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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해설 제 1장 정리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1장 존재의 의미와 존재물음의 필요성 오늘날 존재물음의 필요성 ‘존재하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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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인 '존재'의 의미
- 두가지 의미 - '있음', ' '~임(이다)'
존재' 라는 말은 무엇인가 가리키는 것, 뜻하는 것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가 막상 머리를 굴려 잡으려 들면 허공을 잡듯이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다. '존재' 라는 말과 존재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말 자체가 불가능하고 사유나 인식, 의사 소통과 행위도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막상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막연한 있음' 외에는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먼저 '존재'에 대한 이러한 막연한 생각들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있는 것[존재하는 것]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우리 자신도 그러한 "있는 것' 중의 하나라는 사실도 말이다. 먹고 마시고 즐겁게 무언가에 대헤 이야기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건강을 위해 운동도 하고 의미 있는 생활을 위해 다양한 취미와 여행도 즐기고, 영화도 구경하고 등산도 하는 등 우리가 살면서 행하는 일들은 아주 많다. 이러한 모든 일들과 행동들 역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서 '있는 것'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 없다. 우리가 행하면서도 실제로는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꿈이지 실재[있음]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꿈도 있어야 꿈이지 없다면 그냥 없음[무]' 일 뿐이다. 그래서 일찍이 어떤 철학자는 이런 엉뚱한 물음을 던졌다. "왜 무가 아니고 존재인가?"
어쨌거나 우리가 '있음'을 전제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 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의 전제가 되고 있는 이 있음' 이 꿈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도 꿈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가 전제하고 있는 그 바탕이 튼튼하고 확실해야 그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삶도 평안하고 안전 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세계를 반성하고 더 나은 삶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철학하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철학함의 실마리를 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철학은 '있음' 위에서, 있음을 전제로 시작될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있음의 한가운데, 그야말로 '있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것들 모두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있음을 전제하고 있음 위에서만 우리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우리의 있음이라는 것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대개는 고의적으로 잊고 지내려고 하지만) 불현듯 '당연한' 우리의 있음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있음이 '지나가 버리는' 있음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 생각의 나래를 펼친다. 비록 우리의 있음이 언젠가는 없음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긴 하지만, 만일 모든 있음이 그렇게 확실한 보장 없이 없음[무]에 내맡겨져 있다면, 이 있음 전체가 항상 소멸의 위험 속에 노출되어 있을 것이고, 따라서 있음의 지속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런데 우리에게는 있음의 지속이 기대될 때에만, 아니 있음의 지속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세상은 지금까지 존재해온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보고 대하는 그 모든 있음들이 모두가 다 한결같이 잠시 있음 속에 머물다가 없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우연적인 있음들이긴 하지만, 모든 있음이 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있음의 '본질'이 있다가 사라져버리는 '일시적인 있음'에 있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있음들이 다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그러 한 현상 밀바탕에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어 모든 것이 변화 속에서 없음으로 함몰되어 가지 않도록 막고 있을 것이다. 비록 모든 있는 것들이 변화의 와중에 놓여 있다고 해도 분명 '있음의 본질 은 변화하는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밑바탕에 놓여 있어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버티는 어떤 것, 즉 '기체() 또는 "실체(Substantia)'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있음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뉘게 된다. 우리의 삶 이 벌어지고 있는 변화의 소용돌이인 현실적 '있음'의 세계와, 이 세계의 밑바탕에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견뎌내며 계속 있게끔 하고 있는 '본질' 또는 <실체> 의 세계가 그것이다. 있음의 본래적 의미도 우리가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생성, 소멸, 변화, 운동이 아니라 아무런 변화도 허용하지 않고 어떤 다른 것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고요하고 지속적인 있음, 있음 그 자체, 또는 본질 그 자체, 실체 그 자체이다. 우리는 이러한 참된 있음' 을 육신의 눈이 아닌 정신의 눈으로 직관 할 수 있으며, 그것은 현실적인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고 이념의 세계, 의데아의 세계에서나 대할 수 있다. 리하여 '존 재'하면 존재의 본질[본모습1로 실체를 떠올리고 이념과 이데아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의미는 "지속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음"을 뜻하게 되었다. 최고의 있음[존재), 최고의 본질, 최고의 실체로서 '신'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존재'는 '존재하는', '존재하는 것'과 같은 표현 속에 자주 나타나는데, 이 경우 그것은 우리의 일삼용어인 '있는', '있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존재'는 '존재함' 있음'이 실사화()된 경우이다. 그래서 오래 전에는 존재'라는 개념 대신에 '유'라는 개념이 철학용어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다양한 변형에 적당치 않아 '존재' 라는 개념에 자리를 내주고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건 '존재하는', 즉 '있는' 것은 모두 존재'라는 포괄적인 개념 속으로 합류해 들어올 수 있고, 이러한 '존재' 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존재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가장 포괄적인 개념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적용이 되는 가장 초월적인 범주인 셈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되는 '무'도 우리가 이렇게 글로 쓰고 그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한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있음'의 의미 외에도 '존재'는 아주 중요한 다른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이다'의 의미이다. 흔히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정의한다. 이 경우 우리는 인간에 대해 그가 이성적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지키지 않고 멋대로 행동할 때, '그 사람은 야만적이다'라고 말하면서 야만적 존재로서 그 사람의 못된 측면들을 자세하게 열거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말의 일상적 사용에서도 어떤 것의 어떠함 또는 무엇임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다' 를 무슨무슨 존재'라는 용어로 바꾸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이 용법이 우리말에서는 자세하게 드러나지 않는 서술적 용법으로서의 '존재'의 의미이며, 영어, 독일어, 불어 등의 서구 언어권에서는 이러한 연계사' 로서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존재' 의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존재'는 이와 같이 '있음'과 '~임'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언어사용, 학문적인 논의와 주제탐구 등에서 이러한 두 가지 의미의 '존재' 개념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의 설명에서도 우리는 이 점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존재' 라는 개념에는 '있음'과 ~임'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함축되어 있으며, 반대로 우리가 있음'과 -임'을 이야기 할 때에도 그 배경에는 '존재' 에 대한 논의가 깔려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존재의 의미이다.
'존재'의 다양한 의미
이제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존재는 존재자[존재하는 것]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 존재자(이것이 어떻게 논의되건 상관없이)가 각기 이미 그것으로 이해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또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 ..... 존재는 .. 존재자의 발견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나름의 고유한 제시 양식을 요구한다. ......존재는 있다는 사실과 그리 있음, 실재, 눈앞에 있음, 존립, 타당함. 현존재, '주어져 있음' 에 놓여 있다."
우선 위에서 인용한 하이데거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규정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규정한다는 것은 서술한다는 것이다. 서술한다는 것은 주어에 술어를 연결한디는 것이다. 예컨대 "개나리꽃은 노핳다"는, 주어인 '개나리꽃'과 술어인 '노랗다' 가 연결된 문장이다. 이 문장은 개나리꽃이 노랗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때 개나리꽃' 은 '노란 것'으로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개나리꽃이 노란 것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노란 것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것이 ...에서 이해될 때 이 '....'를 어떤 것의 이해 지평이라 한다. 존재는 개나리꽃이나 노란 것 등의 '존재하는 것'들이 이해 될 수 있는 지평이다.
존재는 존재자를 규정하거나 이해하기 위한 지평이다. 지 평은 어떤 것이 자신을 내보이거나 드러낼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존재하는 것'은 다양한 의미의 '존재' 에서만 자신을 나타낼 수 있다. 지평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동일한 것이 아니듯 존재와 존재자는 서로 다른 것이다. 즉 존재[있음]와 존재하는 것[있는 것] 사이에는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는 존재가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와는 달리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존재'라는 낱말을 자명하게 사용하고 있다. 아니 존재를 학문적으로 탐구하기까지 한다. 존재에 관한 탐구를 '존재론(Onitologie)이라 한다.존재론은 존재하는 것[존재자]의 존재를 드러내어, 존재의 구조를 해명하는 과제를 갖는다.이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든 존재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존재를 '있다는 사실' 과 '그리 있음' 그리고 '실재성' , 눈앞에 있음, '존립', '타당함', 현존재', '주어져 있음'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존재의 방 식' 이라 할 수 있다. '있다는 사실' 은 어떤 것의 있음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리 있음' 이란 어떤 것의 그렇게 있음, 즉 어떠어떠한 모습 또는 속성으로 있음을 말한다. 실재성' 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물들의 '존재 성격', 즉 한 사물이 실제적으로 있음을 뜻한다. '눈앞에 있음'은, 하이데거 자신이 말하는 '존재 성격'으로서, 사물이 관찰 대상으로서 우리들의 눈앞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존립'은 어떤 것이 지속적으로 있음을 일컫는다. 타당함은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에 맞아떨어져 그 둘이 일치를 이루고 있음[진리]을 말한다. '현존재' 는 일반적으로 눈앞에 나 타나 있음을 뜻하지만, 하이데거 철학에서는 존재 일반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자의 존재, 즉 인간의 있음을 말한다. 주어져 있음(es gibt)'은 어떤 것이 우리들의 감각에 주어져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물론 그 밖에도 '존재' 를 뜻하는 많은 말들이 있다. 예컨대 이데아, 우시아, 에네르게이아, 본질, 실존 등이다.
다양한 존쟈자의 형태들
그러면 '존재자(das Seiende, 존재하는 것, 있는 것)'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아주 다양한 의미로 '존재한다'고 명 명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우리가 의미하고 있는 것, 그것과 우리가 이렇게 또는 저렇게 관계 맺고 있는 것 등 그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 것도 또한 '존재하는 것' 이다.
독일어 'das Seiende 는 'seiend(존재하는)'라는 분사를 명사화시킨 것이다. 이를 우리말로는 '존재하는 것'과 '있는 것' 이라고 옮길 수 있다. 철학에서는 '있는 것'보다는 '존재 하는 것'이 습관적으로 선호되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존재하는 것' 이란 표현이 '존재자'라 약칭해서 쓰일 수 있고, 그 활용에서도 '있는 것' 이란 표현보다 어색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일단 여기서도 '존재자 내지 '존재하는 것' 이란 단어를 주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설명을 위해 필요한 경우 '있는 것'이란 낱말도 함께 사용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하는 것' 혹은 존재자의 범위에 들 수 있는 것들로 꼽은 것은 지나치게 형식적이다. 아래에서는 하이데거가 '존재하는 것' 들로 꼽은 순서대로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우리가 '그것' (여기서 의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 모든 것"이라 말한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서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다시 말해 문장의 주어 자리에 놓일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우리는 자유 자재로 이야기할 수 있다. 모든 이야기 속에는,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이야기든 간에, 이야기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 러나 이때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왜나하면 '존재하는 것' 에서 존재는 결코 실제적 존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우리가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의미된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의미된 것'은 우리들의 머릿속에 있는 표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존재자를 뜻한다. 만일 내가 "거기 문 옆에 세워 둔 우산 좀 가져다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문, '우산' 등의 낱말은 문의 표상이나 우산의 표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손잡이를 돌려 열고 단을 수 있는 존재자로서의 문과 비를 막아주는 존재자로서의 우산인 것이다. 그리고 설령 내가 착각을 일으켰다 할지 라도, 즉 거기에 우산이 없는 경우라도, 그때 내가 가져다 달라고 요청한 것은 역시 존재자로서의 우산이지 우산의 표상은 아니다.
그는 존재자를 "우리가 그것과 이렇게 또는 저렇게 관계 맺는 모든 것"으로서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행동 할 때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 밥 먹고 일하는 것 등 우리의 모든 활동이 다 우리 인간의 행동 관계들이다. 우리들의 행동관계는 수많은 도구들과 자연물 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우리들의 행동관계 가운데 만나는 모든 것이 다 '존재하는 것' 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행동관 계를 하느냐에 따라 우리들이 만나는 존재자도 다양해진다. 즉 학문적 행동관계를 하는 사람은 '학문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만날 수 있는 반면, 예술가는 예술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만나게 된다.
그는 존재자를 "우리 자신이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들 자신은 무엇인가? 우리들은 존재하는 자들이다. 우리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들은 존재를 이해하면서 또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염려하면서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가능성 때문에 우리들 자신과는 물론 우리와 다른 것들과도 관계한다. 이러한 관계맷음의 방식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있다'나 '존재한다'는 동사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어떤 것이 '있는 것' 또는 '존재하는 것' 이며, 또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존재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고, 그 종류도 헤아리기 어렵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는 것'을 '시간' 이라는 기준에 의해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
나무, 참새, 집, 그림, 하늘 또는 삼국통일, 살수대첩, 동학 혁명 등은 '존재하는 것' 들이다. 그것들은 우리들이 감관을 통해 알 수 있는 자연물 또는 인공물들이거나, 아니면 우리들이 배워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시간적인 것들', 즉 '시간 속에 있는 것들'이다. 직선, 평면, 입체 등의 공간적 관계들과 수의 체계와 관련된 수적 관계들도 존재하는 것' 들인데, 이러한 것들은 '비시간적인 것들', 즉 '시간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것들'이다. 명제의 의미, 명제의 진리, 타당함 등 역시 '존재하는 것' 이다. 이것들은 무시간적인 것들, 즉, `:시간을 갖지 않은 것들' 이다. 반면 명제를 발언 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으로서 '시간적 흐름' 속에 내맡 겨져 있다. 신 역시 '존재하는 것' 이다. 그러나 신은 영원한 것으로서 '초시간적인 것',즉 '시간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그것의 '존재' 에서 '시간' 이라는 기준에 따라 이와 같이 분류될 수 있다. 물론 다른 기준에 의해 분류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자가 그것의 존재에서 분류되어 파 악된 것 전체를 우리눈 '의미'라 부른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의 '존재'의 의미는 시간'이다. "존재와 시간은, 우리가 존재의 다양한 의미를 이해할 분류 파악할 수 있는 지평으로서 시간을 제시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존재와 시간을 이해하는 데는 '존재하는 것'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