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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종류의 땅
막 4:1-9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막 4:1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마13:1-9,눅8:4-8]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는데 모여든 군중이 너무도 많아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 올라앉아 가르치셨다. 2) 예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는 언제나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그날은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3) `들으라, 한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자기 밭에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고 5) 어떤 것은 흙이 얇게 덮인 돌밭에 떨어져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 6) 해가 뜨자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나무들이 자라서 그것을 덮어 버렸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잘 자라서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고,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
예수님께서 네 가지 땅의 비유를 통해 결실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에 대하여 교훈하십니다.
비유로 가르치시다(1-3)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큰 무리에게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바다에 떠 있는 배를 강단으로 사용하셨는데 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 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며(막 3:9), 또한 바다를 배경으로 좋은 음향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의 랍비들은 앉아서 가르쳤는데 이러한 전통을 따라 예수님은 배에 앉아 가르치십니다. 방식은 전통적이지만 내용은 랍비들과 차별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는데, ‘비유’(헬. 파라볼레)란 ‘나란히 놓다’는 뜻으로 일상의 진실을 통해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는 문학형식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들으라’(3)로 시작하여 ‘들으라’(9)로 끝나는데, ‘들으라’ 이 명령어는 비유의 교훈을 깨닫게 하는 핵심 단어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 하는 것이 본 비유의 핵심입니다.
결실하지 못하는 땅(4-7) 예수님은 먼저 결실하지 못하는 세 종류의 땅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어떠한 농부도 이 세 종류의 땅에 의도적으로 씨를 뿌리지는 않겠지만 우연히 이곳에 떨어지는 경우 결실하지 못합니다. 첫째는 ‘길 가’입니다. 이 땅은 굳어서 씨를 흡수하지 못하므로 금세 새들의 먹이가 됩니다. 둘째는 ‘돌밭’입니다. 이 땅은 흙이 얕아서 곧 싹이 나오지만 뿌리가 깊지 못하기에 햇빛을 받고 금세 말라버립니다. 셋째는 ‘가시떨기 밭’입니다. 이 땅은 씨를 흡수하고 뿌리도 깊어 잘 자라지만 가시떨기에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
결실하는 땅(8-9) 이 비유를 흔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땅의 비유’라고 해야 합니다. 뿌려지는 씨는 동일하고 땅의 종류에 따라 결실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땅만이 결실합니다. 좋은 땅의 비결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당시 바닷가에 모인 많은 청중들이 두 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대부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바 영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좋은 땅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며,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습니다.
적용: 당신의 마음은 네 종류의 땅 중에 어디에 속합니까? 온갖 세상의 일들의 정보를 접수하고 웬만한 것을 알 수 있고 알고 있다고 여기며 삽니다. 그러나 나의 심령상태가 어떠한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농부가 씨를 뿌릴 때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모습으로 땅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땅에 바람이 불고, 내리는 비를 머금고, 뜨거운 햇볕을 쪼이면 조금씩 조금씩 움터 초록빛 싹을 틔웁니다. 우리는 바람이 불면 춥다고 투덜대고, 비가 오면 옷이 젖어 싫어하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면 덥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그것들이 나를 자라게 해 주었음을 지나고 나서야 고백하게 됩니다.
< 설 교 >
나는 좋은 땅인가?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주신 일들 중의 하나를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은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의 비유말씀을 주신 곳은 가버나움과 가버나움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타브가(Tabgha)라는 마을의 중간에 있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원형극장처럼 생긴 장소였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곳은 완만하게 경사진 땅으로 갈릴리호수가 들어와 있어서 아름다운 만( )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서 비유를 들어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다고 해서 "비유의 만(Bay of Parables)"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과학자들은 사람의 목소리가 다른 아무런 장치 없이도 호숫가에 앉은 수천명의 군중에게 힘들지 않게 전달될 수 있음을 증명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거기 모인 사람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예수님께서는 물가에 떠있던 배를 타시고 호숫가 육지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요지는 씨 뿌리는 사람이 뿌린 씨가 여러 종류의 땅에 떨어질 수 있고, 그 땅에 따라서 씨 뿌림의 결과도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의미는 조금 뒤인 14-20절에 그 설명이 덧붙여져 있음으로 별 어려움 없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선 3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는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하셨고, 14절에서는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지는 사람들의 마음밭을 크게 네 종류로 구별하셔서 여러 가지 땅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4절에서는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고 하셨고, 15절에서는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씨가 길가에 떨어진 경우를 말합니다. 길가라는 것은 다져진 땅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씨가 흙 속에 파묻히지 못하고 그냥 있으므로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으면서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튕기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사탄이 노략질하기 제일 쉬운 사람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베드로처럼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던 사람도 일시적으로 자기 생각이나 자기가 원하는 바와 다르다고 주님의 말씀에 맞섰을 때 곧바로 사탄의 노리개가 될 수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다니시던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8:28). 그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멋진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비로소 당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막8:31).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며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돌이켜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막8:33)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두 번째 종류의 마음밭에 관해 예수님께서는 5-6절에서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비유하셨으며, 16-17절에서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밭의 예를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넘긴 가룟 유다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세 번째 종류의 마음밭에 관해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다" 하셨고, 18-19절에서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라 하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의 예도 우리는 성경 속에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서 꿇어 앉아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쭌 일이 있습니다(막10:17).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하신 후,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막10:19) 대답해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또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10:20)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그 사람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간 것입니다(막10:22).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마음밭의 종류에 관해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8절에서는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셨고, 20절에서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하셨습니다. 떨어지는 씨마다 무성하게 자라고 크게 결실하게 만드는 좋은 땅으로 비유된 마음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아 삶으로 열매 맺게 하는 참 믿음의 마음밭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땅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우리의 마음밭은 네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통통 튕기는 아스팔트길 같은 마음밭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깊고 튼튼한 신앙으로 뿌리 내리지 못하여 환난이나 박해 등 조금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는 곧 넘어지고 마는 사람의 마음밭입니다. 또 하나는 말씀을 받아들여 그 믿음이 어느 정도까지는 자라는 것 같고 뿌리 내리는 것 같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믿음의 성장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그래서 믿음의 결실을 보지는 못하는 마음밭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아 삶으로 열매 맺게 하는 마음밭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밭은 어디에 속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비유말씀은 한가하게 들어 넘길 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3절에서 보듯이 비유말씀을 시작할 때에도 "들어라" 하셨고 9절에서 보듯이 비유말씀을 끝내시면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9절)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말씀을 듣는 일이 긴박하고 중요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말씀하시며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너는 어떤 마음밭을 가졌느냐? 너는 좋은 땅이냐? 너는 내가 그동안 그토록 뿌려준 말씀으로 얼마나 되는 결실을 하였느냐?" 묻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지도 열매 맺지도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악조건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수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거부와 방해를 받으면서도 곳곳에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하고 있으며, 세상의 저항이나 무관심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확실히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오고 있다는 것은 말씀의 사역이 수확할 때, 하나님의 심판의 때,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의 때가 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때는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결산해야 할 때입니다. 그 때에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추궁 받을 것입니다. 그 때가 닥치기 전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주시는 대로 쏙쏙 받아들여 알뜰히 결실하게 하는 좋은 땅인지"를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한 마디도 남김없이 다 받아들여 내 영의 양식으로 삼아 나의 믿음이 더욱 깊게 뿌리 내리게 하고 소망 가운데 성장을 거듭하며 사랑의 열매를 맺었는가? 열매를 맺었다면 얼마나 큰 열매를 맺었는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만큼의 달란트를 또 남겨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고 지내는 게으른 믿음의 삶을 계속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지금까지 믿노라고 하긴 했지만 십자가 지기 싫고 어려운 일 당하기 원치 않으며 세상의 욕심과 유혹과 염려를 떨쳐버리지 못해서 믿음이 계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 없이 시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 아니면 말씀이 한 마디도 들어와 박히지 않고 통통 튀는 아스팔트길 같은 날라리 믿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
말씀의 씨를 뿌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뿌리신 말씀의 씨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도 사실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밭에 말씀을 뿌리셔서 그가 원하시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시도록 좋은 땅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꾸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해서도 안 되고, 온갖 근심과 걱정과 세상의 사고와 욕심과 유혹 때문에 그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을 방치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거칠고 메마르고 가시덤불로 뒤덮인 땅같이 되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과 세상의 사고와 욕심과 유혹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것들로부터 해방시켜주시기를 끊임없이 간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밭에 깔린 돌들도 다 제거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돌맹이에서부터 교회의 모든 것에 대한 막연한 부정적, 비판적 시각의 돌맹이, 설교자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선입견과 미움의 돌맹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모든 돌맹이들을 뽑아 던져야 합니다. 그러한 돌맹이들이 마음밭에 박혀있는 한 그 어떤 하나님의 말씀도 귀에 은혜롭게 들리지 않을 것이고 마음 속에 들어와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런 돌맹이들을 우리의 마음밭에서 다 제거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스스로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말씀의 은혜 속에 잠기는 복된 삶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적 비밀
박지온 목사
본문에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의 비밀은 아무나 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라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즉,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영적 비밀은, 바로 말씀을 깨닫는 귀와 눈과 마음이 열릴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말씀의 비밀을 깨닫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에게 말씀의 비밀을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영적 비밀은, 예수님과 함께 하여 말씀을 깨닫는 귀와 눈과 마음이 열릴 때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축복을 누립시다.
①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말씀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②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두지 않고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③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④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할 때 모든 흑암 세력이 덮쳐옵니다.
⑤ 말씀을 들었으나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과 같이 말씀을 빼앗기는 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⑥ 말씀을 듣고 마음에 깊이 심겨질 때, 좋은 밭처럼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⑦ 말씀을 들으며 받아 적고, 다시 되뇌어 보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귀한 방법이 됩니다.
⑧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악한 배경이 있습니다.
⑨ 말씀을 뿌리는 순간에 새들이 와서 다 주워 먹었다는 것이 사단의 배경입니다.
⑩ 말씀을 들을 때 기뻐하나 곧 말라서 죽거나 기운이 막혀서 자라지 못하는 것도 사단의 배경입니다.
⑪ 말씀을 들을 때 자라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성도들의 죄악입니다.
⑫ 지금부터라도 말씀을 듣고, 적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삶을 실천해 봅시다.
2. 말씀이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습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③ 말씀은 새생명의 양식입니다.
④ 하나님은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생명받은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라가도록 하십니다.
⑤ 훈련 프로그램은 바로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기회입니다.
⑥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성장합니다.
⑦ 말씀을 통해서 축복받은 증거를 드러내는 것이 전도입니다.
⑧ 말씀 운동이 회복되는 만큼 가정과 교회와 지역과 직장이 살아납니다.
⑨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자라나야 영적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⑩ 영적 싸움으로 사단을 이기는 힘은 내 안에 있는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⑪ 말씀은 우리의 삶을 인도합니다.
말씀을 어떤 태도로 들어야 하겠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하듯 해야 합니다. 지금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나아갈 때마다 주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깊은 삶
막 4:4-6; 고후 4:1-8 / 김홍도 목사
자연계 중에 식물을 보면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잎사귀나 줄기는 보이는 부분, 즉 들어난 생명체요, 뿌리는 보이지 않는 숨은 생명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튼튼하고 좋은 식물이 되려고 하면 보이는 줄기나 잎사귀도 풍성해야 하겠지만 그 보다도 보이지 않는 뿌리가 더 풍성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가복음 4장 4절 이하에 기록된 말씀대로 흙이 깊지 않은 돌작밭에 떨어진 씨는 뿌리가 깊이 박히지 못하므로 뜨거운 햇빛이 비치게 될 때 곧 시들고 마는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의 생활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부분만 전부이고 숨겨진 부분이 없는 성도는 조그마한 시련과 시험이 닥쳐 올 때는 곧 시들어 말라 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약 이사야 39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이 들었다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15년이나 더 생명의 연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 소식이 바벨론의 왕궁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벨론 왕은 사신들을 시켜 많은 예물을 가지고 문안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에 히스기야 왕은 너무 신이 나서 의기양양 하게 보여서는 아니될 숨겨 둔 보물과 향료와 무기고까지 다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매우 노하셔서 히스기야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모든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옮겨 갈 것이라"고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고 체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자중해서 하나님과만 은밀한 관계를 가져야 할텐데 이방인에게까지 다 드러내놓은 '노출 죄' 까닭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은밀한 신앙 생활의 미덕이 좀 있어져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뿌리까지 다 파서 내어 보이면 그 식물은 시들어 죽고 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의 신자들을 보면 드러나 보이는 생명은 풍성한데 남모르는 은밀한 생명은 극히 적고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삶이 깊어야 남의 깊은 면도 접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깊은 차원에서 사는 삶이란 무엇이겠습니까?
1. 영(靈)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사람을 구조론적으로 구분한다면 육(Fresh)과 혼(Soul)과 영(Spirit)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든다고 하면 마치 계란에 껍질이 있고 흰자위와 노른자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코필드(C.I. Scofield)씨는 그 각각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육(肉)은 세상을 의식(World-consciousness)하고, 혼(魂)은 자아(自我)를 의식(Self-consiousness) 하고, 영(靈)은 신을 의식(God-consious ness)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중에 육이나 혼으로 의식하면서 사는 삶은 얕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으로 사는 삶이란 극히 세상적 쾌락과 향락과 자기의 관능대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요, 혼으로 사는 삶은 정신적, 이성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사는 삶은 하나님을 모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보는 것 같이 믿고 의지하고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중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육과 혼으로 사는 삶은 부패하고 타락한 삶을 살다가 영원히 멸망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실상 사람에게 있어서 물체의 소리를 듣는 귀를 짐승과 비교해 본다고 하면 개는 25싸이클(cycle)을 듣고, 박쥐는 80싸이클을 듣고, 돌고래는 120싸이클을 듣는데 비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사람은 겨우 18~19싸이클 밖에 못 듣는 미약한 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육신으로 사는 삶을 가장 지혜롭고 가장 믿을만한 삶으로 착각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일 얕은 삶을 사는 자는 육으로 사는 사람이요, 또 혼으로 사는 사람 역시 육으로 사는 사람보다 이 세상에서는 혹 나을지는 몰라도 그런 자도 똑같이 멸망으로 들어가고야 만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영으로 사는 사람은 깊은 삶이요, 이런 깊은 삶은 곧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육신의 5관으로 사는 것도 아니요, 지식으로 사는 것도 아니요, 양심으로 사는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이 영적인 삶은 육신의 감각보다 깊고 지식이나 양심보다도 깊은 생명에 근원을 둔 생활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2. 은밀한 선행의 미덕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말씀과도 같이 보이는 잎사귀만 있고 보이지 않는 뿌리가 없으면 그 식물은 시들고 마는 것처럼 나의 선행과 의를 행하는 것이 남에게 알려진 것 뿐이고 나와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한 미덕이 없는 삶은 뿌리가 깊지 못한 얕은 삶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 1절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골방에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만 하고, 금식을 해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남을 구제해도 나팔을 불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 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숨어서 은밀하게 하다가 알려지는 것은 할 수 없지만, 미리 남에게 알리려 하고 사람에게 칭찬만 받기 위한 선행 뿐이라면 그것은 결코 깊은 삶은 되지 못하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께 인정하는 영원한 복된 삶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일찍이 삼층천에까지 올라가 본 신비한 체험까지 한 사람이었으나 14년간이나 숨겨 두고 자랑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바울된 것은 이러한 깊은 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고 교회 봉사를 할 때에, 목사나 다른 교인이 자기의 선과 봉사의 가치를 몰라 준다고 불안해 하거나 조급해 하지 마십시요. 오히려 누가 나를 몰라준다 하더라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장차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약의 요셉은 어떠했습니까? 어려서부터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앞에서 바로 산 까닭에 비록 그는 형들의 시기를 사서 노예로 팔려 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아무런 원망도 없었습니다. 또 보디발의 아내의 말할 수 없는 유혹도 물리쳤고 그 일로 인해 억울한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는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극복하고 끝까지 참게 될 때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는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내리셨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은밀한 선행의 미덕이 있는 사람, 그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진실된 삶을 사는 자인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하루는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하여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려 할 때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사람이 나겠느냐고 하며 무시하고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예수님 앞에 나타나게 될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그 때 나다나엘은 의아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를 알고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의 눈으로 은밀한 중에 나무 숲에 숨어서 기도하는 그를 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인간끼리는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숨어서 하는 모든 일까지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날마다 의식하면서 살아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겸손히 사는 삶인 것입니다
논에서 자라는 벼를 보면 그 벼가 익어갈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도 인격이나 신앙이 완숙해지면 해질수록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서에 보면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귀의 화살은 교만하게 높이 올라간 사람은 잘 쏴서 넘어지게 하지만 겸손히 낮아지는 사람은 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자는 어떤 잘못이나 죄를 범한 자보다 교만하여 거만을 부리는 자를 싫어하시고 그런 자는 꺾어 버리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언제나 겸손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나의 부족과 나의 결핍을 깨닫고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고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의 편이 되어 주시고, 또 그런자를 높이 들어 쓰시는 것을 믿으시고 이러한 영적인 삶과 은밀한 선행의 미덕을 가진 삶을 살고 따라서 낮아진 차원에서 겸손히 사는 삶을 살 때에 그런 자가 곧 깊은 삶을 사는 자요, 영원한 차원의 삶인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인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좋은 땅에 씨를 뿌리십시오
마가복음 4:3-9 / 최응희 목사
이제 정말 봄이 시작된 듯합니다. 사방에서 꽃망울들이 터지는 소리들이 요란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아마도 이런 시기에 농촌에서는 밭을 갈고 씨 뿌리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모습을 씨뿌리는 농부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뿌린 씨가 여러 곳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짝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씨는 좋은 밭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1. 인생은 씨를 뿌리는 농부와 같습니다.
본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본문의 씨 뿌리는 비유는 복음을 전파할 때에 그 복음을 받는 사람들의 심령에 대해서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좋은 밭과 같은 심령도 있고, 좋지 않은 심령의 밭도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심령도 있고, 말씀을 거부하는 심령도 있습니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다른 요소들이 그 심령에 뒤섞여 있어서 제대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복음을 받는 심령에 대한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으로서 이 비유를 읽으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습도 마치 밭에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인생의 농사는 단 한번의 농사이기 때문에 땅의 농사보다 더 정성스럽고, 더 열심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농사에서 무엇을 거둔다는 것은 단순히 지금 네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지금 성공하였느냐, 네가 지금 높은 지위에 있느냐, 네가 지금 건강하냐,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결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현재의 결과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지금 성공한 사람은 좋은 열매를 거둔 사람이 되고, 지금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은 거둘 것이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인생을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느냐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찌 됐던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의미의 속담입니다. 기독교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로 가지말고 바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태 때문에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자신의 목적만 추구하는 세상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전쟁도 그래서 생기고, 세상의 악도 그래서 생기는 것입니다. 목표달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법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부자가 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성공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성공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인생이 다 똑같아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거두는 열매는 다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비록 지금 실패하고 있어도, 비록 지금 건강하지 못해도, 지금 떠들썩하지 않아도, 비록 지금 초라해 보여도, 네가 살아가는 너의 진실되고, 충성된, 너의 삶의 흔적들을 가장 아름다운 열매로 여기시고 그것들을 거두시겠다 하십니다. 그래서 달란트 비유에서도 두 달란트로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나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똑같이 칭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산은 산술적이 아니라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고 아름답고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2. 더러는 나쁜 땅에 떨어졌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나쁜 땅에 떨어졌습니다. 나쁜 땅은 어떤 땅입니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입니다. 인생에도 나쁜 땅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실패하는 것은 땅을 잘 못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길과 같은 땅이 있습니다. 길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입니다. 이러한 길에다가 자신의 인생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나도 좋아하고, 사람들이 그렇다니까 나도 그런 줄 알고, 사람들이 저렇게 사니 나도 저렇게 사는 삶은 마치 길가에 인생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이 없어진 인생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친구도 좋고 친척도 좋은 것이지만 친구나 친척 가운데 아무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돌짝밭 같은 땅이 있습니다. 이러한 땅에 자신의 삶의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온갖 나쁜 감정에다가 자신의 인생의 씨를 뿌리는 사람입니다. 온 통 마음속에 이런 감정 저런 감정을 다 싸안아 가지고 온 세상의 슬픔과 미움과 근심과 불신을 자신의 좁은 마음에 다 담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울왕 같은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기의 땅, 경쟁의 땅, 미움의 땅에 자신의 인생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캐어 버릴 것은 캐어 버리고, 녹일 것은 녹이고, 갈아엎을 것은 엎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땅은 애초부터 좋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쓸데없는 것들을 정리해 버렸기 때문에 좋은 땅이요, 좋은 밭이 된 것입니다.
가시떨기가 있는 땅도 있습니다. 사람도 좋고, 외모도 좋고, 환경도 모자람이 없지만 인생을 집중하지 못하고 이 곳, 저 곳, 기웃거리며 잘 못된 습관이나 잘못된 생활태도에 그 인생의 씨를 뿌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삼손과 같은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좋은 조건에서 태어났지만, 이방여인 따라다니다가 사명도 감당 못하고 쓸모없는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젊은이들 가운데도, 이런 땅에 자신의 인생을 뿌리는 사람들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의 땅, 좋은 땅에 자신의 인생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의 기본적인 인생의 땅이 믿음이었기 때문에 어떤 환경 속에서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가시떨기들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런 땅에 내 인생을 심으면 안됩니다. 남의 인생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의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3.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심기어졌습니다. 좋은 땅이란 부드럽고, 양분이 풍부하고, 쓸데없는 잡초나 가시떨기나 돌들이 없는 땅을 말합니다. 씨앗이 잘 자라고,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땅입니다. 우리의 영과 육이 풍성해지는 은혜의 땅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믿음의 땅에 자신의 인생을 심어야 합니다.
■ 강릉에 있는 사천교회에서 목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오십 여년 전에 당시에 24살 먹은 최영환이라는 청년에 의해서 개척이 됐습니다. 이 청년은 공부를 많이 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났다가 약방면허를 얻어 고향에 다시 돌아와 약방을 차렸습니다. 이 사람이 고향을 떠날 때에는 예수를 알지 못했지만 돌아올 때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젊은 사람이었지만 꿈을 가지고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생활을 꾸준히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코흘리개 아이들을 모아 열심히 찬송을 가르치며 예배를 보고 전도도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뿐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가 비웃고 놀려대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자신의 젊은 아내와 함께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듯이 그 일을 꾸준히 하였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목회하던 그 때는 그로부터 삼십년이 지나갔을 때였는데, 저는 그 삶의 차이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를 놀려대던 사람들은 별 볼일 없는 담배냄새 찌들은 시골영감이 되어 버렸지만, 이 열심 있던 청년 최영환은 장로가 되어 교회를 두개씩이나 개척하였고 지역사회에 존경받는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쯤은 은퇴해서 손자들의 재롱을 보시고 있을 것입니다.
이 분은 자신이 선택한 땅, 그 믿음의 땅이 좋은 땅임을 알았기에 남들이 알아주던 몰라주던, 핍박을 하던, 놀려대던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그 믿음의 땅에 뿌렸습니다. 당장은 우스워 보이기도 하고, 당장은 놀림거리였지만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결국은 거기서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히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좋은 밭에 자신의 삶을 심었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가 보면 정말 좋은 땅에 씨를 뿌린 성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심령이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은 말없이 감당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믿음을 이끌어주는 건강하고 풍성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을 보면 마치 잘 자란 큰 소나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수려한 모습과 그 넉넉한 품성이 그 나무 그늘에 누구라도 쉬고 싶어집니다. 심지어 목회자도 그 그늘에 쉬고 싶어지기까지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 이렇게 좋은 땅에 여러분의 삶을 심기 바랍니다. 이렇게 좋은 땅에 심겨진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땅에 심겨진 것은 무엇이든지 자라나고, 무엇이든지 백배의 열매를 맺는 복되고 풍성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항상 백배의 열매를 거두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삼십 배를 맺을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에 있어서나, 믿음에 있어서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야구선수도 타율이 100%인 선수는 없습니다. 30%의 타율만 올려도 좋은 선수로 여겨져 연봉이 올라가지 않습니까! 좋은 땅에 계속 심다가 보면 백 배를 맺을 때도 올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항상 성령으로 심어 영생을 거두고, 좋은 땅에 뿌려 풍성한 결실을 맺는 능력있는 인생의 농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인명진 목사
요즈음 너나 할 것 없이 웰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웰빙 음식을 선호하고 있습 니다.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무슨 음식이든지 배불리 먹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면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을까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되었습니다. 건강에 좋은 먹거리라면 더 말 할 것도 없이 오염이 되지 않은 음식,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유기농식품을 말합니다. 세상이 많 이 바뀌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선이나 농산물이나 중국산이냐 우리나라 산이냐를 따져서 우리나라 산을 좋아하지만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중국을 우습게 여기고 언제부터 우리나라 것을 좋아하 게 되었는지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농약과 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추를 재배할 때 고추씨를 파종해서 고추를 말리기까지 농가에서 26번의 농약을 친다고 합니다. 고추가 농약 덩어리입니다. 비료 안주고 농사를 지으면 수확이 떨어집니다. 북한에 가면 비료를 안 주어서 농작물이 다 자라다가 말았습 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지축동에서 살면서 농사를 지은 적이 있었습니다. 비료와 농약을 주지 않고 농사 를 짓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농약을 안 주면 병충해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번 농사를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까 유기농을 하시는 분을 찾아가기도 하고 유기농에 대한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제가 마지막에 알게 된 사실은 씨의 문제도 아니고 모종의 문제도 아니고 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땅이 비옥하고 힘이 있으면 비료를 안주고 농약을 안주어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땅이 메마르고 비옥하지 않으면 농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력(地力)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땅이라고 다 똑같은 땅이 아닙니 다. 어떤 땅은 힘이 있고 어떤 땅은 메마르고 힘이 없습니다. 힘이 있는 땅에 농사를 지으면 농작물이 잘 자라고 좋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지력이 있으면 농약을 치지 않아도 병충해에 끄떡하지 않습니다.
의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 모두의 몸속에 암 세포가 있는데 몸이 약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은 몸 속의 암세포가 암을 유발시키지만 건강한 사람은 아무리 우리 몸에 암세포가 있어도 견딜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식물들도 튼튼한 비옥한 땅에서 자라는 식물은 어떤 병충해에도 건강하게 자라는 것 입니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땅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당장의 소출을 어떻게 많이 얻을까 하는 것 이 아니라 좋은 땅을 만들어야 합니다. 땅의 힘이 문제입니다. 지력을 높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땅에는 4종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길바닥 같이 딱딱한 땅이 있고 돌멩이가 섞여 있는 돌짝밭 같은 땅이 있고 또하나는 가시덩쿨이 있는 땅이 있고 마지막 비옥한 옥토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절대로 자라나지 못하고 돌짝밭 에 뿌려진 씨앗은 싹이 나는 듯 하지만 곧 말라 버리고 가시떨기 속에 뿌려진 씨앗은 싹이 나고 자라지 만 결실을 맺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옥토에 뿌려진 씨앗만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농사가 안 되는 것은 씨앗의 잘못이 아니라 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갑자기 땅의 이야기를 하시는지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과 누 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제자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잘 설명해주셨습니 다. 이 비유의 말씀은 농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농사 짓는 것에 비유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축복된 말씀을 들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아무런 축복을 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큰 축복을 받게 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는데 특별히 제자들에게 가르치 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고 심지어는 제자들도 알 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신비한 비밀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시는데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고 값진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행복하고 멋진 것이어야 하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멋진 것이 어야 합니다. 내 인생이 참으로 행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넘친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늘 불평하 고 불만하고 짜증을 내고 분노하고 고달픈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직 예수님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말씀입니 다. 그 옛날 예언자나 선지자도 이 말씀을 듣고 싶어 했지만 들을 수 없었던 말을 가르쳐주는데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하지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큰 축복을 누리는지 알지 못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여기저기 토로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복이 있다 차라리 돼 지 앞에 진주를 놓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출줄 모르고 통 곡을 해도 울 줄 모르는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3년 동안만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 님의 말씀이 늘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언제든지 들을 수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은 사람들의 이와 같은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하신 비유입니다.
어떻게 하면 기적의 삶, 행복한 삶,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듣는 사람의 마음밭이 중요하다는 것입니 다. 천국의 복음은 길가 같은 마음, 돌짝밭 같은 마음, 가시떨기가 무성한 마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 다. 마음을 고치지 않고는 결실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여러 가지 돌멩이가 박혀 있습니다. 욕심과 미움, 염려와 걱정이라는 돌멩이, 불평불만이 가득한 돌멩이, 분노, 시기의 돌멩이, 다른 사람을 찌르고 상처를 주는 돌멩이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돌 멩이들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싹이 날 수 없고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지 10년, 20년, 30년이 되어 수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가운데 자라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 우리 인생이 행복하고 축복이 넘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 런데 아직도 우리 인생이 힘들고 염려와 걱정을 하고 고달픈 것은 기준을 정해서 그 범위에서 신앙생활 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길바닥처럼 딱딱한 마음을 가져서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 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참고 사항일뿐 내 삶과 가치와 생활을 바꾸어야겠다는 결단이 없습 니다.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외치고 설교를 해도 소용이 없 고 변화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날이 그날이고 지난 주와 똑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밭이 길바닥처럼 딱딱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도 정착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씨가 자랄 수 없 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니까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믿어도 그 모습 그대로 입니다. 말 씀을 들으면 뭔가 결단을 하고 내 생각을 바꾸어야겠다고 하지 않고 내가 정해놓은 규칙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찬송이 214장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시옵소서 하는 찬양입니다. 길 바닥과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변화를 거부합니다. 그만큼 이야기하면 한번쯤 해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실수라도 해볼만한데, 마음에 감동이 될만도 한데 딱 정해놓은 범위 안에서 듣고 생각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그 삶에 행복과 축복과 기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평생 걱정하 고 고생하는 메마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한 평생을 마치는 초라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 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꼭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거울을 자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마음의 표시입니다. 자기 얼굴을 자세히 보면 욕심이 있는 사람은 욕심이 미움이 있는 사람은 미움이 얼굴에 나 타납니다. 분노가 있는 사람은 분노가 나타납니다. 마음을 고쳐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 와 시기와 욕심이 있는 한 절대로 편안할 수 없습니다.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땅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행복과 성공을 가져다주 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밭을 바꾸어야 합니다. 마음 밭은 바꾸지 않으면 복음의 씨앗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땅을 바꾸기 위해 거름을 주고 퇴비를 주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밭을 바 꾸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면 우리 마음밭의 여러 가지 돌멩이가 보입니 다. 욕심의 돌멩이, 미움의 돌멩이, 분노의 돌멩이를 기도로 걷어내야 합니다. 기도밖에는 그 돌멩이를 골라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가시와도 같은 것을 걷어내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시기와 미움과 불평과 불만과 분노 가 없어야 합니다. 딱딱한 마음밭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땀 흘려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 때 딱딱한 마음이 녹아집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흘리는 눈물로 마음밭을 기름지게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는 누구든지 다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보람있게 살 수 있습니다. 절대로 후 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아름답고 멋진 인생을 산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감동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존경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지위가 있어서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함 께 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과 분노와 시기가 우리 마음속에 있으면 절대로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마 음에 욕심과 불만이 있으면 축복과 기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밭에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피눈물 나는 기도로 욕심과 분노와 걱정과 근심을 몰아내고 갈아엎어야 합니다. 봉사와 헌신의 눈물과 우리가 흘리는 땀으로 옥토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밭에는 돌멩이가 있고 가시덩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밭을 기 도로 봉사와 헌신으로 눈물로 땀으로 우리 마음밭은 적셔서 하나님이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과 기적과 행복의 열매가 맺어지길 바랍니다. 이 귀한 은혜 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