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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김대건 신부님의 삶과 신앙"
김대건 신부님의 삶과 신앙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제1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을 중심으로
1996년 성 김대건 신부의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면서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전기 자료집 세 권(제1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제2권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적』, 제3권 『성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이 발행되었다.
그리고 교회사 연구 제12집(한국 교회사 연구소, 1997년)에 심포지엄 연구 논문 전체가 게재되었다.
이 글은 주로 이들 자료집과 사료들을 바탕으로,
특히 김대건 신부가 남긴 편지 본문 몇몇 중요한 대목들을 인용하여 성 김대건 신부 일대기를 재구성하였다.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연구 논문이 아니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이들은 직접 자료를 찾아 읽기를 권한다.
김대건 신부님의 삶과 신앙
1. 신앙의 선조와 출생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집안의 천주교 신앙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때부터 시작되었다.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1738~1814) 비오 복자는‘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복음을 접한 맏아들에게 교리를 듣고, 처음에는 세상의 권세 때문에 갈등하였지만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선택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체포와 배교를 되풀이하다가 유배형을 받았다. 그러나 귀양에서 풀려난 뒤 다시 체포되어 1805년 해미로 압송되었는데, 이때부터 당당히 천주교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는 십 년간의 옥살이 끝에 1814년 12월 1일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과 옥중에서 보여준 신앙심은 한국 교회에 널리 알려졌고, 그의 후손들도 순교로 그 믿음을 이어 갔다
김진후 복자의 아들이며, 김대건의 작은할아버지 김종한(金宗漢, ?~1816년) 안드레아 복자도 유명한 순교자다. 한국 교회의 창설기에 맏형인 종현(淙鉉)에게 교리를 듣고 믿기 시작하여, 순교하기까지 기도하고 선교하며 살았다.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밤에는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쳤다. 1815년 을해 박해 때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을 거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1년 6개월가량 옥살이하다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그가 가족에게 남긴 편지를 보면, 교리에 대하여 매우 깊이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각 사람이 떨어져 있는 한 지체지만, 거룩한 교회의 머리는 천주이시고, 목은 성모님이시며, 각 지체는 우리 모두에 해당되니, 머리를 다치지는 않았어도 지체를 다쳤으면 머리를 다친 것과 같고, 마찬가지로 지체를 사랑함은 머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에 따라서 천주를 사랑하면 사람을 사랑할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면 천주를 또한 사랑할 것입니다.” 김종한은 지체와 몸의 비유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과 연결시켰다. 특히 이 대목은 당시 복음 해설서였던 성경직해광익의 한 대목으로, 그가 복음을 외우고 열심히 묵상하였음을 드러낸다.
그는 판결을 앞두고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교에 대한 열망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었다. “저는 순교를 향하여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三仇: 영혼 구원의 세 가지 원수인 육신, 세속, 마귀)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 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는 그의 열망대로 순교로 신앙을 증언하였다. 순교 신심도 핏줄을 타고 유전되는지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한글 서간에는 작은할아버지의 편지와 유사한 구절이 있다. “너희 이런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투루 먹지 말고 주야로 주님의 도움을 빌어, 삼구(三仇)를 대적하고 고난을 참아 받아,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너희들의 영혼 대사를 경영하라.”
이들 순교자 밑에서 직접 보고 배우며 신앙을 이어받았던 후손 김제준은 교우인 고 우르술라와 혼인하여 김대건을 낳고, 박해를 피해서 골배 마실(경기도 용인)에 정착하여 선교사들을 만났다.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는 ‘솔뫼’로 알려져 있다. ‘소나무가 우거진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당진군 우강면에 위치한다. 위에서 말하였듯이 이곳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한 이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였다. 솔뫼는 김진후, 김종한, 김제준, 김대건 신부 이렇게 사 대에 걸쳐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된 순교자 집안의 탄생지이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1796~1839) 성인은, 솔뫼가 고향이었지만 거듭되는 박해로 고향을 떠나 유랑할 수밖에 없었다. 1827년 정해 박해의 여파로 부친 김택현(김대건 신부의 조부)과 함께 서울 청파(靑坡)를 거쳐서 용인 한덕동(寒德洞,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에 살다가 골배 마실(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12)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곳 교우촌에서 김제준은 모방(Maubant) 신부로부터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았고, 김대건도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소의 꿈을 키웠다. 김대건이 열다섯 살 되던 1836년 4월경 굴암, 은이 지역의 공소에 사목 방문을 왔던 모방 신부는 그에게 세례성사와 첫영성체를 베풀고 신학생으로 발탁하였다. 이에 앞서 2월에 최양업, 3월에 최방제 소년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이미 한양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고 있었다. 김대건은 뒤늦게 7월부터 합류하였다.
김제준은 장남 김대건을 유학 보낸 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사위 곽 씨의 고발로 배교자 김순성(김여상)과 포졸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아들을 마카오로 보냈다는 이유로 국사범(國事犯)으로 여겨져 고문을 받았다. 고문이 얼마나 가혹하였던지 그는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막상 배교하였다고 해서 아들을 외국에 보낸 죄까지 용서되지 않았기에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함께 옥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배교의 죄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배교하여도 감옥에서 풀려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김제준에게 알려 주었다. “놓여 나가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의심 없이 처형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려 당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재판관 앞에 나가 배교한 말을 취소하고 순교로써 세상을 마치도록 하십시오.”
이에 그는 형조에서 배교를 취소하고 떳떳이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는 9월 26일 같이 신앙을 증언한 여덟 명의 신자와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 사형 터에서 순교하였다. 김제준의 순교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1839년 음력 8월 19일)에는 다음과 같이 간단한 기사로 정리되어 있다. “사학죄인(邪學罪人) 남이관(南履灌), 김제준(金濟俊), 조신철(趙信喆), 전녀(全女), 경협(敬俠) 등 아홉 명을 처형하였다. 김제준은 사술(邪術)에 홀려 최경환(崔京煥)과 각각 그 아들을 서양(西洋)에 치송하여 보낸 자이다.”
2. 신학생 생활
김대건은 1836년 7월 11일 서울에 있는 모방 신부의 거처에 도착하였다. 김제준이 정하상과 교류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였을 때,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추천한 이는 아마도 정하상 등 평신도 지도자들이었을 것이다. 김대건의 뒤늦은 합류로 예비 신학생은 세 명이 되었다. 김대건은 다른 두 사람보다 4-5개월 늦게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파리 외방 전교회가 선교지에 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나라의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신학 교육이 불가능하였기에 유능한 소년을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로 보내든가 아니면 조선인을 위한 신학교를 세우고자 하였다. 모방 신부는 김대건의 라틴어 기초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유학을 보류하려고 하였지만, 행여나 박해가 발생한다면 기회가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세 소년을 함께 마카오로 보냈다. 세 소년은 1836년 12월 2일 장상에게 순명할 것을 서약하였다. 다음은 라틴어로 서약한 주 내용이다.
나에게 또한 나의 뒤를 이어 조선 교회를 다스릴 목자들에게 순명과 복종을 맹세하는가?
- 맹세하옵니다.
나에게 또한 나의 뒤를 이어 조선 교회를 다스릴 수석 성직자들에게 장상의 허가 없이는 그들이 지정하지 아니한 다른 지방이나 다른 회(會)로 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 맹세하옵니다.
부득이 외방 선교회 신부·조선 선교사·조선 교회의 수석으로 있는 나는 이 소년들 곧 최 프란치스코(경기도 남양 출신), 최 토마스(홍주 다락골 출신), 김 안드레아(면천 솔뫼 출신) / 이들이 우리 주 예수 고상 앞에서 복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1836년 12월 2일에 서약함을 받았음.
베드로 필리베르투스 모방 조선 선교사
세 소년은 서약한 다음 날 12월 3일에 한양을 출발하여 육로를 통하여 마카오로 떠났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 파치피코 신부, 안내자들인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 김 프란치스코 등의 인도를 받아, 의주 성문을 통과하여 12월 28일 중국 측 변문인 봉황성에 닿았다. 한겨울에 압록강을 건넌 소년들은 1837년 6월 7일 남쪽의 따뜻한 지역인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6개월 만에 도착한 그곳에서는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르그레주아(Legregeois), 칼르리(Callery), 리부아(Libois) 신부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 소년의 신학생 시절 이야기는 모두 스승들의 편지와 신학생 시절의 친필 서간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모방 신부는 세 소년을 보낼 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 주었다.
“조선 소년 두 명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또 기회가 없을까 걱정이 되어 비록 저하고 4-5개월밖에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세 번째 소년을 추가로 같이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의 성명을 도착순으로 소개하면, 지난 2월 6일에 최 토마스, 3월 14일에 최 프란치스코, 7월 11일에 김 안드레아가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은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교우들입니다. …… 이 소년들은 온순합니다. 마음에 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열심과 순명으로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 조선 신학교의 설립을 위하여 제일 좋은 장소로조선 소년들을 보내 주시고, 다음 편지에서 그 장소를 알려 주십시오.”
모방 신부는 조선 교회의 첫 신학생들이 가장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시 페낭 신학교는 환경이 좋지 않았고, 만주 지역에서 새롭게 조선 신학교를 세우기에는 재정뿐만 아니라 교수진 구성 등이 여건상 어려웠다.
세 명의 소년을 가장 처음 맞이하여 파리 본부로 소식을 전한 이는 당시 마카오의 극동 대표부 부대표를 맡은 바랑탱(Barrentin) 신부였다. 대표였던 르그레주아 신부가 병석에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 목표 제일 순위는 현지인 사제 양성이었기에, 그들은 세 소년의 교육에 대해 매우 신중히 고민하고 있었다. 쓰촨[四川]에 선교하던 앵베르(Imbert) 신부가 제2대 조선대목구장이 되면서, 칼르리 신부가 조선 신학교 첫 번째 교장을 맡게 되었다.
“샤스탕(Chastan) 신부가 보낸 두 명의 밀사들이 …… 세 명의 조선인 학생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모방 신부의 여러 편지도 가지고 왔습니다. 열일곱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의 이 학생들은 놀랄 만큼 순박해 보입니다. …… 또 우리는 앵베르 주교에게 칼르리신부가 주교의 신학교를 맡기에 아주 적임자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마카오 부대표 바랑탱 신부가 파리로 보낸 편지, 1837년 6월 13일).
조선 신학생들을 위한 새로운 신학교를 준비하던 칼르리 신부는 열정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친애하는 신부님, …… 주문품은 이러합니다. …… 잡지, 수준기(水準器), 기압계, …최고 품질의 연필 세 다스, ……, 자명종. 마지막 물건, 특히 자명종은 위의 여러 물건과 함께 우리 조선 학생들과 지금의 제 처지에서 볼 때 거의 필수품입니다. …… 나의 조선 소년들의 목소리가 매우 쉰 목소리이고, 완전히 음정이 맞지 않는 목소리라는 말을 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교회 노래와 성가들을 가르쳐 그것을 좀 고쳐 볼까 합니다”(트송[Tesson] 신부에게 보낸 서간, 1837년 10월 4일).
“이 밖에도 바늘, 성냥, 부싯깃, 그리고 이런 종류의 자질구레한 것들을 더 보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또 내년에 북만주로 이전하게 될 조선 신학교를 위해서 대단히 유용한 것들입니다. …… 저는 벌써 조선말을 조금 합니다. 얼마 안 가서 모든 것이 잘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 조그마한 손풍금이 하나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조선을 위하여 그것을 마련해 줄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트송 신부에게 보낸 서간, 1837년 10월 6일).
칼르리 신부는 1835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지만, 조선 입국이 불가능해지자 마카오에 머물면서 신학생을 담당하는 ‘초대 교장’ 역할을 맡았다. 위의 두 편지는, 칼르리 신부가 각각 1837년 10월 4일과 6일에 연속적으로 파리 신학교에 있는 트송 신부에게 보낸 것으로 부드럽지만 거절할 수 없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부분이다. 수업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학용품과 생활필수품, 그리고 목소리 교정과 음악 교육을 위한 손풍금도 요청하였다. 같은 내용의 편지를 이틀 간격으로 거듭 보낸 것은 마침 편지를 운송하는 배편이 연달아 있어서 가능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받는 사람에게 거절할 수 없도록 압력을 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신학교의 위치에 대해서 처음에는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보내려고 하였지만 그곳 환경이 좋지 않하여 조선이나 랴오둥[遼東] 지역, 아니면 북만주 지역에 새로운 신학교 건립을 모색한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던 가운데 포르투갈의 ‘선교 관할권’(Padroado) 문제로 이탈리아인 선교사와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마카오에서 축출되면서 선교사들은 필리핀이나 다른 지역으로 피신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학을 온 첫해에는 마카오를 떠나지 않았다. 여건상 새로운 지역에서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우선 마카오 대표부에 계속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 소년 가운데 가장 촉망되던 최방제가 그해 1837년 11월 27일 위열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은 두 소년은 더위와 풍토병과 싸우면서 라틴어 공부와 신학 공부를 이어 갔다. 1839년 중국의 아편 거래가 마카오에까지 미치고, 민란의 위협이 심해지자 학생들을 마닐라로 피신시키게 되었다. 조선에서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있었던 그해 4월 6일 마카오를 떠나 스승과 제자들은 필리핀 롤롬보이로 향하였다.
“4월 19일 아침에 마닐라에 도착하였습니다. …… 칼르리 신부와 데플레슈(Desfleches) 신부, 그리고 두 학생은 뱃멀미를 하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다 괜찮았습니다. …… 승객들이 많아 방들이 다 찼으므로 선장은 자기 방과 부선장인 자기 동생의 방을 우리에게 양보하고, 자신들은 갑판, 심지어는 바닥이나 의자에서 잤습니다. …… 이곳 도미니코회 수도원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드는 칼르리 신부는 마닐라에서 배편으로 사흘 걸리는 곳에 있는 가브리엘 신부를 만나려고 5월 2일 그쪽으로 떠났습니다. …… 우리도 시골의 도미니코회 수사들 집에 가려고 마닐라를 떠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더 편하게 공부할 것입니다. 그곳은 마닐라에서 가까운 장소로, 롤롬보이라고 부릅니다.”
마닐라로 피신한 학생들은 적응 기간을 가진 뒤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운영하는 롤롬보이 농장으로 갔다. 배를 오래 탄 적이 없던 두 소년은 뱃멀미를 심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롤롬보이에는 칼르리 신부, 리부아 신부, 데플레슈 신부 외에 조선인 신학생 두 명,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신학생 두 명이 있었다. 이 시기 리부아 신부의 편지에 김대건에 관하여 잠깐 언급되어 있다.
“…… 우리는 잘 지내고 있으며 (김대건) 안드레아를 제외하면 모두 건강합니다. 안드레아는 자주 복통과 두통과 요통을 앓습니다. 그는 마카오에서 칠면조 집의 대들보를 들어 올린 후부터 허리에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마카오에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그는 칼르리 신부에게 이미 이야기하였는데, 칼르리 신부는 그것이 성장 과정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대답하였했습니다. 그래서 트와네트 신부의 처방대로 약을 지어 주게 하였습니다.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잘 먹고 잘 잡니다. 그래서인지 위험하지는 않습니다”(리부아 신부가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1839년 5월 16일).
리부아 신부에 따르면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 칼르리 신부는 매우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로, 필리핀의 환경에 대하여 불만이 매우 많았다. 실제로 칼르리 신부는 1841년 마카오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간 다음,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탈회하였다. 그리하여 데플레슈 신부가 칼르리 신부의 뒤를 이어 교장 역할을 맡았다. 롤롬보이에서는 부대표인 리부아 신부가 신학생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함께 산책도 하였다. 주로 데플레슈 신부가 수업을 하였다. 기해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조선에서 온 편지를 통하여 세 선교사(앵베르, 모방, 샤스탕)가 모두 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지만 정식 학교나 정식 교사 없이 임시 교육으로 출발하였기에, 두 조선인 신학생의 교육 환경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잘 따르며 사제로서 가져야 할 지식과 덕목을 열심히 배워 나갔다. 필리핀 롤롬보이에서 피난 생활을 보내고 마카오로 돌아온 뒤에는, 마카오 대표부에서 베르뇌(Berneux) 신부, 메스트르(Maistre) 신부 등에게 교육을 받아 무사히 철학 과정을 마치고, 1841년부터 신학 과정을 시작하였다.
3. 성장통의 극복
1842년 김대건 앞에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리부아 신부는 세실(Cécille) 함장의 요청으로 김대건과 조선 파견 선교사였던 메스트르 신부를 파견하였다. 그는 세실 함장이 이끄는 ‘에리곤호’에 통역 자격으로 승선하여 많은 경험을 쌓고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에리곤호’(프리깃함)와 ‘파보리트호’(기함)는 본디 1차 아편 전쟁 이후 영국과 중국이 난징 조약을 체결할 무렵, 프랑스의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입지를 확보하려고 파견된 함선들이었다. 마침 이 지역을 지나가면서, 조선에도 들러서 통상을 요구하고, 프랑스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세실 씨가 며칠 전에 저에게 비밀리에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세실 씨는 곧 조선으로 가서, 그 나라 왕에게 다른 나라들은 제외하고 프랑스하고만 교역하는 조건으로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도록 제의할 생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 이 일을 위하여 그의 통역으로 우리 조선 학생 중 한 명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조선 학생 중 한 명을 줄 뿐만 아니라 조선 학생의 라틴어 대답을 프랑스어로 옮길 수 있게 선교사도 한 명 주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리부아 신부가 파리 본부에 보낸 편지, 1842년 2월 12일).
그리하여 조선어 통역으로 김대건이, 프랑스어-라틴어 통역으로 메스트르 신부가 함선에 동승하였다. 에리곤호는 2월 15일에 떠나서 2월 20일에 마닐라에 도착하여 생활필수품을 실었다. ‘에리곤호’가 항해하는 동안 김대건은 의사의 처방에 따라 건강을 많이 회복하였고, 메스트르 신부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김대건의 라틴어 편지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이때 마닐라에서 보낸 편지다.
“…… 리부아 대표 신부님께서 메스트르 신부님이 저를 데리고 조선으로 가도록 배정하셨습니다. 이 여행이 비록 험난한 줄 알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사하게 지켜 주시리라 희망하고 있습니다. …… 마카오를 떠난 뒤, 우리는 하느님의 보호로 순조롭게 항해하여 마닐라에 입항하였고, 여기서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장만하여 2월 말쯤에 출발할 예정입니다”(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1842년 2월 28일).
김대건이 탑승하였던 에리곤호는 세실 함장의 눈병으로 말미암아 예상보다 늦게 4월 20일에야 마닐라를 떠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저우산[舟山], 우쑹, 상하이를 거쳐서 조선에 갈 계획이었지만, 세실 함장은 계획을 바꾸어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메스트르신부와 김대건은 하선하여 조선에 들어가고자 먼저 랴오동으로 가기로 하였다. 이들이 상하이에 머물렀을 때, 김대건은 난징 조약의 조인식에 참관자로서 참석하였다. 그는 마카오의 리부아 신부에게 그때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보고하는 편지를 남겼다.
“…… 세실 함장이 약속한 대로 우리는 에리곤호로 조선에 갈 것으로 늘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아주 변하여 조선으로 갈 가망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실 함장은 마닐라로 향하여 출범하였고, 우리는 지금 여행 보따리를 가지고 양쯔강 기슭에 있는 어떤 외교인의 집에 머물러 있습니다. …… 영국군이 난징에 도착하여 그 도시 북쪽에 있는 산(鐘山)에 군대들을 상륙시키고 그 도시를 점령하고자 하였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이 광경을 보고 벌벌 떨면서 영국군에게 강화를 요청하러 사자(使者)를 보냈습니다. 영국군은 이런 사실을 알고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강화 조약(난징 조약)을 맺고 8월 29일에 조인하였습니다. …… 강화 조약의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은 영국에게 배상금 이천일백만 원을 지불할 것, 중국의 항구 여섯 곳을 개항할 것, 영국은 베이징 황제에게 대사를 파견할 것.…… 공경하올 스승님께 무익한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1842년 9월경 상해에서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김대건은 세실 함장을 따라서 상하이의 주요 장소를 둘러보며 난징 조약 조인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는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당시 국제 정세를 비교적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난징 조약의 주요 내용도 스승에게 보고하였다. 비록 배를 타고 조선에 가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그들은 랴오둥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으로 갔다. 그곳에서 조선에 들어갈 방법을 모색하면서, 조선에서 온 밀사들을 만나려고 노력하였다. 김대건은 랴오둥에 머물면서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매우 자세하고 긴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랴오둥 백가점에서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보낸 편지, 1842년 12월 9일)에는 당시의 상황들이 잘 요약 정리되어 있다. 마닐라에서 생활필수품을 싣고 출발한 함선은 순풍을 따라 타이완까지 진입하였지만, 생소한 타이완어를 처음 접한 뒤에 다시 저우산에서 두 달을 머물렀다. 그 다음 양쯔강, 오쑹 등을 거쳐 상하이로 갔다. 거기서 김대건들은 영국군이 도시를 점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난징 시내를 구경하려고 중국 배 한 척을 빌려서 전장부[鎭江府] 진산[金山]까지 다녀왔다. 앞서 말하였듯이 8월 29일 난징 조약 조인식에 참석하였으며, 그곳의 유명한 탑과 보은사(Pao-in-se, 報恩寺)라는 절을 소개하고 자세히 묘사하였다. 김대건은 관광을 마치고 우쑹으로 돌아가면서 최양업과 재회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관광을 끝마치고 우쑹커우[吳淞口]로 돌아오는 길에 고대하던 ‘파보리트호’를 만났습니다. 그 배에서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그의 두 동행인 토마스(최양업)와 범 요한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과 괴로움을 한꺼번에 느꼈습니다. 우리가 모두 모였기에 즐거우면서도 우리의 사정이 더욱 곤란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또한 서글펐습니다.”
그러나 이 재회도 잠시였고, 김대건 일행은 10월 23일 랴오둥 해안에 도착하여 26일에는 백가점에 있는 두씨 성을 가진 요셉 회장 집에 투숙하였고, 최양업은 11월 3일 개주 부근의 양관 교우촌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 무렵 두 요셉 회장 가족 말고 다른 교우들은 신부들을 맞이하는 것을 꺼렸기에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어떤 과부의 집을 세내어 조선으로 갈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연락원을 통해서 그동안 소문으로 들었던 기해박해의 상황을 처음으로 상세하게 들었다.
“‘두 명의 외국인이 삼백 명의 조선인과 함께 잡혀 다 같이 사형을 받았고, 왕의 통역관 유(劉) 아우구스티노가 이 불행한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참수된 뒤 시신이 여섯 조각으로 찢겨 새들의 먹이가 되었으며, 그의 온 가족이 멸족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 밖에도 신부님들이 체포된 것은 거짓 신자가 밀고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연락원이 보고하였습니다. 그 거짓 신자는 신부님들의 얼굴을 익혀 두려고 천주교를 믿고 신부님한테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1842년 12월 9일 서간).
이 소식은 김대건 신학생이 기해박해에 대해서 들은 첫 번째 소식이었다. 실제로 조선에서는 세 명의 선교사가 모두 순교하였고, 150여 명의 순교자가 있었다. 그리고 앵베르 주교가 체포될 때 김순성(김여상 요한)이 배교하여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을 유인하여 고발하였다.
김대건의 1842년 에리곤호 항해는 이렇게 마무리되고, 그는 다시 육로를 통하여 조선에 입국할 기회를 찾아 나섰다. 1842년은 김대건의 신학생 시기에 있어서 ‘성장통의 극복’이라고 할 정도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것은 그 뒤의 활동과 편지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4. 조선 입국을 향한 열망
세실 함장의 통역으로 활동한 김대건은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이 어려워지자 랴오둥(백가점)을 거점으로 하여 다시 육로로 조선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는 1842년 12월 23일에 출발하여 변문 근처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조선 사신들을 만났다. 이때 하느님의 섭리로 그는 김 프란치스코를 만났는데, 그는 바로 김대건이 열다섯 살 나이에 마카오 유학길에 오를 때 동행하였던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 프란치스코는 조선에서 벌어진 기해박해로 선교사들과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의 순교 소식을 알려 주면서, 세 선교사가 남긴 마지막 편지들을 김대건에게 전해 주었다. 또한 그는 국경을 통과하기 몹시 어려우므로, 가난한 나무꾼 행세를 하면서 입국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알려 주었다.
김대건은 그 말을 듣고 조선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단독으로 조선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김 프란치스코가 알려 준 대로 나무꾼 행세를 하려고 도끼를 준비하였으나 중간에 잃어버리고, 겨우 금괴와 은괴를 품에 숨겨 들어갔다. 세관에는 마침 소 떼가 몰려들어 가고 있어서 그 틈을 타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밤새도록 100리를 넘게 걷다가 몸을 녹이려고 조그마한 집에 들어갔는데, 거기 사람들이 김대건을 수상하게 여겨서 한양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백가점 교우촌으로 되돌아왔다. 다시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 변문에 들어왔을 때, 모든 사람이 그의 몰골을 보고 비웃었다. 그럼에도 1월 6일에 무사히 백가점에 도착하여 메스트르 신부와 합류하였고, 다시 3월에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제3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Ferréol) 주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메스트르 신부는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거지로 변장하여 음력 11월 이전에 조선에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 김 프란치스코의 반대 의견에도, 끓어오르는 열정에 이끌려 안드레아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서둘러서 거지가 입을 법한 남루한 옷을 서투르게 바느질하여 옷 안쪽에 은 100테일과 금 40테일을 숨기고 출발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는 북쪽 지역에 저와 함께 있습니다. …… 만일 그가 한 살만 더 많았다면, 아마 그를 올해에 (사제로) 서품하는 일이 옳을 것입니다. 안드레아는 남쪽 지역에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북경으로 간 김 프란치스코가 돌아오는 길에 그를 만나서 저희의 입국 방법을 모색할 것입니다”(페레올 주교의 편지, 1843년 2월 20일).
조선대목구장 임명 소식을 듣고 놀란 페레올 신부는 몽골 지역에서 최양업과 머물면서 조선 입국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양업의 학업 상태를 보고 사제품을 주어도 좋겠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한편 김대건과 함께 있었던 메스트르 신부는 편지에서 안드레아의 성장을 이야기하였다.
“안드레아의 영혼과 육신을 돌보려는 저의 미약한 노력을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셨음을 신부님께 알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그의 체질이 튼튼해지고 또 그간 중단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였던 신학 공부를 그가 이제 다시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랴오둥, 1843년 3월 1일).
육로를 통한 조선 입국은 계속해서 좌절되었다. 큰 박해로 말미암아 조선의 밀사들은 두려워서 감히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할 용기가 없었다. 1843년 말일에는 개주의 양관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의 서품식에 두 신학생이 모두 참석하였다.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강복을 받은 다음, 이듬해 2월 5일 썰매를 타고 출발하여 창춘[長春]에서 훈춘[琿春]으로 넘어가는 이른바 ‘동북로’ 개척을 위한 탐험을 시작하였다. 이 여행에서 쓴 글이 김대건의 아홉 번째 서간에 해당하는 ‘훈춘 기행문’이다. 이 서간은 부제 서품 직후인 1844년 12월 15일에야 작성이 끝나서 페레올 주교에게 보내졌다. 본디 한문으로 쓰였는데, 원문은 유실되고 프랑스어 사본만 남아 있다.
이 서간에는 동북쪽의 험한 길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가는 여행에서 겪었던 일화와 그 지역의 문화와 풍습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음력설(1844년 2월 18일)에 진주문(珍珠門)이라는 지역을 지나면서 겪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 지역에서는 음력설이 되면 무조건 가던 길을 멈추고, 자정에는 깨어서 귀신을 맞이해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설 무렵이 되면 외교인들은 미신에 빠집니다. 객줏집 사람들은 뜬눈으로 첫날 밤을 새웠습니다. 그런데 자정쯤에 제주(祭主)가 무엇인지 모를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제 잠자리인 ‘캉’(khang), 곧 온돌로 가까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 “일어나시오, 귀신들이 가까이 옵니다. 귀신을 마중 나가야 합니다.” “귀신이 가까이 온다니! 어디서 오는 거요? 무슨 귀신들이오?” “그렇소, 귀신들, 큰 귀신들이 와요. 일어나시오. 그들을 마중 나가야 합니다.” “여보, 잠깐 기다려요. 보다시피 나는 지금 잠 귀신에 접하여 있소. 지금 오는 귀신 중에 나를 이만큼 기분 좋게 해 줄 귀신이 또 있소? 제발 내 귀신과 조용히 즐기게 내버려 두시오. 당신이 말하는 그런 귀신들을 나는 모르오.” …… 아마 그는 귀신들에 대한 저의 공경심에 별로 감화를 받지 못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제 여행의 전도가 불길할 것으로 예측하였을 것입니다.
출발한 지 한 달여 만에 훈춘까지 이르러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경원 개시(慶源開市) 장소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조선에서 붙잡혀 온 스무 살가량의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냐는 물음에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를 중국인으로 여기고 목을 자를 테니까요.”라고 대답하였다. 김대건은 국경 사이에 깊은 증오가 놓여 있음을 깨닫고, 국경 너머 조선을 바라보며 한탄하였다.
“저로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거처가 없고 며칠 동안의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저 자신이 중국에서 묵인된 것은 사람들이 저를 중국인으로 여겼기 때문이고, 저는 조국의 땅을 외국인의 자격으로 잠시만 밟아 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아아, 인류 대가족의 공동의 아버지이신 성부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전하신 그의 사랑 안에 모든 자녀를 품으실 날이 언제나 올까요?”
김대건은 출발 전에 페레올 주교가 지시한 대로 여행 중에 그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훈춘 기행문’에 요약해 두었다. 물고기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는 ‘유피타즈’[魚皮韃子]족을 소개하는 한편, 비교적 비옥한 만주 땅에서는 주로 옥수수, 조, 메밀, 밀 등을 수확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토지가 비옥함에도 만주 지역이 황폐한 원인에 대하여 김대건은 청(淸)이 중국 내륙으로 내려오면서 만주족의 주요 인물들을 이주시킴으로써 권력을 분산시켰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만주어가 점차 사라지게 되어, 백 년 뒤쯤에는 과거의 추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아울러 명청 교체기에 숭정제(崇禎帝)의 죽음, 강희제(姜熙齊) 때 일시적인 그리스도교의 부흥, 이후 중국 황제들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이야기하였다.
경원 개시가 열리자 김대건은 일행과 함께 손에는 흰 수건을 들고 허리띠에는 붉은 색깔의 작은 차 주머니를 차고 군중 사이를 걸어 다녔다. 그것이 조선 밀사들과 약속한 표시였다. 한참 기다리다가 한(韓)씨 성을 가진 조선 신자(한 베드로)를 만나서 조심스럽게 여행 목적을 이야기하였다. 한 씨는 육로를 통한 조선 입국은 어차피 국경을 넘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므로, 비교적 거리가 짧은 변문 쪽이 덜 위험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 씨는 헤어질 때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쉬워하였는데, 주위의 시선 때문에 마음 편하게 드러낼 수 없었다. 그리고 한 씨와 마지막 헤어짐을 김대건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리가 훈춘으로 돌아가려 하였을 때 조선 교우들이 다시 우리한테로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작별할 결심을 할 수가 없어서 우리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제 동행은 그들에게 인사를 하려고 말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포졸들이 우리를 장사 일이 아니라 다른 일로 온 사람으로 의심할까 두려워 그에게 다시 말에 오르라는 신호를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조선 교회의 수호천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기도에 우리를 의탁하며 두만강을 건너 달단 지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본디 한문으로 쓰였다는 이 ‘훈춘 기행문’에서 순교자에 대한 김대건의 신심을 엿볼 수 있다. 김대건은 자신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유학을 보낸 모방 신부와 동료 최양업 신학생의 부모,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의 순교 소식을 들은 뒤 줄곧 순교자들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는 조선 국경을 바라보며 경원(慶源)에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때 조선 교회의 수호천사들을 기억하면서 순교자들의 전구를 청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소팔가자 교우촌에서 김대건의 이 훈춘 여행을 언급하고 있다. “지난 겨울에 저는 안드레아 신학생에게 중국인 신자 한 명을 대동하여 조선의 북쪽 지방 전체를 탐색하라고 보냈습니다. …… 변문(Pien-Men, 邊門)을 통한 조선 입국이 불가능할 경우, 모험이 되겠지만 북쪽 길로 입국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추신) …… 만일 금년 말에 조선에 들어가게 되면, 저는 안드레아를 데리고 갈 작정입니다. 그때쯤 그는 안드레아 신부가 되어 있겠지요. 삼위일체 대축일에 저는 그 청년들을 차부제품으로 올리려고 합니다”(페레올 주교, 1844년 5월 18일). 위의 내용 에서 변문은 가장 일반적인 사행(使行) 길인 압록강을 건너는 길을 가리킨다. 그리고 북쪽 길은 김대건이 훈춘을 통하여 경원까지 들어갔던 험한 길, 곧 ‘동북로’를 가리킨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는 선교지에 들어가는 목적이 급선무이므로, 최양업에게 먼저 사제품을 주어야겠다는 처음 생각을 접고, 김대건에게 사제품을 주어 같이 조선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두 신학생은 그해 겨울, 늦어도 12월 10일 이전에 부제품을 받았다.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과 김대건을 부제로 서품하였지만, 한 살이 모자라서 사제품은 주지 못하였다. 그는 서품식이 끝나자 바로 김대건 부제를 데리고 변문을 향하여 떠났다. 페레올 주교는 변문 가까이에서 김 프란치스코를 만났을 때, 마음이 기뻐서 두근거렸다고 고백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일곱 명의 신자 가운데 네 사람은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여, 페레올 주교에게 입힐 조선 옷이 없다고 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어쩔 수 없이 김대건 부제만 먼저 입국시키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페레올 주교 서간, 마카오, 1845년 5월 25일 참조).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의 강복을 받고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마침내 하느님의 섭리는 김대건 부제를 통하여 선교사들이 그토록 개척하고자 하였던 해로를 열게 하였다.
5. 라파엘호의 선장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에 육로로 한양에 도착하여 돌우물골[石井洞]에 머물렀다. 그는 그동안 쌓인 긴장과 여독으로 보름 동안 중병을 앓았다. 그는 두 명의 신학생을 지도하면서 그간의 경과를 정리한 열 번째 서간을 작성하여 리부아 신부에게 보냈다.
“사방에 눈이 깊이 쌓여 산촌이 모두 하얗고 싸늘한데 밤이 되기를 기다리자니 너무나 지루하여 묵주 기도를 수없이 거듭하였습니다. 해가 지고 천지가 어둠에 잠겼을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그곳(의주의 어느 산골짜기)을 떠나 읍내로 가면서, 발소리마저 없애려고 신발을 벗고 걸어갔습니다. 강들을 건너고 길도 아닌 험한 곳을 달려갔습니다. …… 제가 조선에 돌아왔다는 말을 저의 어머님(고 우르술라)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자들에게 엄중히 당부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미 우리가 마카오로 간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우리가 귀국하는 대로 즉시 잡아 죽이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이제 중국 강남성(江南省)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참입니다. 그러나 신자 뱃사공들이 미리 겁에 질릴까 염려되어 어디로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 다만 제가 항해술이 능통한 자로 그들을 설득시켰을 따름입니다. ……(추신)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에 걸려 죽어 가고 있으니,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 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열 번째 서간, 1845년 3월 27일).
김대건 부제는 힘겹게 조선의 밀사를 만나 발소리까지 조심하느라 눈길에 신발을 벗고 걷는 등 천신만고 끝에 한양 돌우물골에 마련된 집에 도착하였다. 그는 여독으로 크게 앓은 뒤, 간신히 기운을 회복하여 바닷길을 통한 입국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8년 동안 헤어졌던 어머니에게조차 행여나 위험이 있을까 염려하여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에서 두창(痘瘡)으로 알려진 천연두는 정약용의 마과회통에 인두종법(人痘種法)에 따른 예방법이 소개되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이 병으로 고통받고 있었기에 그는 스승에게 천연두의 치료와 퇴치 방법을 요청하였다.
김대건 부제는 4월 6일과 7일 연달아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 리부아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라틴어 서간들은 대부분 예수, 마리아, 요셉을 뜻하는 ‘J.M.J’로 시작하는데, 열한 번째 서간 첫머리에만 유일하게 ‘A.M.D.G’(ad majorem Dei gloriam,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예수회 선교의 구호를 사용하였다. 아마 선교사로서 각오를 다짐하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편지에서 기해박해 때 세 선교사가 신자들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 신자들을 위하여 자수하였음을 명확히 밝히고, 그들의 순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랐다고 강조하였다.
“신부님들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랐음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인 유다에 의해서 넘겨지셨고, 신부님들은 그들의 제자인 신자에 의하여 넘겨졌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죽음을 향하여 가셨고, 신부님들은 주교님께 순종하여 죽으러 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떠나가셨고, 신부님들은 최후의 만찬으로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신을 죽음에 내맡기셨습니다. 이처럼 신부님들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신을 최고의 형벌에 내맡겼습니다”(열한 번째 서간, 1845년 4월 6일).
바로 다음날 김대건 부제는 다시 리부아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기해박해의 정치적 배경인 벽파와 시파를 언급하면서, 박해의 소강기인 현재 조선의 신자 수가 1만여 명쯤 되리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중국) 강남으로 출발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자기 몸이 병약하다고 한탄하였다. 그럼에도 김대건 부제는 열네 살의 학생 두 명을 가르치며, 또 다른 두 아이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고 보고하면서 조선 종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품들을 보냈다. 그 안에는 선교사들의 유해와 그 유명한 ‘조선 전도’(朝鮮全圖)가 포함되어 있었다.
김대건 부제는 4월 30일 현석문 등 열한 명의 사공과 함께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5월 28일 우쑹커우를 거쳐 6월 4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가 상하이에서 다시 조선에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마지막 보고를 하는 7월 23일 서간(열여섯 번째 서간)에는 항해 내용과 조선에서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이는 『기해일기』의 일부 내용이면서 동시에 조선 교회의 기원을 다룬 초기 교회사에 해당한다. 형벌 그림의 삽화가 들어가 있는 대목이 바로 그 보고서다. 이 서간에는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상하이에 도착한 경위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교우들은 바다를 보고 아주 놀라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서로 물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어디로 가느냐고 감히 묻지를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는 일에 누구든 질문하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입니다. …… 교우들은 사흘 동안 먹지 못하여 극도로 쇠약해졌고 또 삶에 대하여 절망하고 슬피 울며 ‘이제는 끝장이다. 살아날 수 없다.’라고들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성모님의 기적의 상본을 보이면서 ‘겁내지 마십시오.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모님께서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 저도 신병 중이었지만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으면서 일을 하여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제가 으뜸 사공으로 채용한, 이미 예비 신자인 외교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는 김대건 부제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작은 배로 바다를 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면서도 신자들을 설득하여 상하이로 가고자 출항하였다. 폭풍우 속에서 상본 하나에 의지하여 계속 항해할 수 있었던 것은 신덕(信德)과 용덕(勇德)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 속에서 예비 신자에게 세례를 주었다. 중국 강남 해안에 닿았으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 산둥[山東] 배 한 척을 만나 협상 끝에 상하이까지 매달려 갔다. 우쑹에 도착하여 영국 영사관을 찾아 페레올 주교에게 알리는 한편, 예수회의 고틀랑(Gottleland)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고틀랑 신부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김 안드레아가 조선 정크로 산둥의 중국 정크에 끌려 어제 상하이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조선 배에 열두 명(부제 포함)이 있었는데 모두 교우입니다. …… 김 안드레아는 관리들을 위협할 정도로 대담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페레올 주교님께서 미리 기별해 놓은 영국 영사가 안드레아를 크게 환영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더러 그를 기꺼이 보호하겠다는 말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페레올 주교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이곳에 머무를 것입니다”(리부아 신부에게 보내는 서간, 1845년 5월 25일).
고틀랑 신부는 김대건 부제의 담대함에 놀랐다. 그리고 예수회 장상들에게 보내는 또 다른 편지에서 그가 타고 온 배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 그 배가 어떤 배였는지 아십니까? 우리 해군의 말처럼 그 배는 정말로 너절한 엉터리 배였습니다. 그것은 바다를 건너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내지의 강을 건너려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젊은 부제는 어느 날 교우들 가운데 가장 헌신적인 사람들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바다로 간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배에 같이 올라탔습니다. 이 ‘급조된 선장’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항해에 무지한 선원들과 함께 자신의 빈약한 작은 배를 타고 대양으로 나갔습니다”(「전교회지」 19권, 1845년 7월 8일).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고틀랑 신부의 서간에서는 조선 신자들의 고해성사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용감한 조선인들은 그들이 간절하게 원하던 고해부터 해야 하였습니다. …… 안드레아는 그들의 양심의 가책을 가라앉히고, 그리고 신학적인 공부를 조금 하였을 뿐인데도 놀라우리만큼 예민하게 그들의 생각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저는 전날 밤에 시작하였는데, 거의 미사를 드릴 시간이 되어서야 끝냈습니다”(『경향잡지』, 2001년 8월 호).
기해박해 이후 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들은 김대건 부제부터 시작하여, 그의 통역으로 밤새 고해성사를 받았다. 고틀랑 신부의 배려로 조선 신자들은 성사를 받고 상하이에 도착하여 배를 수리하면서 8월 17일 진자샹[金家巷]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 부제의 사제 서품식과 8월 24일 헝탕[橫塘] 신학교에서 봉헌된 김 신부의 첫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8월 31일 주일에 라파엘호를 출범시켰다. 페레올 주교는 처음 그 배를 보았을 때 소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에게 천주님의 특별한 보호가 꼭 필요합니다. 조선에서 초라한 배를 처음 보았을 때 저는 무척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나무토막을 타고 어떻게 100리외(lieue, 약 400km) 이상의 바다를 건너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파도에 맞설 각오가 되어 있는 조선인들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정말 감탄할 정도입니다”(1845년 8월 28일).
이러한 소감은 함께 조선으로 출발하였던 다블뤼 신부에게도 보이는데, 그들은 다른 중국 배를 구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작은 배를 개량하여 ‘프리깃함’이라 부르면서,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 바로 여행자와 치유의 수호천사인 라파엘 대천사를 그 배의 주보(主保)로 모셨기 때문이다.
라파엘호는 8월 31일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9월 28일 제주도 인근 섬에 표착하였다가 10월 12일 강경 부근의 한 포구에 도착하였다. 항해에서 겪은 어려움은 강경에서 보낸 페레올 주교의 10월 29일 서간에 잘 나타나 있다. 키가 부러지고 돛이 찢겨 나가면서, 배에 물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에 주위의 배에 조난 신고를 보냈지만, 누구도 구조해 주지 않았다. 부러진 돛대를 다시 세우고, 부서진 키를 새로 만들어 달면서 겨우겨우 제주도 인근 섬에 닿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만일 그대로 한양으로 들어갔더라면, 그 배가 이미 알려졌기에 곧바로 발각되었을 것이었다.
6. 김대건의 사제 생활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를 한양에 마련한 집으로 모신 뒤, 11월 20일에 리부아 신부에게 도착을 알리는 한편, 그해 겨울에 육로를 통하여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 짧은 서간이 감옥에 갇히기 전 자유의 몸으로 쓴 유일한 편지(열여덟 번째 서간, 1845년 11월 20일)였다.
김대건 신부의 성무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페레올 주교에게 가장 급선무는 조선에 선교사를 영입하는 일이었기에, 유일하게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김대건 신부는 거기에 매진하였다. 그의 성무 활동을 알 수 있는 기록은 김대건 순교자의 시복 재판 때 수집한 증언 기록뿐이다.
김대건 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무쇠막[水鐵幕, 서강 수철막, 마포구 신수동] 심사민(沈士民)의 집, 서빙고(용산구 서빙고동), 미나리골(서대문구 미근동), 양지 은이[隱里] 등이다. 기해-병오 순교자 제93회 차 시복 재판에서 원 마리아의 증언에 의하면 “죄인이 영세와 견진성사까지 받았사오니, 그때 신부 나이 이십오 세이시고 키 크시며 얼굴이 잘나시고 성품이 씩씩하여 끔찍이 장성하시더라.” 하고 기록되어 있다. 이 베드로 또한 제97회 차 시복 재판에서 “…… 신품에 올라 조선으로 돌아와 1년 동안에 경향(京鄕)으로 전교하실 새 죄인이 성사 받을 때 한번 뵈옵고 도리를 강론하여 모든 교우를 훈회(訓誨)하심이 지극히 은근하오며 성사도 부지런히 주신지라.” 하고 증언하였다. 그의 전례 생활에 대해서도 잘 알려진 것이 없지만, 사제로서 단 한 번 맞이한 부활 대축일을 은이 상뜸이 곧 골배 마실 교우촌에서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보낸 것이 드러난다. 제68회 차에 임 루시아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병오년에 신부가 응이 상뜸이 모친 댁에 계시다가 …… 모친이 부활 첨례나 본 후까지 기다리기를 청하매 부활 첨례 보시고 1부 첨례날에 떠나 서울 가서 길 차리시어 배 타고 시골 가시다가 잡혀 서울로 올라오신지라. 옥에 계실 때 모든 교우에게 편지 한 장을 써 보내셨더니 죄인도 보았삽고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여기서 김대건 신부가 사제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부활 대축일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고 바로 다음날 서해를 통한 입국로를 개척하려고 떠났으며, 일을 마치기 전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쓴 한글 서간이 교우들에게 회람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같은 해 남부 지방에서 성무 활동을 한창 펼치기 시작한 다블뤼 신부의 기록에서 당시의 전례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공소 순방 때 저의 생활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궁금하시지요. …… 교우의 집을 경당으로 사용하는데, 벽을 터서 방 두 칸을 한 칸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제대 주위를 전부 흰 종이로 도배합니다. 제대는 받침다리 네 개 위에 나무판을 얹어 놓은 형태입니다. …… 우리 교우들이 기도할 때면, 특히 주일에는 능력껏 각자의 집에 작은 기도실을 마련합니다. …… 신부가 교우촌을 방문할 때, 이따금 축복한 작은 초에 불을 붙여 놓기도 있습니다. …… 그곳은 경당이나 다름없습니다. …… 성주간 동안 대략 그러한 방식으로 예식을 거행해야 하였습니다. 물론 무덤 제대(수난 감실)도 없었고, 저는 상황에 맞게 십자가 경배 예절을 하고, 성토요일에는 모든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한 자 길이의 아름다운 파스카 초를 준비시키고, 향 덩어리가 없어서 제가 나무의 씨앗으로 그것을 만들어서 모든 예식을 잘 치렀습니다. 예식이 끝나고 제 아름다운 파스카 초를 가져왔는데 보름이 지나서 초가 다 닳아 살아 있는 이들의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으니 제게는 더 이상 파스카 초가 없습니다”(부모님에게 보내는 다블뤼 신부의 서간, 1846년 8월 27일).
조선에서 21년 동안 사목한 다블뤼 신부는 고국의 부모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그해의 부활 전례를 언급하면서, 파스카 초가 50일이 아니라 보름 만에 닳아서 전례법의 규정을 지키지 못한다고 하소연하였다. 어쩌면 김대건 신부도 어머니와 함께 지낸 부활 대축일에 화려하지는 않아도 파스카 초를 밝히며 고요히 미사를 봉헌했을지도 모른다.
7. 체포와 순교
김대건 신부는 4월 13일 은이 공소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한양으로 출발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다음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마포에서 서해로 이동하였다. 그는 백령도 인근 순위도 항구를 거점으로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물품을 전달하다가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었다. 6월 5일에 체포되어 9월 16일에 순교하였으니, 대략 3개월 넘게 심문을 받고 옥살이를 한 셈이다.
그의 체포 경위에 대해서는 페레올 주교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비교적 상세하게 나타난다. 중국 배에 접촉하여 조선 지도 2장 등 필요한 편지를 전달하고 순위 항구로 돌아왔을 때, 상품으로 팔려고 사다가 말리던 생선이 채 마르지 않았기에 체류 기간이 길어졌다. 그 지역 관장(등산 첨사)이 중국 배들을 쫓아내려고 김대건 신부가 쓰는 배를 징발하려고 하자, 김대건 신부는 양반 행세를 하며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사공 한 명이 끌려가 심문을 받던 과정에서 큰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포졸들은 작당 모의를 하여 밤을 틈타 김대건 신부의 머리털을 뽑고 옷을 벗기면서 체포해 갔다.
등산진에서 한 차례 심문받은 김대건 신부는 해주 감영과 한양의 좌·우포도청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심문받은 끝에 군문효수 형이 선고되어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순교의 길을 떠났다. 이 마지막 3개월 동안에 이루어진 진술과 서간은 그의 순교 영성을 잘 드러내 준다.
처음 해주 감영에서 심문을 받을 때 김대건은 자신을 중국 마카오에서 온 우대건(于大建)이며 천주교 신자로서 유람을 취미로 하여 조선에 벙어리 행세를 하며 들어왔다고 진술하였다. 이는 아마도 애초에 잡힐 것을 대비하여 미리 그의 측근들에게 일러 둔 각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배의 주인인 임성룡(임치백 요셉 성인의 아들)이 자세하게 고발하면서 서서히 정체가 탄로나기 시작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자신을 중국인으로 밝혔기에 조정에서는 더 상세히 심문하고자 한양으로 압송하라고 지시하였다.
해주 감영에서 이루어진 네 번째 문초에서 김대건의 확고한 의지를 알 수 있다.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인간이면 면할 수 없는 것인데, 이제 천주를 위하여 죽게 되었으니 도리어 이것은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묻고 내일 또 묻는다 하여도 오직 마땅히 이와 같을 뿐이니, 때리든 죽이든 그와 같을 뿐입니다. 빨리 때려 빨리 죽이십시오.”
김대건은 한양 포도청에서 모두 40여 차례에 걸쳐 진술하였다. 여섯 번째 진술 기록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열다섯 나이로 유학길에 오른 김대건임을 분명히 밝히고, 한양의 돌우물골에 집을 얻어 살고 있은 지 4년이 되었다고 진술하였다(『일성록』」 병오 5월 30일). 아마도 김대건은 체포된 지 열여드레가 지났으므로 선교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충분히 피신하였으리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활 첨례를 함께 지낸 어머니의 생사조차 모른다고 진술하였으며, 다른 교우들이나 선교사들에 대한 언급을 피하였다.
그의 심문 과정에서 장연 현감이 중국 배들을 탐문하여 김대건 신부가 전해 준 편지와 지도를 압수해서 한양으로 보냈다. 그 가운데 서양 말로 쓰인 편지가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외국인 선교사가 다시 들어왔는지 의심하였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에게 서양 언문을 써보라고 지시하였다. 포도청에서는 글씨체를 문제 삼았지만, 김대건은 철필이 아니라 새깃으로 썼기 때문에 조금 달라졌을 뿐, 여러 필체로 쓸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감옥에서 서양 지도를 베끼고 번역하면서, 담대하게 심문을 견디고 있었다. 감옥에서 남긴 김대건 신부의 서간은 모두 3통이다. 이 가운데 7월 30일에 한지에 쓴 스승 신부들과 최양업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 편지(열아홉 번째 서간)가 가장 확실한 친필 서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스무 번째 서간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내는 마지막 보고로, 어머니 고 우르술라를 부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서간은 현재 프랑스어 사본만 남아 있는데, 아마도 페레올 주교가 개인적으로 보관하려고 가지고 있다가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한글로 쓰인 “김대건 신부 마지막 회유”의 필사본이 전해진다.
김대건의 스승 신부들은 첫 스승이자 마카오에 도착하였을 때 극동 대표부의 대표였던 르그레주아 신부, 현재 대표인 리부아 신부, 함께 에리곤호를 타고 항해한 메스트르 신부, 그리고 페레올 주교가 부주교로 지목하였던 베르뇌 신부였다. 김대건 신부는 열아홉 번째 서간에서, 자신이 백령도 인근에서 체포되었으며, 스승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모두 압수된 데다가, 함께 조선에 입국한 주교님과 신부님이 붙잡힐까 두렵다고 하였다. 스승 한 명 한 명에게 인사하면서 동료 최양업에게도 마지막 안부를 전하였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토마스,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도록 부탁하네.”
8월 26일에 페레올 주교에게 써 보낸 마지막 보고서에는 감옥 생활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였다.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하였지만 강하게 거부하였고, 압수한 편지를 가지고 와서 조선말로 번역하라고 하였을 때, 조선 선교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설명하였다고 적었다. 또한 감옥에서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 한 장을 번역하여 채색한 지도 두 장을 만들어 주었고, 현재는 작은 지리 개설서를 편찬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마지막 보고서는 다시 한번 자신의 어머니를 장상 주교에게 부탁하는 대목으로 끝마치고 있다. “제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10년이 지나 며칠 동안 아들을 볼 수 있었으나 다시 곧 아들과 헤어져야 하였습니다. 부디 슬퍼하실 어머니를 위로해 주십시오. …… 다블뤼 신부님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천국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포로이며 사제인 김 안드레아”. 페레올 주교는 자신이 서품한 조선의 첫 사제 김대건 순교자의 유언에 따라 고 우르술라를 잘 돌보았다. 고 우르술라는 김대건 신부 옆에 묻어 달라고 요청하여 나중에 미리내에 안장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수리치골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11월 3일 서간에서 김대건의 순교 장면을 매우 자세히 적었다.
“등 뒤로 두 손이 묶인 채 들것에 앉은 김대건 신부는 모여든 구경꾼들 사이로 승리를 거두는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 관장은 김대건 신부에게 선고문을 읽어 주었는데, 선고문의 요지는 ‘외국인들과 교섭을 가졌기 때문에, 죄인을 사형에 처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크게 외쳤습니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했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어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합니다. 죽은 다음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면 여러분도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님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 순교자는 전혀 냉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소.’ …… 그의 머리는 여덟 번째 칼을 맞고야 떨어졌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1846년 9월 16일 순교한 뒤 관례에 따라 3일 동안 형장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 뒤에 여러 교우들이 자금과 힘을 모아 비밀리에 왜고개(瓦峴,瓦署峴, 문패부리)에 임시로 안장하였다가 이민식 빈첸시오 등이 미리내로 옮겨 모셨다. 1901년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시복식 전후와 시성식 전후로 여러 곳에 분배되었다. 현재 유해가 모셔져 있는 대표적인 곳은 절두산 순교 성지와 미리내 성지, 가톨릭 대학교 성신 교정(혜화동)이다.
김대건 신부의 짧은 생애를 구분하면 열다섯 소년기까지 교우촌 생활, 8년의 유학 생활에 이어 부제품까지 포함한 1년 10개월의 성직 생활로 요약된다. 그는 신학생으로 발탁되기까지 선조에게 이어받은 신앙의 뿌리를 사제로 승화시켜 사 대째 순교 신앙을 이어 갔으며, 고된 유학 생활 가운데 ‘에리곤호’의 여행을 기점으로 사제로서 지녀야 할 학식 이외에 용덕과 신덕의 은총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부제 시절부터 선교사 입국로 개척에 헌신하여 바닷길을 열고 ‘조선 전도’를 작성하였으며, 순교로 한목숨을 오롯이 한국 교회의 제단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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