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11월 13일은 우리나라 노동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지 5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70년생인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돌도 되기전에 세상을 떠나신 그 분을 생각하며 하루종일 가슴이 답답하여 "그날이 오면" 이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민중가요를 오랜만에 들으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저녁에 아들과 함께 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냈는데
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다며 제법 자세히 설명을 해주어서 참 기특했습니다.
50년전과 비교해서 지금은 얼마나 나아졌을까요?
페이스북에서 전태일 열사에 대해 잘 정리된 글을 읽게 되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출처 : Kim Jeongho 님의 페이스북
www.facebook.com/amdg77/posts/10221809542480491
청계천을 따라 계속 걸어가다 보면 종로 2가와 3가 사이에 위치한 전태일기념관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 사진)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고등공민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였던 그는 껌팔이, 구두닦이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17살에 서울로 상경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이었던 봉제 공장이 밀집한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갔고 재단사 시다(보조) 생활을 1년 거친 후 재단사가 되었다.
재단은 옷의 각 부위를 만드는 본을 가지고 원단을 자르는 일로 상당한 숙련이 필요한데 1년 만에 재단사가 되었으니 무척 솜씨가 좋았을 것이다.
재단사가 자른 원단은 미싱사들이 미싱(재봉기)으로 박아서 차츰 옷의 형태를 만든다. 옷감을 바느질 하는 '박음질 기계'는 영어로 sewing machin(소잉 머신)인데 일본인들은 '소잉'을 빼고 '머신'을 '미싱'이라 발음했고 우리도 그대로 따라 했다.
옷 제작은 자동차 조립과 원리가 같다. 철판과 철판을 이어붙여 자동차 차체를 만들듯이 옷의 각 부위를 재봉기로 계속 꿰매서 옷을 제작한다.
미싱사의 일은 정말 고되다. 옷 한 벌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맡은 부위의 원단 조각을 수십 번씩 박음질해야 하는데 그걸 하루에 수백 벌 씩 만들어야 한다.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처럼 각자 정해진 부위를 짧은 시간에 정확히 박음질해서 다음 미싱사에게 넘겨야 하기 때문에 중간에 누가 실수라도 하면 생산라인 전체가 멈춘다. 납기 준수는 곧 시간 싸움이라 라인이 멈추면 그만큼 손실이다. 실수한 미싱사에게 온갖 쌍욕이 날아들고 피곤에 쩔어서 졸기라도 하면 반장이 본보기를 보인다며 다들 보는 앞에서 귀싸대기를 날렸다.
청계천의 봉제공장은 사람이 기계처럼 움직여야 굴러갈 수 있었다. 침침한 형광등 불빛 아래,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실내에서 종일 옷감에서 나오는 먼지를 마시며 하루에 15~16시간씩 일해야만 했다. 일터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두 번째 사진)
봉제업의 특성상 직원의 절대 다수는 시골에서 상경한 여공이었다. 여공을 다루는 관리자들은 대부분 남자였는데 말을 잘 듣게한다는 명분으로 신체적인 폭력은 일상이었고 성희롱과 성폭력은 암암리에 자행되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여공들은 그런 폭력과 수모를 그저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청년 전태일은 비참한 노동환경이 개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가졌다. 재단사가 되고 2년 반이 지난 1969년 9월경에 다른 재단사들을 설득해서 '바보회'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었다. 노동조건을 제도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바보회 멤버들을 동원해 노동실태 조사를 위한 설문지를 배포하고 다시 취합해서 서울시청의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다. 근로감독권 행사를 공식 요청한 것이었는데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고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주모자로 낙인만 찍혔다. 청년 전태일은 감독관청의 묵묵부답에 좌절하지 않았다. 두 가지를 실천에 옮겼는데 첫째,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는 것, 둘째, '모범업체'를 만드는 것이었다.한자투성이인 근로기준법을 혼자 공부하다보니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까막눈인 자신을 탓하면서 그 유명한 "나에게도 대학생 친구가 있다면"이라는 대목을 일기에 적었다. 이 일기는 당시 서울 법대 대학원에 재학하며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조영래의 가슴에 불을 댕기게 된다. 조영래는 전태일의 장례식을 치른 후 고인이 걸어온 길을 되짚게 되고 그 결과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세 번째 사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전태일이 기획했던 '모범업체'에 대한 이야기다.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을 획기적으로 바꾸면서도 생산성은 높고 판매도 잘 할 수 있는 회사를 구상했다. (네 번째 사진)
회사는 '태일피복'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25페이지짜리 사업계획서도 만들었다. 이 사업계획서는 "시장조사에서부터 광고, 생산제품, 임금, 복지시설 등 오늘날에도 합리적이고 현실 가능한 계획안으로 평가받고 있다."(다섯 번째 사진) 한마디로 사회적 기업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전태일의 나이는 불과 21살이었다.
이런 구체적인 노력에도 현실은 견고하기만 했다. 전태일은 더 짜임새 있고 활동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음해인 1970년 9월 '삼동친목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회원 전체 명의로 노동청장에게 '근로개선 진정서'를 보냈다. 노동청 국정감사 기간과 맞물려 이런 움직임은 언론의 주목을 끌었고 크게 다뤄졌다.
여론을 더 불러일으키고자 노동청 국정감사일인 10월 20일에 노동청 앞에서 삼동친목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를 계획했다. 노동청 근로감독관은 이슈가 더 커질까 겁을 집어먹고 원하는대로 다 들어줄테니 국정감사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 말을 믿고 국정감사 기간에는 시위를 자제했는데 국정감사가 끝나자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이 입을 싹 씻어버렸다. 분노한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10월 24일 오후 1시에 동대문 평화시장 근처 국민은행 앞에서 시위를 강행하고자 했으나 경찰의 삼엄한 경비로 실패했다.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근로감독관은 11월 7일까지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한발 물러섰는데 그 말 또한 속임수였다. 더이상 속지 않겠다는 각오로 11월 13일에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열기로 했다. 구호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주일에 한번만이라도 햇빛을!', '하루 16시간 노동이 웬말이냐?' 등으로 정하고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화형 시키자는 연설을 하기로 했다.
화형식이 예정된 당일, 국민은행 앞은 경찰이 원천봉쇄 하고 있었지만 노동자 500여 명이 몰려들었다. 오후 1시 30분경 노동자들 틈에서 온몸에 석유를 부은 전태일이 몸에 불을 붙이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근로기준법 화형식 대신 자신의 몸을 불사른 것이었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몇 마디를 짜내어 외쳤지만 바로 쓰러졌고 인근의 국립의료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때가 오후 2시 경이었다.병원 측은 심한 전신 화상을 입은 전태일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고 8시간이 지난 밤 10시 경에 숨을 거두었다.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잠시 의식을 회복한 전태일이 남긴 말은 "배가 고프다"였다고 한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청년 전태일은 그렇게 22살의 생을 마감했다.
전태일기념관이 있는 청계천 변을 따라 계속 동쪽으로 걸어가면 동대문역 못 미쳐 전태일 다리와 전태일 동상을 만나게 된다. 그가 분신한 국민은행 앞 거리는 바로 근처에 있다. (여섯 번째 사진)
청년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에 산화했지만 반 백년이 흐른 지금까지 살아있는 자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그의 죽음이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 조건에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많은 것을 청년 전태일에게 빚지고 있다.
*전태일기념관 사진은 내가 직접 찍은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지 50년이 되었는데 한국 봉제업계의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다음 르뽀 기사를 읽어보시기 바란다. --> 오마이뉴스, "미싱사가 되고 싶다는 학생 말에 가슴이 철렁"
(https://news.v.daum.net/v/202011132148006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