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다.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기쁨을 알았다."' -사르트르-
사르트르의 '지향성' 개념으로 부연하자면, 우리는 각자의 결핍대로 세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채우는 방향성으로 존재한다. 글에 관한 욕망을 지닌 존재들이라면, 이미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고 있을 게다.
글쟁이는 외로움을 각오하는 것이란 박완서 작가의 말, 글쓰기라는 게 어차피 종국엔 각개전투다. 어느 정도의 외로움은 등에 지고서 몰두해야 하는 일상, 그런 결핍까지가 작가로서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오롯이 스스로에게 전념하는 동안 자신에 관한 것들이 보다 선명해지기도 하고.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증언해야 하는 자다. 인간은 그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자다." -하이데거-
왜 그것을 할 수밖에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것이 자기 존재를 해명할 수 있는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계열의 철학에서는 예술가적 자아에 관한 담론으로까지 확장한다. 누군가에게는 글쓰기가 그런 존재론적 의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요즘'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건, 이전까지 내게선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는 의미겠지? 분명 나도 별 다르지 않은 시작이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존재의미를 잃어버린 채 기계적으로 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듯 시간의 누적이 스킬의 숙련도를 증명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콘텐츠의 심도로 이 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 철학에서의 '존재' 개념은,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체계를 매개하고 있는 존재 근거이다. 우리는 그것을 토대로 저마다의 세계를 지어올리고, 또한 그렇게 지어올린 세계가 다시 가치체계의 토대로 순환한다.
하이데거는 그 순환의 상태가 개개인이 영위하는 시간의 결대로 반복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그 증상으로서의 언어, 하이데거는 '존재의 집'이 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무엇을 쓰고 있는가는 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또한 내게서 반복되고 있는 시간의 누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