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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안동독립기념관의 설립 경위
이장희 추천 0 조회 49 15.10.30 17: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동독립기념관 광복게시판에 있는자료 옮김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내앞 마을에 설립하게 된 내력을 밝히고,

이 글로써 한국 근대사의 일부분인 한국독립운동사의 고증(考證)의 자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1900년대 초 우리나라는 중앙정부의 조직이 흔들리고 국민의 생활문제가 안정되지 못하였

으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토와 국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온 국민은 나라 잃음의

부끄러움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국내외에서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권회복의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특히 안동의 내앞 마을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몸 바친 수많은 인물과 독립운동

의 지도자가 배출된 곳이다.



1. 유림들의 회합 장소인 내앞 마을의 의성김씨 종택.

독립운동기념관이 설립된 안동 내앞 마을의 입지적인 조건을 생각해보자.

내앞 마을은 의성김씨의 중흥 대조인 김 진(進)과 그 부친인 승지 김예범이 터를 잡고 부락을

이룬 후 500년의 역사를 가진 의성김씨의 집성촌이다.   중흥 대조인 김 진은 자제와 같이 6부자

(父子)가 모두 대소과의 과거에 합격하였다. 대를 이은 많은 후손들은 학덕이 높고 국가 정치의

발전에 공적을 쌓아서 전통 깊은 선비의 마을로서 특히 안동 유림의 중심으로 명성이 높았다.


내앞 마을의 의성김씨 종택은 한국의 전통가옥이 아닌 특수한 건물로서 대한민국 보물 4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김 진의 자제 학봉 김성일이 중국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 정승의 저택

을 모방하여 건축한 저택이라고 한다.

 

이 저택에서 영남 유림 각성(姓)의 선각자들이 수시로 모여서 선현(先賢)들의 공적과 국가의

정치와 사회문제 등을 논의하는 곳으로 되어있었다. 우리나라의 문화 계몽과 독립운동의 기본이

되는 발의도 이 종택 유림의 모임에서 처음 이루어졌다고 한다.


1907년 경 부터는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짐을 애석하게 여긴 안동 유림들의 모임이 잦았다.

의성김씨 김형칠, 의성김씨 김후병, 의성김씨 김동삼, 진주하씨 하중환 등 같은 년배와 

전주류씨 류인식, 고성이씨 이상룡 등은 모임의 중심 애국지사였다. 그 해 봄날에는 종택의

모임에서 국민을 계몽하고 애국지사를 양성하는 교육을 목적으로 협동학교를 설립할 것을

발의하고 추진 중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일부 유림의 반대로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


김후병, 하중환, 류인식 등 설립주도자들은 호계서원의 원장 종손 김병식을 예방하여 협동학교의

설립에 반대하는 일부 유림을 설득하여 동참하도록 힘써 달라는 것을 간청하였다.  의성김씨 종손인

호계서원 원장 김병식은 협동학교의 설립을 반대하는 일부 유림은 물론 안동의 유림 전체가 협력하

도록 설득하여 협동학교가 개교하게 되었으며 호계서원의 재산 일부를 협동학교의 교육에 충당하도

록 기증까지 하였다.


2. 애국지사들을 배출한 협동학교.

1907년 설립주도자들과 안동 유림의 협력으로 내앞 마을에 협동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다.

협동학교 교무실은 의성 김씨의 후손들이 한문교육을 받으며 학덕을 닦는 가산서당(可山書堂)으로

정하고, 교실은 의성 김씨 종택의 대청과 백하 김대락의 저택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초대 교장은 종손인 김병식이 추대되었고, 교감은 박태훈, 교원은 내앞 마을의 선비와 이관직, 박진서,

김진황 등 경향 각지의 애국지사들이 초청되어 취임했다.

학교가 개교되자 안동과 청송, 영덕 등 경북 북부지역에서 애국심과 교육열이 강한 선각자의 학생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교육 내용은 당시 다른 사립학교와 달리 항일의식 고취와 애국지사를 양성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학생들이 사용하던 교과서를 보면 초등학교가 아닌 중등학교의 교육과정으로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시작된 중등교육기관이었다.

 

교사들은 일본의 침략주의를 배격하고 항일하는 교육을 열성적으로 하였으므로 일본 헌병들이 수시로

학생들의 교육을 방해하고 심지어는 교사를 살해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종손인 김형칠 종형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종택 대청 앞쪽 벽에 핏자국이 있는데 이것은 교사가 수업 중에 일본 헌병에게 피습

되어 칼에 찔려 흘린 피의 흔적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 헌병에 의해 3명의 교사가 시해된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든 학생과 내앞 마을 사람들에게

항일정신과 애국사상을 더욱더 북돋아 주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10년의 경술국치(國恥) 후, 1911년 3월 30일에 제1회 졸업생을 어렵게 배출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의 계속적인 탄압과 방해 공작으로 협동학교는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어쩔수 없이

그 해 가을에 류동태 교사의 주도로 전주류씨 정재종택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집요한 일본의 탄압으로

결국은 학교의 명맥이 이어가지 못하고 교사들과 졸업생과 재학생의 대부분이 만주 지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만주로 망명한 협동학교의 교사 이관식, 교사 일송 김동삼과 마을의 백하 김대락, 일산 김성로, 김병만,

김원식, 김병대, 김창로 등의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석주 이상룡 등과 합력하여 만주의 신흥학교와 부민단

을 운영하며 대한독립협회와 대한청년회와 국민회의와 임시정부 등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사건 당시에도 김병문, 김주로, 김후식 등 많은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였고 왜경에 체포

되어 옥살이의 고초를 겪었다.



3. 안동독립기념관의 설립의 동기

안동독립기념관의 터는 옛날 선조들의 한문학과 예절교육으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를 양성한 가산서당

이 자리 잡은 곳이다. 그 뒤를 이어 우리나라의 수많은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협동학교가 설립 운영

되었던 곳이었으며, 조국 광복 후 천전국민학교가 개교되어 애국애족의 전통이 이어진 성지이다.


그러나 농촌 인구의 감소로 학생수가 적어 천전국민학교가 폐교되어 애국 애족교육의 전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때 경상북도교육위원회 의장이며 의성김씨 천상문화보존회 회장인 평생을 교육에 몸 바친 김형근의 발의가 있었다.

애국 애족심을 고취시키고 선조들의 독립운동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내앞 마을의 협동학교를 영원히 기념하는

구국기념관(救國記念官)을 설립하기로 하고 추진하였다.

 

그 뒤 의성김씨 천상문화보존회가 김호면 회장으로 인계되어 서울 거주의 종친들과 내앞 마을의 종친들이 연계

하면서 계속 추진되어 왔다. 구국기념관(救國記念官)의 추진 계기가 원동력이 되어 안동독립기념관이 내앞 마을

의 천전국민학교 자리에 설립하게 된 동기이다.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김휘동 시장과 한국독립기념관 연구원장이며 안동대교수인 김희곤박사의 열성적인 협조

로 안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이 때 “구국기념관”이 안동독립운동기념관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아! 어떻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907년 협동학교가 개교되고 1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 성지에 다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개관되다니!

97세의 늙은이로서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내앞 땅에 그토록 염원하던 안동독립기념관이 개관하게 됨을 보니

기쁘고 경하하는 심정으로 가슴이 메어집니다.


김휘동 안동시장의 안동의 정신문화 발전에 열성적인 행정력과 안동대학 교육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연구

에 큰 공적을 쌓은 김희곤 박사의 숭고한 학식과 덕망에 심심한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기념관의 설립에 정성을

바친 김호면 천상문화보존회 회장과 서울 거주 종친들의 애족심을 치하하고 기념관의 설립에 협력한 모든 분들

에게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내앞 마을의 의성김씨 종친을 비롯하여 안동시민과 전 국민이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의 설립 정신을 명심

하고 유지 발전에 정성을 바칠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2007년 8월   일

                                                                                                                                    김  형  근

                                                                 


* 필자는 협동학교 제1회 졸업생인 김병대의 장남이며 협동학교의 설립자인 초대교장 김병식의 조카이다. 

초. 중. 고등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고 경상북도교육위원을 2차 연임하면서 평생을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다.


4. 청계공(김진) 후손 독립유공자 명부

안동 내앞 마을의 의성김씨는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국가 발전에

 많은 분들이 참여하였다.

 

순번

성명

생년

공적

포상훈격

1

김흥락

1827

  의병활동

  애족장

2

김대락

1845

  중국 동삼성에서 활동

  애족장

3

김병식

1856

  3.1운동

  애족장

4

김병동

1858

  의병활동

  애국장

5

김익모

1858

  국내에서 항일운동

  대통령 표창

6

김만식

1867

  만주에서 독립운동

  애국장

7

김세동

1870

  국내에서 항일운동

  애국장

8

김후병

1874

  국내에서 항일운동

  애국장

9

김현동

1876

  군자금 모금

  애족장

10

김동삼

1878

  통의부에서 활동

  대통령장

11

김연환

1879

  군자금 모금

  애족장

12

김규식

1880

  만주에서 독립운동

  애국장

13

김동만

1880

  한족회에서 활동

  애국장

14

김성로

1885

  군자금 모금

  애국장

15

김규헌

1886

  군자금 모금

  애족장

16

김용환

1887

  국내에 항일운동

  애족장

17

김정식

1888

  만주에서 독립운동

  애족장

18

김장식

1889

  만주에서 독립운동

  애국장

19

김원식

1890

  만주 정의부에서 활동

  독립장

20

김증로

1894

  3.1운동

  애족장

21

김성로

1896

  독립군에 활동

  애국장

22

김화식

1900

  제2경북유림단에서 활동

  애족장

23

김홍구

1927

  학생운동

  대통령표창

24

김후식

 

  신간회에서j 활동

  대통령표창

25

김회락

 

  국내에서 항일운동

  애국장

26

김  락

 

  3.1운동

  애족장

27

김진악

 

  의병 활동

  건국포장

28

김주로

 

  군자금 모금

  건국포장

29

김병문

 

  군자금 모금

  건국포장

30

김시태

 

  군자금 모금

  건국포장

31

김도주

 

  3.1운동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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