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재위 1674~1720)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축조하여
세검정을 한양 북방 방위의 요충지로 변모시켰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홍제천을 건너 북
한산 비봉 아래까지 이어졌다. 제21대 임금 영조(재위 1724~1776)는 여기에 총융청을 주둔하도록 하
여 탕춘대성을 한양방위사령부로 삼았다. 길도 없고 민가도 없던 자하문 밖이 각중에 한양을 방어하
는 군사기지로 변한 것이다. 이 모두 인조가 겪었던 통한의 삼전도 굴욕을 상기하며 북방 경계를 튼
튼히 하고자 하는 결의에서 나온 조치였다.
부자지간인 영조(52년)와 숙종(46년)은 조선왕 가운데 재위기간 1, 2위를 차지했다. 우리 역사상 가
장 오래 재위했던 임금은 고구려 제6대 태조(47~165)로서, 6세 때인 53년 보위에 올라 99세 때인 146
년 동생 차대왕에게 양위할 때까지 무려 93년 간 보위에 있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최장 재위 기록
이다. 2016년 10월 태국의 푸미폰 국왕이 서거했을 때, 우리 언론들은 일제히 그의 재위기간 70년을
세계 역사상 최장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는 언론 종사자들이 우리 역사에 무관심하고 무지해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총융청은 당초 인조 2년(1624)에 설치된 한양 방위군이었다. 병력은 2만이었고 최초 군영은 사직단
인근에 설치했다. 총융청 군영은 현종 10년(1669) 삼청동으로 옮겼다가 영조 23년(1747) 탕춘대성으
로 이전했다. 영조는 탕춘대성 한복판에 사령부 건물을 지은 뒤 연융대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인조가
만든 총융청 군사들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 앞서 임진왜란 때도 서애 유성룡
의 건의로 5군영 체제의 한양방위사령부를 설치하기는 했지만, 군사들이 한 일이라고는 선조가 의주
로 도망갈 때 임진강을 건너기 위한 나룻배를 구해 나른 게 전부였다. 지속적인 훈련과 무기 개선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조 때 탕춘대성으로 옮긴 새 군영을 신영(新營)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세검정 일대를 관할하는 종
로구 신영동은 당시의 새 병영에서 유래한 동명이다. 2만 병력을 먹여 살릴 양곡을 보관하자면 어마
어마한 창고를 지어야 했다. 그때 지은 군량미 창고를 평창(平倉)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부자동네로
소문난 종로구 평창동의 유래가 되었다. 이후 총융청은 여러 차례 체제‧명칭‧병력이 변화를 겪다가
고종 21년(1884) 친군영제를 실시하면서 폐지되었다.
세검정(洗劍亭)은 칼을 씻은 정자라는 뜻으로, 반란군들이 광해임금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기 위
해 탕춘대성에 집결했을 때 계곡의 맑은 물에 칼을 갈아 씻으며 결의를 다졌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
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워낙 주변경관이 빼어나다 보니 정자는 그보다 훨씬 옛날부터 거듭 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가 연융대를 축조할 때도 계곡에 새로이 정자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화재나 홍수로 여러 번 불타거나 떠내려가서 새로 짓곤 했는데, 현재의 정자는 1977년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를 근거로 복원한 것이다.
해방 후 동회제도를 실시하면서 1947년 6월 행정동인 세검정동을 설치하여 법정동인 부암동‧신영동‧
홍지동 일대를 관할하도록 했다. 세검정동은 1970년 부암동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지역 주민들이
나 외지인들이나 그 일대를 상굿도 세검정이라고 부른다.
역대 임금들은 선대왕의 실록 편찬이 끝나고 나면 세검정에서 세초(洗草)를 했다. 사초(史草)를 물에
헹궈 씻었다는 뜻이다. 임금이 승하하면 다음 임금은 즉시 실록청을 설치하고 선대왕의 실록 편찬에
착수했는데, 육조와 그 산하기관의 업무 내용을 연월일 순으로 정리한 『춘추관 시정기』, 왕명의 출
납 내역을 연월일 순으로 상세하게 기록한 『승정원일기』, 3정승이 국정을 총괄한 내용을 연월일
순으로 기록한 『의정부등록』, 사관(史官)들이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한 사초 등이 실
록 편찬의 핵심 사료(史料)가 되었다.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사관이 기록하여 그날그날 춘추관에 제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사관이 임금의 됨됨이를 비밀리에 기록해두었다가 훗날 실록청에 제출한
가장사초(家藏史草)였다. 가장사초의 내용은 당사자인 사관도 절대 누설해서는 안 되며, 임금을 포함
한 제3자가 이를 알고자 해서도 안 되도록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가장사초는 실록 편찬이 끝나
면 끝까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세초를 했는데, 이때 세초를 한 곳이 세검정이었다는 얘기다. 태우
지 않고 세초를 한 것은 고급지가 워낙 귀하던 시절이라 재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요즘 이면지를 활용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세초를 한다는 것은 실록 편찬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실록 편찬은 국가적 중대사였으므로 세초가 끝
나면 임금은 실록청 종사자들과 사관들에게 세초연(洗草宴)을 베풀었다. 세초연은 세검정 너럭바위
에 차일을 치고 성대하게 치러졌다. 지금도 세검정 옆 너럭바위에는 당시 차일을 칠 때 쇠말뚝을 박
던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때 역사적 장소였던 세검정과 너럭바위가 현재는 세검정로를 달리는
수많은 차량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미동부의 혹한과 눈으로 학교가 휴교하는등 도시 전체가 꽁꽁 얼어 붙었다고 합니다. 특히 카다다 인접주 메인주와 뉴햄셔주는 100년만에 찾아온 추위라고 합니다. 인공지능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자연의 재해, 빨리 해동하기를 바라는 마음 입니다. 주변 걸으시며 활기찬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