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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시 깊이 들여다보기
‘속물’의 시대에 맞서는 ‘눈물’의 자세
―정윤천의 신작 시편들
차민기
1. ‘먹물’과 ‘속물’, 그리고 ‘시인(詩人)’
조선이 겪은 임란과 병란은, 왜와 오랑캐가 온 국토를 짓밟은 것뿐만 아니라, 순박한 백성들의 삶이 왜와 오랑캐의 야욕에 더럽혀진 통한과 눈물의 역사였다. 이러한 비극 속에서 임금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대의명분과 종묘사직을 내세워 제 한 몸 빼내기에 급급했고, 힘없고 가진것없는 백성들은 왜구와 오랑캐의 칼날 앞에 목숨을 오롯이 내놓아야만 했다. 전란이 끝난 뒤, 조선 사회 내부에 격렬한 동요가 일었던 것은 이러한 위정자들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 때문이었다. 위정자들이 그때껏 무지하다고만 여겼던 백성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의 절박함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들 중 일부의 문자 향유층은 이러한 현실인식을 직·간접적으로 표현하며 위정자들의 몸에 밴 위선을 꼬집었다. 그들을 일컬어 ‘위항시인(委巷詩人)’이라 한다.
그러나 개화기에 이르러, 생존의 치열한 문제보다는 신문물의 단맛에 물들어 버린 상류층의 대다수 자제들은, 암담한 현실 앞에 낙담하며 어둔 골목길을 술에 취해 비틀거리기 일쑤였다. 그들에게 현실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아득한 ‘동굴’같기만 하여서, 그들은 차라리 그 동굴 안에 안주하며 관념의 세계 속을 꿈꾸듯 헤매고 다닐 뿐이었다. 그러한 지식인층의 배움터였던 근대식 제도 교육은, 수백 년 동안 다듬어진 자유시 형식을 ‘세련된 기교’라 가르치며 전통 시가의 형식을 철저히 부정해갔다. 혀에 올감긴 운율은 어지러워졌고, 자수를 맞춘 형식은 헝클어졌다. 전통시가가 담아내던 은근한 시정(詩情)은 퇴폐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상상의 세계로 뒤덮여 우리 시사(詩史)는 그것을 ‘낭만주의’, 혹은 ‘상징주의’로 기록하고 있다.
오늘에 이르러 시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그 경제적 지위나 학벌의 됨됨이가 어떻든 간에 지식인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근대를 연구하는 몇몇 연구자들은 개화기부터의 지식인층을 ‘먹물’과 ‘속물’의 양면성을 지닌 계급으로 분류하는데, 이는 그들의 출신성분부터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문물의 소비 주체로 자리 잡은 속물적 계급에 속하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경성’이라는 근대 소비 공간의 한가운데서 신교육으로 무장한 이들은, 겉으로는 지식인 계급으로서의 됨됨이를 갖추었을지언정 참된 지식인으로서의 됨됨이에는 모자람이 많았다.
시를 쓰는 일은 어지간한 지적 능력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행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시인은 먹물도 속물도 아닌, ‘사람’ 그 자체로 풀이되는 지구상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돈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시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그 무수한 통계 수치가 이를 반증한다.
그리하여 다시! ‘시인’이란 누구인가? 그는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생의 풍경(혹은 서사)들을 ‘마음’으로 ‘기억’하며, 그 기억을 ‘관념’의 단계로 끌어올려 자기 나름의 언어로 재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이다. 이 글에서 살피는 정윤천의 시편들이 단순히 먹물과 속물이 버무려진 교양의 언어로 읽히지 않고, ‘사람 냄새 나는 시’로 읽히는 것은 그의 시들이 올곧게 펴 보이는 ‘참된 살이’에 대한 기억과 기록이기 때문이다.
2. ‘속물’의 시대, 시인의 ‘울분’
‘snob’라는 단어가 어떻게 ‘속물’이라는 우리말로 옮겨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프랑스어 사전』에 ‘snob’는 “저속한 것을 멋없이 음미하는 사람의 상태”라는 뜻으로 올라 있다(최혜실과 여럿, 『토털스노브』, 박문사, 2010, 10쪽). 우리 사전에 ‘속물’은, “교양이 없거나 식견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올라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체감하는 ‘속물’이라는 단어는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운’, 또는 ‘돈만 밝히는’ 따위의 자본주의적 의미들을 잔뜩 함축한 말이다. 소위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는 행위나 혹은 그런 사람을 일컫는 말로 이해되는 것이다.
20세기 이후로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인간은 ‘사람됨’의 길보다는 ‘자본의 길’을 내달려 왔다. 기술의 발달이 일구어놓은 ‘자본의 단맛’은, 자연 환경의 깊은 맛보다는 조미료와 같은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쾌감에 닿아있는 것이어서, 인간은 극도의 쾌감을 좇아 경쟁적으로 자본의 축적에 힘을 쏟고 있다. 전통사회가 추구한 ‘더불어 사는 삶’은 치열한 ‘경쟁’ 앞에 철저히 붕괴되었고, 현대인들은 주변을 둘러볼 시간조차 아까워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형국에 이른 것이다. 이는 신선한 인간의 피를 좇아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좀비의 비틀린 질주와 다를 바 없다. 아니, 피뿐이 아니라 장기(臟器)조차 금액으로 환산되고 있는 ‘인간의 도시’는, 어쩌면 좀비 영화 속보다 더 공포스러운 현실인지도 모른다.
눈물은 파는 게 아니어서, 눈물에게는 한사코 가격을 매기지 못한다. 가격을 사양하는 눈물의 자세. 간과 신장은 1500이라는 스티커가 ‘인간적’으로 돌아다니는 현금지절에, 환금과는 무관한 인간의 품목이, 인간의 몸 안에 아직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얼마나 통렬한 발견이었는지.
―「눈물의 자세」 부분
화자는, “간과 신장은 1500이라는 스티커가 ‘인간적’으로 돌아다니는” 시절에 “한사코 가격을 매기지 못”하는 게 “눈물”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화자 스스로도 그것이 자신의 “몸 안에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여태 모르고 산 탓에, ‘눈물’ 한 줄금에 대한 발견을 “통렬한”이라는 수식어로 꾸며야 하는 현실이다. 그 ‘눈물’은 “신에게도 없”고, “짐승만도 못한 것들에게는 더더욱 없는” 것이어서, 현대인들은 사시(斜視)처럼 비뚤어진 눈으로 자본이 내뿜는 황금빛 냄새를 따라 질주할 따름이다. ‘눈물’을 머금은 시인의 눈에는 우리의 현실이 적어도 그렇게 비친 것이다.
앵두나무 우물가 옛 그늘 아래. 저녁물 한 독 넘치게 만근이 아재 아짐씨, 또아리끝 질끈 입에 물고는 푸진 궁뎅이 뒤태. 느려터진 짤박걸음으로, 마을길 뒤뚱 돌아서다 말고는 해저녁 깊어졌으니 그만들 집에 가라던, 한쪽은 구슬패 다른 한쪽은 딱지패였을, 흙강아지 땅강아지 시절의 옛 그늘 아래.
(중략)
오늘은 거기 예전의 그 자리에, 옆으로 세운 볼썽사나운 물건 하나.
(중략) 그의 시집들에 일관되게 들앉은 기억 속 풍경들은 “앵두나무 우물가 옛 그늘”과도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그늘 아래 “볼썽사나운” 말뚝이 옹차게 자리 잡고 있다. 밑동을 파내고 근본을 뒤집어도 자본으로 치환되지 못하는 것들은 그저 “밤마실 어슬렁대는 늙은 똥개들 뒷간이나 되어버”렸고, “앵두나무 우물가 옛 그늘 아래”로는 돌보지 않는 “쑥부쟁이”가 “서발 다섯 자로” 우거졌을 뿐이다. 이러한 풍경의 훼손 앞에 시인이 느끼는 허허로움이란 ‘바람’ 그 자체이다. 풍금이라고 썼던 자리에 내 마음의 오타 한 글자 속으로는 누군가에게 보냈음직한 전언 가운데 놓쳐버린 한 글자에 대한 아쉬움이 바람더미만큼이나 허허롭다. 이 바람더미를 훼손되고 더럽혀진 “옛 그늘”에 대한 상실감(「앵두나무 그늘 아래」)과 나란히 놓고 보면, 이 허허로움의 근원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겠다. 오랫동안 시인의 삶터였을 ‘옛 그늘’의 풍경들. 파헤쳐지고 뒤집혀져 “볼썽사나운” 말뚝들이 여기저기 자본의 길 안내로 우뚝한 그 풍경들 속에서 시인이 껴안았을 절망과 속상함이 오롯이 읽는 이들에게 전이된다. 백화점 앞이라는 애인이 나에게, 무슨 색깔을 원하시나요. 몇 층엘 가려는지, 립스틱인지 파프리카를 고르려는지 헷갈리는 나에게, 애인이 나에게, 부드럽고 고운 색깔론으로 목소리를 내리까는 애인이 나에게 (중략) 아무 소리도 말고 색깔만 칭하라는 애인이 나에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보라색을 골라보는 나에게 ‘백화점’은 근대 소비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사회경제학자인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는 그의 책 『단절의 시대』에서 백화점을 “19세기 대도시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대도시의 꽃’으로도 불리는 이 백화점은, 소비자들이 여러 층의 개방형 매장들을 수직으로 유영하며 스스로 선택권을 자유롭게 행사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입구와 출구가 하나뿐인 폐쇄형 공간 구조를 통해 소비자의 선택을 결국 ‘그 안’에서만 이루어지게 유도할 뿐이다. 사람들이 돌려쓰는 공중 변기에 어떤 새끼인지 똥을 내리지 않았다. 처먹은 만큼의 내용으로 불어터진 똥 덩어리. 똥을 내리지 않았다.(중략) 정권이 지나간 자리 때마다, 처먹은 것만큼으로 싸질러진 똥 덩어리들이, 줄줄이 법으로 불려간다. “정권이 지나간 자리 때마다, 처 먹은 것만큼”의 똥을 싸질러대는 무리들은 다수의 ‘공중’을 위한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를 갖추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줄줄이 법으로 불려”가고 만다. 그들은 시의 초반부에 쓰인 “어떤 새끼”와 후반부의 “싸질러진 똥 덩어리들”로 환유되는 존재들이고, 그들이 누구인지는 쉽사리 일상에서 들추어낼 만하다. 3. ‘속물’의 세상 너머, 변함없는 ‘기억’ 정윤천은 전남 화순에서 났다. 나이 서른에서 서른하나로 넘어가는 동안 지역과 중앙의 문단을 넘나들었다. 등단 뒤 스무 해가 넘는 동안, 그는 모두 네 편의 시집과 한 권의 시화집을 펴냈다.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구석』, 그리고 시화집 『십만 년의 사랑』 들이 그것들이다. 얼핏, 제목들만 들추어 보아도 시인의 마음 한 구석에 갈무리 되어 있을 풍경 몇 쪽이 선연히 떠오른다.
애초에 울타리 없었으니 사립문 없어, 마당귀 늙은 삭정이 밤나무만 너댓 그루. 그래도 철 이르면 알싸한 밤꽃내 흐드러질 듯도 싶던 그늘 밑에는, 흑염소 한쌍. 그리하여 그 집의 사람 사는 흔적을 염소로나 하여금 물어야 했던 애터진 풍경 너머. 누야는 막내를 업고 나는 새참 보퉁이 마을은 벌써 등 너머서 끝이나 山入의 탱자나무 길 고적한 울타리가엔 누군가 흘려놓고간 상여꽃…… 하얀…… 상여꽃…… 어디선가 들쑥 향내는 바람에 날리고 위에 옮긴 두 편의 시 모두 그의 두 번째 시집, 『흰 길이 떠올랐다』(창작과비평사, 1999)에 실린 작품들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이라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만한 기억 속의 한 풍경이다. 설혹 도회지에서 나고 자랐다 하더라도 저 알싸한 “들쑥 향내”엔 뭉클, 마음을 적실만하다. 따라서 시인이 기억하고 있는 그 풍경의 몇 쪽에 우리가 공감할 수만 있다면 그 풍경은 우리를 같은 세대로 묶어놓는 경계 지표가 되는 셈이다. 그 꽃밭 속, 우물가 평상 위로 시집 『흰 길이 떠올랐다』에 실린 이 작품에는, 온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 한때를 보냈던 과거의 어느 한 기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A는 과거 기억의 실체를, B는 그 실체의 관념적 재현을 보여준다. 그리고 재현된 관념의 세계 안에는 지난 풍경에 대한 시인의 기억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꽃잎들이 바람결에 제 향기로 일렁였”거나, “서로에게 동그랗게 벙글어도 주었던가”에 대한 시인의 기억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랬던가요?’라고 묻는 그 물음 안에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시인의 태도가 전제되어 있다. 결국, 시인은 “그 꽃밭 속, 우물가 평상”이라는 구체적 장소에서의 한때를 그리움으로 간직한 것이다. 형제는 모처럼 만나 그동안의 심심한 안부를 묻고 자리를 옮겨 변두리 식당 안에 마주보고 앉아 밥을 먹고(―그러고 보니 얼마만이냐) 이 시에 제시되는 장면은, 앞서 「그 꽃밭 속」에서 “한 저녁의 식구들 동그랗게 둘러 앉아/영락없는 제 모습만큼씩 오종종 맺혀 있던” 유년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귀밑머리가 벌써 볼 만”해져 버린 아우와 “안간힘을 다하여” 세월을 버팅겨 온 형의 모습은 “어두워진 담벼락”만큼이나 그늘진 모습으로 형상화 된다. 그 세월 동안 이들 형제들의 생이 어떠했을지는 뭉텅, 잘려져 있다. 다만 “겨우 제 집 앞의 담장들이나 눈치 죽여 넘어왔느냐”는 행간에서 이들 형제의 삶이 무수한 행간들로 읽힌다. 그 행간들 속에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에 한평생 어깨가 문드러진 우리들의 아비가 들앉아있기도 하고, 가난한 식구들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대처로 나가 기름때 묻혀가며 기술을 익히던 우리들의 형이 들앉아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 아비와 그 형들에 대한 기억이 ‘나’의 기억으로 전이되어 공유되는 것이다. 4. 사람의 세상에서 나누는 ‘눈물’ 연작시 「내 마음의 블루스」 몇 편이나 「눈물의 자세」, 「바람의 뿌리」 들에 묘사되는 현실은, 시인이 기억하는 “우물가 평상”이나, “저녁물 한 독 넘치게 만근이 아재 아짐씨, 또아리끝 질끈 입에 물고는 푸진 궁뎅이 뒤태”가 흔들리던 “앵두나무 우물가 옛 그늘”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그동안 시인이 보여준 시의 본새로 치자면 낯설다 싶을 정도로 격한 울분이 여러 군데서 터져나온다. 그의 시들을 챙겨 읽는 이들이라면 그 격한 울분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가늠하는 일이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들의 귀한 시간을 아무렇게나 불러앉혀놓고, 앵무새의 입으로 괴발개발거려주는 세상의 모든 뉴스와, 2011년에 펴낸 그의 시화집 『십만 년의 사랑』에 실린 작품이다. “뉴스 속에 편입된 저들의 표정이며 자세들”이 빚어낸 “최악의 풍경”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의 귀한 시간을” 함부로 빼앗고 있다. “싸질러진 똥 덩어리들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 혹은 “여우(女優)보다 더 예뻐 보이는 애인이”, “하얀 가운을 입은 집 주인이” 우리들의 귀한 일상에 울분을 자아내게 한다. 나는 다시 한번 세상의 모든 시들이 제각각의 얼굴과 손짓으로 멀리멀리 아름다워지는 순간을 기도하기로 합니다. ―계간 『시에』 2013년 겨울호
차민기
왼쪽 볼딱지도 오른쪽 뺨따귀도, 이모로 저모로 그때마다 요긴하게 볼때기 얻어터지며, 한마디로 좆같은 세월 X같은 날들 건너오는 동안. 이젠 밤마실 어슬렁대는 늙은 똥개들 뒷간이나 되어버린, 서발 다섯 자로 쑥부쟁이나 욱어버린, 앵두나무 우물가 옛 그늘 아래.
―「앵두나무 그늘 아래」 부분
풍근이라고 적혀져 남아있다
그새, 바람의 뿌리 하나가 대신 부쳐졌더라는 말이었는데.
―「바람의 뿌리」 부분
“옛 그늘”이 모두 지워진 삶터는 더 이상 풍경이 아닌 자본의 땅으로 뒤집혔고, 그 자본에 맞설 요량인듯 시인의 나날살이가 훌쩍, 도시로 옮겨와 있다.
―「내 마음의 블루스 12」 부분
이 시에서도 ‘나’의 선택은 제한적이다. “애인이 나에게” ‘선택권’을 주고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결국 ‘빨간색’ 아니면 ‘파란색’ 둘 중의 하나이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보라색을 골라보”지만 결국 애인은 “빨간 속옷으로 나타나” “제 양쪽 가슴 위에 은밀한 부위에 온통 토마토 캐첩을 발라버”린다. “아무 소리도 말고 색깔만 칭”해야 하는 이 은밀한 색깔놀이는, ‘백화점’과 ‘소비’라는 자본주의적 어휘들과 어울려 우리 사회의 계층별 색깔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백화점 소비’를 일상으로 누릴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그리고 그 계층 구분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계층.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 들과 같은 이러한 색깔들을 정치적 색깔론으로 환유하는 것이 어쩌면 이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빚어놓은 피해의식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옛 그늘”의 풍경에 속상한 시인이라면 이러한 속내를 남몰래 함축할 만도 하지 않겠는가.
시인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 시인의 블루스를 그렇게 읽고 싶은 것은 이 다음에 이어지는 또 다른 몇 편의 블루스 때문이다.
―「내 마음의 블루스 24」 부분
그리고 그러한 똥 덩어리들이 이 나라의 지도층 인사로 군림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의 하루하루는 “아아아악어”라는 비명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아무런 현실인식 없이 ‘볼펜’을 맞춘 것만으로도 ‘반장’이 되고, ‘형광등’을 맞춘 것만으로 ‘지도자’가 되는 세상. 그리고 그 반장과 지도자의 영도 아래 하루하루 “대가리와 숨통을 맡겨 놓고, 오로지 구경 값을 벌어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들”이란 또 얼마나 허허로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볼이 터지도록 담배 연기를 입 안 가득 모아”(「내 마음의 블루스 40」)보는 시인의 귀갓길이 애처롭기만 하다.
―「벌레 먹은 집」 부분
―「들쑥 향내는 바람에 날리고」 부분
A 한 저녁의 식구들 동그랗게 둘러 앉아
영락없는 제 모습만큼씩 오종종 맺혀 있던 거……
꽃잎들은, 바람결에 제 향기로 일렁였던가요
B 꽃잎들은, 서로에게 동그랗게 벙글어도 주었던가요.
―「그 꽃밭 속」 부분
이처럼 ‘장소’는 물리적 구조물로서의 단순한 공간과 구분된다. 장소는 그 안에서 이루어진 무형의 서사에 대한 인식이며, 그를 바탕으로 공간은 크고 작은 역사를 지니게 된다. 시인이자 지역문학 연구가인 박태일은 ‘공간’과 ‘장소’의 의미장들을 살핀 그의 글에서, “사람의 감각기관과 지각기제의 도움으로 내재화된 공간”을 문학이라고 풀이하며, “집짓는 일과 마찬가지로 글 쓰는 일 또한 세계 안쪽에 실존적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풀어 쓴 바 있다. 그리하여 “문학공간이란 글쓴이가 구축적 경험을 빌어 이루어놓은 구체적인 체험 현실”이기 때문에, “텍스트 읽기란 그러한 현실을 되겪는 일이다”라고도 했다(박태일, 『한국 근대시의 공간과 장소』 소명출판, 1999, 30~31쪽). ‘장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한 편의 작품을 읽는 과정에 딸려오는 독자의 공유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하겠다. 독일의 사회학자 만하임은 이러한 공유 기억의 집합체를 일컬어 ‘세대’라 규정지었다.
세대가 공유하는 ‘기억’에 대한 관심은 한 사회의 다양한 생각이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작업에 초점을 둔다. 즉,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지 않고, ‘그때 그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있어서 ‘기억’은 과거 완료형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속에 현재로 실재하는 것이며 시인은 그 실재로부터 시상을 전개시켜 하나의 완성된 관념계를 만들어 내고, 독자는 그 시행들을 오르내리며 잊고 있었던 자기 기억을 추체험의 영역에서 환기해낸다.
이 시에서 환기되는 독자들의 기억 또한 작품 안의 “우물가 평상”이라는 장소를 매개로 독자들 저마다 지니고 있을 특정 시·공간에 대한 공동의 체험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다음 시에서처럼 세월이 훌쩍 지난 뒤의 저녁 풍경 한때와 맞물림으로써 애잔해진다.
어린놈이 벌써 귀밑머리가 볼 만하구나 무심코 던진 형님의 말씀 뒤에서 아우는 벌써 정색이 되고 말허리를 분지르고 나서고 덜 씹힌 밥알을 담은 그놈의 입에서 ‘세월’이라는 매큼시큼한 단어 하나가 눈깔을 부라리며 튀어나오고
(중략)
형제여 그러고 보니 너희들은 흔해빠진 일취월장은커녕 겨우 제 집 앞의 담장들이나 눈치 죽여 넘어왔느냐
형도 이제 안간힘을 다하여 하다못해 그 무슨 풍경이라도 하나 눈깔 아프게 사랑할 때가 아니겠냐고 밥알을 튀기던 아우놈의 喝 같은 ‘세월’이 그늘 실팍하게 어두워진 담벼락 너머로 가슴에 어리고.
―「세월의, 저녁 한 때」 부분
정윤천의 시들이 일관되게 아우르는 옛 풍경들은 정겹고 곰살맞다. 그 안에서의 시정(詩情)은 그의 눈매만큼이나 따습고 촉촉하다. 그리고 그 시정을 어루만지는 그의 시어들은 막걸리 한잔에도 탁, 트이는 신과 흥을 담아낸다. 그러나 그러한 신명의 언어들이 대도시의 거리 위에선 터져나오지 못한다. 그곳은 “똥 덩어리들”이 “지도자” 행세를 하며 “아무 소리도 말고 색깔만” 강요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은 “입을 벌린 악어의 입속으로 오로지 생을 밀어 넣”어야만 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저 너머에선 무엇이 우릴 기다리고 있는지” 묻고 싶었던 게다. 그곳은 어디인가? 시인의 기억 속 풍경 몇 쪽, 바로 그곳이기를.
뉴스 속에 편입된 저들의 표정이며 자세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한결같이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풍경으로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나의 시는 잠시나마 반성과 참회의 포즈가 되기를 간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닢의 편지」 부분
이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현실 앞에 시인이 진정 간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잠시나마의 반성과 참회”이다. 그리하여 사람에게만 남아있다는 그 참된 ‘눈물’ 한 줄금을 자기 안에서 통렬히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논다니 아들의 손등 위로” 떨어져 내리는 노모의 메마른 눈물이기도 하고, “선운사 동백꽃 모감처럼” “투욱”하고 떨어지는 “누군가의 더운물 한 방울”(「눈물의 자세」)이기도 하다. 이렇듯 시인이 그려내는 ‘눈물의 자세’란 저보다 못한 것 혹은 저와 같은 것들에게 보내는 연민, 혹은 사랑의 징표로 풀이된다. 이는 ‘서정’이라는 것이 울분보다는 연민의 교감에서 비롯하는 원리임을 시인이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의 시들이 담아낸 서정이 현실 저 너머의 풍경을 또렷이 담아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한 닢의 편지」 부분
부산 출생. 2011년 『시에』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