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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고메이지님의 요청에 따라 또 다른 전투를 쓰려고 했는데 너무 귀찮아서 수기로 대신하려고 했지만 볼일보고 뒷처리를 안한듯한 찜찜함을 못이겨 리메이크 합니다
"이 간나 새끼 어디 갔는지 당장 말하시오 동무!"
분노에 찬 목소리와 눈이 뒤집혀진 듯한 북한군 장교가 춘천시에 입성하자 내뱉은 첫마디였다.
6월 28일 오후 10시 북한군이 우여곡절 끝에 춘천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들이 춘천에 입성 하자마자 첫번째로 한일은 바로 김성 소령을 잡기 위해 연고자를 모두 체포한 일이였다.
짜식들 내가 인기 좀 있짘ㅋ
김성 소령 6사단 16포병대대장
왜 북한군은 춘천에 입성하자마 김성 소령을 잡으려고 한 것일까?
그건 바로 춘천전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50년 6.25 새벽 4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8.15까지 조국을 무력적화 통일 시킨다는 계획하에 전쟁을 준비 시작했으며 6.25의 첫포성이 그 시작을 알렸다. 북한군 작전의 핵심은 1단계 작전에 있었다. 북한군 주공부대가 서울을 점령하여 한국군을 강 이남으로 밀어내면, 춘천을 점령한 북한군 조공부대가 수원으로 내려와 강 이남으로 내려온 한국군을 포위해서 섬멸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춘천을 점령한 후 수원으로 내려와야했던 북한군에게 문제가 생겼다. 춘천을 하루 만에 점령한다는 계획이 무너진 것이다.
북한군의 작전 계획
속전속결을 통해서 서울 점령하고 잔여병력을 포위섬멸해 8.15에 맞춰 종전을 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춘천에서 6사단의 분전으로 인해 계획이 백지화 되버렸다. (춘천전투의 중요성)
우리가 알다시피 6월 24일 토요일 00:00 시점을 기해 국군은 북한군에게 공격의향이 없다고 판단과 동시에 부족한 군량미로 인하여 비상경계령을 해제했기 때문에 주말을 맞아 휴가와 외출을 나간 장병들의 수는 상당 했으며 이로인해 군은 최약체의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시작과 동시에 대부분의 모든전선에서 패배와 후퇴를 하기 시작했지만 6사단과 8사단만은 달랐다.
8사단의 경우 주저항선이 무너진 상태에서 8사단 소속의 18포병대대만이 적의 공격에 대응하고 있었다
보병의 엄호없이 오로지 포병대대만이 남았기 때문에 당연히 후퇴하는게 정석이였다
참모부는 포병대대의 후퇴를 사단장 이정일 대령에게 진언했으며 이정일 대령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18포병대대에선 오히려 부사관을 보내 탄약과 포탄이이 부족하며, 수송을 위해 차량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요청을 들은 참모진은 이는 미친짓이며 전력을 아껴야 한다며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자 요청을 위해 왔던 부사관은 18포병대대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며 사단장을 설득했으며 결국 이정일 대령은 참모진의 반대와 우려를 무시하고 사단내의 모든 차량을 18포병대대에 돌려 탄약수송을 지원하는 화끈함을 보여줬다.
이에 18포병대대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한발자국의 후퇴도 하지 않았으며 위치를 고수하며 몰려드는 북한군을 향해 끝까지 사격을 했다. 그 당시 중대장의 한결같은 명령으로는 "각포! 쏴! 계속 쏴!"였다. 결국엔 포병진지에 다다른 북한군을 향해 영거리 사격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고 포병대대의 장병들은 소총과 삽을 들고 백병전을 수행해 진지를 사수하며 적을 격멸시키는 전과를 달성했다. 그후 포의 폐쇄기를 분해한후 후퇴하였고 오죽헌 부근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다시 화력지원을 하게 되었다.
18포병대대의 이런한 분전으로 무너진 주저항선에서 후퇴하는 보병들을 수습할수 있었고 북한군을 지연시켜 3일이란 황금같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6사단의 전쟁전 상황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제6사단은 지휘소를 원주에 두고 우익은 789고지를 경계로 하여 이정일대령이 이끄는 제8사단과 그리고 우익은 주목리를 사이에 두고 유재흥 준장이 이끄는 제7사단과 각각 연계하고 있었다.
이때 사단의 우일선인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는 지휘소를 공천에 두고 그 예하의 제3대대는 연대의 오른쪽 제 1선으로 789고지-우준리 간을, 그리고 제1대대는 왼쪽 제 1선으로 873고지-오산동 간을 각각 방수하고 있었으며 제2대대는 연대 예비로서 당포리에 배치하였다.
임부택 중령이 이끄는 제7연대는 춘천에 지휘소를 두고 제2대대는 제2연대1대대와 연계하여 양통리까지, 그리고 제3대대는 이에 이어 주목리까지 각각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중 제11 및 12 양 중대는 연대의 예비인 제1대대와 함께 춘천에 있었다.
*제7연대는 그 전해인 1949년 2월 20일에 사단으로 예속되어 청주로부터 원주로 약진하여 2개월간의 교육을 마친 후 5월 3일에는 현 진지 춘천으로 진입하여 서종철 중령이 이끄는 제8연대로부터 인수받고 3개월 뒤인 8월 6일에는 신남으로 침습한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포착해 섬멸하는 경험을 쌓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3개월간에 걸친 방어로 해당 지역의 지형을 숙지하게 되고 또한 군관민의 통제가 어느 곳보다도 공고하였다.
또한 제7연대는 대대전투훈련을 마쳤으며 우수한 장교의 피교육차출을 기피하는 당시의 풍조를 깨고 대부분의 장교들을 해당학교에 파견하여 보수과정교육을 마치도록 하였다.
진지공사에 있어서는 춘천정면은 제7연대가 진입하자마자 전선으로부터 시내가 불과 1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음을 감안하고 공사를 서둘렀는데 육군본부에서는 예산상 공사를 지연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자 자체 인력만으로 해결하기고 결정하고 사단으로부터 공병 1개중대를 지원받아 춘천 시민과 학생들의 도움으로 9개소(장재동 : 1개소, 인남리로부터 춘천간 : 6개소, 서상리 : 1개소, 지암리 : 1개소)에 유개 콘크리트와 그리고 중대마다 2 ~ 3개소의 통나무로 만든 유개호를 마련하고 호간에는 연락호로 연결하였으며 진전에는 지붕형 철조강을 쌍선으로 치고 그 중간에는 대인지뢰를 묻었다.
※ 오로지 전투준비가 제대로 된건 7연대만이였다. 2연대는 6월20일에 사단에 예속되었으므로 이곳에서 8연대와 진지교대를 마쳤고, 19연대 또한 5월에 예속된 바 이들은 아직 작전지역의 방어준비는커녕 지형조차도 미숙한 상태에 있었고 이미 병력의 1/3병력이 외출외박을 한 상태로 북괴의 남침공격을 받게 되었다.
전쟁직전 전쟁의 징조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날이 갈수록 빗발쳐 들어오는 북한군의 징후를 심상치 않게 주시하고 있었는데, 6월 19일에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으로부터 『북괴 제 2사단 소속의 전차병 한 명이 귀순하였는데 그의 진술에 의하면 북한군은 6월 23일부터 38도 분계선 접경에서 야외연습을 하기 위하여 일주간의 야간행군으로 전차 40대와 함께 화천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는 많은 병력과 포가 집결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보고를 하였다.
사단장은 1개 포로의 진술만으로는 정보의 정확도가 마약함을 인지하고 연대장에게 다시 확인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연대장은 윤수용 소위를 장으로 한 수색대 30명을 화천 및 양구 쪽으로 잠입시켰는데 그들의 귀대보고에 따르면 『화천에 차량 400대 및 양구에 300대가 각각 춘천으로 남하할 태세를 갖추고 줄지어 있음을 목격하였고 그 양쪽에는 대병력이 숙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북한군의 대대적인 침공이 조만간 있을거라 예상했으며 6월 24일 비상경계령이 해제됐음에도 불구하고 부대의 70%의 장병들이 군부대에 있었다
※ 6사단의 상대 북한 제 2군단
1950년 38선을 경계로 하여 춘천 북방에는 북한군 2, 5, 7사단, 603모터찌크 연대로 구성된 총 3만5천의 2군단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이를 상대 할 아군은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7연대, 5월 1일 원주로 이동하여 사단 예비가 되었던 19연대, 6월 20일 인제로 이동을 막 완료한 2연대로 구성된 약 9천의 6사단이었는데, 그 전력 격차는 병력으로 4배, 화력까지 고려한다면 6배 이상 차이가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전쟁당시 6사단 전력의 30%가 휴가 또는 외출이므로 병력의 6배가 차이나는 상황이였으며 북한의 2사단은 전쟁발발직전 평가한 사단 평가순위 1위!!!였으며 주공에 비해 병력이 적은것을 감안하여 북한내에서 최정예사단만을 편성한 것이 2군단이였습니다.
홍코너~! 북한 2군단 예 603모터찌크 연대
동무들 내래 인민의 폭주족이 뭔지 보여주갔어!
이에 맞써 대항하는 청코너 6사단
무식한 새퀴들 전략전술이 뭔지 가르쳐주마!
전투의 진행과정
간략히 소개하자면
A. 첫 번째 전투 - 사농동 16 포병대대 포 사격 전투.
1950년 6월 25일 16 포병대대의 북한군 포격 섬멸.
최대의 위기 순간에 북한군에게 반격을 가한 부대는 포병이었다.
B. 두 번째 전투 -옥산포 전투
1950년 6월 26일 옥산포 동쪽 능선에 배치되었던
7연대 1 대대 전장병들이 1.5km 전력 질주하는
장거리 돌격으로 적의 측면을 강타하여 패주시키고 추격함 .
전쟁 초기 유일한 북진 반격이었음.
C. 세 번째 전투.- 소양강 전투
개전 사흘 후인 27일 역시 7연대 2 대대가 소양강을 도강하던
전면의 국군 2대대가 철수한 것을 잘못 안심하고 도강하던 북한군을
역시 전방 측면에서 자동화기와 57mm 전차포로 섬멸해 버린 전투
D.네 번째 전투 - 원창 고개 전투
1950년 6월 28일 이미 서쪽 전선이 무너져서 전 국군의
총 후퇴 해야함을 알게 된 6 사단도 지연전을 하면서
홍천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7연대는 춘천 남방 원창 고개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적에게
타격을 주고 시간을 벌다가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아래 빨간쪽 표시가 북한군의 목표인 춘천시내
A. 6월 25일
04:00부터 북한군은 인남리 및 지암리에 격렬한 포격을 퍼부었고 1시간에 걸친 공격준비사격이 끝나고 사정을 연신하는 듯 하더니 운집한 대군이 가랑비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을 뚫고 추전리-청평-고탄리-인남리-지암리의 각 도로를 따라 노도와 같이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은 38선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초계병들에 의해서 신속하게 전달 되었으며 김종오 사단장은 즉각 원주에 사단 예비로 있던 19연대에게 출동을 지시하였고, 명령을 하달 받은 19연대는 보유하거나 긴급 징발한 차량이 부족하자 우선 1개 대대를 차량으로 춘천으로 보냄과 동시에 본대는 중앙선과 경춘선을 거치는 장거리 열차편을 수배하여 즉각 이동 전개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개전 초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보기 드문 침착하고 신속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가 발생했다 북한군이 모진교를 확보한 것이다. 모진교는 북한강을 도하하여 춘천을 공격하는 관문이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군 2사단의 전쟁개시후 첫번째 목표는 모진교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진교를 너무 간단히 확보하자 북한군 제2군단사령부에서는 무전으로 "(제2사단) 제6연대 모진교점령" 이라는 소식을 접하자 "모진교를 점령했다고?, 파괴되지 않았는가" 라고 반문하였을 정도로 모진교의 군사적 가치는 큰 것이었다.
왜? 6사단은 춘천의 관문인 이 모진교 폭파계획을 세우지 않았을까? 그건 폭이 겨우 4M에 불과한 이 작은 교량을 점령한다 하더라도 별 영향을 못미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은 교량 때문에 47km에 달하는 제 7연대의 방어선이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더구나 고탄리의 38선으로부터 춘천시 외곽까지 병력이 배치되어있지 않아 북괴군은 손쉽게 춘천 외곽인 역골, 지내리 일대까지 일거에 진출하고 말았다.
그러나 7연대 임부택 대대장(중령)은 신속하고 질서정연하게 후방의 계획된 주저항선인 소양강 방어선을 점령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 하는 침착함을 보여주었다 또한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지역내의 민간차량을 징발하여 기동력을 증대시키고, 군량미를 확보하며, 삼천리(현수몰지역) 탄약고에 보관중인 탄약을 안전지대로이전하는 등의 조치와 연대 직할대로 신예비대를 편성하는 등 필요한 모든 방안을 강구하였다.
7연대장 임부택 중령
내가 한 침착하지ㅋ
또한 6사단은 휴가 또는 외출을 했던 장병들에게 소집령을 내리고 전투준비를 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기세가 진격속도가 드높고 빨랐기 때문에 이를 저지못한다면 자칫 싸워보지 못하고 6사단이 붕괴할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노도와 같은 진격을 막아낸 부대는 6사단 예하 16포병대대였다.
당시 한국군의 포병은 미군의 인색한 원조로 전방 연대는 단 5 문의 포 구성 포병 중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6사단의 포병은 김 성 소령의 1개대대 3개 중대 뿐이었다.
6사단 배속의 1 대대 총 포 수는 15문이었다.
6사단 2연대 배속의 포 중대는 홍천에, 7연대 포 중대는 원주에, 19연대 포 중대는 원주에 각각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만약 이 포병 중대가 연대별로 흩어져 있었다면 6ㆍ25 발발과 함께 즉각 대응한 포병의 눈 부신 활약을 못했을 것이다.
천우신조로 6ㆍ25 적침 바로 전 분산되었던 포병 중대들은 김성 포병 대대장 지휘 하에 소양강 이북 우두동에 집결해서 훈련 중에 있었다.
춘천전투의 꽃 16포병대대의 설명을 하자면...
훈련이 너무 가혹하다고 대대 장병들이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주야간 훈련을 반복하여 대대 군의관까지도 포사격을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즉, 눈감고도 적의 예상 집결지에 포탄을 날릴 수 있을 만큼 전투준비태세가 완비되어 있었습니다.
병사의 주적은 간부 북한
주적 중의 주적 김성 소령님
눈감고도 못 맞추면 그건 포병이 아니잖아요? 왜들이래요 다들 눈 감으면 못 맞추는 것처럼
당시 국군의 주력 M-3 105mm 곡사포
공수 부대 사용을 위해서 경량화를 하여포신도 짧았다. 덕분에 사거리도 짧았다.
우리의 주적은 김성 소령!
적이 내침했다는 경보를 받은 대대는 06시 15분 전 포병 중대들의 포 2문씩을 먼저 출동시키고 이어서 15분 후에 준비를 갖춘 나머지 포들이 후속 출발했다.
부대는 포전을 치룰 포탄도 확보하고 있었고 주적 김성소령 밑에서 사격 연습으로 전투의 감을 잡고 있었다.
적의 침공로인 북한강변 적의 침공로를 전면을 막고 배치된 것은 1 포병 중대와 2 포병 중대였다.
두 중대는 적의 사격으로 옥산포 북방의 미리 준비한 진지에 투입하지 못하고 옥산포 남쪽 1km 지점의 사농동에포 방렬을 하고 사격 준비를 완료했으며 3 포병 중대 또한 전선의 우익에 배치 되어 포 방렬을 하고 대기 하고 있었다.
07:30 북한군 2사단예하 6연대가 옥산포 남방 사농동에 배치된 포병 1중대와 2중대 전방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병의 엄호가 없이 단독으로 북한군을 저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였으나 16포병대대는 굳건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였다. 6ㆍ25 당일 대대 15문의 포들 중에 3문이 고장 나서 전투에서 활약한 포는 단 12 문의 포 뿐이였으며 3개의 고장난 포가 하필 주공로에 방렬한 2개 중대에서 발생해서 적의 주공에 맞선 포는 단 7문이었다.
전방에 북한군 2사단 6연대가 나타나자 사농동의 포병들은 우측 123고지에 올려 보낸 FO의 관측에 따라 대대 일제 사격을 연속 퍼부었다. 대대가 처음 해보는 대대 일제 사격이었으나 장병 일체가 되어 포신이 달아오르도록 계속 사격을 가하였다.
09:30 역골 방면의 17번 도로를 따라 SU-76 자주포가 내려오고 있다는 관측에 따라 이 쪽 방향에도 화력을 집중시켰다.
북한군 6연대는 선두 중대가 첫 일제 사격에 나가 떨어지자 주력 2개 대대가 나서서 병진 속공을 시도했으나 계속된 포병의 집중 사격에 결국은 우왕좌왕하다가 피해만 급증하자 급편 방어에 들어갔다.
이 부대는 침공 선두 사단인 북한군 2사단(소련군 출신 이청송 소장지휘)의 주공 6연대 1,3 대대 였다.
105mm 곡사포가 적을 저지하는 동안 7연대 대전차 중대의 57mm 포 1개 소대(잘 알려진 심일 중위 지휘)중 2문이1중대 전방에 위치한 옥산포에 방렬하였다.
최초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심일 중위(1923~1951)
북한군 자주포 SU-76 육탄공격으로 3대나 격파함으로써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1951년 수색중대장(대위)으로서 임무수행중 전사 사후 1계급 특진함으로써 소령으로 추서
하지나 심일 중위는 그의 57mm 대전차포가 적 자주포에 대적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포병들보다 먼저 철수했다. 그의 소대는 대전차포 한 문이 수렁에 빠져 이를 유기했다.
그러나 오후 1시 적은 SU-76 자주포 10대를 몰고 다시 옥산포로 밀려들어왔다.
이처럼 위기에 빠지자 7연대 대전차포(57mm) 소대장 심일(육사8기·전사·태극무공훈장 추서)소위가 중대장 앞에 나섰다. 그는 중대장 송광보 대위에게 적의 공격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건의했다.
심일 소위 : "중대장님, 용감한 부하 1개 분대를 선발해 주십시오. 어떻게든 저놈들을 쳐부수겠습니다."
송광보 대위 : "저놈들과는 중과부적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심일 소위 : "사태가 급박합니다. 우리는 일당백입니다. 저놈들의 침략을 조금이라도 지체시키려면 우선 탱크 진입을 차단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특공작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전력이 약하면 비상수단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송광보 대위 : "성공할 수 있겠나?"
심일 소위 : "과감히 부딪쳐 보겠습니다."
송 중대장은 망설였으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심소위에게 1개 분대를 선발, 결사 특공대를 편성해 주었다. 심 소대장은 편성된 특공대원들에게 수류탄과 휘발유병(화염병)을 휴대토록 하고 적 전차 접근로상에 매복시켰다.
선두 전차 두 대가 다가오고, 일정 거리를 두고 수십 대의 전차가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이 보였다. 적 보병도 일정 거리를 두고 전차 대오 후미를 따르고 있었다. 심소대장은 선두전차가 커브를 틀자 일부 분대원을 인솔하고 곧바로 탱크에 뛰어올랐다.
뚜껑을 열고 수류탄과 휘발유병을 투척했다. 다른 탱크는 분대장이 맡았다. 순식간에 탱크 두 대가 화염에 휩싸였고 적 전차병이 탱크 밖으로 뛰쳐나온 것을 육박전으로 한순간에 쓸어버렸다.
또한 일순간에 적 전차 한 대가 파괴됐다. 관측하고 있던 16포병대대의 사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적은 더욱 혼비백산한 모습이었다.
이를 본 후미 전차가 당황해 어정쩡하게 서 있거나 방향을 틀고 뒤따르던 보병이 황급히 산속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북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이들은 아군의 엄청난 화력과 병력이 산속에 매복해 있는 줄 알고 일단 뺑소니를 친 것이다.
보·포병 협동작전의 승전보가 일시에 전선에 퍼져 나가자 진중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치솟았다. 겁먹고 불안에 떨던 장병들도 자신감을 갖고 움직였다.
심일 소대장은 격파 직후 "천하무적이라는 인민군도, 소련제 탱크도 별것이더냐!" 라고 외쳤고 이를 전해들은 장병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지고 적을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한편 16포병 대대장 김성 소령은 포의 긴급 전개부터 시종일관 사농동의 포진지와 보병 7연대 OP인 우두산을 왕래하며 포전을 지휘했다.
단 12문의 포격 결과 북한군 연대 본부의 지휘가 마비되고 북한군 사단장 이 청송과 포병 대대장이 자주포에 승차하여 후방으로 도주하는 등 북한군 6연대 전력의 70%가 궤멸당해 해체수준의 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16포병 대대는 각 중대의 소요 포탄 5,000여발을 북한강 건너 북쪽의 우두동에 보관하고 있었다. 만약 이 포탄들이 적의 수중에 넘어갈 경우 전력에 큰 치명타였으므로 포전에 필요한 포탄만을 제외한 나머지 포탄은 긴급히 후방으로 철수하여야 했다.
(후방이란 춘천 남방 사범학교를 말한다.)
먼저 농림학교 농장의 손수레와 생사공장에서 사용하는 손수레 각 10여대를 이용하여 농업학교 호국단, 공장 직공, 우두 국민학교 교사및 동네 구장들로 구성된 시민 협조대가 손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시민 봉사대는 삼단으로 조직되었다.
1조가 창고에서 5번 도로까지, 2조가 소양교 북방 500미터 29번 교차점까지, 3조가 다리 건너 소양강 이남까지 릴레이로 운반했다.
벌써 피난민들이 남행이 시작되고 있었고 주민들도 거리에 나와서 주민들이 진행을 지켜 보고 있었다.
운반 포병들은 주민들에게 사정도 하고 애걸도 하고 강요도 하며 제발 포탄을 소양강 이남까지만 가져 달라고 부탁하여 부지런히 포탄을 운반했다.
지게에는 1-2발, 손수레는 3-4 발, 우마차는 4-5 발, 자동차는 8-10발을 소양교 건너 운반해와 소양로에 집적했다.
소양강 남쪽에서는 춘천 사범학교의 학생들이 동원되어 운반해온 포탄을 학교로 날랐으며 징발된 민간 차량들이
이 포탄들을 춘천 사범학교로 운반했다.
이렇게 해서 아슬아슬하게 건져낸 포탄만 3,800발이나 되었츠며 총 300여명의 민간인들이 포탄 운반에 협조했다.
이는 6ㆍ25 전사에서 특기할 민군 합동의 사례다.
전투는 치열했다. 적을 향해 포를 방열하랴 적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게 포탄을 후방으로 수송하랴 이렇게 치열하게 전투가 전개되고 18:00시 넘어 적의 마지막 공격이 개시 되었다.
포 중대는 가래목 나루로 향하는 적 보병 대대를 보리밭에서 붙잡아 집중 포화를 가해서 삼거리 방면으로 도주하게 하였다. 전방의 1 포병 중대는 접근해온 적을 피해 500미터 정도 철수하여 방열한 후 직접 사격으로 적을 강타했다.
25일 위기의 순간에만 적에게 쏴댄 포탄만 무려 900발이나 되었다.
춘천 방어 전투 나흘 동안에 16 포병대대가 쏜 포탄은 보유탄 5,000 발 중에서 4,000발이었다.
(12문으로 4,000발)
소양강 이북의 16포병 대대는 이틀간의 눈부신 활약을 하고 26일 밤부터 적의 전체적인 압박으로 남방으로 철수하였다.
이렇게 6월 25일 북한군 2사단 6연대의 공격은 긴급출동한 16포병대대 방어에 의해서 저지 되었다. 6연대는 16포병대대에 접근 할 수도 없었으며 점심 때까지 춘천에 입성한다는 계획하에 무리한 공격실시함으로써 6연대 전력의 70%가 궤멸당했으며 이는 해체수준에 이르렀다. 또한 점심 때에는 2사단의 포병대장인 안빈 대좌가 전사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16포병대대의 날이였으며 북한군 입장에서는 하루종일 불벼락을 맞은 신세였다. 더욱 중요한건 16포병대대의 포는 겨우 12문이였으며 6연대를 저지한것은 7문이였다. 또한 6연대를 저지한 중대의 중대장들이 출장으로 부재였음에도 전개 후 전투에 돌입한 것은 극찬을 받아 마땅하다.
물론 16포병대대만의 활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7연대의 1대대 병사들은 사농동에 전개한 1,2 포병중대의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진입한 북한군을 격멸함으로써 16포병대대가 안심하고 포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측면을 엄호해주었다.
북한군이 꼭지가 돌을만 하네요 소령님ㅋ
6사단의 화력을 책임진다 뿌!뿌!뿡!!!!
너무 많이 기다리실것같아서 1,2부로 나눌께요...
힘들어서 그럽니다ㅋ
첫댓글 선리플후감상.설마 이게 끝? 이라고 생각하면서 들어왔는데 2부도 있다니 잇힝
이분 뭐야.. 무서워... 내 글을 노리는 매의 손ㅋㅋ
얼른 2부를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 ㅋㅋ
빨리 쓰면 퀄리티 떨어지니 천천히 쓰시라능...
저도 짧은 글 쓰느라 시끕해봐서 그 고통 앎ㅋ사진자료,짤방 검색,엄선하는 것만 해도 힘듬ㅋ
넵 그럼 양질의 글을 쓰기위해 조그만 기다려 달라능ㅋ
우왕@o@ 드디어 나왔군요. 역쉬 포병의 화력은 무시무시합니다.
아...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포를 퍼부어댔군요.... 12문에 4000발이라니...
휘하 포병들은 피지컬만으로 일인당 스무명씩은 때려 잡을수있을듯...
역시 포병의 화력은 위대하다능..!
예나지금이나 병사의적은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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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거리 무기만 잡으면 양에서 사자로 돌변함 ㅋㅋ
우와..대단했군요..
귀여운 105mm로군요. 그나저나 전쟁은 역시 화력입니다.
역시 조선사람은 쏘는건 잘합니다-_-
역시 어느나라의 화력덕후..우린.. 포병덕후였어.....
잘 읽었습니다. 님 말씀대로 춘천전투 아주 중요했군요. 북한군 계획대로 됐다면 1군단이 모루역할을 하는 동안 2군단이 춘천을 돌파해 경기도로 이동해서 포위공격하는 악몽이 전개되었겠군요. 으스스한데.....
만약 춘천에서 패배했으면... 지금쯤 김정일을 빨고 있겠죠;; ㅎㄷㄷ
이래서 국방부가 그렇게 포전력에 목을 메는것이군요!(에잇 포방부)
아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2부가 기다려지네요.
오오오 잼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