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이야기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 항주가 있다'(上有天堂,下有蘇杭)는 말이 있다. 도대채 소주 항주가 얼마나 좋으면 이런 표현이 남았을까? 나는 살아생전 소동파와 백락천 시인이 서호(西湖)에서 연꽃을 적시는 봄비 속에 매화 조각한 유람선의 둥그런 창가에 미인 앉히고 풍류를 즐겼다는 그 서호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동창 부부 10명이 소주 항주 3박4일 여행을 간다는 것이다. ‘꽃을 즐기는 데는 마음 푸근한 벗이 있지않으면 않된다. 청루(靑樓)에서 가기(歌妓) 얼굴 보는 데는 재미있고 멋있는 친구를 얻지않으면 않된다. 달을 감상하는 데는 냉철한 철학 가진 벗이 있지 않으면 않된다. 눈 내리는 풍경을 기다리는 데는 미모의 벗을 얻지 않으면 않된다.' 여행 같이 갈 친구로 동기동창보다 좋은 사람 없다.
상해는 가로수가 유도화(油桃花)와 야자수다. 위도가 제주도 보다 남쪽이다. 먼저 황포강에 갔는데, 프랑스 영국풍 석조건물이 많다. 한 때 ‘동방의 파리’란 명칭으로 곱게 불리다가, 아편과 매음 때문에 ‘동방의 창녀’라는 곱지않은 이름 얻은 곳이다. 임시정부 터 찾아가니, 마당로(馬當路)는 60년대 서울의 달동네 비슷하여, 화장실은 골목의 공동화장실을 쓰고, 수도도 골목길에 있어 빨래가 만국기마냥 골목길 위에 걸려있다. 김구 선생님이 기거한 낡은 목조 2층 청사는 바닥 면적이 15평 쯤 되는데,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딛고 이층 집무실 올라가보니, 선생이 쓰시던 나무침대가 너무 초라하다. 그 다음 윤봉길 의사가 시라카와 대장을 폭살한 홍구(虹口)공원 둘러본 후, 중국 본토 요리를 맛보기 위해 근처 요리점에 갔다. 요리는 탁자 가운데 놓인 둥근 유리판에 나오는데, 처음엔 전채(前菜)로 채소나 스프가 나오고, 그 다음은 본격 요리로 오리, 돼지, 소고기가 삶고, 튀기고, 졸이고, 별미로 변해 나온다. 끝엔 국수와 밥이 나온다. 술은 공자 가문에서 전래한 ‘공부가주’(公俯家酒)인데 독하면서 순하여 맘에 들었다. 그런데 식사 시작하자마자 웃음판 벌어졌다. 작난끼 동한 남자들이 요리 담긴 둥근 유리판을 손으로 돌리면서, ‘제 앞쪽으로 좀 돌려주시겠읍니까?’ 혹은 ‘반대 쪽으로 살살 돌려주세요’ 하며 '돌려주는 데다' 악센트 넣어 부인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면, 부인들이 선문답을 금방 이해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까르르 까르르 뒤로들 나자빠진다. 그 바람에 식사가 더 재미있었다. 상해는 원래 양자강 하구에서 잡히는 게발의 밑부분에 부드럽고 까만 털이 빽빽한 ‘털게’로 만든 요리가 유명하다. 살아있는 게를 술에 담아먹는 ‘취해’(醉蟹), 껍질 채 푹 졸인 장초청해(醬炒靑蟹), 게 껍질에 게살과 알을 채워 쪄먹는 부용해투(芙蓉蟹鬪), 게살과 두부를 졸인 해분두부(蟹粉豆腐) 등 다양하다.
그 밖에 뱀장어 찜 홍소하만(紅燒河鰻), 해삼을 삶아 만든 하자대오삼(蝦子大烏參), 자라를 간장에 졸인 홍소빙당갑어(紅燒氷糖甲魚), 상해 사람들이 침을 삼키는 고기만두 소롱포(小籠包)가 유명하다. 거사는 공부가주에 취한 후 기차로 한시간 거리인 소주(蘇州)로 갔는데, 이층 열차에서 밖을 보니 넓은 들판에 뛰엄뛰엄 농가가 보이는데, 빈부 격차가 없이 평등 추구하는 공산사회라 집의 크기가 다 비슷하다. 대개 지층에는 가축을 기르고 이층에 사람이 사는데, 집집마다 사각 연못을 파놓고 거기에다 자라와 새우를 길러 담백질을 보충한다. 이 근처는 끝없는 평야 곡창지대라, 풍년이 들면 11억 중국 전체가 굶지않는다고 한다. 소주는 쌀과 차, 비단과 물고기가 풍부해서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 불리운다. 중국의 문필가 위치우위(余秋雨)는 이곳을 '물은 너무나 맑고, 복사꽃은 너무나 아름다우며, 먹거리는 너무나 달고, 여인은 너무나 곱다' 하였다. 여기가 실크로드 출발지인데, 마르코폴로가 ‘동방의 베니스’라 부른 소주는 수나라 양제가 북경서 여기까지 판 운하가 시내 가운데 지나가고, 태호(太湖)의 물은 양자강(長江)으로 흘러간다.
호텔에서 조식 후 버스로 한산사(寒山寺) 가서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를 만났다.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울음 울고 하늘엔 서리만 가득한데, 강가 단풍 숲 고기잡이 배 불빛만 수심에 찬 내 눈에 비치고 고소성 밖 한산사 야반의 종소리 나그네 뱃전에 들려오네.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眼.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거사가 보기엔 이 시는 한산사 종소리 듣는 일견 평범한 서사시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장삿속 때문일까. 당나라 때 장계(張繼)라는 사람이 과거에 몇 번째 낙방하고 수심 가득한 얼굴로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고기잡이 배들의 불빛이 비치는 ‘풍교’라는 다리 근처서 한산사 종소리를 들으며 쓴 유명한 시라며 족자들을 팔고있다. 그 다음엔 오월동주(吳越同舟) 고사를 남긴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도읍지를 찾아갔다. 시내 곳곳 운하에 다리 놓아 이끼 낀 다리 아래 배가 다니고, 길거리엔 태호에서 건져온 태호석(太湖石)이 보이는 운치있는 곳이다. 분재와 수석이란 책을 창간호부터 10년 구독한 거사는 속으로 길에 흔하게 세워놓은 구멍 뻥뻥 뚫어진 괴석 하나만 서울에 가져가도 돈 좀 되겠다 싶었다. 사람들은 옛부터 ‘강남 정원은 중국 제일이요, 소주 정원은 강남 제일’이라 했다. ‘졸정원’(捽政園)에 들렀는데, 이곳은 북경의 이화원(梨花園), 청도의 피서산장(避西山莊), 소주 유원(留園)과 더불어 중국 4대 명원(名園) 중 하나다. 명나라 왕헌신(王獻臣)이란 사람이 관직 은퇴 후 조성했는데, ‘채소밭에 물주고 채소 팔아 끼니 마련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 우애 있는 것, 이것이 못난 사람의 일’이라는 반악(潘岳)의 시에서 '졸정원'이란 이름을 따왔다. 그런데 채소 팔아 끼니 마련한다는 건 노장적인 검소를 추구한 말작난이요, 실제 정원은 서울 비원 보다 넓고 정교하다. 졸정원은 정원 반 이상이 호수다. 도영루(倒影樓)는 물 속의 꺼꾸로 선 나무 그림자 감상하는 누각이요, 향원당(香遠堂)은 먼 호수의 연꽃 향기 맡는 누각이다. 견산루(見山樓)는 산을 바라보는 누각이요, 원앙관(鴛鴦館)은 손님 접대하는 누각이다. 백향목(白木香) 숲을 따라가면 계수나무는 꽃을 피우고, 태산목은 하늘을 가렸는데, 작은 오솔길이 정자와 누각 사이로 이어진다. 누각은 꽃무뉘 새겨진 화창(花窓)을 통해서 경치를 조망토록 되어있다.
참고로 진주사범 출신으로 前 문화재관리국장 정재훈 님이 쓴 <한국전통의 茒> 책을 보면, '대(臺)는 멀리 조망하기 위한 축조물이다. 첨성대 서장대 수어장대 등이 그것이다. 누(樓)는 대 위에 사방이 탁 트이게 지은 건물을 말한다. 경희루 영남루 광한루가 이것이다. 정(亭)은 경치 좋은 곳에 휴식하기 위해 건립한 집이다. 포석정 백제 왕궁 남쪽의 망해정(望海亭)이 이것이다. 각(閣)은 2층 이상 집을 말한다. 창덕궁 후원의 서향각(書香閣)이 이것이다. 이밖에 당(堂), 헌(軒), 재(齋)는 선비의 거처나 공부하는 장소이다'. 정재훈 시인은 남강문학회 회원으로, 경주 안압지 복원이 잘되어 박대통령이 칭찬하자, 그 자리에서 '각하! 진주성도 임진난 유일의 승전지로 복원할 가치가 있습니다' 라고 권의하여 즉석 허락을 얻은 것이라고 거사에게 말한 적 있다.
졸정원 돌아본 후 오왕 합려의 무덤이 있는 ‘호구’(虎丘)로 갔다. 우리에게 와신상담(臥薪嘗膽), 오월동주(吳越同舟) 고사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호구는 30미터 남짓한 나지막한 언덕인데, 입구에 작은 운하가 지나가고, 꽃과 기념품 파는 행상이 많다. ‘시검석’(試劍石)은 합려가 검 제작 명인 간장(干將)과 막사(莫邪) 부부에게 명하여 다섯 자루 검을 만들고 검의 성능을 시험한 바위로 둘로 잘라져 있다. ‘천인석’(千人石)은 합려의 무덤을 만든 후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아들 부차가 공사에 동원한 인부 천명을 독살한 너럭바위고, 검지(劍池)는 3천개 칼과 아버지의 시신을 묻은 곳이다. 곁에 있는 정자는 손자를 기념하는 손무정(孫武亭)이다. 천하명필 왕희지 안진경도 여길 다녀간 모양이다. 암벽에 그들의 친필과 낙관이 새겨져있다.
백락천 시인은 양자강 하구 분포구(盆浦口)란 곳에서 희미한 달빛 속 등불 밝힌 배에서 여인을 만났다고 한다. 여인은 비파로 얼굴을 반쯤 가려 은근한 멋을 풍기며,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는데 곡조는 소리를 이루기도 전에 정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한소리 한소리에 슬픔이 서려, 평생 불우한 정을 하소연하는 듯, 아미를 약간 숙이고 심중의 무한한 사정을 말하는 듯, 배는 소리에 취한 듯 조용하고, 다만 강물 위에 가을달이 유난히 희게 보이더라고 했다. 그래 거사는 백락천의 ‘비파행’(琵琶行) 읽으면서 언제 꼭 한번 비파 타는 여인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적 있다. 그런데 나에게 안복(眼福)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 비단공장에서 패션쑈를 한다고 거길 갔는데, 거기서 천2백년 전 양자강 분포구(盆浦口)에서 희미한 달빛 아래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던 여인 상상해볼 수 있는 모델들을 만난 것이다. 거사는 거기서 옥같이 흰 피부에 화려한 비단을 감고, 구슬같이 맑은 눈에 아름다운 미소를 띈 모텔들이 내 앞을 왔다갔다 하는 걸 보면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무릅을 치며 속으로 하오!(好) 띙하오!(頂好)를 몇 번이나 외쳤다. 여인은 눈빛이 천량인데, 거사는 작심을 하고 미인의 눈빛을 원도 한도 없이 쳐다보았고 기념으로 비단 마후라를 네개나 샀다. 항주(杭州)에서는 호텔 석식을 마치고 10위안을 내고 택시로 골동품 시장에 가보았다. 도자기와 흑단(黑檀) 자단(紫檀)과 옥과 대리석 인재(印材) 구경한 후, 청화백자 한 점과 청동으로된 관운장 좌상 하나를 샀다.
청화백자는 오래된 것처럼 색깔을 누렇게 변색시켜놓고 진품이라면서 60위안 내라고 했지만, 중국 사람 믿을 수 없다. 관운장 좌상도 일견 청룡도 칼날과 관운장의 긴 수염 한올 한올까지 세밀히 조각된 것이 근사하다. 그러나 ‘뚸샤오첸’(多少錢)? 얼마냐고 물어보면 어떤 집은 4백위안, 어떤 집은 2백위안 종잡을 수 없다. 상인이 전자계산기로 숫자를 보여주면 매정히 ‘뿌야오’(不要) 안산다고 돌아서야 한다. 그러면 붙잡고, 그러면 '뿌야오' 하고 돌아선다. 이렇게 인정사정 없이 깍아서 한정없이 내려가는 그 재미가 중국 쇼핑 재미다. 거사는 그날 4백 위안에서 시작한 걸 깍고깍아서 청화백자 관운장상 두 골동품을 1백위안(元)에 샀다. 품에 안고 의기양양하게 5위안 내고 인력거 위에 높이 앉아서, 인파 속을 인력거꾼이 죽어라고 페달을 밟는 걸 거만하게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모정’에서 월리엄홀덴이 그랬던 것처럼 멋지게 담배 연기 품으며 호텔로 왔다.
이튿날은 시인의 고향이라는 서호(西湖) 구경을 가서 배로 호수를 유람했다. 둘레 40리, 깊이 1미터, 서호 절반이 연꽃으로 덮혀있다. 남송 시대는 여기가 등용선(燈龍船)이나 누선(樓船)에 기생들 태운 부자들 유람선 불빛이 물을 수놓던 곳이었다 한다. 백낙천이 만든 백제(白提), 소동파가 만든 소제(蘇提) 두 제방은 물속에 잠길 듯 말듯 뻗어있다. ‘맑은 날 서호보다는 비 내리는 서호가 좋고, 비 내리는 서호보다는 눈 내리는 서호가 좋고, 눈 내리는 서호보다는 밤의 서호가 좋다’는 말도 있었다. 여행사 가이드가 한시를 읊어주기에, 거사는 미리 준비한 두보(杜甫)의 ‘강남춘’(江南春)이란 시로 화답했다. 천리 꾀꼬리 울음 속에 푸른 숲에 붉은 꽃 비치고, 강촌 성곽의 술집 깃발은 나부끼는데, 남조시절 4백80개의 절, 수많은 누대가 실비 속에 젖고있네. (千里鶯啼綠暎紅 水村山郭酒旗風 南朝四白八十寺 多少樓臺煙雨中) 그러자 손님들이 ' 배 위에서 이렇게 직접 시를 읊어주니, 고량주 한잔에 10위안씩 받아도 다 사먹고 싶소’ 하면서 흥을 냈다.
호수 속에 고산(孤山)이란 작은 섬이 있었다. 북송 때 시인 임화정(林和靖)이 은둔한 곳이다. 임화정은 항상 작은 배를 타고 서호(西湖) 근처의 절들을 찾아 노닐었는데, 혹시 손님이 찾아오면 동자가 문 앞에 나와 손님을 맞이하면서 새장에 있는 두 마리 학을 풀었다. 그러면 한참 후에 임포가 배를 저어 돌아왔다. 거사는 임화정이 학을 부를 때 쓰던 피리 비슷한 걸 만들어 팔길래 1위안 내고 피리를 하나 집어들었는데, 곁에 있던 박홍식 친구 부인이, ‘일 위안 양꺼!’ 한마디 던지고 잽싸게 하나 집어들고 달아났다. 홍식이도 이제 고인이다. 서호 근방에는 1백50년 역사를 지닌 ‘누외누’(樓外樓), ‘산외산’(山外山), ‘천외천’(天外天)이라는 멋진 이름 주가(酒家)들이 많은데, 거기서 닭을 연꽃잎과 함께 풍로 증기로 찐 규화계(叫化鷄)나 양념한 돼지고기 요리 ‘동파육’(東坡肉) 시켜놓고 부드러운 소홍주(紹興酒) 마시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그래 거사가 ‘내 당장 서울 가서 집 팔아 여기 항주로 이사 올란다’ 투덜거리자, 전춘식 친구가 ‘거사야, 봄에 꽃 필 때 한번 더 오자’ 다정히 위로해준다. 그 다음에 전당강(錢塘江)에 갔는데 12월인데 개나리꽃이 피고 파초잎도 푸르다. 동진(東晋) 때 인도 승려 혜리(慧理)가 창시한 영은사(靈隱寺) 둘러보았다. 중국 선종(禪宗) 10대 사찰 중 하나로, 현관의 운림선사(雲林禪寺)란 현판은 청 강희제 글씨라한다. 대웅보전에는 19미터 높이의 향나무에 금도금한 석가모니불이 계시는데, 입술과 눈동자가 여인처럼 고혹적이다. 법당 뒤에서 신라 왕족 김교각 스님 등신불(等身佛) 불상 만났다. 신라는 왕족 가족 중 한사람이 출가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는 용정차(龍井茶) 본고장이다. 절 근처에 다원(茶園)이 많다. 다원 입구에 희고 붉은 산다화가 피어있다.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김춘수의 시 '처용단장(處容斷章)'을 생각하며 여행을 마쳤다. 이번 여행은 상해에서 독하면서 순한 ‘공부가주’(孔府家酒) 맛 보았고, 소주에서 백락천이 시로 읊은 미인 보고 원 풀었고, 서호(西湖)에선 시를 화답해 주변 사람 흥까지 올려주었고, 항주에서 그 흥정을 생각하면 미소가 번지는 청화백자와 관운장 좌상 가방에 챙겨넣어 소소한 것 모두가 만족스럽다. 이렇게 흐믓한데. 아시아나 항공기가 내마음을 아는 것처럼 구름 위로 올라가더니, 시속 8백 킬로 속도로 힘차게 달린다. (1998년 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