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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묵상글 ( 연중 제18주일. - 일용할 양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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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일용할 양식
정해진 양식,
필요한 양식,
이 둘 가운데 어떤 것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할까?
풀어서 얘기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먹어야 할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다 청해서 먹어야 할까?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만나를 줄 터이니 일용할 양식만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만나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입니다.
거두는 수고를 인간이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수고를 한다 한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그 수고가 헛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베드로가 고기잡이할 때의 그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래아 최고의 어부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과 만나는 그날처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그때까지 자기가 고기를 잘 잡아서 고기를 많이 잡고,
자기가 애를 많이 썼기에 많이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을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힘이 있지요.
능력과 노력이 그것인데 신앙이 없는 인간은 보통 자기에게 능력이 있고
거기에 노력까지 다하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베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만은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는데
예수께서 하라는 대로 하니 많이 잡게 되었고,
이때 그는 예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주님임을 깨닫고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느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기를 써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됩니다.
만나에 담긴 또 다른 뜻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만큼만,
달리 말하면 정해주신 대로 거두어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필요한 만큼 청하는 것을 불허하시는 것일까요?
프란치스코는 가난에 관해 얘기하면서 필요가 곧 법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필요해서 청하는 것과 욕심으로 청하는 것은 다르다고 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신다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는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청합니까?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조금 필요한데도 많이 필요하다고 필요에 거품이 없습니까?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다시 말해 하루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천년을 써도 다 쓸 수 없을 만큼 욕심부림으로써
결국 필요가 아니라 욕심으로 청하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내게 더 필요하다 하진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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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 세상에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한 단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냥’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실수한 사람에게 “왜 그랬어?”라고 묻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그냥”이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이 무책임한 단어에 화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무책임한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떻게 되겠지.’라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나’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당연히 자기가 만든 ‘나’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남이 만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온갖 불평불만을 다 쏟아내곤 합니다. 부모님 탓, 조상 탓, 형제자매 탓, 친구 탓, 회사 동료 탓, 환경 탓,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 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남이 나를 만들었을까요? 큰 착각입니다. 자기가 만든 ‘나’를 부정하는 것은 현재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어떻게 되겠지’라면서 책임감 없이 사는 우리입니다. 그 결과의 삶은 만족스럽지 못한 곳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지금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바로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고유한 ‘나’를 만들면서 지금을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남 탓, 조상 탓, 환경 탓, 하느님 탓 등을 하고, ‘그냥, 어떻게 되겠지.’ 등의 무책임한 말로 꽁꽁 싸매고 사는 삶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 혼자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언제나 함께하시기 위해 생명의 빵을 매 미사 때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은 빵을 배불러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빵이라는 사실은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거저 주어지는 빵을 계속 먹고 싶어 했기에 하느님의 일을 하려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일을 해야 예수님의 빵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실 주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필요한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계속 베풀어주신 것은 오로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닌 무상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느님과 함께하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면서, 자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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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한다면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하느님의 뜻과 일치될 것입니다(성 아오스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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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연중 18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입니다. <제1독서>는 이집트를 탈출해 홍해를 건너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 준 양식”인 메추라기 떼와 만나를 먹은 이야기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선포하시며, <제2 독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고, 옛 인간을 벗고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로 많은 이들을 먹이신 후에 군중을 피하여 호수 건너편으로 오자, 그곳까지 몰려 온 군중의 세 가지 질문과 한 가지 청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군중의 질문은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 25)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6-27)
군중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빵을 배불리 먹었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에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사람의 아들”이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브로시스)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 34)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군중의 질문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여기서, ‘일’(에르가)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이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그분의 뜻을 우리가 실천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곧 ‘믿음’이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요한 6,27)으로 믿지 않는 이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세 번째> 그들의 질문은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 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물로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그러나 이 빵은 더는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빵으로,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곧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동시에, 이 빵을 먹는 사람도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마침내 군중은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사실, 물질의 빵과 생명의 빵인 예수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물질의 양식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살과 피로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주님!
부서져 먹히게 하소서!
부서져 먹히는 빵이 되고서야 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혀 형제들 안에서 사라져버리게 하소서!
먹혀 사라지고서야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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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가 생명의 빵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사랑에도 암균이 있다. 그것은 의심이다. 사랑에도 항암제가 있다. 그것은 오직 믿음”(정채봉).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에 이은 이야기입니다. 빵의 기적에 사람들은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그 기적이 지닌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빵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과 또 다른 생명, 곧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는 분, 삶의 질을 높여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썩어 없어질 빵으로 오천 명을 먹여 살리는 육체적인 생명이 있듯이 썩어 없어지지 않을 빵을 먹여서 살리는 참다운 생명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드러난 은총에 매이지 않고 언제나 은총을 주시는 분께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 주님의 권능으로 무덤에서 나온 나자로, 많은 치유를 경험했던 이들, 주님의 말씀과 손에 의해 치유를 받았던 이들은 오늘 여기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 지상을 떠나 하느님 안에 새 생명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을 가진 육이 아니라 육을 입은 영입니다. 영이 먼저입니다. 그럼에도 육을 중심으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얼이 빠지면 껍데기입니다. 우리는 알맹이, 하느님의 영을 지켜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지만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마땅히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준 것도 “주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신명8,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밥보다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라는 말 한마디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 날, 내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을 먼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 아침 주일미사참례를 한 다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개인 일이 급해 주일을 궐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행, 휴가는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주일을 궐하면서 휴가를 하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무엇을 앞세우는가에 따라 믿음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체는 곧 예수님의 몸입니다. 영생의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얼마나 잘 준비된 마음, 믿음으로 모셔야 하는지요? 요즘 많은 사람이 몸에 좋다는 음식을 찾습니다. 웰빙 식품을 먹으려 애씁니다. 영양보조식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영원한 생명의 빵인 성체 한번 모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썩어 없어질 빵과 생명의 빵은 서로 대비를 이룹니다. 다시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먼저 챙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성체만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무엇에 앞서 성체를 모실 수 있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계심을 기뻐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체를 주신 이유를 알고 성체를 갈망하면 좋겠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 못 하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면 더 바람이 없겠습니다.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에 속하는 것들을 감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로 오는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2,14). 영이 맑으면 영이신 주님과 통합니다. 성시간에 참여하는 어린이 복사들의 모습을 보면 여러분이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썩어 없어질 세상의 헛된 것에, 매이지 않고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달콤하게 유혹하고 끌어당긴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앞세워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파리들이 지하실 바닥에 쏟아진 꿀을 발견하고는 달려들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달콤한 나머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먹다보니 발이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서 도저히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죽어가면서 파리들이 말했습니다. “한 순간의 달콤함 때문에 이렇게 죽어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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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7월 9일에 휴가를 떠난 부주임 신부님이 이번 주 목요일에 돌아옵니다. 건강하게 잘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제가 보좌신부로 있을 때도 휴가를 갔습니다. 당시에는 월요일에 가서 금요일에 오는 일정이었습니다. 주일을 껴서 휴가를 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여름 행사를 마치면 주로 바닷가로 가서 스쿠버 다이빙을 했습니다. 겨울 행사를 마치면 산으로 가서 스키를 타거나, 산행을 했습니다. 시간도 흐르고, 세상도 바뀌어서 요즘은 주일을 포함한 휴가를 가곤합니다. 휴가를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건강입니다. 건강하지 못하면 휴가를 즐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휴가는 몸이 떨릴 때 보다는 마음이 떨릴 때 가라고 합니다. 둘째는 시간입니다. 지나치게 바쁘면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빠듯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휴가를 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 이런 광고도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 휴가를 떠나라!’ 셋째는 여유입니다. 휴가를 가려면 비용이 필요합니다. 휴가 중에도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 가난한 사람에게 휴가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넷째는 친구입니다. 혼자서 휴가를 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친구와 함께 휴가를 떠납니다. 저도 피정은 혼자서 간 적이 있지만, 휴가는 늘 친구와 함께 다녔습니다. 바쁜 일상을 떠나서 몸과 마음을 여유롭게 재충전하는 휴가를 떠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휴가는 주차장이 아닙니다. 휴가는 주유소와 같습니다. 주유를 마치면 차는 다시 목적지로 떠나기 마련입니다. 휴가라는 주유를 마치면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은 주차장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당에 와서 영적인 말씀을 듣습니다. 성당에 와서 기도합니다. 그렇게 영적인 주유를 마치면 가정으로, 직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영적인 충만함을 가족과 이웃에게 나누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간디의 눈에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수레바퀴를 굴리면서 살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먹을 양식이 없다고 불평하였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다면 삶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만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해결되어도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늙게 되고, 뜻하지 않지만 병이라는 친구가 불쑥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삶의 시계가 멈추고 우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운명입니다. 이런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이런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야만 비로소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은 ‘인생’이라는 짧은 휴가를 보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인생이라는 휴가에서 영적인 주유를 잘 마치고 우리의 본향인 영원한 생명에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움이 많아도, 신앙이 깊어도, 오랜 수도생활을 했어도 우리는 이 짧은 휴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돌아가야 할 곳을 모르고 방황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무엇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양식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새 인간을 입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한다.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인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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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이거 빼면 시체지.’라는 말 종종 하는데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서 무엇을 빼면 시체 같을지 말입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일지 모릅니다. 그것이 내 생명력일지 모릅니다.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돈 때문이라면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요? 돈을 벌기 위해 내가 산다면 말입니다. 권력, 명예라면 신기루 같지 않을까요? 있다가도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끝도 모르는 것이 바로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까? 무엇이 내 생명력입니까? 무엇이 오늘의 나를 살게 합니까?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참으로 많습니다. 3년이라는 공생활을 하셨지만,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하나하나 다 기록하면 세상을 덮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많은 일을 단 두 글자로 말한다면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늘 자기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길 바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늘 자신의 삶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손짓이나 눈빛에서 그것을 알려주시려 노력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측은히 여긴 사건도, 죽은 라자로를 보고 눈물 흘리는 모습도, 생명의 물을 달라고 말하는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모습에서도,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병을 고쳐준 모습에서도 모두 사랑이 묻어납니다.
주님에게서 사랑을 빼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듯이 예수님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주님의 생명력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나누어주시려 합니다. 우리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말합니다. 주님처럼 사랑하라고, 그 사랑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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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박 전
애호박과 당근을 3mm 정도로 채를 썰어 주세요.
채를 썬 후 소금 티스푼을 넣고 절여주세요. 10분 후 완전히 오독오독해진답니다.
10분 정도가 지나면 물이 절인 그릇 안에 물이 고여있을 거예요. 그곳에 물이 흥건하지 않을 때까지 부침가루를 넣어주세요. 3스푼 혹은 4스푼 정도면 될 거예요.
그렇게 반죽을 한 후 잘 부쳐주세요. 부칠 때 도넛처럼 부치면 사방을 더 바삭하게 드실 수 있어요.
만약 집에 청양고추가 있다면 채를 썰어 부칠 때 위에 고명으로 올려주세요.
도넛처럼 생긴 애호박 전, 속이 촉촉한 우리 닮은 ‘겉바속촉’을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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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키엣 대주교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양식
베트남은 아직 가난한 나라이지만 자살율이 증가하고 사고로 인한 사망률 또한 높아지고 있습니다. 붐비는 대도시 좁은 도로 사이를 대형 오토바이로 경주하듯 질주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그로 인한 사망률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먹고 살기에 바쁜 어려운 시절에는 오직 먹고 입는 것 만을 바라고 그것만 충족되면 행복했습니다. 더 많은 행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풍요로움이 행복과 비례하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정해 놓은 틀을 위해 몸과 마음은 바빠지고 지쳐만 갑니다. 내 옆의 동료들은 같은 곳을 향해가는 친구가 아니라 적이기에 나를 뛰어 넘게 놔두지도 않고, 내 울타리에 들어오는 것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나를 보호하던 울타리 안에서 홀로되어 철저한 고독의 순간이 될 때야 현실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걷느라 힘들 땐 자전거만이라도, 자전거가 생기면 오토바이, 또 자동차, 그리고 더 좋은 럭셔리한 고급차 등, 욕심은 한계가 없고 통제되지 않습니다.
물질이 채워지면 허전한 삶을 채워 줄 또 다른 갈증이 생깁니다. 평화와 사랑, 행복에 대한 갈증, 갈증이 강렬할수록 인간은 불안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은 눈에 보이지만 내 안의 행복은 보지 못합니다.
간절히 양식을 구하는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무한한 욕망과 갈증을 채워 줄 가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참된 빵이며 생명의 빵,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양식, 그것은 주 그리스도의 몸이십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찾아 떠났고 귀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귀한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크나 큰 시련이었음에도 그는 아들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진실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구속을 끊음으로써 주님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절대 선이신 주님과 견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다른 어떤 환상도 쫓지 않고 주님의 참 행복만을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그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덧없는 행복이 아닌 행복의 원천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재물은 필요합니다. 또 그것이 행복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 속의 영원한 보물이 없다면 눈 앞에 보이는 물질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가치가 아닌 절대 가치이신 주님을 찾으십시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영원한 참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종교를 갖는다” 또는 “먹고 살기 바빠 종교를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노력하지만 얻고 나면 곧 싫증을 내고 또 다른 꿈을 꿉니다. 이러한 경험이 있습니까?
3. 물질과 영혼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주님 옆에서 느낄 수 있는 만족과 행복을 느껴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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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탈출(Exodus)의 여정
"참 아름다운 사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최소한 대칭구조를 이루는 두 사람입니다. 더불어 하는 이, 역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더불어, 끊임없이 탈출의 여정에 올라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이들이 아름답습니다. 몇가지 아름다운 사례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8월4일 주일이라 기념하지 않지만 원래는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1786.5.8.-1859.8.4.) 기념일입니다. 전세계 본당 사제의 수호성인으로 그의 전설적인 말년을 소개합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는 감동입니다.
“1855년경, 아르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숫자는 한 해 동안만 해도 2만명에 달했다. 이를 하루 단위로 나누어 계산하면 매일 평균 60명이 방문한 것이다. 비안네 신부는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에게 하루 최소한 16-18시간까지 고해성사를 줬고 교리를 가르쳤고 기도했다.
비안네는 하루 평균 두세 시간의 수면밖에 취하지 못했다. 1859년 8월4일 새벽 2시, 요한 마리 비안네는 아르스에서 41년5개월 동안의 사목활동을 마치고 향년 73세에 선종하였다. 그가 선종한 날 아르스의 모든 사람이 슬피 울었다.”
비안네 사제의 감동적인 하느님 사랑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한순간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느니 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기를 바란다. 순간순간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수 없어도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제혀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도 심장이 고동칠 때 마다 제 마음이 주님을 사랑한다 말하기를 바라나이다.”
비안네 사제의 삶의 원동력은 바로 하느님 사랑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심신이 아파 아침미사에 거의 못나오던 수도형제가 칸톨 부재로 어려움을 겪자 초인적 믿음으로 연이어 칸톨을 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고맙고 자랑스러워 부재중인 원장과 기쁨을 나눈 대화를 소개합니다.
-“피델리스 수사의 책임감과 활약이 놀랍고 감사하네요! 아침미사부터 끝기도까지 칸톨 훌륭히 소화해 내고 있고, 저녁기도 후렴도 성공적으로 불렀고 방금 성가지도 역시 잘 끝냈습니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힘들어도 칸톨하기 위해 참는다고 합니다. 자랑스럽고 고마워 기쁜소식 알립니다.”
“놀랍습니다. 신앙에서 나오는 저력같습니다.”-
요즘 프록스꽃이 한창입니다. “청춘의 기쁨, 열정”이란 꽃말도 멋집니다. 이 꽃을 받은 분이 보낸내 메시지입니다.
“아멘! 꽃말이 주는 설레임에 기분이 좋아지네요! 감사합니다.”
하느님 주시는 청춘의 기쁨, 열정으로 사는 사람이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이 그러했고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그러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신선한 기쁨을 선사합니다. 이렇게 사는 분들이 진정 주님을 닮은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우면 원망없는 세상이 된다.”<다산>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봄바람(춘풍;春風)처럼 부드럽고 하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가을서리(추상;秋霜)처럼 엄격하게 하라.”<채근담>
엊저녁과 아침성무일도 후렴의 뒷맛이 지금까지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오늘 하루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로 노래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이런 기도내용을 믿고 실천하는 이들이 영적으로 참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우리 삶의 여정은 ‘더불어, 탈출의 여정’입니다. 평생 이 탈출의 여정에 항구하는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이의 전형적 모범이 제1독서 주인공 모세요, 제2독서 주인공 바오로요,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이고 그 뒤를 따를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 구체적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이들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제1독서 탈출기에서 모세의 인도하에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이들과 반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니 하느님 들으라 하는 불평들입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그대로 욕망에 노예된 우리의 보편적 모습니다. 영육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영적 삶을 살기는 이처럼 힘듭니다. 자비로운 주님은 이들에게 저녁 어스름에는 메추라기 고기를 내려 주고, 아침에는 만나 양식을 배불리 먹여주시니 우리가 부끄러워집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모세가 주고 받는 말이 마치 우리가 이스라엘 자손이라도 된 듯 부끄러워 더욱 분발하게 합니다.
“이게 무엇이냐?”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
저절로 이들과는 반대로 살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되니, 이들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불평불만 대신 찬미감사로 응답하며,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중에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과거 지향적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으로 주님과 함께 힘차게 희망차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불어 탈출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모세가 그러했고 예수님이 그렇게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둘째, ‘생명의 빵’ 예수님을 찾고 믿는 사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신 주님입니다. 바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모시고자 이 거룩한 생명의 잔치이자 주님의 희생 제사인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일은 이런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온힘과 온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하느님의 일은 없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I AM the bread of life).”
모세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 이름이 ‘나다(I AM)’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고백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I AM the Light of the World)
“나는 문이다”(I AM the Gate)
“나는 착한목자이다”(I AM the Good Shepherd)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나는 길이다”(I AM the Way)
“나는 포도나무다”(I AM the Vine)
하느님은 아름다움 자체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고스란히 닮은 예수님 역시 참으로 아름다운 분입니다. 우리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해 주는, 우리를 언제나 구원에로 초대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과 하나되어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첩경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을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래서 주님을 찾는 성소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 이런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찾지 않고 엉뚱한 세상적인 것에서 찾기에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른 영혼들입니다. 세상에 주님 아닌 그 누구가, 그 무엇이 이런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을런지요!
셋째, 새인간을 추구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평생목표요 과제가 새인간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사랑하여 날로 닮아갈 때 새인간으로 변모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 모범이요 새인간의 정체를 밝혀주며 우리를 고무 격려합니다. 주님을 그대로 닮은 새인간의 모범인 바오로의 육성을 듣는 듯, 단숨에 읽혀지는 대목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지 마십시오.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가르침을 받은대로 살아가십시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가는 옛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인간을 입으십시오.”
죽는 날까지 계속될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평생과제입니다. 이 기쁨, 이 맛, 이 재미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말씀을 통한, 기도를 통한, 교회를 통한, 미사를 통한 주님의 무상 은총이 우리를 부단히 정화하고 성화하여 날로 주님을 닮은 새 인간으로 만들어 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의 탈출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시고 날로 당신을 닮은 새인간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지혜16,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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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결단>
삶은
피할 수 없는
결단의 연속입니다
함께 배 부르려
자신을 내어놓는 것과
제 배를 채우려
굶주린 이를 외면하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단!
쓰러진 이 일으키려
몸을 숙이는 것과
높은 곳에 오르려
약한 이를 짓밟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단!
더불어 가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과
홀로 나아가려
뒤쳐진 이를 내치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단!
정의를 외치며
힘겹지만 참 생명을 누리는 것과
불의에 무릎 꿇어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가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단!
아낌없이 내어놓는
충만함에 배부른 것과
게걸스런 탐욕을 채우려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단!
모든 이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삶의 결단은
그리스도인에게
피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결단을
다그칩니다
섬김과 나눔의 거룩한 예물로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오직 주님만을 주님으로 받드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한낱 당장의 사리사욕을 채워주는
종으로 삼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결단!
생명의 양식인 주님처럼
다른 이에게 먹힘으로써
죽음의 기운 가득한 세상에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과
모든 이에게 먹히시는
생명의 양식인 주님을
홀로 소유하여
죽음의 양식으로 삼는 것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결단!
중간은 없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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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18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당신자신을 생명의 원천이라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메시지는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묘이며 비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의 영혼의 요구를 채울 수 있는 일체의 행복과 일체의 생명이 있습니다. 신앙은 전 존재를 그리스도께 위탁하는데서 절정을 이룹니다.
성 보나벤뚜라는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의 근원임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얘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을 감추어 두신 생명의 책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다양한 지혜가 그분으로부터 비추어져 나오며 그분안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영원한 기원과 부패하지 않는 본질, 생명을 주는 지식과 지워 질 수 없는 글씨를 가진 이 책을 찾아 내야 합니다. 이책을 연구함도 바람직하고 이책의 가르침은 쉬우며 그 지식은 감미롭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으며 그 말씨는 이루 표현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 책을 찾아내는 이는 그 누구든지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이 지상 생활의 목적은 우리 마음안에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즉 마음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초자연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소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내면, 곧 존재의 숨겨진 부분으로 바로 그곳에 존재의 충만함이 있으며, 이곳에서 인간과 하느님이 만납니다. 마음은 존재에 있어서 생명의 근원입니다. 마음은 인간 존재의 중심이고, 지능과 의지의 활동적 기능의 근본이며, 모든 정신적 생명이 흘러 나오고 모아지는 지점입니다. 인간의 심리적이고 정신적 삶이 솟아나오는 불명료한하지만 심오한 원천이며, 인간은 마음이 있어 생명의 원천과 가까워지고 통교하게 됩니다.
마음안에 있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역동적 생명력이 위로향할때는 영원불변하고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갈망하고 그리워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생명력이 아래로 향할 때 불순함, 독선, 위선, 논쟁, 완고함, 불화 그리고 직접 혹은 간접으로 말과 행동으로서 어떤 독특한 탁월함을 표명하고자 하는 생각, 이와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결핍, 영혼의 교만, 혹은 어리석음으로 나타나는 자기의 생명을 경시하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안에 용솟음 치는 생명력에 대한 섬세한 자기 관찰과 진실한 자아인식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높은 이상으로 삼는 것 안에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하느님 앞에서 더 낫게 보이려고 높은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나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내려가 나의 욕정과 욕망, 나의 분노의 생명력을 통해 하느님께서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회피하고 싶은 이런 생명력들은 오히려 하느님께 개방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은 처음부터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참된 자아로 향하게 하는 이정표가 됩니다.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영이 친히 우리 안에서 뿜어내는 힘의 원천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안에 자리잡은 회피하고 싶은 부끄러운 것들은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고자 하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생명의 빵의 의미를 더욱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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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북 바이에른 지방의 에르딩(Erding)에 있는 순례성지 “성혈”
독일-1417년
바이에른(Bayern)의 교회사는 위대한 성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지극히 거룩하신 주님의 은총을 실증한 일도 기록하고 있다. 주께서는 바이에른 사람들의 영웅적인 믿음을 때때로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해서 보상해 주셨다.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데겐 도르프 (Deggendorf), 에르딩(Erding) 에서의 성찬식의 기적은 제대 위의 성체께 대한 주민들의 사랑을 더욱 돈독히 해 주었다.
어떻게 해서 14 세기 때 바이에른에 있는 그 에르딩이라는 마을에서 그 성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특별히 공경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어떠한 역사적인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순례의 관습을 통해서나 계속되는 구전(口傳)의 전래를 통해서 성체께 대한 모독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순례의 이야기는 중앙 제대 앞에 드리운 장식 위에 장엄하게 그려져 있다. 우리들은 그 교회의 한 그림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이 성당은 우리의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성체를 모시는 거룩한 성체성사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봉헌된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한 농부가 “크리스찬다운 순종에 따라서” 부활절에 영성체를 하기 위해 그의 이웃사람과 함께 구 에르딩에 있는 성 페터(St. Peter) 성당으로 가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그는 이웃 사람에게 그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성공했고 잘 살게 되었는지를 설명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농부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굶주림과 역경에 시달려야만 했다.(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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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 성체 모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024-08-03 ㅣNo.174736
믿음이란 하느님 은총이고 선물이며, 또한 동시에 주님 계획과 거저 내어 주시는 사랑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그에 따른 임무를 실행하는 것일 게다. 사실 세속인에게는 배고픈 이에게는 먹을 것 주면 되고, 목마른 이에게는 마실 것 주면 해결된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먹는 것만으로 만족해하거나 열광만 해서도 안 된다. 예수님께서만 먹이시고 살리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보다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에 매달리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내가 줄 것이다.” 그들이 “하느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면 저희가 보고 믿겠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생명을 주는 빵이다.”‘
이렇게 아버지 뜻에 따라 지상 순례에 나서신 예수님께서는, 영원을 향해 믿음을 구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만 힘써라.” 썩어 없어질 빵은 인간의 일차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겠지만, 자유, 생명, 진리 같은 더 큰 가치를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게다.
사실 믿음의 길을 가는 삶의 여정에서 보면, 영적 갈증은 세상이 주는 것으로는 안 된다. 세상이 주는 양식에만 맛들이면 영적 양식의 입맛을 잃게 되리라. 주님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는 이는 영적인 갈증이 해소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소화시키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참된 인간이 되게 하셨다. 주님 받아들이기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세상이 주는 그 달콤한 식단을 끊어야만 한다.
오래 전 예수님 시대까지만 하여도, 모세 법을 가르치는 제멋에 사는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고 사람이 구원을 얻는 일이, 기도와 단식과 자선, 십계명 준수, 성전 예식과 깨끗한 정화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나와 있는 규정을 그대로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점을 바꾸어 하느님의 일, 곧 하느님 마음에 드는 유일한 길이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일임을 밝히신다. 실제로 하느님 은총의 선물인 이 믿는 신앙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서 인정할 수가 있기에.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을 안기는 빵으로 말씀하시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니 그분께서 작심하고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는데도 굳이 받아드릴 리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이가 그다지 없다. 그러기에 엉뚱한 곳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이상한 사람에게 가서 자신과 가족들의 앞날을 묻는다. 답이 나올 리가! 생명은 주님께서 주관하신다. 어떤 생명이든 주님의 섭리 안에서 존재한다.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삶이 밝아진다. 그것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신앙인은 미사 때 영성체로 생명을 체험한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영성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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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이집트의 고기 냄비는 ‘옛 인간’의 생활 방식입니다. 그런데 옛 인간의 삶은 충만하지 않습니다.
광야 길에 지친 이스라엘이 이미 잊은 듯하지만, 이집트는 설령 먹을 것이 있었다 하여도 종살이하던 집이었습니다.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억눌려 부르짖었기에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을 해방시켜 주시는데, 이스라엘은 그 해방을 잊고 음식이 주는 쾌락을 찾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람을 속이는 욕망”(에페 4,22)이라는 표현이 특별히 눈에 들어옵니다.
욕망, 어떤 것을 좋다고 여겨 그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사람을 속인다고 말하는 것은 그 대상이 참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수 건너편까지 애써 예수님을 따라간 이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빵을 청하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바로 생명의 빵이시라고 말씀하실 때는 그분을 떠나갈 것입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옛 인간에게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음식을 구하려고 수고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지금 찾고 있는 것을 더 이상 찾지 말라고, 그 빵이 생명을 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옛 인간을 벗어 버리지 못합니다.
마치 이집트의 음식을 그리워하여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처럼, 내 손으로 붙잡을 수 있어 보이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더 큰 선물을 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배까지 마련하여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옛 인간을 만족시키는 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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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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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군중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결국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다르게 해석하십니다.
군중이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예수님께서
빵을 배불리 먹게 해 주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당신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보리빵 다섯 개로
예수님께서 표징을 일으키시자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산으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썩어 없어질 빵이 아니라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찾는 것은 잘하는 것이지만
그 방향, 즉 물질적인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군중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에
모두 나타나지만
그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일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해서
율법의 어느 조항을 지켜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이라는 단수를 사용해서
단 한 가지 당신을 믿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말씀하시자
군중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군중의 질문에도 '믿다'라는 동사가 있지만
여기에서도 그 의미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것을 말씀하시지만
군중은
당신의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것을 말하며
그것을 위해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 다가가야 함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으로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온전히 내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도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먹을 것이 필요하고
잠잘 곳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찾고 얻으려는 노력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찾는 군중의 노력이 성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찾으면서
그 찾는 것의 마지막 목표는
하느님임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을 때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이야기하듯
우리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며
그것을 채워주시려고 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하늘에서 참된 빵을 내려 주시며
세상에 생명을 주십니다.
채워주시려는 사랑을 믿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면서
하느님께 한 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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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찰 없는 성공이 곧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사무실에 직원이 없는 관계로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서, 비슷한 일을 하시는 분들의
고충과 애환을 120퍼센트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대체로 안 그러시지만, 일단 내려 까고 시작하시는 분들도 꽤 계십니다.
주방에서, 분리수거장에서, 들판에서 땀흘리며 일을 하고 있노라면, 일단 바라보는 특유의 시선도 느낍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는 척결하고 극복해야할 측면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감정 노동 종사자들, 서비스 업종 종사자들, 요식 업소 종사자들, 그 얼마나 소중한 일에
종사하고 계시는데, 보다 존중받아야 하고 배려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일은 정말 우리에게 큰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스스로 표현하고, 주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어떤 일을 하던 직종에 상관없이 기쁨과 열정을 갖고 하면, 그 일이 바로 주님을 위한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과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내게 있어 썩어 없어질 양식은 무엇이며,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에 혈안이 된 사람들의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마음과 내면, 영혼과 본질을 우선시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그럴싸한 말과
결과에만 몰두합니다.
그 끝은 언제나 실망과 허탈함과 좌절감입니다.
베트남의 성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견뎌내야 했던 오랜 독방생활 중에,
철저한 고독,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 열렬한 기도 끝에 그 둘을 구별할 줄 아는 식별력을
얻었습니다.
그는 한치 눈앞의 것에만 몰두하지 정작 가장 중요한 본질에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영원이라는 상표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이든 가짜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들이 지닌 공통된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양이 그럴듯 해보이지만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실상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성,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성찰 없는 성공이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겸손이 사라진 권위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양심과 지성이 결여된 명예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정직과 나눔이 없는 부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참된 부와 그릇된 부, 진품과 명품, 영원한 보화와 짝퉁을 구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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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를 믿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의 빵의 기적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는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감사와 찬미보다도 호기심과 어떤 이익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6-27절) 군중들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주시는 분보다, 선물에 마음을 두고 있다(참조: 마태 12,28; 사도 10,38; 에페 1,13; 4,30; 2코린 1,22).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신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주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양식이시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앞에 신뢰를 얻도록 하라고 하시며,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탁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그리스도, 하느님의 일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당신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이루어 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믿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27절 참조).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30-31절)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벌써 잊어버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빵을 위한 빵만을 찾고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이 없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기적보다도 만나의 기적이 더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2-33절)
여기서 만나는 참된 빵이 아니며, 빵의 상징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한 현세적 양식이었고, 빵의 기적도 현세적인 배고픔을 면해준 것으로 이것 또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이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3절)는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여기서 이 빵은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는 구체적인 인격체로서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이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행동을 통해 주시는 영적인 빵보다는 물질적인 빵을 택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참된 빵과 동일시하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느님의 빵이며, 하느님의 선물 그 자체이시다. 신앙만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의 빵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우선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생명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새 인간”(에페 4,24)이다. 그리스도를 택한다는 것은 죄로 물든 “옛 인간”(에페 4,22)을 벗어버리는 것과 또한 성령에 힘입어 끊임없이 새롭게 변모될 수 있도록 죄를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2코린 5,17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를 “새 인간”이라 한다. 이는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생명을 주는 빵”(요한 6,33)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는 끊임없이 변모되는 것이다. 참된 신앙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오신 생명의 빵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며 그분을 닮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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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간은 각자의 이것을 발견하기까지 굶주리고 목마르다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예수님께서 ‘성체’라는 주제로 이끄시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내어주셔 교회를 먹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너지가 떨어져 지쳐감을 의미합니다.
언제 사람이 지칠까요? 불안할 때입니다.
안 좋은 감정은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차피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처지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다면 사람이 지치지 않을까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죽음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을 더 큰 공포를 피하기 위한 피신처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인정받지 못함’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더 많은
인정을 받았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그림을 사주지 않고 더는 작가로서 좋은 글이 써지지 않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전 KBS 아나운서인 이혜성 씨는 똑똑하고 예쁘면서도 ‘인정중독’에 빠져있었습니다.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녀는 공부를 잘해서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인정을 받아도 배가 고파서 폭식증에 시달렸습니다.
먹으면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마음, 이것이 배고픔이고 목마름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부모의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인정받음입니다.
우리는 커다란 진주를 들고 시장에서 그것을 팔려고 다니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그렇게 귀한 물건을 들고 다닐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아이에게 그 진주를 준 부모만이 그 진지의 가치를 압니다.
우리 각자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라는 진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나를 창조하신 분에게 봉헌한다는 말은 그분만이 그것을 5천 명을 먹이실 만큼의 가치로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로고 테라피’, 곧 의미 치료를 한국에 소개한 책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의 공동 저자 박상미 교수는 24세 때 수돗물이 얼 정도로 단열이 안 되는 옥탑방에서 인생을 끝내려 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왔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남자친구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몰래 사귀고 있었으며 가난은 그녀를 더는 버티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수면제를 먹고 이틀 동안 잠들어 있다가 깼을 때 그녀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자기 죽은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죽기를 원했던 그녀는 “살려주세요!”를 연발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다시 몸속으로 돌아왔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삶이 주어진 은총이라고 믿으니 그 삶을 주신 분이 왜 자신을 창조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처럼 심리적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의미를 찾아주는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하였고 그것을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당신 살과 피는 내 빵과 물고기를 바치게 만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을 창조자로 믿고 그분이 나를 창조하신 뜻에 집중하는 일입니다.
저도 저 자신을 바치는 것을 아까워하며 불만에 싸여있을 때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고 그제야 나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좋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나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을 때 더는 신학교 생활이 지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이유는 나를 바쳐 목숨을 걸고 수행할 사명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찾지 못한 이유는 나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 살과 피를 내어줄 존재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가 바로 아이가 부모를 만나듯이 우리가 당신 생명보다 소중한 존재라고 알려주는 창조자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통해 우리가 할 일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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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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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초자연적이거나 신기한 현상,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이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또 다른 기적을, 더 크고 놀라운 현상을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그저 우연히, 혹은 운이 좋아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섭리 중에 목적이나 의미 없이 그냥 행해지는 것은 없지요. 우리를 당신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이끄시기 위해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넘어서는 놀라운 경험들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또한 그런 경험들은 ‘일상’처럼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평생 단 한 번 마주할까 말까하는 그 특별한 체험이 주는 감동과 기쁨을 마음 깊이 담고, 거기 스며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되새기며, 그렇게 크고 단단해진 믿음으로 하루 하루 하느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 삶이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고양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신비체험이나 기적만을 쫓는다면, 사이비나 사기꾼들의 꾐에 빠져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눈에 보이는 기적을 쫓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이라는 표징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저 적은 양의 음식으로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는 ‘신기한 현상’만을 마음에 담고는, 더 크고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하기 위해,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 그분을 억지로라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 듭니다. 그런 잘못된 지향을 아신 예수님이 그들을 피해 떠나시자, 그들은 수 십 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샅샅이 뒤지며 그분을 찾아내지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더 맛있는 것을 더 배불리 먹기를 원합니다. 더 예쁘고 화려한 옷을 입고, 더 넓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더’를 채운다고해서 그만큼 행복해지는게 아닙니다. 물질적인 것들을 더 채우는 만큼 행복의 기준이 더 높아지기에, 아무리 전전긍긍하며 애를 써도 자기들이 생각하는 참된 행복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질적인 것들이 주는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행복에 안주하지 말라고, 채우면 채울수록 자신을 더 큰 결핍에 빠뜨리는 세상의 헛된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빵을 먹으려면 일을 하여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 뭔가 대가를 치러야 즉 ‘그분의 일’을 해드려야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철저히 자본주의의 논리로 바라보는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이라는 표현에서 ‘일’로 번역된 그리스어 ‘에르가’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가 각자의 능력과 힘을 이용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해드려야만 그 대가로 양식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거저’ 베푸시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단 한 가지, 당신께서 베푸시는 생명의 양식들을 우리가 제대로 소화시켜 내 몸과 영혼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의 양식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이루시는 그분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음식은 그것을 ‘자린고비’처럼 그저 쳐다보기만 해서는 ‘그림의 떡’이 될 뿐입니다. 그것을 입에 넣고 꼭꼭 잘 씹어 삼켜야만 내 몸 안에서 소화되어 양분이 되지요. 하느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그저 귀로 듣기만 해서는 손 안의 모래처럼 다 빠져나가고 말지요. 그것을 믿음으로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삶 속에서 철저히 실천해야만 내 마음 안에서 싹이 트고 자라 내 영혼을 살찌우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일’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믿음’이라는 말을 ‘양식’과 연관지어 생각하다가, 자기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특별한 음식인 ‘만나’를 떠올립니다. 자기 조상들이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광야를 헤매면서도 중간에 굶어죽지 않고 약속된 땅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만나’라는 특별한 양식을 내려주셨기 때문임을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만나’는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보살피시고 지켜주심을 드러내는 ‘표징’인 셈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방점’을 잘못 찍었습니다. 자기 조상들이 만나를 ‘먹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기억하다보니, 그런 자기 조상들이 특히 모세가 특별하고 대단한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겁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참된 빵을 ‘내려주셨다’는 점을 강조하여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그날 필요한 만큼만 모아들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랐을 것입니다. 광야라는 척박한 땅에서도 자기들에게 양식을 주시어 살리시는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며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면 탐욕에 눈이 멀어 필요 이상으로 만나를 모아두었다가 구더기가 끓을 일도,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참된 양식을 받아먹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죽고마는 슬픈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참된 믿음은 누가 더해주는게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그분 뜻을 따르는 의지와 결단을 통해 깊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표징은 누가 보여주는게 아니라, 내가 하느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세상과 삶을 바라보며 거기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찾음으로써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받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심을, 그런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세상과 삶을 바라보면,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구원의 표징’,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됩니다. 굳이 먼데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 안에 성령께서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몸과 피를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주님을 만나고 내 안에 모십니다. 고해소 안에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자비로운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렇게 우리는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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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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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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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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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연중 제18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사는 삶
<2024.8.4> 아침을 여는 묵상 (렘 44:15~30절)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사는 삶❞
❚ 다양한 소리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 말씀을 분별하기 위해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환난의 원인을 호도하지 않아야 합니다(15~19절).
예레미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모든 남자, 모든 여인, 모든 백성의 큰 무리’라는 표현은 유다 백성의 총체적인 타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에 대한 표현이 반복되는 것은 하늘의 여왕을 섬기는 일에 여인들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5절). 무엇보다 예레미야의 경고에 강력히 반발하여 우상 숭배를 계속할 것을 주장하는 완고함을 보입니다. 특별히 유다인들은 우상 숭배를 계속할 것을 주장하는 논리로 우상을 숭배할 때에는 복을 받았으나 그렇지 않을 때는 재앙을 만났음을 들고 있는데 이는 유다 멸망의 원인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패역무도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16~18절). 심지어 유다 여인들은 하늘 여신을 섬기는 일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로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면서 행한 음란한 행위조차 남편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으로 실로 가증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습니다(19절).
유다의 백성들은 물질에 가치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의 양식보다 육의 양식을 구하며 살아왔습니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만든 거짓 신이 풍요를 준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죽음의 길인지도 모른 체 그들은 하늘의 여왕을 섬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도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합니다. 돈과 권력을 가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를 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의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답게 우리의 삶의 가치와 기준이 하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자유하며, 범죄한 자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 그의 선하심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자의 삶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환난의 원인을 호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당당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충고의 말씀을 비난하지 않아야 합니다(20~23절).
유다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을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늘의 여신을 숭배했을 때에 풍족한 생활을 하였으며 재앙을 받지 않았다고 했지만, 예레미야는 오히려 유다가 멸망하고 황폐하게 된 원인이 그들의 우상숭배와 율법을 불순종한 데에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23절).
유다 백성들은 그 영혼의 감수성이 완전 마비되어 죄를 책망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하나님의 사람의 책망과 권면을 귀기울여 듣지 않고 반박하며 비난하는 것은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과 같은 두려운 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말씀으로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통하여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겸손하게 귀 기울이는 삶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즐기며 사는 것이 멸망의 길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서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회개의 은총을 부인하지 않아야 합니다(24~30절).
예레미야는 애굽에 와서도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는 유다의 백성들을 향하여 예루살렘 백성이 받은 형벌을 내리겠다고 ‘...주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여...’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예언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반복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죄의 길에서 속히 돌이켜 심판을 받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한 심판 예언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표징으로 애굽 왕 호브라를 원수의 손에 넘겨서 죽임을 당하게 하실 것(30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고된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최후 심판의 날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고 경험한 적이 없는 날일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이 확실하게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은혜를 입은 자는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울러 주변에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꺼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회개하길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때 긍휼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는 말씀을 부인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의 원인을 호도하지 말고, 불신앙과 부끄러운 삶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버리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부끄럽지 않은 성도가 되도록 말씀 안에서 올바르고, 경건한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44:15~3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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