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서른네 번째 이야기, 사랑의 멍에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나은 삶, 더 여유 있는 생활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교육의 기회를 활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어서 하는 고생을 미래를 위한 성취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참고 인내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평범한 범인들에게는 아주 건전하고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고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르고 달라야 한다. 옛 속담에 교육과 관련한 가장 잘못된 말이 있는데 “배워서 남 주나?”라는 속담이다. 잘못된 동기에서 시작된 많은 금언이 현실 사회에서는 오히려 잘못된 방향을 제시하고 나쁜 동기를 심어주는 문장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배우는 목적은 배워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 잘살려고 한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 교육의 바른 목표는 배워서 남에게 유익한 삶을 살기 위함이다. 한 마디로 배워서 남 주려고 하는 것이다. 배워서 남 주면 안 된다는 뭔가가 있는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이기심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자연이지만 이타심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낯선 이방인이다.
예수께서는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다. 인생의 고단한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제안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에는 조건이 하나 따라붙는다. 그것은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쉼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멍에는 무엇인가? 멍에는 짐승들이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등에 지는 도구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이것은 영적으로 봉사를 의미한다.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고 삶의 참된 쉼을 누리려면 봉사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한 번은 섬기는 교회에 나오던 집사님이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가정 형편이 어렵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딱히 건강이 나쁠 이유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집사님께 “한 복지 단체에 다가서 봉사활동에 참가해 보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단체에 나가서 봉사활동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그 활동을 하고 난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나를 찾아와서 자신이 다 나았다면서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 사람을 고친 것은 약도 아니고 전문가의 상담도 아니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치료되었고 그의 마음에 불안과 불평은 사라지고 인생의 쉼을 누리게 된 것이다.
“봉사를 위해 메는 멍에는 곧 하나님의 율법이다. 에덴에서 계시되었고 시내산에서 선포되었으며 새 언약에서는 마음에 기록된 사랑의 대강령, 이것이 인간 일꾼들을 하나님의 뜻에 결합하게 한다.”(소망, 329)
봉사하고 사는 것이 인간이 가장 잘 사는 것이다. 남을 위한 배움, 타인을 위한 노력, 연약한 자들에게 느끼는 연민, 이런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되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자산들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은 자기 행복과 기쁨을 위해 예수께 가지만 거기에서 결코 참된 행복과 기쁨을 얻지 못한다. 그것은 그분이 주시는 조건 사랑의 멍에를 메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의 멍에를 메지 않고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봉사만이 사람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주님의 행복 처방전이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하나님의 율법을 생각합니다.
그 율법이 곧 봉사와 섬김이라는 사실 앞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율법을 헛되이 지키려고 했던가를 기억합니다.
다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팟캐스트 방송)---
http://www.podbbang.com/ch/10726?e=24443690
---(Link-2)---
http://file.ssenhosting.com/data1/chunsd/220906.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