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여름의 숲은 어둑신하고 서늘하다. 숲 속에서, 빛은 사람을 찌를 듯이 달려들지 않는다. 나뭇잎 사이로 걸러지는 빛은 세상을 온통 드러내는 폭로의 힘을 버리고 유순하게도 대기 속으로 스민다. 숲속에서, 빛은 밝음과 어둠의 구획을 쓰다듬어서 녹여버린다. 그래서 숲 속의 키 큰 나무들은 그림자도 없이 우뚝우뚝 홀로 서 있다. 스며서 쓰다듬는 빛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가득 내려쌓여 숲은 서늘한 음영에 잠긴다.
숲 속으로 들어가면, 숲의 빛은 물러서듯이 멀어지고, 멀어지면서 또 깊어져서 사람들은 더 먼 빛 속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간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키 큰 나무들은 알맞은 거리로 뚝뚝 떨어져서 서 있다. 식물사회학 책을 보니까, 나무들도 살기 다툼의 결과로써 개체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는데, 키 큰 나무들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다툼이 아니라 평화의 모습으로 서늘하다. 키 큰 나무들은 저마다 개별적 존재의 존엄으로 우뚝하고 듬성듬성하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 숲의 온갖 나무들은 함께 젖고 함께 흔들리지만, 비가 멎고 바람이 잠든 아침에 숲을 찾으면 젖은 나무들은 저마다 비린 향기를 품어내고, 잎 사이로 흔들리는 아침 햇살 속에서 나무들은 다들 혼자서 높다. 나무들은 뚝뚝 떨어져서 자리잡고, 그렇게 떨어진 자리에서 높아지는데, 이 존엄하고 싱그러운 개별성을 다 합쳐가면서 숲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숲을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해석하려는 말들이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 책도 여럿 나왔고 숲이 좋아서 숲으로 가는 사람들의 모임도 생겼다. 숲을 문화적으로 해석하는 사유는 결국 숲과 인간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일이 될 터인데, '숲의 문화론'은 숲이 문화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전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숲은 가까워야 한다. 숲은 가까운 숲을 으뜸으로 친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로키 산맥의 숲보다도 사람들의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정발산(경기도 고양시 일산동)의 숲이 더 값지다. 숲은 만만하지만, 숲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은 그곳이 여전히 문화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숲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숲의 시간은 퇴적의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흐르고 쌓여서 역사를 이루지 않는다. 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소멸과 신생의 순환으로서 새롭고 싱싱하다.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이다.
여름 휴가의 풍경은 피난 행렬과도 같다. 남부여대해서 어린아이 손을 잡고 젖병 물병 얼음통을 챙겨서 가고 또 간다. 생활을 좀 밀쳐내기란 이처럼 어렵다. 지금 오대산의 전나무숲이나 치악산의 소나무숲, 담양의 대나무숲은 얼마고 깊고 푸르고 그윽할 것인가. 너무 멀고 또 길이 막히니 갈 수 없기가 십상이다.
산다는 일의 상처는 개별성의 훼손에서 온다. 삶은 인간을 완벽하게도 장악해서 여백을 허용치 않는다. 멀고 깊은 숲에 갈 수 없다면, 우리마을 정발산 숲 속으로 가자. 숲은 마을 숲이 가장 아름답다. 거기서 삶과 인간들을 멀리 밀쳐내고 키 큰 나무처럼 듬성듬성 우뚝우뚝 서서 숨을 좀 쉬어보자. 정말 산에는 키 큰 나무가 많다.
- 김훈 에세이 <자전거 여행, 200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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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전국의 산천으로 끌고 다닌 내 자전거의 이름은 풍륜(風輪)이다. 이제 풍륜은 늙고 병든 말처럼 다 망가졌다. 2000년 7월에 풍륜을 퇴역시키고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값 월부를 갚으려 한다. 사람들아 이 책 좀 사가라.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아무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다. 라고 나는 써야 하는가. 사랑이여,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 - 52살의 여름에 김훈은 겨우 쓰다 * [책의 표지에 적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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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金薰), 65세(1948-서울 생). 오랜 기자생활을 거쳐 47세 때인 1995년에 첫 소설〈빗살무늬토기의 추억〉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다.〈칼의 노래, 2001〉〈현의 노래, 2004〉〈남한산성, 2007〉등 발표 작품마다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다.〈자전거 여행, 2000〉 <바다의 기별, 2008> 등 에세이집들도 높이 평가 받았다. 그의 글은 깊이있는 사유와 빼어난 필력으로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시대의 몇 안 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 '산문 미학의 진경을 보여주는 작가', '한국문학에 벼락같이 내린 축복' 등 최고의 찬사를 얻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훈, 그의 글은 거의 다 구해서 읽었다. 강연장에도 찾아갔다. 어쩌면 이토록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경이와 감탄과 함께 마약에 절듯 그의 글에 빠져 들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어느 대목에 눈을 주어도 깊은 성찰과 섬세한 감성, 치밀하고 수려한 명문에 그냥 압도 당한다. 나도 그렇게 써봤으면 하는 부러움과 시샘의 마음이 든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그 사유의 깊이와 피나는 연찬의 결과일 테지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건필을 빌면서 새 작품을 또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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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by McFerrin - Don't Worry Be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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