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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은 조선의 멸망을 지켜본 비운의 증인이다. 덕수궁의 역사는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이름이 경운궁이던 덕수궁 자리에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과 흥천사라는 절이 있었
다. 이방원은 보위에 오르자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인 지금의 정릉동으로 이장하고 그 자리에 왕가
와 세도가들의 사저를 짓도록 했다. 임진왜란 때 백성들의 방화에 의해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등이
모두 불타버리자 피란에서 돌아온 선조는 이곳에 있던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임금은 1608년 이곳에서 즉위했는데, 그해 중건을 마친 창덕궁으로 떠나기
전 이 저택에 경운궁이라는 궁호(宮號)를 내림으로써 일개 사저가 왕궁으로 격상된 것이다.
태조보다 스물한 살이 어린 신덕왕후는 친정이 명문세가인데다 지혜가 뛰어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많은 공을 세웠다. 호랑이 사냥을 나갔던 장년의 이성계가 우물가로 달려와 급히 물을 청하자, 빨리
마시다가 탈이라도 날까 싶어 물 위에 버들잎을 띄워서 바가지를 건네줬다는 민간설화의 현명한 처
자가 바로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정실인 한씨가 개국 전에 죽었기 때문에 신덕왕후는 조선의 첫 번
째 왕비가 되었다. 태조는 유달리 신덕왕후를 사랑하여 정실인 한씨 소생의 장성한 여섯 대군들을 젖
혀두고 신덕왕후 소생인 11세의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방원은 이에 반감을 품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정도전 등 태조의 여러 충신들과 함께 신덕왕후 소생의 두 왕자도 살해해버렸다.
이빨 빠진 호랑이 이성계는 보위에 있으면서도 가장 사랑하는 두 어린 아들의 살해 소식을 듣고만 있
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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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2년 전인 태조 5년(1396) 8월, 신덕왕후는 41세의 나이로 먼저 승하하여
험한 꼴을 보지는 않았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장지를 찾기 위해 손수 여러 곳을 물색한 끝에 지금의
덕수궁 자리를 택했다. 도성 안에 능을 쓰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신하들이 극구 반대했지
만, 태조는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경복궁에서 훤히 건너다보이는 취현방 언덕배기에 부득부득 능을
쓴 뒤 능호(陵號)를 정릉이라 지었다. 능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경기여고 뒤 미국 대사관저 일대였다.
지금도 미국 대사관저 경내에는 정릉의 일부 석물들이 남아 있다.
태조는 정릉 주위에 소나무를 심는 등 묘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뒤 그 옆에 정릉의 원찰(願刹.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셔놓고 명복을 비는 법당)인 흥천사를 세웠다. 흥천사의 위치는 현 영국대사관과 성
공회 성당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흥천사는 무려 170칸으로 규모도 방대했지만, 최고급 목재로
기둥을 세우고 금빛 채색을 하는 등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태조는 흥천사에 밭 1천 결과 수십 명의 노
비를 내리고 해마다 엄청난 국고를 지원했다.
방원은 즉위하자마자 흥천사의 노비와 재물을 몰수하고 모든 지원을 중단했다. 이어 정릉의 영역이
너무 넓다는 이유로 사방 100보 밖에는 민가를 짓도록 허용했다. 끗발 좋은 좌의정 하륜이 가장 먼저
요지를 차지하여 여러 사위들에게 나눠주었다. 태종 8년 태상왕 태조가 승하하자 방원은 즉각 정릉
을 도성 밖인 오늘날의 정릉동으로 이장했으며, 정릉의 정자각도 헐어다 다른 데 쓰고 석물도 뽑아다
청계천 광통교를 놓는 데 썼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봉분마저 없애버려 한동안 정릉은 자취조차 없
어졌다. 정릉 옆에 세워졌던 흥천사는 100년 남짓 존속하다가 연산군 10년(1504) 원인 모를 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훗날 그 일대에 경운궁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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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4일, 오랜만에 문화재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안건은 덕수궁 명칭 변경 문제였다. 그해
4월, 할 일은 없고 아는 체는 하고싶은 어느 식자(識者)가 문화재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했다. 덕수궁
의 명칭을 본래 명칭인 경운궁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해방 이후 여러 사학자들과 언론인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제기해왔고, 그 안건으로 문화재위원회만
벌써 여러 차례 열렸던 사안이었다.그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달 수백만 원씩 수당만 타먹기가
민망했던 문화재위원들은 희색이 만면한 채 하나둘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결론은 반세기 전에 이미
나 있는 문제였다.
야당은 우리나라를 위원회공화국이라며 불필요한 위원회는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
다. 그러나 일단 정권을 잡아 여당이 되면 태도가 돌변한다. 경쟁적으로 동료 의원들을 규합하여 관
련 법안을 통과시킨 뒤 새 위원회를 만든다. 선거를 도와준 인사들에게 보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필요 없다고 욕을 퍼붓던 기존 위원회도 그대로 두고 위원들만 자신들의 측근으로 바꾼다. 장관급인
위원장에게는 운전기사 딸린 승용차와 비서도 제공된다. 대통령 직속, 국회 직속, 국무총리 직속, 장
관 직속, 공기업 직속 등 종류도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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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유력인사의 측근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초기에 몇 번 회의를 소집하여 몇 가지 안건을 논의하
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안건마다 구체적인 결론을 도출할 만한 전문지식을 갖춘 자가 없기 때문
에, 회의라는 것도 술을 곁들인 식사나 하고 회의수당이 든 봉투나 받아 챙기는 요식행위에 불과하
다. 역대 정권마다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법의 뒷받침을 받아 구성된 수백 개의 위원회는 정권
이 바뀐 뒤에도 그대로 존속된다. 위원회마다 위원장과 수명 또는 수십 명의 위원들은 여전히 국민
혈세로 매달 수백만 원의 수당을 챙기고 있다. 국민들은 있는 줄도 모르는 위원회가 이처럼 해마다
수백억 원의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
덕수궁 명칭 변경과 관련하여 2011년 ·12월 14일에 열린 문화재위원회도 서로 뻔히 알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형식적으로는 격론을 벌이는 척했다. 빈대도 낯짝이 있다고 밥값을 하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
서였다. 덕수궁으로 두자는 견해와 경운궁으로 환원하자는 논리가 팽팽했지만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낼 사안이 아니라는 것도 다들 미리 알고 있었다. 고급 호텔에서 1인당 수십만 원씩 하는 식사를 해가
며 장시간에 걸쳐 난상토론을 벌인 끝에 내린 결론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선배 문화재위원들이 이미
여러 번 내린 결론과 동일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광범위한 연구를 거친 끝에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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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시간’, 그들은 그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적어도 정권이 바뀌어 자신이 위원 자리를 내놓을 때
까지 별 미안한 마음 없이 월 수백만 원의 수당을 받아먹을 명분을 마련해둔 것이다. 행사를 주관한
문화재청장과 직원들도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다. 다만 하는 일도 없이 월급만 축내기가 민망하니 하
나마나 한 회의라도 소집하여 생색을 낸 것이다. 다른 수많은 위원회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위원회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오늘 남북 판문점 고위급 회담이 잘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는 올림픽의 정신에 입각한 순수한 공감대로 이끌어 내어야 함에도 또다시 서툰 담판의 오류가 걱정이 아닐수 없습니다. 개회식 공동입장이야 지금껒 그렇게 해왔으니 바람직한 합의 사항 이지만 한미연합훈련 중단,금강산.개성공단의 재가동등은 유엔의 결의에도 빗나간 상식밖의 논의사항임을 명심 하였으면 합니다. 다만 북핵을 포기시키는 방안에 접근 하는 미끼로 올인 하여야 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