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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아케이드
엄원태 시집 :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박제영 시집 : 『식구』
사이코 패스 시대와 연민의 시학
임 동확
1.
심심찮게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곤 하는 사이코패스Psychopath 성향을 지닌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큰 특징으로 한다.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체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걸 감지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점들이 공통적이다. 남의 고통이나 타인의 슬픔에 대한 무반응이나 무감각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폭력과 잔인성을 부른다.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느끼지 못하기에 결코 진정한 자기반성이나 죄의식을 가질 수 없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감각은 세계의 타자와 마주하는 데서 오는 반전反轉의 충격과 고통이다. 세상의 보다 높은 진리는 논증이나 검증의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경험적인 통로로 알려진다. 달리 말해, 인간의 고통이나 슬픔은 마냥 피하거나 타기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제 안의 자연적 생명력을 현시하게 만드는, 우리 모두의 삶을 지탱하는 필요불가결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특히 고통과 슬픔은 어느 누구에게도 고유하지 않은 스스로가 신이 아닌 유한자이며, 무엇보다도 극단적인 고통은 자신들을 타자로 경험할 뿐만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타자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마냥 회피와 외면의 대상일 수 없다.
세상의 어떤 고통이나 슬픔에도 무감각하고 무신경한 사이코패스적 시들이 만연하고 있는 작금의 시단에서 필요한 것은, 따라서 무슨 미학적 혁신이나 감각의 신선함이 아니다. 한 개인의 의지나 신념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불가역적인 한 인간의 슬픔이나 세계의 고통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폭력의 역사, 야만의 현실을 보고 느끼는 데서 오는 한 방울의 눈물이 간절하다. 모든 인간들이 처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나 유한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깊이 공감과 더불어 이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자진하여 참가하는 연민 또는 자비의 정신이 더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엄원태 시인의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창작과 비평사』)와 박제영 시인의 『식구』(『북인』)는 그러한 시적 요청에 부응한다. 우연찮게도 두 시인이 공통적으로 어미 소가 송아지를 혀로 핥아주는 것과 같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가리키는 ‘지독지애舐犢之愛’ 다루고 있는 그 좋은 예이다. 먼저 극심한 산고産苦로 “갓 낳은 제 새끼”에 “젖 물리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낙타’ “어미”가 마두금의 연주를 듣고 “제 새끼를 핥아주고 젖을 물리”(엄원태, 「후스후르」)는 사태는, 타인과 함께 슬퍼하고 남의 고통에 참여할 때 참된 인간성이 탄생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동시에 “구제역” 때문에 “살처분 판결 받은” “어미 소”가 “죽는 순간까지” “갓 태어난 송아지에게 젖을 물”리고 “젖은 등을 핥”(박제영, 「지독舐犢」)는 행위는, 내 안의 타자로서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여는 연민 또는 자비의식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
엄원태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눈여겨 볼 것 중의 하나는 “십이 년 전 가출한 아우의 옷가지를/ 이사 때마다 갖고 다니”시는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에 비견되는 “측은지심”(「가출」)이다. 그야말로 인간 성정의 하나를 나타내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의 시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햇살에 폭삭 주저앉은 상엿집”과 같이 “이미 썩거나 메말라버린”, 혹은 “퇴색하거나”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들을 “세세히 어루만지”는 “마음의 일별”(「주저앉은 상엿집」) 또는 상대를 불쌍히 여겨 괴로워하며 “엉거주춤, 그 옆에 서서 어쩔 줄 모”른 채 “내려다보고”(「2월」) 있는 마음의 형국을 보여주고 있다.
우연히 “산길”을 “내려오”다가 “리기다소나무”에서 “삭정이”가 “떨어”지는 사태에서 그 “나무”가 “말없이 말을 건넨” “말”을 “오래 견뎌온 고통”의 “호소”로 받아들이려는 그의 마음가짐이 그 증거다. “소리” 없이 “부러지”는 “나무”를 보면서 느끼는 “나”의 “저릿함”은, 그 “나무”와 “나”와의 동일시 때문에 발생한다. 이와 동시에 “나무”의 “오래고 묵묵한 견인堅忍” 속에서 “제대로 된 호소”를 읽어내는 ‘측은지심’은, “끝내 아무런 말이 없”는 “나무”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라고 왜 괴로움과 슬픔이 없겠는가”라는 반문은, 실상 그 “나무”(「나무가 말을 건네다」)를 통해 과거에 자신이 느꼈던 내적 감정에 대한 확인과 맞물려 있다.
예컨대 “이태 전,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407호”의 “꼬부랑 할마시”의 “호의”가 “조금 어색”하거나 “숨 쉬는 소리”가 자신이 사는 곳까지 “들린다”는 착란현상은, ‘나’ 자신이 “천식”을 앓는 그 “노파”(「햇볕 아래 1」)와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무덤 옆 풀밭 공터 귀퉁이”에 “버려져 있”는 “이주노동자의 것인 듯한”“여행가방”과 “낡은 구두 한 켤레”가 다름 아닌 “내가 전생의 어느 별에선가” 버려두고 “허둥지둥 떠나왔던 것은 아닌가”는 물음은, 그 “여행가방”과 “신발 한 켤레”(「햇볕 아래 2」)의 주인공과 동일시하면서 그의 고통을 함께 하려는 연민의식의 발로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연민의식 또는 자비심은 단지 상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근심이나 걱정, 동정이나 헌신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바로 그것들은 ‘나’의 의식이나 생각과 상관없이 행해지는 ‘절대적 의식’(사르트르)의 출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절대적 의식’의 존재는 우리들 각자의 개별성 아래 모든 인간의 근본적 동일성이 깔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들길 옆 풀숲”에 “버려져 있”는 “마네킹”의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하나같이 닳아버린 잿빛 쓸쓸함으로 닮아 있”(「토르소들」)다는 ‘나’의 생각은,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동일성이 존재하며, 바로 그것이 연민의식을 불러온다는 것을 말해준다. 모든 인간이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느끼거나 사고할 수 있는 공감과 소통능력이 바로 연민의식 또는 자비심의 정체인 셈이다.
그러한 연민의식은 인간의 고유한 성정 가운데 내재한 어떤 감정 중의 하나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처할 수밖에 없는 수동성과 유한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깊이 공감하는 데서 발생한다. 인간의 한계 또는 고통의 극단 속에서 언어를 상실하거나 세계가 차단되는 경험이 타자와의 소통 내지 공감으로서 연민의식을 부른다.
이제 너는 타나 호수로 돌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타나 호수, 내 침침한 흉강 한쪽에 넘칠 듯 펼쳐져 있다. 거기에 이르려면 슬픔이 꾸역꾸역 치미는 횡경막을 건너야 한다. 고통의 임계지점, 수평선을 넘어가면 젖가슴처럼 봉긋한 두 개의 섬에 봉쇄수도원이 있다. 우리는 오래전 거기서 죽었다. 파피루스 배 탕크와는 한때 내 몸이었다.언젠가 다시 그곳에 가리라. 그때면 너는 물론 거기 없을 테지만, 한 무리 펠리컨들이 너를 대신하여 오천 년쯤 날 기다려 주리라. 그때 내 입에선 문득 악숨 말로 된 노래가 흘러나올 것이다.
-「타나 호수」 전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타나 호수”로 “돌아”가기 위해선 ‘나’는 극단적 경험으로서 죽어가는 경험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자아를 상실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의 임계지점”을 통과해야 “젖가슴처럼 봉긋한 두 개의 섬”에 있다는 “봉쇄 수도원”. 결코 관념으로 통제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외부의 공간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경험을 맛볼 수 있다. “한때” “파피루스”로 만든 “배”와 한 “몸”이 되는 경험이 역시 그렇다. 이는 절대적 “고통”이 누구에게도 고유하지 않는 익명의 탈존을 나타내며, 무엇보다도 거기에 떠밀려간 자가 급격하게 “한 무리 펠리컨” 같은 타자로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젠가” “문득” “내 입”에서 “흘러나올” “악숨 말로 된 노래”는 ‘나’의 존재가 스스로 정립될 수 없으며, 그러기에 ‘나’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타인의 목소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병원 주차장에 쭈그리고 앉아 통증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속수무책 깍지 낀 내 손가락들을 가만히 쓰다듬어주던” “나”가 아닌 “바람”이라는 사실은, 결코 “나”(「독무獨舞」)는 자신 안에 갇힐 수 없는 자이자 결국 타자에게 내맡겨 있는 자라는 것을 가리킨다. “새들마저 외면하는” “지렁이들”의 “필사必死의 순례행렬”이나 “일몰의 산업도로를 건너려는 허리 굽은 노파의 막막함”은 ‘나’의 “생”(「길을 가면서」)이 결코 ‘나’의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완전히 타자에게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젖 뗄” 무렵의 “강아지”와 “내가” “각각의 슬픔으로 여문 검은 눈망울을/ 서로가 처음인 듯 가만히 들여다보곤 하는” (「강아지들」)것은 ‘우리 모두’가 필연적으로 외부ex나 타인으로 향해 있으며, 이때 발생하는 연민은 우리가 타자 자체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3
박제영 시인의 이번 시집 『식구』를 지배하는 정서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어버지로서 삶의 애환만이 아니다. 그러한 표면적인 가족애와 부성애 뒤엔 “맥업시 맴이 짠~해지는”, “거시기한 맛”(「거시기」)으로 비견되는 인간의 근원적인 삶의 애틋함 또는 서글픔이 스며들어 있다. “가문을 욕보”이고 “양귀를 믿”었다는 “죄”로 질식사한 “열아홉 살” “딸”을 못 잊어 “사십구 일을 꼬박 피울음 쏟아냈다”는 “제종증조고모” 때문에 “장사익의 찔레꽃이 나의 십팔번이 된 사연”(「도모지塗貌紙」)이 그렇다. 그의 시들은 어쩌면 흘려보낼 수도 있는 집안 내력의 사태들을 통해 보잘것없는 삶의 외로움이나 슬픔을 공유하고 서로 위로해주려는 마음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연민의식이 개인적인 감상感傷이나 일방적인 동정에 그치지 않은 것은, 그의 시가 서적 대상에 대한 서로의 동등성과 더불어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돈 법네 시 씁네 바꺁으로만 사십 년 나댕겨부렀”다는 “일흔” 나이의 “노시인의 말”을 듣고 새삼 “잠든 아내와 딸을 와락 깨워” “뽀뽀를 한 참 해대”(「뻘짓」)는 행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가장으로서 새삼스런 이러한 ‘나’의 이런 행위는, 단지 가족에 대한 ‘나’의 미안함이나 무책임성 때문만이 아니다. 그 노시인의 회한어린 말을 통해 그의 식구들이 일방적인 보호나 시혜의 대상이 아닌, 저마다 무한한 가치를 갖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
거짓말 하면 키오키오 코가 길어진단다
도은이가 거울을 보면서 자기 코를 만질 때
우리 딸 거짓말한 거 있지요?
물어보면
달기똥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우리 집에는 열 살짜리 피노키오가 산다
2
아빠 말대로라면 아빠 코는 코끼리 코보다 길어졌겠지요
아직도 내가 어린앤 줄 아는 아빠 생각하면
어른이 되면 안 될 것 같아서
거울을 보다가
그만 눈물이 나기도 하는데요
우리 집에는 피노키오를 사랑하는 코끼리가 삽니다.
-「피노키오」 전문
위시에서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다고 믿는 “열 살짜리” “딸”과 “아빠” 사이의 관계는 일단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이다. 특히 어린 딸은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에 비해 모든 능력과 판단력이 뒤떨어지는 약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다고 말하는 “아빠”와 그러한 “아빠”를 “생각”해서 짐짓 어린애인 척 하는 “딸” 사이엔 근본적인 인격의 동등성이 존재한다. 보호자이자 강자의 위치에 있는 “아빠”가 “열 살짜리” “딸”에게 일방적으로 ‘정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도 “아빠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기 나름의 개별적 판단력과 개성을 가진 주체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니까 “아빠”인 “내가 바위를 내고” 어린 딸 “도은이가 가위를 내도 도은이가 이긴 것”(「가위바위보」)으로 하거나 그 “도은이”와 술래잡기를 하면서도 “언니”가 못 본 척하며 “동생”(「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게 계속 양보하는 것은, 아버지와 언니의 일방적인 시혜와 배려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부성애나 형제애를 빙자한 지배욕 또는 폭력일 수 있다. 달리 말해, “식구들 먹다 남은 밥이며 반찬”을 “끼니”로 삼은 “아내”의 “지지리 궁상”은 단지 “박봉”과 “자식들”(「거룩한 계보」)을 위한 희생과 헌신만을 보는 것은 역설적으로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가족 관계만을 확인하려는 처사이다. 그렇게만 보는 경우 그 아내의 숭고한 행위 속에 들어 있는 타자의 주체성에 대한 세심한 인정과 배려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있다.
“오지랖 넓”고 “입심” 단골 “호프집” 주인인 “남여사”의 “주부백일장 장원기”(「남여사 주부백일장 장원기」)처럼 웃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지게 하는 그의 시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어진 사실을 곧이곧대로 드러내기보다는 에둘러 표현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나타내는 해학諧謔 또는 다의어 또는 동음이의어를 통한 말장난pun 속엔 각자의 인격성과 주체성을 전제로 한, 타자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과 유대의식이 들어있다. 나이와 지위에 관계없이 인격적 동등성과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는 진정한 의미의 연민이며, 타자와의 진실된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신의 존재적 요청에 충실한 것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게 그의 시라 할 수 있다.
4.
한때 젊은이들에게 신자유주의 체제의 폭력에 저항하고, 정치적 무관심과 체념을 떨쳐버리면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라고 호소하는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소책자가 전 세계적으로 ‘분노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에 무감각하고 냉혹해진 사이코패스적 시대 속에서 무조건 분노하기 앞서 ‘연민하라’가 먼저가 아닐까. 특히 자신과 타인들의 아픔과 상처에 민감한 시인들이라면 인간의 동일성과 개인적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공감각共感覺, co-sensation을 통한 생명의 공동 감지를 뜻하는 연민이 더 절실하고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현란한 말재주와 유창한 언어 구사, 화려한 제스처와 현란한 기교에 가려진 낯선 느낌이나 소름끼치는 냉담한 시선이 지배하는 오늘의 시단 속에서 두 시인의 시집이 갖는 의의는 여기에 있다. 자세히 보면 논리적 단절과 근거 없는 비약에 따른 산만성과 주제의 분산이 마치 사이코패스의 뇌의 구조와 닮아있는 일말의 시들이 만연하고 있는 이때, 그들과 달리 이들 두 시인의 시들은 결코 날렵하거나 번잡하지 않다. 오히려 그러기는커녕 일견 주제나 기법 면에서 뒤처지거나 낡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들이 공통적으로 선보이는 연민의식은 자칫 시대착오적 감정의 투사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은 단지 그 자체로 그치지 않는다. 한 인간의 “고통과 결핍”으로 형성된 “그늘로 인해 생”(엄원태, 「싸락눈」)은 뜻하지 않는 지혜나 창조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아무렇지 않은 듯” 남편 “항문의 피고름” “맨손”으로 “짜내”는 “아내”의 “손”(박제영, 「약손」)과 같은, 모든 타자들에 대해 무한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 세상의 불의와 불행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타자들에게 목적과 근거 없이 열리는 감정체험의 하나로서 연민의식은, “눈보라 속에서도” “갯쑥부쟁이 꽃대들”이 “안간힘을 다해 허리를 곧추세”(엄원태, 「눈보라」)우도록 한다. 또한 그것들은 “사람이 삶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킬 뿐만 아니라 “인생의 의미나 우주의 신비”에 대한 “직관력이나 통찰력”(박제영, 「마음이 부르는 노래」)을 선사한다.
따라서 “눈물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자 위무”(엄원태, 「후스루흐」)이라는 깨달음이나 “떨어지는 원숭이”를 “몇 도 각도로 총을 쏘아야 하는가?” 보다 “먼저 치료”해주는 것이 먼저라는 것 때문에 “공학도”(박제영, 「누가, 인간에게 원숭이를 죽일 권리를 주었나」)가 되기를 포기하게 만든 양심의 부름은 아무리 반복돼도 낡지 않은, 야만과 광기의 역사를 반성하고 성찰시키는 인간들의 영원한 덕목이다. 결코 행복하지만은 인생을 견뎌내고, 궁극적으로 고통스럽고 비참하며 슬픈 세상과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선한 눈’을 하고 있기에 연민에 가득 찬 이들 두 시인의 시들이 더욱 빛난다고 할 수 있다.
임동확
1987년 시집 『매장시편』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외
현 한신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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