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2세되는해 10월달에 풍으로 쓰러졌다.
일본과 한국을 병행하며 사업을 하며 열심히살면서 한국에 부업으로 강원도일대에 수십만평의 땅에 약초를 계약재배한다.
황기,당귀,더덕등를 농민들에게 선돈을 미리주면서 전량약초를 매입하는 방법이다.
나는 산을 좋아하면서 약초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어느정도 경제적으로 재정도 뒷바침되자 나는 내가 하고싶은일에 투자를 하게된것이다.
여름내내 틈틈이 강원도 골짜기를 다니면서 씨를뿌리고 관리가 잘된곳을 선정하여 계약을 치르며다녔다.
이때 나를도와서 약초재배를 잘알고,판매에 능숙한분을 전문가로 채용하였다.
이렇게 사업은 일사천리로 탄탄하게 다져갔고 많은 투자로하여 소득도 적지않을것으로 기대되였다.
드디어 수확시기를 맞아서 장비를 투입하여 이곳저곳에서 약초가 매일처럼 산더미처럼 쏱아셔 생산되였다.
공장으로 이동하여 철철하게 닦고,건조하여 창고에 쌓여지며,출하를 앞두고있었다.
나는 잠시 일본에 사업은 다른사람에게 맡기고 이쪽약초사업에 온힘을 기울였다.
이것이 나에게 화근이 된것이다.
새벽부터 늦은밤까지 이곳저것으로 다니면서 몸에 무리가온것이다.
의사가 풍이 예상되니 충분한 휴식를 할것을 요구했으나 무시해버렸다.
이렇게 나는 운전중에 이상한 증상으로 병원으로 실려가서 오른쪽 마비증상으로 입원하게된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그때의 심정은 표현하기도조차 힘들었다.
결국 약초사업은 다른사람들만 배불리는 초라한 모습으로 많은돈까지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에게 남은것은 불구가되버린 비참한 육신에 가족들뿐이였다.
나는 병원에서 모든걸 포기한 상태에서 아무런희망도,용기도 없이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이때 나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준 사람은 아내였다.
아내의 헌신적인 재활에 노력과, 용기가 나를 새로운 재활의 희망으로 일으켜주었다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주무르고,맞사지 해주며 근육이 굳어지는것을 막아주는것이었다
이렇게 노력하는 아내을 바라볼때 나는 눈물만 흘리고 바라볼수밖에는 별수가없었다.
세월은 한달이상 흘러가면서 내마음이 한번해보자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내가 왼손으로 주무르며 마미된쪽을 움직이려고 피나는 노력을 시작하게된다.
내가처음으로 입원했던 병원은 제천에 자리하고있는 세명대학한방병원이었다.
사실 병원에서 치료해주는것은 침과,재활치료뿐이였다.
하루하루가 나아지는것없이 초초할뿐이였다.
내가 묵는 병실은 5층으로 남자들만 있는 병동이였다
6층에는 여자분들이 입원치료하는곳이였다.
나는 계속해서 병원의사만 처다보며 있기에는 이제한계에 달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벌써 6개월정도의 재활치료에도 별다른 차도가 없었던곳이었다
환자나,보호자들은 서로가 교류하며 어디서 누가 풍를 잘고친다는소문을 찾아다니며 치료받으며 메달리는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결심하기 시작한다,이제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것을 병원만 믿고 있을수없었다.
나는 매일처럼 마음속으로 재활치료를 스스로 하고있었었다
침대에누워서 마비된 쪽을 움직이려고 무던히도 힘을쓰고 땀이나도록 연습을 혼자하고있었다.
이렇게 3개월정도 운동하던끝에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는것을 느낄수있었다.
나와,아내는 너무도 기쁘고 희망을 갖고 연습하면 다시금 회복될수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나는 낮과밤을 가리지않고 연습한결과 침대에서 내려올수있도록 빠른회복을 보였다.
병원측에서는 자기네들이 치료를 잘해서 낳은것처럼 대대적인 홍보를하면서 자랑하기시작한다.
나는 무릅으로 기고,한팔로 기느라,온몸에 멍이며,상처투성이가 되있었다.
사실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엎드려서 기어다니는 정도밖에는 되지안지만 움직이지 목하던 때에 비하면 좋아진것이다.
갈길은 멀고도 멀었다,마음만 자꾸 더 급해지는것 같아서 힘이들었다.
이런 싸움을 언제까지 해야할지 기약없는 싸움이다.
나는 아내와 상의해서 서울 경희대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좀더 시설이 잘되있고 의사진이 두꺼운 곳에서 치료받아보자는것이 우리들 의견이였다
이렇게 10개월만에 서울로 병원을 옮기게 되였다.
그래도 우리부부는 기대감이 부풀어서 매일처럼 열심히 재활치료와 운동이며 병원에서 원하는것은 모두 행하였다.
나는 서울에온지1년만에 내발로 어렵게나마 서서화장실에 갈정도가 되였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병원을 휄스장삼아 재활운동를 열심히한 덕택이라 생각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께요^^~~
첫댓글 자린고비님이 큰시련을 겪으신 내용 잘 읽었습니다.
저 또한 그런 큰 병마를 이겨내고 지금은 생업활동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큰병을 다스리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3가지가
필요합니다 (저의 경험상)
즉 착한 아내, 명의, 본인의 의지 3가지가 큰병을
낫게 해 줍니다.
병마를 이겨내고 나면 생명의 귀중함을 깨달아
세상을 더 소중하고 의미있게 제2의 인생을
활기차게 살아갈수 있습니다. 쾌유 완쾌를 빕니다.
낭주님의 좋은 경험에 말씀 감사합니다
저또한 필요한 세가지를 모두 갖추었기에 어려움을 이겨내는
큰힘이 되였던것 같네요
저도 지금은 본연의 사업에 충실하고있답니다
지금의나이가 59세니까 17년전의 경험답입니다
@자린고비 띠동갑이라 유심히 봤습니다.
저도 1999년도에 큰수술 지금은 완쾌하여
열심히 잘살고 있습니다.
생업에 충실하면서 이런 카페생활동을 잘 하시면
생할충전에 많은 도움이 될것 입니다.
본인 의지가 참으로 중요 하다고 합니다 건강을 되찾겠다는 마음을 끝까지 놓지 마세요. 건강되찿으시고 카페 좋은분들과 함께 하는 날이 오시길 바랍니다
나이테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주일되세요^^
본인의지와 가족들의 돌봄 .간병인 중요합니다.고생많이하셨군요
저도 5년전 후배기 운전하고 가다가 가로수와꽝 졸음운전 으로 진단16주.다 죽었다고 했죠
119 출동하여 나주병원후송수술불가능조대병원에서수숳 뼈이식수술 일년동안 병원생활
고생하셨군요
지금은 편안하신지요
저도 작년에 교통사고로 허리수술에다 병원생활6개월하고는
지금영 죽을맛입니다
보험처리 지금도 덜된상태네요
풍으로 지병잇어서 보험도 잘처리안되네요
나 아프면 남편이 챙겨주려나?
문득 그것이 궁금..
자린고비님!!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다는 건 세상 그 어떤 복보다 최고의 복입니다
분명 최고의 삶을 사시고 계십니다
홧팅^^
그럼요~~
저는 아내가 아니면 지금에 저는 존재하지 안지요
언제나 감사하며 사랑한답니다
일단 아프지 마세요. 누가 챙겨줄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마세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 아픈 사람 있으면 삶이 힘들어지잖아요.
물론 챙겨줄 사람이 있을겁니다. 그러나...자신은 자신이 잘 챙기자는 역설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이해하시죠 ?
인생이라는 항해는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해도 비치고....
하다못해 손가락 하나라도 다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겁니다.
병을 얻었을때 잘 관리하여 굳세게 일어서는 그날...
진정으로 맛진 사람입니다. 희망을 가지시고 건강 필히 회복하시어
약초사업을 다시 일으키는 그날을 기다려 보겠습니다.
적토마니 감사합니다
지금은 회복되여 약초사업합니다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겁니다
@자린고비 네 ~ 모두 잘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열심히 사셨던 만큼 재활에도 열심을 다하셨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재기에 성공하셨을 것 같습니다~
2편을 기대합니다~^^
시냇물니의 과찬에 칭찬 감사합니다
지금은 성공하여 여행업과,약초사업을 합니다
와우~
후편 기대됩니다.
저도 열심히 살고있는데 몸이 신호를 보내네요...쉬라고!
지금님에 관심과 기대하심에 감사드립니다
2편 오늘중으로 올리겠습니다
이미 제카페에는 써놓았네요^^
즐건 주일되세요
지금은 회복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이젠 사업 확장보다는
건강 챙기세요~~^^
은빛이슬님에 걱정에말씀 늘명심하며 조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면 성격도 이샹해 지던걸요..쾌차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세요 조 부모님도 부모님다 노졸증으로 돌아갔는데
재발히시면서 힘들어 하신 기억이 납니다 무리 하는게 재발의 원인이라 의사가 말하던데요..조심하세요
아프면 모두가 힘이듭니다..
마야님에 관심과뎃글에 감사드립니다
조심 또조심하며 살겠습니다
끝까지 꼭좀 글올리면 읽어주세요
대충7~8편까지는 갈것같은데요
고운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