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시모음 5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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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월
이외수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 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죽여 흐르는
불면의 가움
기다리는 마음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 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마리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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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월
이외수
밤을 새워 글을 쓰고 있으면
원고지 속으로 진눈깨비가 내립니다
춘천에는 아직도 겨울이 머물러 있습니다
오늘은 꽃이라는 한 음절의 글자만
엽서에 적어 그대 머리맡으로 보냅니다
꽃이라는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신 적이 있나요
한글 중에 제일 꽃을 닮은 글자는
꽃이라는 글자 하나뿐이지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햇빛 때문에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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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0월
이외수
이제는 마른 잎 한 장조차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 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 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칼로 베어낸 부처님 눈썹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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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1월
이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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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2월
이외수
떠도는 그대 영혼 더욱
쓸쓸하라고
눈이 내린다
닫혀 있는 거리
아직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고
종말처럼 날이 저문다
가난한 날에는
그리움도 죄가 되나니
그대 더욱 목메이라고
길이 막힌다
흑백 사진처럼 정지해 있는 시간
누군가 흐느끼고 있다
회개하라 회개라하 회개하라
폭석 속에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이 한 해의 마지막 언덕길
지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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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이외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 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 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리라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침묵으로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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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을빛
이외수
밥이 보다 요긴했던 시대
밥 때문에 상처받던 시대
사랑도 밥 앞에서는
맥 못 쓰던
그런 날에도.
흰쌀밥으로만 보이던
원고지 빈 칸
뜯어먹으며 쓴 말
밤마다 푸른 잉크로
살아온 날만큼
사랑이라 적으면
눈시울 젖은 채로 죽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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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강이 흐르리
이외수
이승은 언제나 쓰라린 겨울이어라
바람에 베이는 살갗
홀로 걷는 꿈이어라
다가오는 겨울에는 아름답다
그대 기다린 뜻도
우리가 전생으로 돌아가는 마음 하나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
눈을 맞으며 걸으리니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마다
겨울이 끝나는 봄녘 햇빛이 되고
오스스 떨며 나서는 거미의 여린 실낱
맺힌 이슬이 되고
그 이슬에 비치는 민들레가 되리라
살아있어 소생하는 모든 것에도
죽어서 멎어 있는 모든 것에도
우리가 불어 넣은 말 한 마디
아
사랑한다고
비로소 얼음이 풀리면서
건너가는 나룻배
저승에서 이승으로 강이 흐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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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걸인의 노래
이외수
삶은 계란
반으로 잘랐더니
그 속에
보름달이
두 개나 숨어 있었네
세상이 이토록 눈부신 뜻
내장만 비우고도 알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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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겨울비
이외수
모르겠어
과거로 돌아가는 터널이
어디 있는지
흐린 기억의 벌판 어디쯤
아직도 매장되지 않는 추억의 살점
한 조각 유기 되어 있는지
저물녘 행선지도 없이 떠도는 거리
늑골을 적시며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모르겠어 돌아보면
폐쇄된 시간의 건널목
왜 그대 이름 아직도
날카로운 비수로 박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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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겨울예감
이외수
"끝없는 시간의 강물을 건너고 건너
이제 나는 한 마리 잠자리로 태어났건만
그대는 지금 어느 윤회의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느냐
무서리가 내리고
국화꽃이 시들고
문득 겨울 예감이 살갗을 적시면
그때는 내 목숨도 다하나니
몇만 년 윤회를 거듭해도
나는 그대 생각 하나로 눈물겨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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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이외수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
한 겹씩 파내려 가면
먼 중생대 어디쯤
화석으로 남아 있는
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는
한 줌의 고사리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무는 바다 쪽으로 흔들리면서
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
꿈꾸고 있었을까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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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기다림
이외수
어느 날은 속삭이듯
배꽃나무 그늘로
스미고 싶다던 그대여.
스며 그에게로
가닿을 수 있다면.
터진 꽃망울의 속살로
피어날 수 있다면.
한 꽃나무에서 다른 꽃나무로
흐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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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억의 서랍에 자물쇠를 채운다
이외수
이별 끝에
못다 한 말들은
모두 하늘로 가서
구름을 떠돌다가
아픔이 사라질 무렵
빗소리로 떨어진다.
빗소리는
아물어가는
상처를 도지게 만든다.
그래서 빗소리가 들리면..
기억의 서랍을 열지 말아야 한다.
나는
기억의 서랍에
자물쇠를 굳게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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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길
이외수
버리고 일어서라.
시간의 감옥
눈 먼 등대 아래서
살해당한 바다곁에서
누군가
진눈깨비에 뼈를 적시며
울고 있지만
아무리 깊은 어둠
부러진 날개
참혹하여도
버리고 일어서라.
버리고 일어서라.
이 세상 모든 길들은
내게서 떠나가는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로 돌아오는 자를 위해서
영원토록
잠들지 않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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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꽃
이외수
안개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가 말했다.
수은등 밑에 서성이는
안개는
더욱 슬프다고
미농지처럼 구겨져
울고 있었다.
젖은 기적 소리가
멀리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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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
이외수
인간은 누구나 소유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완전무결한
자기 소유로 삼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요
아예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내 꺼는 없어, 라는
말을 대부분이 진리처럼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오늘 제가 어떤 대상이든지
영원한 내 꺼로 만드는
비결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 대상이 그대가 존재하는 현실
속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세요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순간 그 대상은
영원한 내 꺼로 등재됩니다
비록 그것이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그대의
영혼 속에 함유되어 있습니다
다시 새로운 한 날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많은 것들을 소유하는 삶보다
많은 것들에 함유되는
삶이 되시기를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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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노을
이외수
허공에 새 한 마리
그려 넣으면
남은 여백 모두가 하늘이어라
너무 쓸쓸하여
점하나를 찍노니
세상사는 이치가
한 점안에 있구나.
안개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가 말했다.
수은등 밑에 서성이는
안개는
더욱 슬프다고
미농지처럼 구겨져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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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놀
이외수
이 세상에 저물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누군가가 그림자 지는 풍경 속에
배 한 척을 띄우고
복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뼈 가루를 뿌리고 있다
살아 있는 날들은
무엇을 증오하고 무엇을 사랑하랴
나도 언젠가는 서산머리 불타는 놀 속에
영혼을 눕히리니
가슴에 못다한 말들이 남아 있어
더러는 저녁 강에 잘디잔 물 비늘로
되살아나서
안타까이 그대 이름 불러도
알지 못하리
걸음마다 이별이 기다리고
이별 끝에 저 하늘도 놀이 지나니
이 세상에 저물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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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이외수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 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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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더 깊은 눈물 속으로
이외수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비로소 내 가슴에 박혀 있는
모난 돌들이 보인다.
결국 슬프고
외로운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고
흩날리는 물보라에 날개 적시며
갈매기 한 마리
지워진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파도는 목놓아 울부짖는데
시간이 거대한 시체로
백사장에 누워 있다.
부끄럽다
나는 왜 하찮은 일에도
쓰라린 상처를 입고
막다른 골목에서
쓰러져 울고 있었던가.
그만 잊어야겠다.
지나간 날들은 비록 억울하고
비참했지만
이제 뒤돌아보지 말아야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 거대한 바다에는 분명
내가 흘린 눈물도 몇방울
그때의 순순한 아픔 그대로
간직되어 있나니.
이런 날은 견딜 수 없는 몸살로
출렁거리나니.
그만 잊어야겠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우리들의 인연은 아직 다 하지 않았는데
죽은 시간이 해체되고 있다.
더 깊은 눈물 속으로
더 깊은 눈물 속으로
그대의 모습도 해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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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들리시나요
이외수
걸음마다
그리운 이름들이 떠올라서
하늘을 쳐다보면
눈시울이 젖었지요
생각하면 부질없이
나이만 먹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알 수 있지요
그리운 이름들은 모두
구름 걸린 언덕에서
키 큰 미루나무로
살아갑니다
바람이 불면 들리시나요
그대 이름 나지막히
부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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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만추
이외수
영혼이 없는 육체를 보았습니까.
그는 영혼을 호주머니 속에 넣어둡니다.
마른 풀씨 처럼
불을 붙이면
연기도 없이 지워질 몸은,
차곡차곡 접어서
서랍 속 흰 빨래 옆에 가지런히 놓아둡니다.
가끔은 주머니를 털고
술잔 속에
담배연기 속에
우리들 손등 위에 가만히
그의 영혼을 옮겨 놓습니다.
그리고는 말없이 서랍 속으로 들어가
이 세상과 분리됩니다.
우리가 그를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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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바람의 인연이 아니라면
이외수
소유할 수는 없지만 간직할 수는 있습니다
온 생애를 바쳐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은 부지기수지만
온 생애를 바쳐서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우주와 같은
크기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아무리 멀리 떠난 사랑이라도
우주와 같은 크기의 마음 밖으로는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당연히 그 안에 간직될 수밖에 없지요.
사랑은 소유할 수는 없지만
간직할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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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별
이외수
내 영혼이 죽은 채로 술병 속에
썩고 있을 때
잠들어 이대로 죽고 싶다
울고 있을 때
그대 무심히 초겨울 바람 속을 걸어와
별이 되었다
오늘은 서울에 찾아와 하늘을 보니
하늘에는 자욱한 문명의 먼지
내 별이 교신하는 소리 들리지 않고
나는 다만 마음에 점 하나만 찍어 두노니
어느 날 하늘 맑은 땅이 있어
문득 하늘을 보면
그 점도 별이 되어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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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봄날은 간다
이외수
부끄러워라
내가 쓰는 글들은
아직 썩어 가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지 못하고
내가 흘린 눈물은
아직 고통받는 이들의
진통제가 되지 못하네
돌아보면 오십 평생
파지만 가득하고
아뿔사
또 한 해
어느 새 유채꽃 한 바지게 짊어지고
저기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봄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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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봄눈
이외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뜨고요
영혼들만
새벽 안개등으로 빛나는 날
샘밭에 가면
강물처럼 흐르는 축축한
혼들의 행렬이 보이지요
안개는 슬픈 사람들의 넋이야
배추밭 뚝에서 젖은 채
흐느끼는 그대를
만나는 날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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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봄밤의 회상
이외수
밤 새도록 산문시 같은 빗소리를
한 페이지씩 넘기다가 새벽녘에
문득 봄이 떠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네
내 생애 언제 한번
꿀벌들 날개짓소리 어지러운 햇빛 아래서
함박웃음 가득 베어물고
기념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 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풍경들은 언제나 흐림
젊은날 만개한 벚꽃같이 눈부시던 사랑도 끝내는
종식되고 말았네
모든 기다림 끝에 푸르른 산들이 허물어지고
온 세상을 절망으로 범람하는 황사바람
그래도 나는 언제나 펄럭거리고 있었네
이제는 이마 위로 탄식처럼 깊어지는 주름살
한 사발 막걸리에도 휘청거리는 내리막
어허,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네
별로 기대할 추억조차 없는 나날 속에서
올해도 속절없이 봄은 떠나가는데
무슨 이유로 아직도 나는
밤 새도록 혼자 펄럭거리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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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사랑은
이외수
하고 있는 순간에도
하지 않은 순간에도 언제나 눈물 겹다
사랑은 부끄럽지 않은 것
흐르는 시간 앞에 후회하지 않는 것
험난한 일이 앞에 닥쳐도 두렵지 않은 것
창피하지 않은 것
몇 날 며칠을 굶어도 배고프지 않은 것
막연히 기대하지 않는 것
서로 간에 자존심의 빌딩을 쌓지 않는 것
허물없이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것
가랑비처럼 내 옷을 서서히 적시는 것
온 세상을 아름답게 간직하게 해주는 것
어두운 곳에서도 은은하게
밝은 빛을 내주는 것
삶의 희망과 빛을 스며들게 하는 것
그래서 밤하늘에 기대하지 않았던 별이
내 앞에 떨어지는 것처럼
기다리지 않아도 생각하지 않아도
무심결에 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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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사랑을 달콤하다고
이외수
사랑을 달콤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대가 만약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신을 백 미터 선수에 비유하지 말고
마라톤 선수에 비유하라.
마라톤의 골인 지점은 아주 멀리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초반부터 사력을 다해 달리는
어리석음을 삼가라.
그건 백 미터 선수에 해당하는
제비족들이나 즐겨 쓰는 수법이다.
그러나 그대가 아무리 적절한 힘의 안배를
유지하면서 달려도 골인 지점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계속적으로 고통이 증대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따라서 계속적으로 증대되는 고통을 감내하지
못한다면 아직은 선수로서의 기본 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수준임을 명심하라.
진정한 마라톤 선수는 달리는 도중에 절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절교선언이나 배신행위에 개의치 말라.
사랑은 그대 자신이 하는 것이다.
진정한 마라톤 선수는 발부리에 음료수 컵 따위가
채이거나 눈앞에 오르막 따위가 보인다고
기권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대도 완주하라.
그러나 마라톤에서의 골인지점은 정해져 있지만
사랑에서의 골인지점은 정해져 있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평생을 달려도 골인지점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
사랑은 그대의 한평생을 아무 조건 없이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다면 역시 진정한 사랑을
탐내기에는 자격미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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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설야
이외수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시를 쓰며
눈이 내린다는 말 한마디
어디선가
나귀등에 몽상의 봇짐을 싣고
나그네 하나 떠나가는지
방울소리
들리는데
창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함박눈만 쌓여라
숨죽인 새벽 두 시
생각나느니 그리운 이여
나는 무슨 이유로
전생의 어느 호젓한 길섶에
그대를 두고 떠나왔던가
오늘밤엔 기다리며 기다리며
간직해 둔 그대 말씀
자욱한 눈송이로 내리는데
이제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시를 쓰면
울고 싶다는 말 한마디
이미 세상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살아온 한 생애가 부질없구나
하지만 이 시간 누구든 홀로
깨어있음으로 소중한 이여
보라 그대 외롭고 그립다던 나날 속에
저리도 자욱히 내리는 눈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길 하나
그대 전생까지 닿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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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섬
이외수
삽작 어귀도 쓸고
댓돌도 쓸고
방 안도 거울처럼
쓸고 닦았다.
벽 속의 달마가 말하기를
웬 쓰레기가
이리 큰 것이 앉았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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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수국 밭에서
이외수
도로변 꽃집 꿈꾸는 수국 밭에서
암록 빛 배암이 꽃이 꽃을 게울 때
도시에서 하루 한 번씩
꽃집 창 앞을 기웃거리던 버릇을
생각하는 친구여 차를 들게
지금은 비가 오지만
그리운 이유조차 알 수 없지만
몇 년이 지나도 아는 이 없는 거리
따뜻한 커피 잔 속에 보이는 친수여
도무지 사는 일이 힘들어 야위어 가는
네나 내가 동무 삼는 수국 밭에서
하루 한번씩 그립던 버릇을 생각하는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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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수변
이외수
벽 속에도
벽 밖에도
담장에도 굴뚝에도
달마만 보였다.
구들장에도 서까래에도
하늘에도 땅에도
그리운 별은 또 어떻고.
버혀도 버혀도
달마는
비처럼 내렸다.
話頭를 놓았다.
달마도 벽도
간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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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시월
이외수
이제는 마른 잎 한 장조차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 드릴까요
기러기 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 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 칼로 베어낸 부처님 눈썹 하나
☆★☆★☆★☆★☆★☆★☆★☆★☆★☆★☆★☆★
《36》
여름 엽서
이외수
오늘 같은 날은
문득 사는 일이 별스럽지 않구나
우리는 까닭도 없이
싸우고만 살아왔네
그 동안 하늘 가득 별들이 깔리고
물소리 저만 혼자 자욱한 밤
깊이 생가지 앓아도 나는
외롭거니 그믐밤에는 더욱 외롭거니
우리가 비록 물 마른 개울가에
달맞이꽃으로 혼자 피어도
사실은 혼자이지 않았음을
오늘 같은 날은 알겠구나
낮잠에서 깨어나
그대 엽서 한 장을 나는 읽노라
사랑이란
저울로도 자로도 잴 수 없는
손바닥만한 엽서 한 장
그 속에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
말 한 마디만으로도
내 뼛속 가득
떠오르는 해
☆★☆★☆★☆★☆★☆★☆★☆★☆★☆★☆★☆★
《37》
여름
이외수
샘밭에 가면
남루한 옷차림의
노을이,
남루한 사랑이
펼쳐진다. 공복인 그대가
어루만지던 원고지의
빈칸처럼.
그리움도 사랑도 시든 지
오래.
옛사랑은 노래가 되지 않는다.
☆★☆★☆★☆★☆★☆★☆★☆★☆★☆★☆★☆★
《38》
연꽃
이외수
흐린 세상을 욕하지 마라
진흙탕에 온 가슴을
적시면서
대낮에도 밝아 있는
저 등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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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외로운 세상
이외수
힘들고 눈물겨운 세상
나는 오늘도 방황 하나로 저물녘에 닿았다
거짓말처럼 나는 혼자였다
만날사람이 없었다
보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사람만 그리워졌다
사람들속에서 걷고 이야기하고 작별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섞여지지 않았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왜 자꾸만
사람이 그립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가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결국
내가 더 사랑한다고 느낄 때
외로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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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입동
이외수
달밤에는 모두가 집을 비운다
잠 못들고
강물이 뜨락까지 밀려와
해바라기 마른 대궁을 흔들고 있다
밤 닭이 길게 울고
턱수염이 자라고
기침을 한다. 끊임없이
이 세상 꽃들이 모두 지거든
엽서라도 한 장 보내라던 그대
반은 잠들고 반은 깨어서
지금 쓸려가는 가랑잎 소리나 듣고 살자
나는 수첩에서 그대
주소 한 줄을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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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장마전선
이외수
흐린 날
누군가의 영혼이
내 관절 속에 들어와 울고 있다
내게서 버림받은 모든 것들은
내게서 아픔으로 못박히나니
이 세상 그늘진 어디쯤에서
누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가
저린 뼈로 저린 뼈로 울고 있는가
대숲 가득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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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점등인의 노래
이외수
이 하룻밤을 살고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헤어진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이 등불 가에서 만나게 하라
바람 부는 눈밭을 홀로 걸어와
회한만 삽질하던
부질없는 생애여
그래도 그리운 사람 하나 있었더라
밤이면 잠결마다 찾아와 쓰라리게 보고 싶던 그대
살 속 깊이 박히는 사금파리도
지나간 한 생애 모진 흔적도
이제는 용서하며 지우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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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조각잠
이외수
겨울 강바람이
산발치로
산길 몇 개를 틀어 올리면.
사람이 그리워
내려오는
산길로 들자.
무엇을 더 끊어야 하리.
세상 밖에 나와서
세상을 보는
저 깊은
적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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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찔레꽃
이외수
마음으로만은
사랑할 수 없어
밤마다 편지를 썼었지
서랍을 열면
우울한 스무살 가슴앓이
사어들만 수북히 쌓여 있었지
입대하기 전날 아무도 몰래
편지를 모두 잘게 찢어
그대집 담벼락에 깊이 묻고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리
나는 바삐 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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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초저녁 강가에서
이외수
헤어진 사랑
땅에서는 바위틈에 피어나는
한 무더기 꽃
하늘에서는 달이 되고 별이 되고
또 더러는 내 소중한 이의 귀밑머리
거기에 무심히 닿는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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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풀꽃
이외수
세상길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도 법문 같은 개소리
몇 마디쯤 던질 줄은 알지만
낯선 시골길
한가로이 걷다 만나는 풀꽃 한 송이
너만 보면 절로 말문이 막혀 버린다
그렇다면 내 공부는 아직도 멀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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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하늘빛 그리움
이외수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을 감싸 안으며
나즈막히 그대 이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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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한세상 산다는 것
이외수
한세상 산다는 것도
물에 비친 뜬구름 같도다
가슴이 있는 자
부디 그 가슴에
빗장을 채우지 말라
살아있을 때는 모름지기
연약한 풀꽃 하나라도
못 견디게 사랑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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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함께 있는 때
이외수
세상에 神의 사랑 가득한 줄은
풀을 보고 알 것인가
꽃을 보고 알 것인가
눈을 감아라 보이리니
척박한 땅에 자라난
그대 스스로 한 그루 나무
실낱같은 뿌리에
또 뿌리의 끝
하나님의 눈은 보이지 않고
다만 존재할 뿐
사람이여
정답다 우리
함께있는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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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흐린 세상 건너기
이외수
비는 예감을 동반한다.
오늘쯤은 그대를
거리에서라도 우연히
만날는지 모른다는 예감.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엽서 한 장쯤은
받을지 모른다는 예감.
그리운 사람은 그리워하기 때문에
더욱 그리워진다는
사실을 비는 알게 한다.
이것은 낭만이 아니라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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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그도세상 : 김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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