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복음 강해 제 17장 성도의 생활과 인자의 재림
본장은 9:51절부터 19:27절까지 대 문단 중 두 번째 단락과 세 번째 단락이 교차하는 부분이다. 예수께서 베레아 지방의 사역을 마감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과 다시 유대 지방을 방문하시고 베푸신 이적과 권능과 말씀을 수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이 갈수록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는 희생과 겸비의 모범을 제자들에게 제시하시며 제자들이 본받을 것을 거듭 당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개인적인 영달과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남을 실족하게 할 세속적 야심과 욕망에 가득 차 있었다. 또한 메시야 관에 있어서도 엄청난 곡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걸어가야 할 길은 골고다의 십자가의 길임을 다시 밝히셨고 마지막 때에 심판이 있을 것을 환기시킨 것이다.
1. 교회 공동체 생활의 기본 원리 (17:1-10절)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는 마태와 마가도 기록했으며 죄를 범한 형제에 대한 훈계와 회개했을 때의 용서의 필요성에 대한 교훈은 마태의 내용과 평행된다. 마태는 ‘천국에서 누가 크냐’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관련하여 이 교훈이 주어졌지만 누가는 제자 훈련의 일환으로 교훈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은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 용서에 대한 교훈, 믿음과 겸손에 대한 교훈으로 구성된다. 이 교훈들은 제자들과 무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형제들에 대한 제자들의 행동과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교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 ‘스칸달론’은 원래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해 놓은 덫 혹은 올무를 의미한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즉 실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것보다는 고의적으로 죄를 짓게 하는 것을 의미하며 바리새인들의 외식 행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화로다’라는 말 ‘우아이’는 슬픔이나 불쾌감을 나타내는 감탄사인데 비난이나 단순한 비탄의 절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심판의 선언을 말한다.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 즉 죽음보다 더 무섭고 가혹한 형벌인 영영히 타는 불 속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은 자’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어린이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제자가 되려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 초신자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새신자들은 믿음이 연약하고 흔들리는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단의 사설이나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의해서까지 실족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실제로 연자 맷돌에 사람을 묶어 바다에 빠뜨리는 사형법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작은 자라는 표현과 대비를 이루어 타인을 실족하게 하는 죄가 얼마나 크며 심각한 것인가를 실감나게 말씀하신 것이다. 즉 타인을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보다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셨다. 즉 상대방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살피고 경계하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형제가 죄를 범할 때에는 두 가지를 행하라고 하셨다. 첫째는 경고하라는 것인데 이는 책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는 경고의 수위를 높이는 방법으로 처음에는 죄를 지은 당사자만 상대하여 권고하고 그 다음에는 두세 사람이 권고하고, 그 다음에는 교회에 말하고, 마지막으로는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고 했다. 둘째는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것이다. 형제가 권고를 받아들여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것인데 ‘아피에미’라는 이 말은 죄과를 모두 탕감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한 번 용서한 이상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회개하더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수이자 무한수이기 때문에 산술적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무제한적 용서, 무한한 관용을 베풀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세 번 용서하는 것을 최선의 수준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제한을 철폐하시고 무제한적 용서를 가르치신 것이다. 마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이를 강조하였다. 사실 하루에 일곱 번 회개한다는 것이 진정한 회개인가 하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라도 죄악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인간의 연약성, 이타적 사랑을 위해서는 무한한 인내의 용서가 필요함을 역설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끝없는 용서’에 대해 그 말씀을 실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예수께 더 강한 믿음을 주실 것을 부탁한다. ‘더하다’라는 말은 자신들이 어느 정도 믿음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내포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겨자씨만한 믿음마저 없었다고 하신 것이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예수께서 믿음의 분량을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참 된 믿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믿음의 분량을 요구했으나 예수께서는 그 질적인 면, 믿음의 생명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형제의 죄나 허물을 용서하는 일은 생명력이 있는 진실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뽕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겨지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마태와 마가는 뽕나무가 아니라 산이라고 했다. 이 둘은 모두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존재들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살아 있는 믿음에는 이러한 이적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상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의 심성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이적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고대 근동의 주인과 종의 관계를 비유로 인간의 선행이 하나님께 보상을 주장하기 위한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 대한 봉사는 받은 자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자 당연한 의무의 수행일 뿐임을 교훈하셨다. 이 비유는 특히 열두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봉사와 헌신이 어떤 마음가짐에서 행해져야 함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적 행위로서 하나님의 보상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주인에 대한 종의 시중은 마땅한 의무이자 봉사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라는 것은 자신의 분수를 넘는 행위로서 종은 결코 주인에게 그 어떤 부담도 지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맡은 일을 다 한 후에 집에 돌아오면 주인이 곧 와서 앉아서 음식을 먹으라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도리어 주인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고 상을 차리고 주인의 식사 시중을 들며 일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주인이 명한 대로 순종했다고 해서 그 종에게 감사할 주인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비추어보면 제자는 평생을 분골쇄신하여 봉사를 하더라도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다 보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밭을 가는 일이나 양을 치는 일은 제자들의 목회적 과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명을 다한 후에 주인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익하다.’라는 말은 쓸모가 없다거나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봉사 행위에 대해 전혀 사례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겸손의 표현이다. 즉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하라는 것이다. 사실 제자들의 모든 사역은 제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2. 열 문둥병자를 고치심 (17:11-19절)
교회 공동체 생활의 기본 원리를 교훈한 앞의 문단과 주의 재림에 관한 뒤의 문단 사이에 문둥병자를 고치신 이적이 기록되었다. 본 사건은 전체적 흐름을 단절시키는 인상을 주지만 실상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두 가지 반응 즉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적 기득권자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지적하신 것이다. 이 사건은 사복음서 중에 유일하게 본서에만 나오는데 전형적인 기적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믿음이 소개됨으로서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 반면에 이방인들은 그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다고 하는 말은 지리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갈릴리 지방이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사마리아는 그 아래에 있으며 예루살렘이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는 지리상 여건보다는 아홉 명의 유대인과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방의 경계를 지나가신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열왕기하에 보면 네 명의 문둥병자가 함께 기거한 것으로 나온다. 이로 볼 때 사마리아 지방의 어떤 마을은 문둥병자들만 함께 모여 살았을 것이며 예수께서는 열 명의 문둥병자가 모여 있는 한 마을로 일부러 들어가신 것으로 보인다. 율법에 보면 문둥병자들의 처신법이 나온다. 첫째,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한다. 이는 지극한 슬픔과 애통을 표현하는 히브리적 방법이다. 이런 행동은 죽은 자에 대한 애도를 나타낼 때 하는 행위로서 문둥병자는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둘째, 윗입술을 가렸는데 이는 자기 입술을 치는 행위로 극심한 자기 비하를 나타낸다. 셋째, 부정하다, 부정하다, 라는 말을 외쳐야 하는데 이는 자신의 부정을 알려 외인들의 접근을 방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진 밖에서 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마을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부정한 자는 결코 진 안에 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문둥병자들은 이러한 규정을 잊어버리고 다만 자신들의 병 고침에 대해서만 예수의 긍휼을 바랐던 것이다.
문둥병자들은 예수를 만나자마자 멀리 서서 소리를 높이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다. 저들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예수를 랍비로 알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즉 예수의 신성이나 메시야 사역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다만 예수가 자신들의 문둥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저들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보다는 그동안 소문으로 전해 들었던 예수의 치유 능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즉시 치유의 이적을 베풀지 않고 다만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 제사장은 문둥병자를 진단하고 돌보며 예방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또한 이 병이 치유되었을 때는 문둥병자에게 정결의식을 행해야 하며 속건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그동안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실 때에는 말씀을 하시거나 손을 얹어 안수하시거나 기도하셨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을 생략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는데 그 말을 들은 병자들은 자기들의 병이 나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갔다. 예수께서 말씀에 복종하는 신앙을 요구했는데 그 신앙에 부합한 행동을 한 것이다. 문둥병자들이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그 병에서 깨끗함을 받았는데 예수의 말씀에 복종하는 믿음이 병 고침의 기적을 유발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한 명의 사마리아인은 성전에 들어가거나 제사장을 만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전을 향하여 함께 갔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전으로 가던 도중에 모두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다음의 행동은 달랐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이 깨끗함을 받은 후에 성전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정결의식을 행한 후 집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들이 예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았던 이유는 예수께서 저들을 위하여 직접적으로 하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 사마리아인은 그 즉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사마리아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은 특이한 일이다. 이는 그가 평소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았다는 것이며, 비록 문둥병자였으나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예수께 돌아왔다는 것은 자신의 문둥병을 고쳐 주신 분을 정확히 인지했던 것이다. 그가 예수께 감사했는데 ‘유카리스테오’라는 이 말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깊은 환희와 감격이 넘쳐서 나오는 진정한 감사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받은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았으며 그럼으로 인하여 더욱 큰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동안 열 명의 문둥병자가 함께 살았을 때는 유대인이건 사마리아인이건 구별 없이 지내다가 막상 병이 치료되고 정결의식을 치르게 되었을 때에는 아홉 명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 한 명에 대해 멸시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자기들만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을 것이다. 사마리아인의 감사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그에게 묻기를 병 고침을 받은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고 하셨다. 마치 하나님께 범죄하고 숨어버린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아담아’라고 부르신 것과 같이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하였을 때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이다. 아홉 명의 문둥병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예수 앞이며 그분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병 고침을 받은 자의 마땅하고도 유일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병이 나았음을 증명하는 진단서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정결 의식을 치루는 일에 정신을 쏟았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예수에게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을 ‘이방인’이라 부르셨는데 이 말에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에드노스’라는 말은 다른 지방 사람이라는 뜻이며, ‘알로게네스’라는 말은 ‘다른 나라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알로게네스’를 사용하여 사마리아 사람을 하나님 나라 사람 유대인이 아님을 강조하신 것이다. 사마리아인이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한 행위는 예수를 메시야로 생각하고 그에게 경배하는 행위였으며 그의 사례의 말은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다. 이 선언은 인류의 대제사장이 되시며 대속자 되시는 예수께서 직접 문둥병자에게 깨끗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신 것이므로 이 사람은 더 이상 성전의 제사장에게 가서 정결 의식을 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이 선언은 육체적 정결함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영혼도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며 구원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아무리 제사장을 찾아가서 정결 의식을 행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율법 속에 갇힌 자들이 되었으며 예수를 떠남으로 구원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된 것이다.
3.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교훈 (17:20-37절)
예수께서 바리새인들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변하신 교훈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될 수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했으며 예수를 주로 모신 신자들의 심령 속에 실재한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께서 재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지상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에 자신들을 압제하던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경제적 부유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물리적 의미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시고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주장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며 통치가 실현되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해 질문한 이유는 구약에 예언된 주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이며, 예수의 답변을 통해 그가 메시야인가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저들의 질문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도래의 시기에 관해 물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관해서는 이미 굳어진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우회적으로 답변하셨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구체적인 표징이나 징조를 말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그런 표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유월절 전야에 오신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건설될 유토피아적인 왕국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오감으로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신령한 눈을 뜨지 않고서는 그 나라의 진행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너희 마음속에’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 중에’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어떤 마음 상태를 지칭하는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것이다. 특히 이 말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은 어디든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통치 속에 살면서도 또 다른 특별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의 날’ 하루를 말씀하셨는데 이 말이 예수의 지상 사역의 때를 말하는 것인지 혹은 미래에 있을 재림을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인자의 날’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 혹은 ‘주의 날’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며 ‘메시야 통치의 시대’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로 본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간섭하시고 통치하시는 ‘심판과 구원의 날’이다.
*암8: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암9: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 옛적 같이 세우고..
이 날은 제자들이 보고자 할지라도 보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 날이 예수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고 하면 아직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날은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는 날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되는 날이다. 실제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여러 사람들이 ‘속히 오리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재림 예수와 선지자임을 자처하며 무리들을 미혹하여 혼란에 빠뜨렸던 것이다.
*살후2: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된 자들과 이단들은 선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신들의 부나 명예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날은 은밀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번개가 하늘에서 비침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 출현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이 동요되어 공동체로부터 떠나거나 이탈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임재를 번개에 비유하셨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우주적 가시성이다.
번개가 번쩍이면 온 세상이 순간적으로 환하게 밝아지는데 이처럼 메시야의 재림은 범우주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 즉각성이다.
번개가 칠 때는 망설이거나 지체하지 않는다. 이처럼 예수의 재림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칭 메시야라고 선전할 시간적 여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메시야는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고난과 배척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로서 오심을 예고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영광의 나라이기 이전에 심판의 나라임을 예고하셨는데 물과 불에 의해서 각각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을 예로 들어 교훈하신 것이다. 이 사건들은 최후의 심판 때에 나타날 우주적 파국을 예시한 것이기도 하다. 먼저 노아의 홍수를 비유하셨는데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고 하는 것은 인생들이 생존을 위해 추구해가는 일상의 다반사를 말하는 것으로 이런 일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일상을 벗어나 탐욕과 쾌락에 빠져 노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경건으로 돌이키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멸망의 전조가 이미 주어졌지만 결코 믿지 않았다. 그 결과 노아 홍수 때에 저들은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하고 다 멸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자가 나타나는 날 즉 주의 재림 때에도 사탄에게 속하여 타락에 빠진 사람들은 치명적인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롯의 때 역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사하고 집을 지었지만 이들의 삶 역시 방종과 타락과 음란이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이 쏟아져 그들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예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주의 재림 때에도 노아의 때와 같이, 소돔과 고모라 같이 사람들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음란하고 부패할 것이라는 것이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이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재림하실 것을 말하는데 이 날은 사람이 자기의 귀중한 물품을 챙길 겨를도 없이 다급하고 긴박한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지붕에 물건을 널기 위하여 올라갔다가 주의 재림을 당하면 귀중품을 가지러 집안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고, 밭에서 일하는 자들 역시 집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토록 긴박한 상황에 처해도 집안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자기의 가치 있는 물품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물질의 노예로 살아온 인간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그네와 청지기 정신으로 살아온 사람은 주의 날을 대망하며 세상에 속한 미련을 버리고 주를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환난 때에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셨다. 집을 떠나가면서 뒤를 돌아본 것 때문에 목숨을 잃은 구체적인 사례이다. 그녀는 소금기둥이 되었는데 뒤를 돌아본다고 하는 것은 현세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을 완전히 단절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기억하라’고 하는 말 ‘므네모뉴오’는 단순히 기억해낸다는 의미보다는 ‘마음을 쓰다.’ ‘조심하다.’라는 뜻으로 롯의 처가 당한 파멸을 기억하고 조심하라는 경고이다. ‘목숨’ 이라는 말 ‘프쉬케’는 자연인의 개개인의 생명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한다는 말은 현세적 삶을 누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본주의로 살아가는 세속성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영원한 생명인 ‘조에’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세속적인 생명을 잃어버리는 자는 영원한 생명 ‘조에’를 얻게 되며 탐욕과 죄악이 가득 찬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한 가정에서 가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는 이 말은 세상을 버린 자는 재앙으로부터 구원되어 구원과 영생의 자리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지만 세속을 버리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 자는 종말의 재난을 당하도록 남겨지게 된다. 36절의 기록이 없는 것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대부분 학자들은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가 생략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37절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라는 말로 보아 예수께서 무슨 질문을 하신 것 같다. 즉 ‘너희들이 그 버려진 상태와 장소를 알지 못하느냐.’라는 질문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시간을 물은 것에 비해 이제는 장소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욥기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여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인다.’고 하셨다. 죽은 시체를 먹는 독수리는 썩은 고기가 있는 곳에 몰려든다. 그러므로 시체가 있는지 주검이 있는지 알려고 하면 독수리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욥39:30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종말의 때에 그 영혼이 죽었는지 버림을 받았는지 아는 방법은 사탄과 짐승의 역사가 나타났는지, 짐승의 표를 받았는지를 확인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