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방전 사연
학교에서 치루는 정기고사 둘째 날은 칠월 초하루였다. 오전에 고사 관리를 하고 아이들과 같이 급식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담임들은 아이들을 보내 놓고 학교 바깥에서 점심 자리를 가지려는 듯했다. 나는 서둘러 집으로 왔다. 정기고사 기간 중 오후 반나절을 무얼 할 것인지 구상해 두었다. 평일이면 학생 지도에 얽매여서 좀체 내기 어려운 자투리 시간을 금쪽같이 보내고 싶어서다.
정년퇴직 후 동읍에서 블루베리를 가꾸는 교직 선배한테 들려보려는 생각을 가졌다. 용제봉이나 불모산 산기슭 들어가 숲속을 거닐다 나오려는 마음도 있었다. 이런 구상은 집안일 우선순위에 밀려 훗날로 미루어야 했다. 한때 들불처럼 번져가던 메르스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렇지만 서울 강남의 한 대형 병원과 강북의 한 대학 병원은 아직도 진료와 수술이 전면 폐쇄된 상태다.
메르스 여파가 아니었다면 집사람은 이번 주 석 달 만에 다가오는 정기검진이 예약되어 있었다. 검진 받는 데만 이틀이 꼬박 걸리고 그 다음 주 외래진료가 잡혀 있었다. 그런데 메르스 파동으로 검진과 외래진료를 제 날짜 받을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복용하는 약이 바닥나 처방전을 발급 받는 일이었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상담전화가 연결되어 길을 찾아냈다.
집사람 주치의 예약 시간대 간호사와 연결된 전화로 원격 처방전을 발행한단다. 환자나 가족이 병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기에 약을 구입할 약국을 찾아 팩스 번호를 알려주면 그곳으로 처방전을 보내겠단다. 그런데 암 환자에게 투약되는 약은 드물어서인지 웬만한 약국에는 비치되지 않은 약이었다. 마침 마산의 대형 병원 앞 어느 약국에서만 그 약이 있다는 것까지 확인이 되었다.
그런데 약을 구하려는 약국에서는 처방전이 팩스로 와도 추후 원본 처방전을 요구했다. 그것도 집사람이 다음 달 초 미루어 가기로 한 검진과 외래진료 날짜보다 이르게 요구했다. 약국에서는 보건의료 종사자가 지켜야할 권리와 의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반 환자들이야 교과서적인 내용에만 익숙한지라 메르스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평소 아는 바가 없었다.
서울 병원서는 한두 시간 후 우리가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내 통보한 약국으로 처방전을 팩스로 보낼 것이라 했다. 소심한 집사람은 약국에서 수일 내 처방전 원본을 가져온다는 보장을 못한다면 약을 주지 않을까 봐 머뭇거렸다. 나는 그런 걱정은 닥치면 하고 약국으로 가보자고 했다. 약국 문전에 들리니 약무 종사원이 금방 닿은 팩스 처방전을 의아하게 여기고 전화를 걸고 있었다.
처방전에 적힌 환자인 집사람한테 궁금해 전화를 넣고 있었다. 집사람은 팩스 처방전이 오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렇잖아도 재택 원격진료를 받은 몇 고객이 다녀갔다고 했다. 그들에게 병원 약무 팀에 연락해 원본 처방전을 요구해 놓았다고 했다. 집사람이 한 걱정은 기우였다. 약국에서는 누군가가 해당 병원 약무 팀으로 전화를 넣어 원본 처방전은 어떻게 확보되는 모양이었다.
서울서는 한 번에 석 달 치 약을 받았는데 재택 원격진료는 한 달 치 약을 받았다. 약이 떨어지기 전 검진과 외래진료 차 서울 병원을 가야하기에 상관없었다. 약사로부터 복용법에 대해서도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 호르몬을 조절하는 약인지라 매일 같은 시간을 지켜 먹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서울의 병원 앞 약국에서도 이미 몇 년 째 같은 얘기를 듣고 있으며 꼬박꼬박 실천하고 있다.
계산대에서 약값을 결제하기 전 또 다른 약을 사야할 것이 떠올랐다. 이번엔 집사람이 아닌 내가 어디 불편해서다. 일요일 장복산 언저리로 산행을 다녀왔더니 밤새 종아리가 가려웠다. 내 몸의 병은 내가 잘 안다. 접촉성피부염으로 일명 ‘풀독’이다. 나는 여름 산행에서 개옻나무에도 옻이 탄다. 피부과를 먼저 가야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처방전 없이도 살 수 이런 약이라면 얼마든지. 15.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