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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를 설명하심
막 4:10-20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막 4:10-20 /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마13:10-17,눅8:9-10] 그후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 열두 제자와 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 찾아와 물었다. `그 비유의 뜻이 무엇입니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어 있지만 12)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다. ㄱ)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용서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ㄱ. 70인역 사6:9-10) 13) [씨뿌리는 비유의 설명;마13:18-23,눅8:11-15] 만일 너희가 이 간단한 비유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내가 말하려고 하는 다른 여러 가지 비유를 어떻게 다 알아 들을 수가 있겠느냐? 14) 내가 말한 씨를 뿌리는 농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15) 길가에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단이 와서 그 말씀을 곧 잊어버리게 만드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16) 돌밭에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기는 하지만 17) 그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처음에는 잘나가다가 박해가 시작되면 곧 넘어지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18) 가시덤불 속에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는 하나 19) 세상살이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여러 가지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마음에서 밀어내 버려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 그러나 좋은 땅에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받아들임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사람, 즉 그 마음속에 심어진 씨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께서 비유의 참뜻을 알려주십니다.
비유의 목적(10-12) 일반적으로 교사들은 진리를 먼저 말한 후 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나 실례를 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리를 밝히지 않은 채 비유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열두 제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비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에게 비유의 뜻을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목적을 두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비밀’이란 하나님께서 계시하셔야 알 수 있는 진리를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의 참뜻을 설명(계시)하자 비로소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둘째, 비유는 입문(doorway)과 같습니다. 외인(문 밖에 있는 사람)은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하시면서 외인이 아무리 보거나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죄 사함을 얻지 못하며, 여전히 하나님 나라 밖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비유를 설명하심(13-20) 마침내 천국의 교사이신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키워드를 알려주십니다. 그 핵심 단어는 말씀입니다. 씨 뿌리는 자가 뿌리는 것은 말씀입니다. 길 가에, 돌밭에, 가시떨기에, 좋은 땅에 뿌려진 것 모두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은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네 종류의 땅은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나타냅니다. 말씀은 씨앗처럼 생명력이 있어서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면 많은 결실을 맺으며, 그로 인하여 천국이 확장됩니다. 하지만 천국의 확장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탄의 세력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빼앗아갑니다. 둘째는 사람의 죄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잠시 기뻐하지만 환난이나 박해를 당할 때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포기합니다. 셋째는 세상입니다. 말씀보다 세상의 재물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말씀 순종하는 것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이 되기 위한 비결이 무엇일까요? 사탄이 말씀을 빼앗지 못하도록 성도는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묵상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야말로 말씀을 간직하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또한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를 당할 때 성도는 믿음으로 시험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 있는 천국의 가치를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 세상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가 좋은 땅으로서 많은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적용: 악한 사탄의 존재를 잊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삶은 영적 전쟁입니다. 인간의 죄성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는 누구인지요?
우리는 비가 제때 내리고 기후가 좋으면 경작하는 밭에서 생산되는 열매가 얼마나 될까 기대하며 즐거워합니다. 때로는 날이 가물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소출이 적을까 염려합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밭에서 생산되는 소출과 비교할 수 없는 진짜 값진 것이 경작하는 밭에 묻혀 있음을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깨달아 지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 설 교 >
가시떨기 밭 마음
이종철 목사
밭에 뿌린 씨앗은 모두 동일합니다. 100배의 결실을 맺은 씨앗은 특별한 씨앗이 아니라 길가나 돌짝 밭이나 가시떨기에 뿌려졌던 것과 같은 동일한 씨앗입니다. 동일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제자들과 같이 좋은 결과를 내는 밭이 있는 반면에 전혀 그렇지 못한 밭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어제나 오늘이나, 이곳이나 저곳이나 동일하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 밭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적다고 탓하기 전에 우리 마음 밭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더 지혜로울 것입니다. 보물은 우리 마음 밭에 있습니다. 내 자신을 변화시키고 내 마음 밭을 아름답게 가꿀 때 바로 그곳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수피의 회교 신비주의자 바야지드의 기도문)
내가 젊었을 때 나는 혁명가였고 하느님께 드린 나의 기도는
“주여 저에게 세상을 뒤엎을 힘을 주소서.”였네.
그러나 내가 중년에 이르러 내 인생의 절반이 덧없이 흘렀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기도의 내용을 바꾸었네.
“주여 저에게 저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
그러나 나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주위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을 보았네.
이제 내가 늙고 여생을 헤아리게 되면서 나는 나의 우둔함을 눈치 채게 되었다네.
지금의 내 기도는 이렇게 되었네.
“주여 저에게 내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
내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했더라면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거야.
마음 밭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세 번째 묵상할 마음의 밭은 가시떨기 밭입니다. 예수님은 이 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농부가 가시떨기가 있는 곳에 씨를 뿌리겠습니까? 아마도 가시떨기가 있었다면 다 갈아엎을 것입니다. 그러나 잡초는 원래 생명력이 강합니다. 뿌리가 살아 있다가 다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잡초는 발육이 더 왕성해서 알곡으로 가야할 양분을 다 빨아 먹습니다. 가시떨기는 또한 햇빛과 공간마저 막아 알곡은 성장이 더디게 되고 결국은 쭉정이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가시떨기를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기타 욕심이라고 해석합니다. 누가복음의 비유에서는 여기에 일락, 곧 쾌락을 덧붙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눅8:14) 우리 안에는 생명의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 에너지가 열매를 맺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데 염려나 물욕이나 욕심이나 쾌락으로 그 에너지가 새어나가고 맙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안에 일정량의 생명 에너지 탱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탱크가 줄줄 새고 있습니다. 여러 개의 연결관이 박혀 있어 에너지를 뽑아가 정작 열매를 맺는 쪽으로 미약하게 흘러들어갑니다. 새는 곳을 막고 불필요한 관들을 잘라내어야 생명에너지가 온전히 사용될 수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은 작을지라도 한 곳에 힘을 모으면 거기서 폭발적인 힘이 나옵니다. 남극의 태양일지라도 돋보기를 갖다 대면 불을 일으킵니다. 못의 힘 또한 집중력에서 나옵니다. 힘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는 것을 막고 한 곳에 집중시킨 결과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생의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결국 열매 없는 인생으로 만듭니다. 생명에너지를 갈아먹는 유혹들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세상의 염려입니다.
데일 카네기라는 사람이 『근심이여 안녕』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근심, 곧 염려와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세계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50%는 염려와 근심 때문에 생긴 신경장애나 정신장애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좀 먹는 것도 이 염려입니다. 현실은 전혀 비관적이지 않는데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스쳐갑니다. 그래서 우리 온 에너지가 다 빠져 버리고 말며 더 이상 기도할 의욕도 나지 않고, 믿음도 없어집니다. 염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림나’인데 ‘나뉘다’란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염려는 생각과 마음이 나뉘고 분산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도 여러 염려들로 우리 마음이 분산되어 말씀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먹을 것에 대한 염려, 일에 대한 염려, 자녀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미래에 대한 염려 등으로 우리 생각은 흩어져 있습니다.
염려가 많은 우리들을 향해 주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빌4:6)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염려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6:27) 염려는 쓸데없습니다. 쓸데없는 이유는 염려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음만 산란하여 제대로 된 조치나 계획을 취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염려는 습관입니다. 그것도 아주 잘못된 습관이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악한 것입니다. 몽테뉴는, “나의 생애는 실제 발생하지 않은 아주 처참한 액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라 말을 합니다. 염려는 무엇입니까?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지 않고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미리부터 걱정하는 태도입니다. 염려는 우리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상입니다. 현실은 잘 굴러가는데 우리는 이 염려라는 허상 때문에 스스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몇 해 전 유행했던 베스트셀러 중에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주된 내용은 사람들은 사소한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무기력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예컨대, 어떤 계약을 해야 하는데 상대방이 나오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럴 경우 우리는 오만 가지 생각을 다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 “저 사람이 내 약점을 알아봤다” “내가 하는 일은 항상 그래” 등등 온갖 상상을 하고 의미 부여를 하다가 스스로 낙담하고 맙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정말 그 회사에 바쁜 일로 긴급소집이 있어 올 수 없었다고 하며 오히려 사과까지 하였습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염려하고 있었던 시간 내내 우리는 마치 사망의 늪에 빠져 있었던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염려할 시간에 대신 기도를 하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염려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사라집니다. 주님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너희 아버지 되시는데 너희 필요한 것들을 어찌 다 채워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신앙이 없으면서도 염려하지 않고 태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잘 되겠지!’ ‘궁하면 통한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하면서 이겨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 필요를 아시고 도와주시겠다는데 더욱 더 염려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염려를 없애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집중력이 생겨 위기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재리의 유혹입니다.
알곡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주님 앞에 나왔던 부자 청년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청년은 영생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다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19:21)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이 부자의 마음이 물질에 가 있다는 것을 간파하시고 문제의 본질을 건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막19:22)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재리의 유혹이 영생의 열매를 맺을 기회를 앗아간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수도자들의 아버지' '사막의 성인'으로 불리는 안토니오의 경우입니다. 안토니오는 251년 이집트 중부 코마나의 한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무 살에 양친을 잃은 후 성인은 가족들을 돌보며 많은 재산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평범한 부자 청년이었던 안토니오의 삶을 바꾸어 놓았던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부자 청년과의 대화였습니다. 안토니오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많은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참회와 청빈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한적한 동굴과 사막에서 수도의 생활을 하였고 안토니오를 통해서 놀라운 기적과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안토니오의 수도와 청빈 생활을 본받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집트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한참 많을 때는 사막의 수도사만 근 2만 명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재산을 버리고 사람이 없는 사막으로 나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에 있으면 물질과 여러 유혹 때문에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습니다. 의지할 것 없고 방해하는 것이 전혀 없는 광야에서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데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시대에서 이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생활이란 것이 있고 또 우리가 먹여야 할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생활에서 영적인 성숙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부단히 물질로부터 자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잠언 30장 7-9절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문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아굴의 기도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그는 물질의 위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질이 없으면 신앙을 유지하기가 어려움을 잘 압니다. 물질이 많으면 교만해져 신앙을 버릴 수도 있음 또한 잘 압니다.
주님은 물질을 주인이라 하여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혹이 강하고 맘몬의 지배력이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물질이 하나님의 발 앞에 무릎 꿇도록 해야 합니다. 부요하게 되는 것은 좋지만 그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물질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물질이 유혹이 되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위한 귀중한 도구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는 욕심입니다.
사람이 욕심을 갖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적당한 욕심은 우리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도 이상의 욕심을 품을 때 그것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방해합니다. 영적인 것에 집중해야 할 때 다른 부수적인 것으로 우리 에너지를 분산시킵니다. 문제는 욕심이 교묘히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되어 우리를 유혹한다는 점입니다. 욕심은 목회자들을 자주 넘어지게 만듭니다. 선교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은 많은 성도수를 자랑하고 싶은 욕심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교회 건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큰 교회를 지어 자랑하거나 소유하려는 우리 욕심이 더 클 경우가 많습니다. 총회장 자리나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명예욕 또한 목회자들을 영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나라 술잔 중에는 ‘계영배’라는 것이 있습니다. 계영배는 과학적 원리를 이용하여 일정 높이 이상이 되면 따랐던 술이 사라지게 만든 잔입니다. 사람들에게 적당히 마실 것을 권유하기 위해서 만든 교훈의 잔입니다. 소설 『상도』에서 유명하게 된 잔인데 거상 임상옥의 마지막 시험이 바로 이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권력과 결탁하여 더 큰 부자가 되는 꿈을 내려놓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동안 쌓아놓았던 것을 완전히 허물어버리는 욕심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광야에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과시욕과 세상 만국의 권세를 주겠다는 권력욕으로 예수님을 유혹하였습니다. 더 인정받고 더 큰 힘을 갖고자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끊임없이 물리쳐야 될 것들입니다. 주님은 대신 죄인들과 가난한 자를 섬기는 길과 십자가에서 자신을 비우고 희생하는 길을 가셨습니다. 섬김과 십자가를 통해서 신앙인들이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욕심인지 하나님의 뜻인지는 다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져 가는지를 보십시오. 또 내가 맺은 열매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평화와 오래참음과 자비와 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에 이르는 성령의 열매인지 아니면 과시와 허영과 허세와 권려과 분열의 열매인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한 욕심을 하나님을 향한 욕심으로 바구십시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하나님은 우리가 더 영원하고 가치 있는 것에 욕심을 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갈 때 욕심이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넷째는 세상의 즐거움입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많으면 하나님의 일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술이나 도박이나 음식이나 스포츠나 성적 탐익 등이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아 갑니다. 목회자가 세상의 즐거움에 빠지면 기도를 게을리 하고 목회도 게을러집니다.
물론 자기 본 일 외에 다른 즐거움이 없다면 인생이 너무 재미없을 것입니다. 적당한 놀이와 즐거움은 필요합니다. 그것이 기분전환이 되고 생의 창조력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볼링의 원조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볼링의 원조는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옛날 중세 수도사들에게는 나무 막대를 세워놓고 공을 굴려서 넘어뜨리는 놀이를 하였습니다. 놀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나무 막대를 사탄으로 생각하고 사탄을 쓰러뜨리는 놀이를 즐겼던 것입니다. 이것을 대중화 시킨 것이 루터입니다. 당시 루터는 다이아몬드 형태로 핀을 세우고 공을 굴려 넘어뜨리는 놀이를 개발하였습니다. 쉬고 놀고 즐기면서 우리는 새 힘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나 ‘-홀릭’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곳에 빠지면 위험합니다. 사업가가 사업 외에 도박에 빠지면 그 회사는 곧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이 인터넷이나 게임에 빠지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즐거움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목회가, 학자는 연구하는 것이, 사업가는 사업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될 때 거기서 열매가 나옵니다. 주님은 자신의 일이 즐거움이 된 분이었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우리가 세상의 즐거움에 빠질까봐 주님은 종말을 통해 우리를 경고하십니다. 주님은 갑작스럽게 우리를 찾아오실 것이고 그 때 깨어서 주님의 일에 충성되었던 사람에게는 칭찬이 주어질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악한 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4:48-51) 지금은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자다가도 깰 때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잡초는 그냥 놔두어도 잘 자랍니다. 우리 마음 밭에도 이런 잡초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의 쓴 뿌리들이 틈만 나면 솟아오르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로 떠내려가고 맙니다. 하나님 말씀과 기도와 부지런한 순종은 강력한 제초제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행함으로 우리 마음 밭을 부지런히 일굴 때 가시떨기라는 잡초는 자랄 수 없을 것이며 거기에는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결실이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좋은 땅의 축복
막 4:13-20 / 김영수 목사
지금 전국이 가뭄으로 인하여 고통하고 있는 이때에 맥추 감사절을 맞이하여 먼저 농사와 관련된 속담 한 마디를 전합니다. “하농(下農)은 잡초를 가꾸고(作草), 중농(中農)은 나락을 가꾸고(作穀), 상농(上農)은 땅을 가꾼다(作土)” 이 말의 뜻은 농사의 하수는 피와 같은 잡초를 뽑는 데 힘을 쓰고, 중농과 같은 평범한 농사꾼은 좋은 결실을 얻으려고 나락만 가지고 씨름하며, 진짜 잘하는 농사꾼은 땅을 좋게 만드는 데 전력한다는 뜻입니다. 잡초를 뽑는 것도 중요하고, 나락에 신경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땅의 질이 좋고 영양분이 있어야 작물의 수확이 좋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농사꾼은 부지런히 땅을 갈고 고르고 또 그 위에 영양분을 주는 객토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농사꾼입니까? 잘못된 것만 가지고 씨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은 버리고 잘된 것만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까? 씨앗은 자체 생명력이 있습니다. 좋은 환경만 제공되면 어떤 곳에서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좋은 땅의 비유를 통해 맥추감사절에 참여하는 우리의 영적자세를 점검해보려고 합니다.
Ⅰ. 사람의 마음 밭은 어떤 것일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뿌렸지만 길가나 돌짝밭이나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에서는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옥토와 같은 좋은 땅에서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좋은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수는 적었을는지 모르지만 그곳에 이룬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말미암아, 길가와 돌짝과 가시떨기 밭에서 잃었던 손해를 너끈히 보상하고도 남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처럼 네 종류로 나누고 있지만 원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모두가 길가나 바위처럼 단단했는데 점점 옥토로 바뀌어 간 것일까요? 아니면 원래 옥토였는데 완악해지고 단단해져서 길가나 바위처럼 변해버린 것일까요? 동양의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여으며, 순자는 반대로 성악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사회학자이며 교육학자였던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단순히 문명에 대한 거부의 말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조직이나 제도가 오히려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왜곡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비판하고 제시한 루소의 교육학 방법론의 일종이었습니다. 루소는 교육학의 고전이 되어버린 그의 책 『에밀』의 첫 줄을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신은 만물을 선하게 창조했지만 인간의 손에서 모든 것은 악하게 된다.”
더불어 기독교에서도 인간의 마음을 타락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우주와 인간을 만드실 때는 흠이 없고 아름다웠습니다. 모두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밭은 형편없이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형편없이 망가졌다고 자주 말하였습니다. 이를 전적타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적타락이라는 말은 단지 구원과 관련되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전적타락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전적타락이라는 것을 인간성에도 적용하여 인간 마음의 본질적인 악함이나 무능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를 적용한다면 옳지 않습니다. 이런 경향은 어린 아기를 바라보면서도 어떻게든 그들이 죄인이고 악하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신앙인들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성마저도 형편없이 망가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철저히 망가질 작품이라면 그것은 원래부터 완벽한 작품이라 할 수 없습니다. 타락은 작은 흠에 불과합니다. 인간 생명 자체는 에덴동산에서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위대하고 아름답습니다.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워낙 아름답게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루소나 맹자의 성선설에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원래 인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4-15)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곧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어떤 씨앗이 뿌려져도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불행히도 인간은 이 어린아이와 같은 심성을 잃어버리고 단단하고 완악해져서 길가나 바윗덩어리처럼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적인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Ⅱ. 회복되어져야 할 우리의 마음 밭
1. 무엇보다 단순하고 솔직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단순하고 솔직하다는 것은 자기 눈앞에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안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웃고 떠들며 그 순간을 즐깁니다. 자신이 가난하거나 자신이 위기에 처한 현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는 화를 내거나 엉엉 소리 내어 웁니다. 자신의 위치가 어떻고 자신의 체면이 어떻고 하는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울다가고 금방 까르르 웃기도합니다. 서로 싸우다가도 금세 함께 어울려 놉니다.
어른들은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현재를 마음껏 즐기지 못합니다. 자기 체면이나 위치 때문에 마음껏 울거나 웃지도 못합니다. 자기에게 잘못하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은 평생 원수가 됩니다. 소위 ‘뒤끝작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기억하고 있다가 결국 어떻게든 복수합니다. 편견이란 것도 어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이래’ ‘저것은 이래’라고 규정하면 도무지 그것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상황이나 현실이 바뀌어도 수용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가 힘이 듭니다. 자기 생각이 강해서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SBS에서 하는 TV 동물농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동물원에 원숭이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원숭이가 자기 오빠 원숭이를 괴롭혔습니다. 가까이 올 때마다 얼마나 사납게 구는지 먹지고 못하고 함께 지낼 수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물들 하고 의사소통이 되는 하이디라는 커뮤니케이터를 불렀습니다. 하이디는 동물과 대화가 가능한 희한한 능력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이 하이디라는 여자가 먼저 여동생 원숭이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여동생 원숭이가 이렇게 자기 오빠를 사납게 대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했습니다. 자기는 강한 수컷과 짝을 짓고 싶은데 오빠 때문에 다른 수컷이 접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괴롭힘을 당하는 오빠 원숭이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다른 원숭이 가족들과 따로 만남을 갖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이 오빠 원숭이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동생에게 당하지만 말고 용기를 내라”는 가족들의 메시지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즉시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빠 원숭이가 용기를 갖게 되었고 그 무서워했던 동생에게 용감하게 접근했습니다. 동생 원숭이는 처음에는 으르렁댔지만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던지 이내 수그러들고 말았습니다. 급기야는 오빠 원숭이를 안아주며 털에 있는 이까지 잡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동물과 대화하는 하이디라는 여성보다도 바로 이 장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화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단 한 번에 용서도 하고 변화도 수용할 수 있을까요? 절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 마음이 가지고 있는 복잡함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힘든 것입니다.
『실낙원』을 썼던 밀턴은 노년에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눈이 멀고 난 후 밀턴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를 절망케 한 것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소경된 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내 생각이었다.” 인간의 생각이란 것이 불행하게 만듭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 내 처지에 대한 비관,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사람들은 솔직해지지 못합니다.
류시화 씨의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실렸고, 인터넷에서도 떠돌고 있는 작자 미상의 “신과의 인터뷰”라는 글이 있습니다. 신과 인터뷰하는 가상의 글인데 ‘나’란 사람이 신에게 “사람들을 보실 때 어떤 것이 가장 신기한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어린 시절을 지루해 하는 것, 서둘러 자라나길 바라고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잃어버리는 것 /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 버리는 것, 결국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못하는 것 /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결국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는 것.”
이어서 ‘나’가 또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로서 어떤 교훈들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으신가요?” 하나님이 대답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단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너 스스로를 사랑받게 만드는 것임을...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희에게 사랑을 표현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 중에서도 너희를 진실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 역시도 용서해야만 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또 있나요?” 하고 ‘나’가 묻자 하나님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늘 기억하거라. 내가 항상 이곳에 있음을. 언제나, 모든 방법으로.”
2.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단순함과 솔직함은 실은 그 배경에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부모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부모는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보호자입니다. 어린아이는 전폭적으로 신뢰합니다. 부모가 왜 어린아이들에게 매여 있습니까? 아이들이 자기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도움 없이는 그들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분 앞에 어린아이가 되어갑니다. 그분이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고 모든 것을 채우시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될 때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이런 옥토 밭이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유대 지도층들의 위협이 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제자들은 철부지 같았지만 주님은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옥토 밭과 같은 결실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진리 안에 거하는 자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그분의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금세기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교인 중 하나는 아마 티벳 라마교의 달라이라마 일 것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도 이 달라이 라마가 가면 아무리 시골이라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런데 그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인상은 그가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표정에 항상 웃음과 생기가 돌고 장난기도 있습니다. 진리가 그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신뢰와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기쁨이 있고 그 기쁨이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최근에 돌아가신 분 중에 제가 보기에 가장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간직하고 계신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강영우 박사입니다. 이 분의 강연도 듣고 사진도 보았는데 항상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럽게 웃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중학교 때 축구공에 맞아 두 눈을 다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1년 전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실명하고 나서는 그 충격으로 어머니와 누나가 죽었습니다. 동생들은 다 흩어져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형편이면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그를 다시 일으켰고 그분의 의지가 스스로를 절망의 길로 몰고 가지 않았습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현실은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견디기 힘들 현실이라고 거기에는 의미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란 것이 우리를 극단적인 비극으로 몰아갑니다.
강영우 박사는 이에 좌절하지 않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연세대학까지 들어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쁜 여대생을 자기의 아내로 맞았습니다. 유학 가서는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교육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부시 정부 때는 백악관의 장애인위원회 차관보라는 높은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자서전 『빛은 내 가슴에』나 『우리가 오르지 못한 산은 없다』는 책을 써서 절망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그 자녀들은 아버지를 존경하며 자랐고 의학과 법학 분야에서 탁월한 인재들이 되었습니다.
그가 췌장암으로 생을 마치면서 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습니다.
“... 하나님의 축복으로 저는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저의 실명을 통해 하나님은 제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역사들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전쟁이 휩쓸고 가 폐허가 된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두 눈도, 부모도, 누나도 잃은 고아가 지금의 이 자리에서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입니다. 실명으로 인하여 당시 중학생이라면 꿈도 못 꿨을 예쁜 누나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었고, 실명으로 인하여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 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실명으로 인하여 책도 쓸 수 있었고, 세상 방방곡곡을 다니며 수많은 아름다운 인연들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아름다운 인연들로부터 받은 게 너무 많아 봉사를 결심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는 강연들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눈을 잃고, 저는 한 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늘 여러분의 곁에서 함께 하며,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보다 간절하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여러 번 병원에서 검사와 수술, 치료를 받았으나 앞으로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 의료진들의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로 인해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램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 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 받았습니다. 한 분 한 분 찾아뵈옵고 인사 드려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분은 두 눈을 잃었기에 하나님만 의지하였고 하나님께서 그의 앞길을 인도해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며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 인생에 행복을 맛보고 싶습니까? 우리 인생이 100배의 결실을 맺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과 함께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3. 범사에 감사하며 인내함으로 헌신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좋은 땅에 대해서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 밭을 가는 수고라 할 것입니다. 부지런한 농부는 황무지도 옥토로 만듭니다. 돌멩이 투성이인 밭을 부지런히 갈고 물을 주다 보면 어느새 옥토가 되어 있는 것을 주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평택은 간척지가 많습니다. 저희 처가댁도 간척지로 인하여 생긴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척지는 처음 농사지을 때 소금기가 많아서 농사가 잘 안 됩니다. 평균적으로 간척지의 염분을 제거하는 데 평균 1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 물을 대고 빼면서 소금기를 빼고 객토를 해야만 비옥한 땅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 믿고 금방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아직 내 자신은 간척지와 같이 세상의 것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여기서 좋은 열매를 거둘 수가 있습니까? 자신의 경험, 지식, 모든 것을 버리고 어린이처럼 순수하게 되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드릴 때 우리는 좋은 영적 옥토로 바뀔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옥토에는 지렁이와 같은 각종 미생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농약을 친 논에는 메뚜기도 없고 지렁이도 서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농약을 안친 논과 밭에는 많은 지렁이와 미생물들이 번식하며 성장합니다. 좋은 밭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채소의 잎에 벌레가 끼고 지렁이들이 그 땅 밑에 서식하듯 각종 어려움과 고통과 아픔들이 있지만, 또 그렇게 자신의 내면들을 갈아대듯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속에서 좋은 열매들을 만들어 냅니다. 비록 겉보기에는 볼품이 없지만 건강한 채소와 열매들이 자라납니다.
지금 병들어 있는 논과 밭을 건강한 밭과 논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기다림의 수고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기를 소망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은 그 얼굴에 평화가 있고 웃음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외면적인 수확에 마음을 빼앗겨 황무하게 되어버린 나의 마음을 점검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하며 기도하며 감사함으로 이겨내는 우리의 맥추감사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