 세상에서 빛 한줄기를 바라봅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아멘.”
어둔 세상 한 복판에서 “주님의 빛”으로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형제님이 참 경이(驚異)롭습니다.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것은 세상 곳곳에서 크고 작은 주님의 빛을 반사하며 살아가는 형제자매들 덕분입니다. 오늘 수난복음 중에도 한결같은 주님 사랑의 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음을 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후 전개된 수난복음의 목차를 정리해봤습니다.
(마르14,1-15,47)
1.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
2.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3.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다
4.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
5.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6.성찬례를 제정하시다
7.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
8.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
9.잡히시다
10.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
11.최고의회에서 심문을 받으시다
12.예수님을 조롱하다
13.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다
14.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15.군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다
16.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17.숨을 거두시다
18.묻히시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과 수난을 겪어낸 주님의 한결같이 깊고 깊은 믿음, 희망, 사랑이 참 놀랍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호산나!" 당신을 환영하던 군중이 폭도로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침에도 한결같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평상시 참으로 듣고 배움에 충실했음을 깨닫습니다. 다음 주님의 종이 고백하는 바 그대로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한결같이 듣고 배우는 공부에 충실하셨을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어 제2독서 필립비서의 그리스도 찬가가 또 깊은 감동과 더불어 깨우침을 줍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 토요일 제1저녁 기도시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대로 오늘 수난복음의 요약처럼 느껴집니다. 역시 하느님 향한 사랑의 비움,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입니다. 수난복음에서 주님의 이런 모습에 감동한 백인대장의 다음 고백이 수난복음의 절정이자 결론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앞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여인과 더불어 백인대장과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 역시 칠흑같은 어둠을 비추는 주님의 빛입니다. 수난복음 마지막 묘사,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라는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두 여인 역시 칠흑같은 어둠을 비추는 주님의 빛입니다. 과연 나는 수난복음의 누구에게서 나의 얼굴을 발견합니까?
예수님은 수난복음에서는 물론 평생 삶에서 겪는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겸손의 계기, 순종의 계기, 비움의 계기로 삼으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 사랑의 비움이 파스카 신비의 완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닮는 것은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입니다. “어떻게?” 저는 셋을 권합니다.
“배워라, 비워라, 닮아라”
주님처럼 한결같이 배움의 여정에, 비움의 여정에, 닮음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열렬한 신망애(信望愛)의 삶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처럼 간절히 항구히 바치는 기도가 이런 한결같은 배움과 비움, 닮음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주님의 감동적인 두 기도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니, 이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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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오늘 저는 강론 주제를 다음과 같이 잡았습니다. '수모는 받아도 수치를 당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스스로 받지, 억지로 당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 주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수난을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수난(受難)이라는 한자어를 뜻풀이하면 ‘받을 受’, ‘어려울 難’입니다.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어려움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받는다는 것이니 수동태(passive)입니다. 그런데 받기는 받되 억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저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니 수동태이되 능동적 수동태인 셈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고통을 기쁘게 받게 하고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합니까?
사랑이 아닙니까? 그래서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번역한 ‘Passio Christi/Passion of Christ’의 Passio 또는 Passion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이 Passion을 흔히 ‘열정’, ‘격정’, ‘열광’ 등으로 번역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면 ‘뜨거운 사랑’ 또는 ‘불타는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즉시 불나비를 생각하고 ‘불나비사랑’이라는 옛 노래를 떠올립니다.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차라리 재가 되어 숨진다 해도 아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무엇으로 끄나요 사랑의 불길 밤을 안고 떠도는 외로운 날개 한 많은 세월 속에 멍들은 가슴 아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자신을 불태우고 죽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죽어도 행복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의 수난은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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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11,9;15,13.14)
<두 마음!>
'주님수난성지주일'인 오늘은 '교회 전례주년(전례력)에서 가장 거룩한 주간'인 '성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성주간' 동안 교회는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사건인 수난과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너머의 사건인 '주님의 부활'을 맞이합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마르코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14,1-15,47)를 듣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예루살렘 입성 복음(마르 11,1-10)'과 '수난복음(마르 14,1-15,47)'은 '유다인들의 두 마음', 더 나아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두 마음'을 바라보게 하고 성찰하게 합니다.
'격한 환호와 기쁨'의 의미를 담은 "호산나!"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바뀝니다. 한 입에서 나온 '두 외침'입니다.
참으로 혼란스럽기도 하고, 참으로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두 마음을 드러낸 유다인들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나의 두 마음이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나의 두 마음 때문에, 이런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 참으로 죄송하기도 하고, 참으로 감사하기도 한 날입니다. 두 마음이 함께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육화) 땀을 흘리시고(공생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에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다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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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4EzAGbrMq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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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마르 14, 30)
하느님은
작아지시고
우리는
커져만 간다.
하느님은
실행하시고
우리는
도망친다.
모두가
힘든 시기에
성주간의
첫날을
맞이한다.
진짜와
가짜 사이에
우리가 있다.
하느님의
진짜 얼굴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주님께서는
수난하시고
우리는
격하게
환호한다.
하느님께서
무시당하시고
우리에게서
버림받으신다.
이중성의
마음 사이로
예수님께서
아프게
지나가신다.
예수님의
아픔은
모든 아픔을
대변하는
진짜 아픔이다.
아픈 상처와
절박한
믿음 사이에
우리가 서 있다.
상처가
상처를
치유하고
고통이
고통을
치유한다.
거짓된 삶을
치유하는
십자가이다.
고통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이다.
사랑은
무너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를
만나는
사랑의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걸어가신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
감사이다.
모두
포기하지 않는
십자가의
은총이다.
주님의
십자가로
소중한 우리를
다시
만나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정녕 우리를
구원할 것임을
믿는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진짜 얼굴을
만나는 은총의
성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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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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