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안중근(安重根) 의사 유묵(遺墨)
石松 이명선
1.
안중근 의사(1879~1910)는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의 가슴과 배에서 7개의 점이 뚜렷하여 북두칠성의 기를 받았다 하여 어린 시절 ‘응칠(應七)이란 이름을 갖는다. 무술과 사격을 좋아해서 사격 실력이 뛰어났으며 천주교에 입교하여 1897년 ’토마스(도마)란 세례명을 갖고 있다.
제국주의자 일본은 1905년 우리나라 외교권을 박탈하고(을사늑약 (乙巳勒約), 1907년에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 산 한다.
1909년 3월,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땅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서 애국청년 12명을 규합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비밀결사대를 조직한다. 왼손 넷째 마디를 잘라 그 흐르 는 피로 태극기 위에 ‘대한독립(大韓獨立)’ 네 글자를 쓰고 독립 운 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한다.
이때 연해주 독립운동의 재정과 조직의 대부 최재형(崔在亨)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지원한다. 자금, 권총, 정보 등 거사 전반을 적 극적으로 후원한다. 자기 집에서 사격 훈련도 연습시킨다. 안중근 의 사는 대한 의군(義軍)을 창설하고 참모 중장의 신분으로 거사 준비에 만전을 기한다.(조선일보)
2.
1909년 10월 26일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 코프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오전 9시 하얼빈역에 내린 이토히로부미를 향해 권총 3발을 쏴 그 자리에서 명중시킨다. 그때 안중근은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된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거사 당위성을 주장한다.
“나는 살인범이 아니라 대한 의군 참모 중장이다. 내가 이토히로부미 를 죽인 것은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 아니다. 나는 대한 의군 참모 중 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전쟁을 수행한 것이 다. 따라서 나는 살인범이 아니라 전쟁포로임으로 만국공볍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에서 어머니가 보낸 편지 “네 가 항소를 한다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수의를 지어 보내 니 입고 가거라.” 와 함께 하얀 모시 한복을 입고 순국한다.
“萬國公法 不如大砲”(국제법이 대포알만 못하다)
뤼순 감옥에서 마지막 안 의사가 남긴 유묵을 일본으로부터 환수하여 서울 덕수궁 중명전에서 공개하였다.(2026, 8, 13 조선일보)
䨒溪 이도현 시인은 이 비장(悲壯)한 유묵 내용을 시조 한 편으로 창작하여 광복절 아침, 인터넷에 올렸다.
오늘 81주년 광복절 해가 솟았다
“세계 국제법이 대포알만 못하다”고
통한의 안중근 의사 손바닥 도장 찍었다.
대한 의군(義軍) 참모 중장 역사적 사명으로
이등박문을 저격한 애국혼을 보아라
이 아침 비장한 유묵(遺墨) 만천하에 빛난다.
-이도현의 <안중근 의사 유묵>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