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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6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마태오 19,16-22
형제들끼리 “너는 내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한 부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영원한 생명에 관해 묻습니다.
그런데 묻는 방식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그는 선한 일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은 ‘사랑’에 관한 율법입니다.
그가 ‘행동’에 관해 물었기에, ‘행동 지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행동으로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완전함을 추구하는 그 사람에게 가진 것을 팔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팔아야 합니다.
돈에 대한 욕구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기에, 그리스도를 따름은 곧 욕구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율법은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그분의 법이 내 안에서 실현되게 만들어야 완성됩니다.
자기 힘만으로 지키려는 율법은 항상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을 행동으로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인의 힘으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한계에 부딪힙니다.
왜냐하면, 자기 욕구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가 입에 뼈다귀를 물고 주인이 주는 밥을 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소유욕이 살아있는데 내어주려고 사랑하려 하니, 결국 이도 저도 안 됩니다.
영화 ‘싱글라이더’(2017)는 일밖에 모르던 한 가장이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삶을 무겁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증권회사의 지점장 강재훈은 회사가 부실채권을 팔아 피해자가 많이 생기고 회사가 와해하자 죄책감과 상실감을 느낍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와서 서재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호주로 유학 보낸 아내와 아들의 집 주소를 손에 적고는 술을 마십니다.
그러다 아내와 아들이 보고 싶어 무작정 호주로 떠납니다.
호주에 도착하고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찾아가지만, 집에 아무도 없는 걸 보고 슬쩍 들어가 살펴봅니다.
그러다 아내와 아들이 돌아오는 소리에 급히 집을 나가서 목격한 건 아내 이수진과 아들, 옆집 아저씨 크리스와 그의 딸 일행이 가족처럼 들어와 놀고 저녁을 먹는 모습입니다.
수진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고 그만두었다던 바이올린도 다시 연주를 시작한 상태입니다.
다음 날 그는 아내의 애인으로 의심되는 크리스를 미행합니다.
계속 미행하다가 크리스가 한 병원의 병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보고 본인도 들어가는데 거기에는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있는 크리스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재훈은 복잡한 표정으로 병원을 나오고 다시 집으로 간 재훈은 수진이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려고 오디션을 준비하는 걸 몰래 지켜보고 아내가 주체적인 삶을 찾은 모습을 봅니다.
지금까지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 때문에 아주 오스트리아에 남기로 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수진이 오케스트라 면접을 보는 동안 재훈은 수진의 집에 돌아와서는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동네 노인의 목격에 의하면 재훈의 아들이 통증으로 쓰러져 크리스가 들어와 발견하고 재훈의 아들을 안고 맨발로 뛰어서 병원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재훈은 수진과 크리스 몰래 병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만납니다. 아들을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아빠 맞냐며 기뻐하고 재훈은 아들에게 괜찮냐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그동안 자신이 아내와 아들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재훈은 크리스와 수진의 불륜 광경을 목격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자리를 떠납니다.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집에 몰래 들어온 재훈은 수진이 작성한 영주권 신청서를 보고 아직도 자신을 남편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에 울음을 터트립니다.
재훈은 잠자는 아들 옆에 누워서 아내와 아들이 매일 즐겁게 지내길 빌고는 집 밖에 나와 오열합니다.
아들은 수진에게 아빠가 와서 자신과 얘기했다고 하고, 수진은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의아해하며 한국 집으로 전화를 하니 벨만 울립니다.
아내 수진은 크리스에게 사과하고 이성으로서의 관계를 거절하고 영주권 신청서를 준비하고 재훈에게 알리려 한국 집에 전화하지만, 통화가 되지 않자 한국 집의 관리소장에게 전화해 비밀번호를 알려줄 테니 남편이 잘 있나 확인해달라 부탁합니다.
남편의 회사가 망한 것을 안 수진은 한국에 있을 재훈을 걱정해 열쇠수리공까지 불러 한국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건 컴퓨터 앞에 조용히 자는 듯 죽어있는 재훈이었습니다.
재훈은 가정을 위해 일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정에 무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랑의 일환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일도 잃고 가정도 잃었습니다.
다 사랑 때문에 한 일이었지만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지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진도 남편을 사랑했지만, 자신에게 무심한 재훈보다는 옆에 있으며 자신과 아들을 챙겨주는 크리스에게 더 끌립니다.
불륜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죽었습니다.
수진도 사랑은 했지만, 자기 욕심을 버릴 수 없어서 불륜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내가 하려는 사랑엔 반드시 ‘나’가 살아있어서 그 나의 소유욕, 성욕, 이기심이 발동하기 때문에 항상 이런 결말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부자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마음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스승님, 제가 사랑을 쟁취하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해서 사랑이 된다면 나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 자아가 하느님처럼 살아있기 때문에
사랑으로 소유하려던 것을 잃으면 그 절망감에 견딜 수 없게 됩니다.
내가 하려는 사랑은 ‘소유’하려는 마음이기에 항상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소유함은 창조자의 속성입니다.
피조물은 서로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스마트폰끼리 서로 너는 내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끼리 서로 “너는 내 거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들 모두의 주인은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예수님의 충고처럼 ‘가진 것을 버리고’, 곧 ‘내가 창조자가 아닌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참 창조자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부모 밑에서는 형제가 나를 미워하고 죽었다고 할 때 나의 생명까지 끊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라 부모의 것이고, 나까지 잘못돼 버리면 부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소유’가 되지 않고 적정한 ‘분리’ 안에서 성취됩니다.
따라서 사랑이 부모가 있는 형제 안에서 더 완전하게 성취되듯,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서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이시고 나를 창조하신 주님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할 때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느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가 되고 나는 부모의 뜻만 따르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할 때 모든 것은 하느님 것이 되고 그래서 나의 모든 소유욕이 사라져 마치 태양이 지구를 사랑하듯 상대가 있거나 없거나 그저 사랑의 빛을 보낼 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6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복음 : 마태오 19,16-22
최고봉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잊지 않을 때, 찬란한 성덕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부적격한 지도자들, 언행일치가 안 되는 지도자들, 자기관리 등 기본도 안 되는 지도자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까?
한 자리 차지하면 갑자기 신(神)이라도 된 듯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아랫사람들을 억압하는 지도자들,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 백성들을 아끼고 섬기는 지도자,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봉사를 위해서 사용하는 지도자의 시대가 왔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멋진 국왕이 한 분 있습니다.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975∼1038)입니다.
그는 성덕이 왕좌에 숨어있을 수도 있으며, 걸인의 의복 안에 숨어있을 구도 있음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적 위대함의 최고봉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잊지 않을 때, 반대로 가장 비참한 곤궁 중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기꺼이 수용하고 사랑할 때 찬란한 성덕은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는 다른 무엇에 앞서 무척이나 청빈했습니다. 왕으로서 화려한 복장을 피하고 아주 소박하고 단출한 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백성의 필요성에 언제나 활짝 열려있었기에 굶주리던 백성들을 위해 왕실의 곳간을 활짝 열어 아낌없이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자신의 왕관을 하느님께 봉헌했으며 자신의 손에 맡겨진 헝가리 왕국 안에 하느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한 세상과 하느님 나라를 자신의 생애 안에 잘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신앙과 삶, 기도와 활동 사이에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현대 성인의 선구자요 리더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아들 에메리코에게 보낸 편지 안에는 그의 탁월했던 신앙심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천천히 읽어보면 아들에게만 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오늘을 살아가는 바로 나를 위해 남긴 편지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 땅의 모든 지도자들이 귀를 기울여야할 성왕 스테파노의 유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잘될 때 교만해지지 말고 역경에 처할 때 실망하지 않도록 굳건한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께서 현세와 후세에 너를 높여주시도록 네 자신을 낮추어라. 중용지덕을 지니도록 하여라.
어떤 사람이간 너무 지나치게 처벌하거나 단죄하지 말아라. 온유한 사람이 되어 정의를 거스르는 것을 피하여라.
성실히 처신하되 누구에게도 수모를 주지마라. 정결한 사람이 되어 죽음의 충동인 사악한 유혹을 피하라.
이와 같은 것들이 왕관을 씌워주는 덕행들이다.
이런 덕행이 없다면 이 지상에서 제대로 왕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영원한 나라에 도달하지 못한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을 따르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해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명과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의무입니다. 그 의무만 충실히 이행해도 하느님 뜻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1)
스스로 계명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고, 실제로도 나름 잘 살아왔을 그 청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부족함이 느껴졌나 봅니다. 영원한 생명이 이 정도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들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에게서 지금처럼만 살아도 충분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을까요? 사실 갈망은 부르심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더 하고 싶어 하게 마련이지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예수님께서 진복에 이르는 비결을 알려 주십니다. 이는 계명을 제대로 지키기에도 급급한 사람들에게는 발설되지 않는 비책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부자 청년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자기와 식구들을 건사하며 살아야 하는 보통의 평범한 이들에게도 큰 도전을 줍니다.
과연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되는 '구원'의 가능성은 재물의 양과 반비례할까요? 그렇다면 재산을 어느 정도 이상 지닌 이들은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걸까요?
그 해답을 제1독서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판관 2,11-12)
바알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리를 잡고 사는 가나안 땅의 신들입니다. 바알의 뜻은 "주, 주인"이기 때문에 야훼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은 땅의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바알에게 이끌려 그들을 받들어 모십니다. 왜 이스라엘이 굳이 하지 말라는 바알 신 숭배에게 빠져든 걸까요? 바로 바알 신이 재산을 증식시켜 주고 부을 축적해 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래라 저래라 요구조건이 많으신데 비해 바알은 실질적으로 손에 쥐어주는 게 더 많아 보이니까요.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이 베풀어 주신 약속의 땅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살아야 하는 본분을 잊고, 이방 민족들을 따라 재산과 재물을 탐욕하며 하느님과의 관계에 소홀해지고 맙니다. 성경은 내내 이 죄악을 "불륜"이라 칭합니다.
"제 스스로 덫에 걸렸네."(화답송)
이스라엘에게 재물과 하느님은 병립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느 한 편을 선택하고 어느 한 편을 외면할 수 밖에 없지요. 하느님을 선택하고 섬김으로써 누리는 은총과 축복보다 눈에 보이는 재물이 더 귀하고 소중했던 겁니다. 이 덫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걸려든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탐욕은 그만큼 드센 유혹거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선택한다고 빈털털이가 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을 믿고 의탁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유형 무형의 온갖 축복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에서 콕 집어 재물 축복을 달라고 요구할 수 없을 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우리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시니까요. 차이는 그걸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서 발생합니다.
오늘 복음 속 젊은이는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더 믿는지, 자기 손의 재물을 더 믿는지" 질문을 받은 것과 다름 아닐 겁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는 제 손의 것에 의탁하는 삶을 유지하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하느님은 그 부자 청년을 처음에는 계명 준수의 윤리적 삶으로 부르셨고, 그 다음은 갈망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려온 넉넉한 재물이 오히려 버림과 따름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결정적 순간에 그냥 그동안 살아온 수준에 머물기로 결심하지요. 사실 그만큼도 준수하니까요.
그 청년이 예수님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느낀 슬픔은 하느님의 마지막 부르심일 수도 있습니다. 이 복음서 뒷편에서 그가 어떻게 응답할 지 모르지만 이대로 끝이 아니길 빕니다. 그리고 그 결말은 우리 모두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입당송)
이 고백이 벗님의 것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 맛깔진 행복을 벗님이 꼭 맛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