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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금 나는 깨어있다 원문보기 글쓴이: 추공
[원문]
단(斷), 상(常)의 二邊을 떠난 중도 묘유의 이제를 근본으로 삼고
증,감의 이변을 떠난 뛰어난 道를 자량으로 삼아
윤회와 열반의 이변을 떠난 二利의 뛰어난 證果 얻도록
언제나 어긋나지 않는 法 만나기를 원하옵니다.
[해설]
불법의 대요를 根, 道. 果의 세 자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 구절은 대수인법문의 근,도,과를 말하고 있다.
소승에서는 세속(번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根으로 하고, 사제(고,집,멸,도)를 道로,
아라한을 果로 한다.
대승에서는 보리심을 根으로하고, 육바라밀을 道로하며, 아뇨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각,묘각)를 果로 한다
대수인 법문과 달마선에서는 이변을 떠난 中道妙義를 根으로 하고, 無生인 心性은 부증불감하고 불생불멸하며 능소(주과 객관)가 따로 없는 一心임에 自心에서 한 법도 따로 얻고 취할 수 없나니
그 마음을 어떻게 하고자 하면 어긋난 것이어서 단지 어떻게 마음을 하고자 함이 없고 무엇을 따로 구하거나
얻고자 함이 없이 안주하는 無念無修行을 道로 하고, 法界同體의 大無住열반을 果로 한다.
있다. 없다.라든가, 존재는 죽으면 단멸한다거나[단견], 생명이란 단멸하지 않고 영원하다[상견]거나,
모든 존재는 하나다[같다] 또는 다르다,고 하는 생각을 이견(二見) 또는 이변(二邊)이라 한다. 그러나
본래 一心이며 無生이라 이러한 견해는 그림자나 환상을 실재로 보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과 같다.
이견의 미혹과 집착을 벗어나 중도묘유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나무의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도묘유의 이치를 터득하면 속제(세속법의 진리)와 진제(승의제)가 하나하나 모두 수행의 길에
디딤돌이 되어준다. 그리고 저 이변을 떠난 법이(본래 있는 그대로)의 심성에 안주하여 따로 무엇을
얻고자 하거나, 마음을 어떻게 하고자 함이 없음이 실천행인 道이다. 윤회와 열반의 어느 쪽에도
머무름이 없이 단지 법계와 일심동체로서 자리이타(나와 남이 모두 이로움)의 원만구족상을 여여하게
성취함이 바로 가장 뛰어난 果이다.
[원문]
명정(明淨)과 공(空)이 함께 살아 움직이는 체성(體性)이오니
금강유가대수인(金剛瑜伽大手印)으로
미혹하고 산란한 모든 더러움 홀연히 청정케 하여
더러움 떠난 정과(淨果)의 법신 증득하길 원하옵니다.
[해설]
마음수행의 진전은 바로 마음의 밝고 맑음으로 체헌 되어간다.
이는 곧 空의 진리의 체현이기도하다. 즉 공제(空의 진리)가 뚜렷해지면
지혜광명이 증장되어 미혹이 제거되며, 밝아지고, 집착심이 사라지며, 마음이 맑아진다.
또한 明淨이 이루어짐에 따라 空의 체성 또한 훤히 드러난다. 대수인법문은 위와 같은
대승의 중관교의(中觀敎義)를 기본 전제로 한다. 이로부터 미혹하고 산란한 모든 더러움
홀연히 청정케 할 수 있는 금강도(金剛刀)의 날카로운 지혜가 구현되며, 부동의 견고한
깨달음이 성취되는 것이니, 금강유가대수인이라 한다.
[원문]
체(體)에서 모든 증익을 떠난 것이 定見이 오며
바로 거기에서 잘 지켜 흩어지지 않음이 수행의 요체라,
모든 수행 가운데 이것이 가장 뛰어난 것이니
언제나 見, 行, 修, 삼요(三要) 구족하길 원하옵니다.
[해설]
이 마음 이대로 부증불감의 聖心이며 일심이고 무생이라, 무엇을 따로 취할 바도 없고
버릴 바도 없는 것이니, 이 자리에서 이 마음을 어떻게 하고자 하거나, 무엇을 이루고자 하거나,
또 할 수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깨어 있을 뿐이니, 대승 교의의 요체인 삼해탈(空, 無相, 無願)
가운데 무원(無願) 삼매가 바로 이것이요, 지관타좌(마음을 어떻게 하고자 함이 없이 단지 그대로 앉아
깨어 있을 뿐)가 바로 그 뜻이다.
이것이 바로 대수인(大手印)의 요체이며, 가장 뛰어난 법이다.
이를 무수지수(無修之修; 닦는 바 없이 닦음)라 하며, 중국 선종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수인의 삼요는 다음과 같다.
1)見: 일심(一心) 무생(無生)의 심성(心性)을 心悟함,
2)行: 무원무구(無願無求, 일체의 구함이 없슴)의 마음수행,
3)修: 무수지수(無修之修, 닦는 바 없이 정진)로 정진함.
[원문]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이 나타난 것이오며,
마음은 본래 무심하여 마음의 체성이 空이라
공하니 멸도 없고 나타나지 않음도 없으니,
體를 관찰하여 定見 얻기를 원하옵니다.
[해설]
일체는 오직 마음 뿐이라 대상경계 그대로 자심(自心)일 뿐이며 마음 밖에 다른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 마음이 마음을 알 수 없다. 마음이 있으면 마음을 보지 못한다-반주삼매경"]이라
하였다. 마음은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니 마음이 어디에 따로 있다 할 것인가,
그대로 공적하니 그 마음 얻을 바가 없어 무심이다. 마음은 텅 비어 허공과 같아 생멸이 없으며
공적하니 知함도 없고 見함도 없되 일체를 평등하게 걸림 없이 나타낸다. 그래서 화엄경 7권에 이르길
["봄(見)이 없어야 능히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심성(體)을 여실히 보아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것이 定見이며 일행삼매(一行三昧)이고 일상삼매(一相三昧)이다.
[원문]
본래 일찍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심소현(自心所現)인데 미혹하여 경계로 삼고
무명으로 인해 見分을 나"라고 집착하여,
이 두 가지 집착으로 여러 가지 존재로서 유전하오니
미혹과 산란함의 근원인 무명 끊길 원하옵니다.
[해설]
본래 일심의 자리에는 능(能, 주관), 소(所, 객관, 대상)가 따로 나뉘어 있지 않은데, 홀연히 무명의
바람으로 미혹의 꿈 속에 들게 되면서, 일심에서 견분(見分, 보는자리)을 세우니, 동시에 상분(相分,
보이는 대상, 경계)이 전개되고, 견분과 상분의 미세한 전변이 일어 나는데, 이 자리를 장식(藏識, 아뢰아식,
제8식)이라 이름 한다.
동시에 장식의 견분을 我로 여기는 세력이 이루어지며,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내가 있다고 하는
생각(아상, 아집)이 흐르는데 이를" 마나식(제7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나"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잠재된 가운데(제7식),
상분을 대상화 하는 것이 더욱 거칠게 이루어지며(전변, 轉變), 이 대상들에 대한 증오, 애락,시비 등의
모든 분별심이 전개되는데 이를 "의식(제6식)"이라 한다.
이 분별심이 또 전변하며 그 상분을 각 방면별로 인지하게 되는데 이를 전오식(前五識,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라 한다. 동시에 전오식의 상분을 또 한번 더 대상화 하여 전변하니, 본래 식에 있던 것들이
식(識)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이 6진(塵, 티끌) 또는 6경(경계, 대상) 곧 색성향미촉의
모든 바깥 대상(사물)들이다.
그래서 결국 장식 이하의 모든 識 경계는 미혹으로 인해 나온 것이요, 꿈일 뿐이다. 꿈에서 나온
바깥 사물을 보고, 이를 바깥에 따로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니(전도몽상), 이를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도망상의 행업은 그대로 업식(業識)이 되어 장식(藏識)에 갈무리되며,
또한 식의 끈질긴 상속의 전변(轉變)에 합세하고 합류한다.
그러나 바로 본래 일심인 까닭에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한 자리인
것인데 이를 따로 나누어 분별 집착하니, 생사윤회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바로 자심에서 견분과 상분이
여일함을, 두 자리가 아님을 여실히 깨우쳐야 한다. 견분과 상분이 두 자리가 아니니, 곧 一心이고 각(覺)이다.
[원문]
일체는 비유이며 또한 제불을 見함도 없으나
윤회와 열반 등 일체의 근인(根因)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위(違)도 아니요 순(順)도 아니되 둘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중도관으로서
분별을 떠나 심체의 법성 증득하길 원하옵니다.
[해설]
일체는 그림자 같고, 공화(空花)와 같고, 꿈속의 일과 같아 생하였으되, 생긴 것이 아니라
비유(非有)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다 하면 이미 전도몽상이니, 제불(諸佛)이 있다 함도 마찬가지이다.
이 마음 밖에 어떠한 한법도 없고, 그 마음 또한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처소가
따로 없으니, 제불이 어디에 있다 하겠는가~ 제불이 있을 처소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있다 없다, 있으면서 없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의 四句로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한 일심(如來藏)의 자리에는 결정성의 일체 근인(根因, 원인)이 없지도 않는 것이니, 윤회의 생멸법과
생멸이 다한 열반이라는 법, 열반을 성취한 제불의 근인(원인)이 없지도 않는 것이다.
마음수행하는 데는 먼저 위(違, 역, 逆)와 순(順)의 개념을 잘 알아야 한다.
위(거슬리다)란 지금 범부 상태의 어지럽고 욕심으로 가득 찬 더러운 마음을 억제하고 제어하며 고치고
다스려서 가지런히 하고 정화 하고자 함을 말한다. 순(그대로 따르다)이란 마음에 일어나는 욕망 따라
느낌 따라 집착하며 끌려 다니는 것을 말한다.
즉 위는 마음에 일어나는 상(想)을 거부하며 이를 제거 내지는 탈피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순은 그 想에 혹하여 끌려 가는 것이다. 그래서 違(위)는 삼승과 이승 단계의 공부를 말하고,
順(순)은 아직 불법의 가르침에 들지 못한 이들의 심행(心行)을 말한다.
그러나 중도묘의의 일승, 대수인법에서의 중도관은 이 양자의 행이 아니되, 또한 위와 순의 뜻이
함게 저절로 운용된다. 번뇌가 곧 보리임을 心悟한 후에는 따로 이 번뇌의 마음을 작의하여 고치려
하거나 다스려서 가지런히 하고자 하지 않는다. 번뇌의 이 마음 그대로 覺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마음 자리를 떠나서 어디에 열반의 자리, 해탈의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번뇌의 마음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하려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깨어 있는 채로 맡기고 가는 것이다.
이를 임운행(任運行)이라 한다.
선종의 조사선도 곧 이 행이다. 이 번뇌의 마음을 떠나서 따로 해탈을 구하지 않으니, 단지 무원무구
(無願無求) 할 뿐이라, 그 마음 그대로 무념이요, 무수이며 무수지수(無修之修)이다. 바로 이 행은
억지로 마음을 거슬려서 어떻게 하려거나 이루고자 하지 않으니, 위(역, 逆)가 아니며, 또한 단지 물들지
않은 채로 깨어 있을 뿐이고, 번뇌의 마음에 혹하여 끝려 가지 않기 때문에 순(順)도 아니다.
보리임을 아는지라 억지로 물리치지도 않으니, 여기에 순의 뜻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둘(위와 순)이 아니되
둘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중도관이다.
요컨데 중도관이란 일체의 생각을 억지로 끊음도 아니요, 일체의 생각에 물들어 끌려감도 아니다
바로 이렇게 함이 분별을 떠남의 행이니, 심체(心體)는 이 행에 의해 증득된다
[원문]
이렇게 말하여도 나타내기 어려우며
이렇지 않다 하여도 또한 부정하기 어려우니
이것은 의식을 떠난 법성의 무위라,
구경의 정의 체득하여 결정 얻기를 원하옵니다.
[해설]
앞에서 설한 여러 법문들 여러 어구를 들어 설명하였으나 그 실제를 그대로 드러내기 어려운 것이며
또한 그러한 설명이 실제 그대로가 아니라 하여도, 그러한 설명이 잘못 되었다고 부정하는 일도 어려운
일이다. 또한 그 밖의 모든 언설로 표현된 법문도 마찬가지이다. 어쩔 수 없이 언설로 나타내었으나 그
언설만으로 온전히 그 뜻을 드러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 언설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수행자는 법문이 이러함을 잘 알아야 한다.
그 법문에서 뜻을 잘 파악하여 항상 자심에 비추어 보아 자심성지(自心聖智)를 열어 가야 한다.
이러한 대수인법(大手印法)은 의식을 떠나 법성의 무위 그대로 인지라, 이를 통해 구경의 정의를 체득하여
결정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결정이란 일심에서 일체법이 생함 없이 있음이다. 일심이니 무심이고,
무생이니 일심이다. 생함이 없음이니 멸함도 없어 결정이다.
[원문]
이를 모르기에 윤회의 바다에 유전하오며
이 법의 증득을 떠나 따로 불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일체는 이것이든 이것이 아니든 모두 있는 것이 아니오니,
법성과 일체의 근본요의를 증득하길 원하옵니다.
[해설]
일심(一心)이고 무생(無生)임을 모르니 윤회의 바다에 유전한다. 이 법성(法性)을 증득함이 바로 불타
(부처)이니, 이 밖에 따로 불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심이고 무생인데 이것이든 이것이 아니든 무엇이
있다 할 것인가. 그러나 또한 일심이고 무생인 법성이 일체의 종(種, 근본, 根因)이 되는 것은 부사의(不思議,
不可思議)의 요의(了義)이니, 이를 증득하길 발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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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나타난 것은 마음, 공이란 것도 마음,
밝게 통달함도 마음, 미란(迷亂;번뇌)도 마음이며,
生도 마음, 멸도 마음이라,
일체의 더하고 덜함이 모두 마음임을 체득하길 원하옵니다.
[해설]
나타난 모든 것은 마음이 나타난 것이니 오직 마음일 뿐이다. 일체의 명상(名相)과 개념 또한
마음이니, 공이라는 명상과 개념 또한 마음이다. 밝게 통달함도 마음 밖의 일이 아니며,
미혹하여 번뇌의 어지러움에 있음도 또한 마음일 뿐이다. 생함도 마음이요, 멸함도 마음일 뿐이다.
더해지고 감해짐도 바로 마음일 뿐이다. 오직 일체가 마음임을 요달하리.
[원문]
억지로 생각 내어 관(觀) 닦으면 병이되니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
세간의 산람함과 얽매임의 소용돌이 떠나
있는 그대로 본체에 자연스럽게 안주하여
심의(心義)를 잘 호지하고 닦을 수 있기를 원하옵니다.
[해설]
불법 수행에 주의하고 주의할 일이 있다. 바로 어떤 법의 상(法相, 교법의 내용)을 억지로 생각해 내어 觀하는 일이다. 교법(敎法)의 뜻을 올바로 파악하였다면 그 교법에도 머물지 않고 벗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 곧 불법이다. 머리 속에 그려진 법상이란 하나의 개념이요, 영상(相)이고 그림자이니, 여기에 집중하여 붙들고 있는 것은 참다운 수행이 아니다.
결국 머리 쪽에 정신이 집중되니 당연히 上氣가 되어 머리가 아프고 눈이 충혈된다. 수행을 잘못하여 일어나는 병은 거의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 얻을 바가 따로 없는 것이 마음이거늘, 그 심체는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대상이 될 수 없어 본각(本覺)이거늘 무엇을 따로 대상화하여 집중하고자 할 것인가
법상(敎法)을 많이 터득하면 터득할수록 심체(진여, 眞如)에 가까워지게 되어 있는 것이 불법이다. 그래서 가능한한 빨리 최상의 理法을 경론을 통해서 터득하도록 해야한다. 그래야 최상승의 선법이 열리게 된다. 최상승선의 기본은 억지로 생각내어 닦는 수행이 아니라, 무원무구(無願無求, 원하고 구함이 없슴) 무수지수(無修之修, 닦음이 없는 정진)의 임운행이다.
심의(心義)란 곧 일심이고 무생(無生)이며, 오직 마음일 뿐이고, 마음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어, 마음이 마음을 모르며, 마음이 있으면 마음을 보지 못한다는 진리이다. '능가경'에 칼이 칼(자신)을 베지 못한다고 하였다.마음으로 마음을 어떻게 하려는 행을 떠나야한다.이러한 뜻이 수행하는데 항상 지침이 되길발원함이다.
[원문]
거칠고 미세한 망념의 파도가 스스로 적정해지고
평정한 마음의 하류(河流)가 자연히 머무르며
혼침과 산람함의 더러움 떠나
견고 부동의 선정해(禪定海) 얻기를 원하옵니다.
[해설]
모든 망념과 파도는 본래 그림자 같고, 환과 같으며, 허공과 같고, 空花 같으며, 눈을 감으면 나타나는
둥그런 환영과 같아 본래 무생임을 확실히 안다면, 그 상에 물들거나 얽매이거나 집착함이 없게 되어
그 파도가 적정해지고 평온하며 明淨한 마음의 하류가 자연히 머무른다. 혼침과 오락가락하는 산란한 마음
벗어나야 견고부동의 선정이 이루어진다.
[원문]
볼 수 없는 마음 자주 관찰할 때에
볼 수 없는 뜻, 밝게 꿰뚫어 보며
이것인가 저것인가 의심스러운 생각 영원히 끊어서
어긋남 없는 스스로의 면목 증지(證知)하길 원하옵니다.
[해설]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관찰하라는 말인가?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함을
알고, 마음이 본래 무생임을 알며, 감소하지도 증가 하지도 않음을 알며, 마음이 있으면 마음을 보지
못함을 알며, 마음에 일어나는 상념을 얻을 바 없음을 알면, 이 심성이 그대로 불성이요, 법성이며
일심법계임을 아는 것이, 곧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心想을 얻을 바 없으니, 또한 그 심상이 무생임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그 마음을 어떻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그러함을 알고 있을 뿐이다. 곧 無觀의 觀이다. 無修의 修이다. 여기에서 볼 수 없는 뜻이
스스로 밝아져 온다. 밝게 꿰뚫어진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의심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의심하려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이 자리에서 어긋남이 없는 스스로의 면목이 證知되는 것이다.
[원문]
대상에서 마음을 보아 대상을 보지 아니하고
마음에서 마음의 체성이 공함을 관찰하며
이자(二者)와 이집(二執)이 스스로 해탈되어 있음을 관찰하여
광명 심체(心體)의 실상 증득하길 원하옵니다.
[해설]
대상은 곧 이 자심이 나타난 것이니, 대상에서 곧 이 마음을 보아야 하며, 그 마음 또한 체성이 공하여
어디에 있다 할 바도 없다. 대상과 마음의 두가지, 그리고 그 두 가지에 집착인 이집(二執)은 모두 얻을 바 없는
마음일 뿐이요, 공한 자리의 법이니 바로 覺이요, 해탈이다.
즉 심체는 공이고 공한 가운데 전개되는 일체법은 그대로 覺일 뿐이다. 바로 옳게 보면 있는 그대로 모두 해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이 자리는 먼저 일체가 오직 마음일 뿐임을 요달해야 얻어지는 것이며, 오직 마음 뿐임을 요달하기 위해서는 밖에 보이는 대상이 공하여 그림자와 같고, 꿈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서 무량광의 심체, 본각, 실상의 자리가 드러난다. 이들 용어는 모두 같은 말들이다.
[원문]
의식을 떠난 이것이 바로 대수인(大手印)이며
분별을 떠난 이것이 곧 大中道라
이것이 일체에 두루함에 이름하여 대원만이라 하옵나니,
결정심(決定信) 성취하여 하나를 지(知)함이
일체를 知함이 되길 원하옵니다.
[해설]
의식을 떠나 법성의 무위에 안주함이 곧 대수인이다. 의식을 떠남은 곧 분별을 떠남이요,
분별을 떠남은 어디에도 머무르는 바 없는 것이니 곧 대중도이다. 대중도라 하는 것은 일체의 생각을
작의(作意)하여 끊음도 아니요, 일체의 생각에 물들어 끌려감도 아닌 까닭이다.
무원무구(無願無求, 원함과 구함이 없음)가 되어야 의식을 떠나는 것이며, 분별을 떠나는 것이다.
대원만이란 어디에나 평등 무차별로 두루 걸림이 없음을 말한다.
이 대수인(大手印)과 대중도(大中道)의 행(行)이 되어야 대원만(大圓滿)이 가능하다.
결정신이란 바로 일체법이 일심이며 무생의 일체법임을 아는 것이다. 일심에서 생함이 없이 생한 일체법이니
바로 결정성이다. 일심무생의 결정성이기에 하나를 앎이 일체를 앎이 된다. 일심법계이니 일체법이 곧 하나요,
하나가 곧 일체이며, 하나 가운데 일체가 들어 있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들어 있다.
그래서 하나를 앎이 일체를 앎이 된다. 佛眼(불안)으로 보면 일체법 하나하나가 바로 법계연기의 화엄세계이다.
[원문]
탐착하지 않는 까닭에 크나큰 즐거움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상에 집착함이 없기에 광명이 번뇌의 장벅을 떠나게 하옵나니
의식을 초월하고, 분별없는 그대로 임운하여
억지 수행 떠난 끊임없는 행을 원하옵니다.
[해설]
세속법에도 출세간법에도 탄착함이 없는 무원무구행이요, 어떠한 심상도 이미 대상이 아니고,
바로 그대로 일심,여래장 공덕의 자리이고, 大樂이 끊임없이 솟구쳐 나오고, 지혜광명이 번뇌의
씨앗을 멸진하는 무량한 공덕의 자리이다. 대수인 행법의 요체는 억지 수행을 떠남이요,
억지 수행을 떠나니 힘을 덜어 쉽게 가고 멀리 가며, 무상의 구경에까지 갈 수 있다.
그래서 원만성취가 가능하다.
[원문]
탐착과 善妙覺受(선묘각수)도 스스로 해탈되어 있고
迷亂惡念(미란악념, 번뇌망상)도 그 성품은 있는 그대로 청정하며
취사득실의 평상심은 본래 없는 것이니
희론을 떠나 법성의 근본 진리 증득하길 원하옵니다.
[해설]
선묘각수란 수행이 진전 되면서 일어나는 좋고 묘한 경계(느낌)을 말한다. 대개 마음이 일어나는 탐착은 나쁜 것이므로 이를 버리려고 한다. 반면 선묘각수는 이전에 가져보지 못한 안락하고 미묘한 경계인지라 이를 버리려고 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여기에 집착하고 놓치기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다.
탐착을 버리려고 하는 것도 대수인 수행이 아니요, 선묘각수에 집착함도 물론 대수인행이 아니다.
왜냐하면 탐착도 선묘각수도 心相이고 心想일 뿐이며, 그 心想은 그림자와 같고, 환과 같아 무상이고,
무상이니 어디에 따로 대상이 없어,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다. 또한 본래 일심이어서 탐착도
선묘각수도 같은 마음일 뿐이고, 본래 일심이니 따로 버리거나 취할것이 없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따로 없이 일심이니, 그 심체란 곧 각이고 본래 각이어서 탐착이든 선묘각수이든 모두 해탈되어 있다.
탐탁이 그대로 해탈이요, 선묘각수 그대로 해탈이다. 이를 버리고자 하거나 취하고자 하면 이미 대상을
취함이니 無相과 一心에 어긋난다. 그래서 버리려 하거나 취하고자 함이 없음이 곧 바른 수행이다.
覺이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주관과 객관이 둘이 아닌 일심이니 곧 각이다. 일체법이 스스로
해탈되어 있다 함은 설청동시(설함과 듣는 것이 한자리이며 동시임)이고, 신증(身證)의 경계이니, 이를
각이라고 하고, 靈知, 眞知, 절대지라고도 한다. 그래서 미란악념(迷亂惡念, 번뇌망상)도 그 성품은
있는 그대로 청정하고 미묘무비(微妙無比)한 자리이다.
그러나 이 범부의 평상심에 염착되어서는 안된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는 범부중생의 평상심은
착각으로 인하여 나온 것이요, 꿈속에 일과 같아 실재의 것이 아니다. 평상심에 물들지 않을 때,
평상심이 대상이 아닐 때, 평상심은 이제 각의 자리이고 영지(靈知, 眞知)해탈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희론이란 쓸데없는 논변이다. 무엇이 쓸데없는 논변인가, 자심수행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방해만
주는 것이다. 그냥 논변에 끌리어 마음을 사변적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논변을 위한 논변이고
논변을 즐기는 것일 뿐이며, 희론이란 법문의 사변적인 사고로 해석하는 것이다.
법문을 自心에 비추어 보지 못하고 머리로 이리저리 굴리며, 세속의 학문처럼 사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법문에서 자심의 성품(심성)을 보아야 희론에서 떠나는 것이다. 법성의 진리는 바로 희론을
떠나는 데서 발현되는 것이다.
[원문]
중생의 성품은 비록 언제나 불성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한없이 윤회하고 있사오니
고통속에 한량없는 유정중생들에게
언재나 참기 어려운 대비심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해설]
부처님은 知, 情, 意의 세가지 가장 훌륭하고 균등하며 원만하게 갖추어진 분이라고 한다.
대승에서는 대비(大悲 , 情)의 면을 증장하는 내용이 많다. 대승보살은 모든 중생을 같은 뿌리,
같은 몸(同體)로 보아 대비심으로 함께 수행해 가며 성불하고자 하는 원력으로 보살행을 한다.
이러한 원력의 힘으로 소승의 열반락에서 뛰어나와 어려운 보살행을 하기에 아라한을 넘어
8지보살, 9지보살, 10지보살을 지나 등각, 묘각(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바로 대비심이 갖는 힘(능력)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성(지혜)과 의지(옳바름)가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情(자비심)의 면만 치우치게 강하면 미망의 길을 가게 되기 쉽다.
대승의 행은 그래서 대승의 근기가 요구 되는 것이다. 아울러 소승의 가르침도 필요하고 중요하다.
또한 대승의 행에서 思惑(사혹)의 뿌리가 온전히 제거된다.
사혹의 끈질긴 뿌리를 제거하는 데는 情의 순화가 필요하며, 情의 순화는 바로 중생에 대한
동체대비심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情(양심)이 순화 되었을 때 동체대비심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쉽게 동체대비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항상 대비심이 우러나오길
지심으로 마음안을 떠나나지 않도록 불보살과 스승님들께 가피기도를 하는 것이다.
[원문]
참기 어려운 대비심이 멸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일어날 때에
체성(體性)인 空의 뜻이 적나라하게 나타나오니
이것이 어긋남을 떠난 가장 뛰어난 쌍운도(雙運道)라,
밤낮없이 언제나 이 觀에서 떠나지 않길 원하옵니다.
[해설]
佛心은 대비심이고 心體 그대로 불심이니, 대비심으로 충만함은 심체에 이르름이다.
그 심체(신성, 空)란 곧 자비광명과 지혜광명으로 충만한 자리이다. 자비심이 증장하면 지혜심
또한 증장한다. 공의(空義)가 적나라하게 드러남이란 자비와 지혜가 함께 닦아지고 증장됨이
어긋남이 없는 수행이다. 이 양자를 함께 닦아 나가는 것이 쌍운도이다.
[원문]
수행으로부터 나오는 천안통 등의 여러 신통은
유정들을 성숙케 하고, 여러 불찰(佛刹)을 청정케하며
불타의 뛰어난 법과 모든 대원을 원만히 성취하여 주옵니니
구경의 원만한 청정함 이루어 성불하길 원하옵니다.
[해설]
自心수행을 통해 자심이 갈수록 明淨해 지면 결국 眞如를 친히 증명하게 되어 초지보살(환희지)에 오르게 된다. 초지에서 진여를 친증하여 현행하는 아집을 넘어 섰으니 여기서 부터는 聖位가 된다. 그리고 진여불심의 공덕이 하나하나 발현되기 시작한다. 먼저 숙명통 부터 열리고 이어 천안, 천이 신족, 타심 누진통 등의 육신통이 열리게 된다.
묘각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러한 신통은 갖추어 지게 되어 있다. 신통 자체가 목적은 아니나 본래 진여 일심의
공덕이니 그 증득함의 정도에 따라 그만큼의 신통이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초지보살에서 보살십지(法雲地)
까지를 수분각(隨分覺)이라 하니, 이는 처음 진여(覺)를 증득한 후 점차 증득이 심화된 만큼(隨分), 각을 증득하는 단계인지라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 과정은 개인에 따라 신속히 이루어지거나, 몇 단계를 뛰어 넘거나, 하는 경우와 느리게 이루어짐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통력이 갖추어짐에 따라 미혹한 중생을 잘 살펴서 여러 방편을 통해 인도 할 수 있게 된다.
숙명통과 천안통이 이루어 졌을 때 전생의 도반들, 가까웠든 인연중생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하고 있는지를
알아 그들을 인도하며 성숙케 할 수 있는 것이다. 본래 불찰(佛刹, 정토, 淨土)이건만 미혹에 빠진 중생들에게는 오탁한 중생계이다. 수행자의 신통력은 이 미혹한 중생들을 바르게 인도 할 수 있는 힘이 되고 지혜가 되어준다.
그래서 신통력은 정토를 이루게 하는 도구가 된다. 국토를 청정히 하고 중생계를 청정히 함은 곧 자심에서
구경의 원만한 청정심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뛰어난 법과 대원을 성취함이다.
또 [지장광명경]에 "여래는 스스로 청정케 함으로써 중생의 정화를 인도하는 것이다.
여래의 정화와 중생의 정화, 이 두 가지는 나뉘지 않는다." 고 하였다.
진여를 친증하여 보살초지에 이르는 데는 불보살의 가피력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어 대원의 성취에
이르기 까지 불보살의 가지력이 함께 한다. 부처님이 모든 보살의 행을 가지(加持;호지)하심이 곧
여래선이다. 부처님의 가지하심이 없다면 보살들도 아차 하면 잘못된 길로 빠지고 만다고 한다.
[원문]
시방(十方)의 불타와 佛子의 대비력
일체의 청정한 선업력을 지니고
그 힘에 의지하여 자타가 모두 청정하게 되길 기원하오니
여법하게 임운(任運)하여 성취할 수 있게 되길 원하옵니다.
[해설]
모든 수행공덕은 결국 모든 중생에게 회향되도록 발원하여야 한다. 회향이야말로 동체대비의 실현이다.
진정한 성취는 회향이 순수하게 원만히 이루어 진 것이여야 한다. 그리고 모든 중생이 어디에나 계신 불타의
대비력의 가피를 받기를 기원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성취에 일게 하는 가장 뛰어난 행은 자심에서
여법(如法)하게 임운하는 것이다. 여법하게 행함이란 바로 불법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행하는 것이다.
이 行과 願이 제불보살마하살과 상사(上師)의 가피력으로 원만히 성취 하옵길 기원하니이다
- 대수인원문 (大手印願文). 마침-
출처 : [그냥 물처럼 바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