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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묵상글 (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 우리는 하느님 자선의 통로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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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05 05:13
- 우리는 하느님 자선의 통로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늘 복음은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얘기입니다.
제자들은 굶주린 사람들을 걱정하고,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주님께 제안합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우리가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저도 보통 그렇게 생각하고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나무라시지는 않고 그러나
“그들을 돌려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나무라시지는 않고 새로운 길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새로운 길이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주긴 하지만 실은 당신이 주시는 방식인데
지금까지 제자들은 이렇게 줘 본 적이 없고 어쩌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없는 것을 어떻게 줍니까?
사실입니다.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결과를 놓고 보면
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줄 마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가진 것이 없어도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면 진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줄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다시 말해서 사랑이 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것을 주거나 내 것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서 나눠주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형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받아 나눠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것도 받는 것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선 받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가운데 받는 것을 잘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줄 마음이 없이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받아서 자기 주머니를 채우려는 것이니 하느님께서 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제게 많은 후원을 해주시는데
그것으로 제 주머니 채운다고 생각하시면 후원해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주시는 것을 넙죽넙죽 잘 받습니다.
옛날에는 정말 저의 가난을 생각하며 안 받으려고 했지요.
그러나 지금 저는 여러분이 주시는 것을 다 받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주님께 받으신 것을 오늘 제자들처럼 나누시도록
제가 다만 통로가 되어 드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자선의 통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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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책에서 영화 스타워즈에서 제다이의 전사 요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소개합니다.
“해보겠다고? 해보겠다는 건 없어!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만 있을 뿐!”
솔직히 이 영화를 보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해보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참 많지요. 그러나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과연 변하는 것이 있을까요?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런저런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소망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과연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유명한 괴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용해야 한다. 생각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동해야 한다.”
불가능한 상황이어도 포기하고 좌절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하려는 사람만이 변화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죽은 사람의 물건을 정리해 주는 유품정리사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대게 제일 좋은 것은 써보지도 못한 채 죽는다고 말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상 생활에서 하는 사랑의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만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보화를 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을 해보지도 못하고 주님 곁으로 간다면 큰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시면서 하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녁이 되어 문제가 생겼습니다. 먹을거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면서 불가능하다고 항변합니다.
우리의 사랑 실천만이 하느님의 놀라운 표징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귀한 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따라서 포기하고 좌절하는 쪽으로 향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일이 이 세상에서 환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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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희망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일어나 옳은 일을 하려 할 때, 고집스러운 희망이 시작된다. 새벽은 올 것이다. 기다리고 보고 일하라. 포기하지 말라(앤 라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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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긴지라,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끼십니다. 여기에는 바라보는 시선(관점)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제자들은 자기중심, 곧 자신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심, 곧 상대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연민의 마음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곧 그들의 배고픔이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곧 당신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손해보려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가진 것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베풀어야 할 그 무엇인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마저 없는 것처럼 말하고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바로 감사의 눈이요, 없는 것을 보는 눈은 바로 불평의 눈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있는 것’ 그것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신 까닭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감사와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이 믿음의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은 실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마태 14,20).
그렇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항상 너끈하게 차려진 밥상과 같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측은히 보시는 마음으로 차린 밥상이요, 어떤 처지에서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차린 밥상이요, 변함없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차린 밥상입니다.
오늘도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차고 넘치는 이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건너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이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아먹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을 통해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우리의 희망을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주님!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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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손에 얹어 놓아라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는데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은 물론 제자들의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예수님을 통해 이웃과 나누었을 때 큰 무리의 굶주림은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 여겨져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사랑으로 나누면 그다음은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23,1-3).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의탁하면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 배고프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두를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나눔의 신비’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기아 문제는 해결된다고 합니다. 유엔난민기구의 2024년 통계자료는 7억 3,34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로 고통받고 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이는 세계 인구의 9%에 해당됩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기아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결식 아동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은 사랑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내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가운데 은총의 충만함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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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것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어떤 것들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성서 해석의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첫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말씀’ 그대로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 그대로의 해석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2000년 전과 지금은 제도와 문화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는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왕정국가였습니다. 한 국가에는 한 종교가 허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권과 신권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방의 종교는 인정받지 못하였고, 이방의 종교는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두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윤리와 도덕’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크게 영향받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병든 이를 치료해 주고, 어린이를 돌보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과 말씀에 대한 해석은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세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영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으로는 우리의 썩을 몸을 구할 수 없습니다. 진시황제도,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졌지만 모두 썩어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꾼의 품삯에 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도, 오후에 일한 사람도, 저녁이 되어서 일한 사람도 똑같은 품삯을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의 능력과 재능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 쌓아온 업적과 성과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남은 것을 모아보니 12 광주리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여러 표징을 보여 주셨던 것처럼 그런 표징을 보여 주실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냥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것을 나누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는 놀라운 표징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듯이, 우리의 나눔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기쁨이 됩니다. 수단에서 이태석 신부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이 꽃동네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나눔의 풍요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영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날이 오면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하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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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복음은 그 소식을 들은 후 주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한 줄에 많은 감정과 기도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에 관한 묵상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물러가신 이유는 요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요한의 역할을 아셨던 주님이셨기에 더욱 그의 죽음을 애도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의 뜻이 이곳에 펼쳐짐을 위해 자신의 삶을 봉헌한 요한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또한 말씀을 따라 사는 삶과 그 말씀에 순명하는 삶에 관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요한과 제자들과 지금의 우리들을 위해서.
이렇게 요한의 죽음을 애도하는 중에도 주님께서는 사랑을 개을리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개을리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슬퍼할 시간 없이 다시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어루만지셔야 했던 주님 삶의 모습을 오늘 복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겨라.’라고 하신 주님이 말씀이 이제야 조금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도 스스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순간에도 슬픔에 싸여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여러 사건은 애도의 순간에도 우리 손길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주님처럼 우리도 애도와 동시에 삶의 순간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주님처럼, 하늘에 맡길 것은 하늘에 맡기고 의연히 말씀 따라 걷는 우리들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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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 점프
처음 번지 점프에 도전했던 순간이 언제인지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적어도 10년은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첫 도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6회 번지 점프를 했습니다.
여행 목적지에 도착해 번지 점프를 할 기회가 있다면 늘 도전했습니다.
가끔 번지 점프에 도전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제게 무섭지 않냐고 묻습니다.
물론 무섭습니다. 사실 점프한 후는 그리 무섭지 않습니다. 점프 전이 정말 무섭습니다. 홀로 점프대에 서 있어야 하는 것도 무섭고 제 몸에 달린 두꺼운 고무줄이 밑에서 저를 당기고 있어서 무섭습니다. 만약 그 고무줄이 저를 잡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과감하게 팔을 벌리고 허공에 제 몸을 맡기지 못할 것입니다.
번지 점프를 하며 배운 것은 이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거나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면 우리는 삶의 모든 두려움 앞에서 주저앉거나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믿으세요. 그대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믿으세요. 그대는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믿으세요.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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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한 목자 예수님처럼!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삽시다”
“주님,
저를 거짓의 길에서 멀리하시고,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시편119,29)
일기쓰듯 쓰는 강론입니다. 새벽 뉴스를 확인하니, “사상 최악 폭염, 2018년 이후 첫 40도...열흘은 폭염”, 기후위기가 현실화되는 불길한 느낌입니다. “평화의 하느님 말씀을 억누르지 마라. 전쟁은 패배다.” 교황님의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시 말씀입니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패배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하느님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전쟁입니다. 어제 읽은 삶의 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불교에서 관觀은 지혜로 경계를 비추어본다는 의미이다. 관심觀心은 마음을 그리 보며 바르게 살핀다는 의미가 되겠지. 앞으로 세상을 잘 관觀하여 길 잃지 말고 인연이 닿거든 또 보자.’ 주지 스님의 편지에 착안한 작가는 관병觀病이라는 단어를 발굴해 병을 헤아리고, 살피며, 관계하는 대상이라고 정의한다. 투병鬪病, 치병治病도 아닌 반려병伴侶病이랄까?”
이런 지혜와 일맥상통하는 ‘놀다’라는 시입니다.
“괴로움을 견디느라 괴로움과 놀고
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놀고
그러다가
노는 것도 싫어지면
싫증하고 놀고....”<정현종 ‘놀다’시 전문>
어느 시인이 책상위에 붙여놓고 자신을 경계했다는 다음 대목의 글도 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서 책만 읽는 것보다 부끄러운 일이 또 있겠는가?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우라. 학자도 땀흘려 일하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며, 다양한 일들을 경험해봐야 한다. 노동은 책 읽는 것 못지않게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자신의 글 속에서 쓸데없는 잡담과 감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든 과일이든 스스로 예쁨을 경계해야 한다”
다산 옛 어른이 말씀도 마음에 새겨집니다.
“한 갑자의 공부를 두 단어로 정리하자면 바로 ‘마음’과 ‘일상’이다.”
모든 공부를 귀결하는 말마디가 ‘마음’과 ‘일상’입니다. ‘마음관리’와 ‘일상’을 충실히 살아냄이 참으로 중요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고백성사차 들린 어느 순박한 수도사제가 땀을 뻘뻘 흘리며 들고 온 무거운 수박 선물을 잊지 못합니다. 후에 체중계에 달아보니 무려 10.1kg이었고 농부의 노고에 감동했습니다. 영양, 봉화, 진안등 해발 300m 산기슭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자라 과육이 아삭한 ‘산(山)수박’입니다. 불암산 기슭에서 불암산 정기를 받아 영적 거인 수도자로 살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참 예언자 예레미야와 거짓 예언자 하난야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리자 비로소 말문을 여는 하느님의 사람, 예레미야입니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보내시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너를 땅 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하난야 예언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참으로 진실하고 정직한 용기의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은 소통의 일치관계에 있는 기도의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런 예레미야와 대칭구조에 있는 오늘 복음의 주인공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예레미야의 긍정적 덕목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착한목자 예수님은 말그대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이며, 그의 덕목은 기도, 자비, 지혜, 용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순교후에 계속되는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예수님은 깊은 관상적 휴식의 기도를 위해 외딴곳을 찾습니다. 삶이 복잡하고 힘들수록 외딴곳의 쉼터와 샘터, 배움터와 기도터의 마련은 필수입니다. 저에게는 이른 새벽마다 강론을 쓰는 집무실이 외딴곳입니다. 예수님이 한결같이 진인사대천명의 삶을 살 수 있게 한 것도 외딴곳에서의 아버지와의 깊은 내적일치의 기도 덕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외딴곳의 광야에 도착했을 때 미리 대기하며 기다리고 있는 군중에 대한 예수님의 처신에서 착한목자로서 그분의 자비와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자비의 연민은 하느님의 얼굴이며 분별의 잣대입니다. 자신과 제자일행의 휴식보다는 아프고 배고픈 군중들의 고치심과 먹이심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주님의 분별의 지혜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나타나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의 존재가 다음 대목에서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언행은 정직하여 속일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주눅들지 않으시고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신 자비와 지혜의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고치심에 이어 군중을 먹이심으로 구체적 사랑이 표현됩니다.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가진 것 전부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 놓아 나눴을 때, 즉시 이어지는 주님의 봉헌의 기도입니다. 군중을 풀밭에 자리 잡게 명하신후 진인사대천명 마음으로 봉헌기도를 바칩니다. 마치 광야여정중의 오아시스 미사를 상징하는듯 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눠주었다.’
그대로 미사를 봉헌하는 모습이요 이런 절박한 자세로 미사를 봉헌해야 함을 배웁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군중들을 감동시킨 제자들의 나눔이요 예수님의 봉헌기도에 마침내 모두가 배불리 먹은 기적입니다. 아마도 군중은 가진 것을 다 자발적으로 비워 나눴을 것이니 차고 넘치는 기적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기적입니다.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광야 인생 여정중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아 기도와 회개,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진실과 용기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두오니,
진리의 말씀을 제 입에서 결코 거두지 마소서.”(시편119,4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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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께 드리니>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 14,18)
나
가진
한 그릇의 밥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맛나게 먹이시네
나
가진
한 줌의 기쁨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활짝 웃게 하시네
나
가진
한 모금의 시간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넉넉하게 돌보시네
나
가진
한 가락의 눈길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부드럽게 살피시네
나
가진
한 옴큼의 마음
그분께 드리니
그분께서
모든 이를
따뜻하게 품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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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마태 14,19)
복음의 음식
빵과 물고기를 받은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아버지께 감사를 올리신 것은 머지않아 율법과 예언서의 시대가 지나고 당신께서 복음의 음식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은 풀밭에 앉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누우라는 지시는 없었습니다. 율법에 의지해 사는 사람은 누구나 땅이 풀로 덮여 있듯, 자기 행실의 열매로 덮여 있었습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마르코 복음 9,43-47: 10.17.24.25에서는 “하느님 나라”라는 표현이 “생명” 혹은 “영생”이라는 표현과 번갈아 쓰이고 있다. “영생”이라는 표현은 랍비의 용어인 “다가올 시대의 삶”과 같은 뜻이다. ‘다가올 시대의 삶”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입수한 유대교 자료에서 커다란 희망의 목표, 곧 종말을 가리키기 위해 “하느님 나라”보다 훨씬 더 자주 쓰였다.
하느님 나라를 영생으로 해석한 사람은 마르코뿐만이 아니다. 요한도 그렇게 해석했고, 다드에 의하면 예수도 그랬다고 한다.
제4 복음서 기자는 인간에게 다가온 “영생”의 징표로서 치유 사역을 소개한다. 이는 우리의 가장 초기 자료에 들어 있는 발언을 바르게 해석한 것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영생이야말로 하느님 나라 도래의 궁극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해석할 때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고정점이다. 그것은 예수의 사역을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주장한다...(215)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2베드 1,1-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가, 우리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 덕분에 우리처럼 귀한 믿음을 받은 이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지니지 못한 자는 근시안이라서 앞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옛 죄에서 깨끗해졌음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소명과 선택이 굳건해지도록 애쓰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추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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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4,16)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믿고 살면 살아갈수록 느끼는 것은 예수님은 참 별난 분이시고 특이한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 점이 바로 저에게는 참으로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사실은, 그분은 특별히 배고프고 헐벗은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과 장애인들을 좋아하시고 늘 그들과 함께, 그들 곁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삶에 지치고 힘겨워하며 배고픈 사람들을 보실 때,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려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신”(14,13) 이유는 팔자 편하게 휴가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동반자였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셨기에 외딴곳으로 물러가신 것입니다. 휴가를 위한 물러남이 아니라 애도를 위한 그리고 자신의 사도직 활동을 새로운 상황에 맞춰 조정하기 위해 물러났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마음은 찹찹하고 무거웠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군중들이 당신께 몰려오자 그런 군중들을 보시고, 당신 자신과 닥친 일을 잠시 잊은 채 그들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리시는 주님의 마음 씀씀이 한편 감사하면서도 한편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 역시도 주책없는 군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돌보기보다 자신을 찾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가엾은 군중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을 배려한 데 반해(=이타심), 군중은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만을 채우려는 듯한(=이기심)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잠시나마 쉬시도록 배려해 드리지 못하고 늘 우리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해 주고 도와달라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싶어서 한편 예수님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저녁때까지 병자들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을 향하여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14,15)라고 말하는 제자의 표현에서 저의 모습을 봅니다. 군중을 챙겨주는 듯싶지만 이제 저희도 피곤하고 배도 고프니 좀 쉬면서 뭘 먹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라는 속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4,16)하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가난한 자들아, 너희가 알아서 너희의 문제를 해결하라!, 가 아니라 제자들아, 너희가 나서서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방치하는 게 교회의 처신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는 교회가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고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너희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어라!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마른 자에게는 마실 물을 주는 것이며,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빵을 주는 것이며, 위로가 필요한 자에게는 위로를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권고하자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4, 17)하고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합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충분하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대답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법 아래 이미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느낍니다. 그러기에 군중들을 예수님께서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고 재촉합니다. 늘 제자들은 함께 계신 주님을 망각하거나 자신들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실수를 범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거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들의 방법을 스승에게 제안하기보다 오히려 주님 저희가 어떻게 할까요?, 라고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시라고, 도와주시라고 겸손되게 청하는 마음이 필요했던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는 단지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빵의 기적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턱없이 부족할 것 같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계산으로 너무 하찮고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넘겨지고, 손을 들어 아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축복을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이젠 더 이상 부족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엄청난 양으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14,19) 여기서 빵을 손에 들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 나누어주셨다는 말씀은 성체성사를 연상하게 합니다. 엠마오의 제자들도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주님을 알아보았듯이 빵을 떼어 나눔은 단순한 나눔이 아니라 삶에 지치고 상처로 찢긴 영혼들의 아픔에 예수님 친히 자기 몸을 함께 나누시는 것이며, 빵 뗌을 통해서 주님과 상처받은 우리 모두 하나 됨을 의미하는 중요한 신앙과 사랑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단지 성찬의 식탁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의 표양, 곧 당신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구원과 생명을 늘 세상의 부서지고 상처받은 영혼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은 곧 사랑의 나눔과 그 사랑으로 찢기고 상처받아 문드러진 영혼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데 있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당신 말씀을 교회와 교회 지체인 저희가 망각하지 않고 실행할 수 있도록 은총 내려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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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 오병이어[五甁二魚]는 함께 나눔의 결실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024. 08. 04. 21:19 ㅣNo.174770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 五甁二魚]로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먹인 내용은 그 일의 정황자체가 정말 구체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을 기적으로 그다지 생각지 않는 것 같다. 다른 건 쉽게 이해하여 받아들이면서도 이렇게 정확한 숫자까지 나열하면서 설명을 하여도 그냥 넘겨짚으면서 대충이다. 변죽만 울린 꼴이다.
무엇이 오해의 소지가 있어 ‘수박 겉핥기식 헛다리짚듯’ 하면서 넘어갈까? 다시 요약해보자. 예수님과 제자들, 그 많은 군중이 어느 저녁나절 외딴곳에 계셨다. 지금 그들에게 먹을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것들을 가지고는 그 많은 이를 배불리 먹이셨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단다. 먹은 이들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이게 ‘오병이어’ 이야기의 줄거리 핵심이다.
어쩜 이 이야기가 지금 현실적으로 가능이나 할까? 그러나 어쩌랴, 의당 믿을 수밖에는. 이걸 믿지 않는다면 천지창조, 노아홍수, 홍해 물 갈라짐, 광야 땅 하늘에서 먹을거리인 만나의 떨어짐 등의 기적을 어찌 믿을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고기잡이 기적과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의 그 포도주, 죽은 이들을 살린 것과 오랜 불치를 치유하신 것은 믿는다면서 말이다.
더구나 예수님 탄생과 십자가 죽음, 삼일만의 부활, 그리고 사십일이 지난 후의 승천을 믿는 우리가 기적의 축에도 끼지 않을 이 오병이어를 어찌 믿어보라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다. 혹자는 그 많은 군중이 먹었던 게 그들의 것을 일부 내어놓은 것이라는 둥, 또는 먹지 않고도 마음으로만 배부른 거라는 둥 여러 이야기를 한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아닐 게다. 빵과 물고기가 하늘에서 떨어졌다거나, 또는 각자가 가진 것들을 송두리째 다 내어 놓았다는 것도 가능하다.
정녕 우리가 믿어보려는 신앙의 신비인 기적은 무에서 유로 변한 게 있어야만 한다나. 사실 오병이어로 그 많은 장정을 배불리 먹이고도 부스러기가 쾌나 남겨진 이 드라마에서나 있음직한 이야기는, 실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지금도 도처에서 일어난다. 생각을 바꾸어 우리의 처지를 보자. 기적 아닌 게 과연 있는가! 매일 매일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 지금 부담 없이 숨 쉬는 것, 이게 감사해야 할 기적이 아닐까? 달리 생각이 바뀌면, 모든 게 다 기적으로 느껴진다.
우리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 깊어가지만, 나눔 실천하기를 꺼린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공동체는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였다. 아픔마저도 함께 했다. 그분께서 만나는 이 하나하나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으셨기에 모든 이가 빵을 배불리 먹은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게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매사에 깊은 관심을 두는 게 사랑의 기적을 만드는 출발이리라.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함께 나누셨다. 불평하지도 않으시면서 다만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러내셨다.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시면서. 어려운 상황에서의 불평은 모든 해결 가능성을 막고 상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기만 한다. 반면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는 온갖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기쁘게 극복하게 해 준다. 따라서 길가의 돌이 보석으로 변하는 식의 기적을 바라기보다 가진 것을 이웃에게 건네는 나눔의 기적에 동참하자.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힘든 처지에 놓인 이웃을 늘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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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예레미야는 하난야의 말에 “주님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소!”(예레 28,6)라고 말합니다.
그는 멸망을 바라지 않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심판을 선고하라는 것이었기에 그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난야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임금과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물리쳐 버립니다.
내 마음 안에도 참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명백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받아들일 때도 있지만, 알면서 거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거짓 예언자가 나를 속이는 순간에는, 정말 깊이 돌아보지 않으면 속아 넘어갑니다.
사람들이 하난야의 말을 따라가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부수시고 성전 기물들을 되찾게 하여 주신다는 말이, 그들이 믿고 싶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서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 마음으로 속게 됩니다.
그런 마음은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속삭입니다. 식별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예측을 벗어나기 때문에, 어떤 도식에 따라 간단하게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난야에게, 평화를 예언할 때는 그 말이 이루어져야 참예언자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멸망을 예언할 때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판 선고를 들은 이들이 회개하면 그 심판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을 때는, 진실하게 깨어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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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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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신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다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가장 많이 차이가 나는 요한복음을 제외하고도
마태오복음은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과
그 시작이 다릅니다.
그것은 복음서 안에서 이야기의 흐름 때문에
생긴 차이입니다.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서는
우리의 이야기가 제자들을 파견하신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제자들을 둘씩 파견하신 이야기가 가까이 있으며
그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제자들의 휴식을 위해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물러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시고 나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물러가시는 모습을 전합니다.
마르코복음도 바로 앞에서 요한의 죽음을 전하지만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물러나는 것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두고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태오복음에서는 그를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요한의 죽음을 접하신 예수님께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을 찾으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모습
친척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위해 함께 노력했던 동료의 죽음에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모습이 더 크게 보이는 이유는
이어지는 이야기 때문입니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군중의 모습에서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요한이 죽었다는 것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그러한 모습이 싫으셨을 것 같고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싫으셨을 것 같은데도
가엾은 마음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신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아픔, 우리의 약함을
알고 계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적인 모습으로
그 아픔과 약함을 해결해 주시는 분임을
비록 당신께서 곤란한 상황일지라도
우리의 필요를 우선으로 생각해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두 모습이 함께 드러난 것이
오늘의 기적으로 열매를 맺은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그것이 우리를 향한 사랑임을
우리는 사랑 받는 존재임을
한 번 더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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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기적의 원동력, 내 작은 나눔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가장 우세한 특징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풍성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족하거나 모자라고, 궁색하고, 쪼들리고, 그래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고대해왔던 젖과 꿀이 철철 흘러넘치는 곳, 그래서 더 이상 가난도 눈물도, 아쉬움, 불평불만도 없는 그런 곳이 아닐까요?
복음서 여러 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맛’을 살짝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탕자가 귀환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태도를 기억해보십시오.
그 마음이 너무나 넉넉합니다.
그야말로 대자대비하십니다.
하인들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암소도 한 마리 잡습니다.
풍성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주린 배를 가득 채웁니다.
예수님께서 첫 기적을 행하셨던 카나의 혼인잔치를 생각해보십시오.
잔치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바로 잔치가 망했다, 파장이 되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궁핍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서시니 즉시 상황은 반전됩니다.
여섯 개의 큰 돌 항아리에 가득 채워졌던 물이 순식간에 격조 높은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그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약 600리터의 포도주입니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잘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군중들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했습니다.
하루만 굶어보십시오.
눈이 핑핑 돌면서 오로지 머릿속은 먹을 것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흘을 굶어보십시오.
아무리 고상한 사람, 박학다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짐승으로 돌변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좋은 말씀이 선포된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다니던 백성들의 구체적인 현실, 쓰라린 뱃속을 외면한 채 말씀만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의 필요성, 그들의 눈물, 그들의 슬픔,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하려는 동질감, 합일감, 일체감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귀여겨들어야 할 메시지의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기적의 첫 출발점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풍성함은 바로 우리 인간 측의 미약하고 작은 노력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군중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의 작은 나눔(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어떻게 보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나눔을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시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나눔이 빵의 기적의 원동력이자 구심점, 출발점이자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사랑의 큰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내가 내어놓을 수 있는 작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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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외딴곳으로 가셨다. 외딴곳으로 물러가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직은 당신이 누구시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중은 그분을 끝까지 따라간다. 아마 예수님께 큰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17절) 그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교부들은 이 빵 다섯 개를 율법서 5권으로, 물고기 두 마리를 예언서와 요한의 가르침으로 해석한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18절) 하셨다. 빵과 물고기를 받으신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은 사람들에게 눈을 하늘에 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빵이 나눠지지 않았다면, 그 빵은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 기적으로 사랑의 실천, 서로 한 마음이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것을 가르치신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빵과 물고기만 주심으로써 그것을 누구나 똑같이 나누게 하신다. 빵이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은총의 선물이 그들을 통해 분배될 것이다. 군중은 배불리 먹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빵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군중들은 만족하였고, 이제 이 말씀을 다른 민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열두 사도에게 거룩한 권능이 넉넉하게 남겨졌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하여 당신을 알아보아야 했다.
옛날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 역시 외딴곳에서 음식이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분은 아낌없이 주셨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너끈히 먹이신 것은 옛날의 기적과 같다. 그때 이스라엘은 필요한 만큼 그것을 먹었고, 지금은 빵조각이 많이 남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 나눈 빵과 물고기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거둔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 이 빵은 이제 다른 사람들,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나누어질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돌아갔다. 우리 자신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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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 앞에서 그 정도의 꿈밖에 꿀 수 없단 말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만약 제자들이 자신들이 함께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았더라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니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과 제자들의 믿음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당신 믿음을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십니다.
그 씨가 잘 자라면 새들이 깃들어 쉬게 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행복입니다.
씨는 꿈입니다.
그런데 그 꿈은 누군가를 쉬게 하고 힘을 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기가 가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지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불안이고 인정받지 못함인데, 이웃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명을 가진 이는 능력자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에 지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온 세상을 배불리고 더 나아가 온 우주에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나의 능력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식의 작은 꿈은 버립시다. 작은 꿈은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스웨덴의 화학자, 엔지니어,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으며 355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폭발물 산업에서의 그의 발명품과 사업 벤처는 그를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노벨은 전쟁과 산업 분야에 널리 사용된 그의 발명품의 파괴적인 잠재력 때문에 종종 비판받았습니다.
1888년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의 동생 루드비히 노벨(Ludvig Nobel)이 프랑스 칸에서
사망했습니다.
프랑스 신문은 실수로 Ludvig 대신 Alfred의 사망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죽음의 상인은 죽었다(The Merchant of Death is Dead)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에서는 노벨이 폭발물을 발명하고 폭발로 인한 파괴로 이익을 얻었다고 비난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찾아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 박사가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노벨은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쿠르지 영감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고 난 후
변화하게 된 똑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이 자신에게 묶여 있다면
여전히 죽음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남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노벨은 자기 재산을 인류에 대한 긍정적인 기여에 보답하는 데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는 2,000억 정도 되는 재산으로 어떻게 세상에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개인과 조직에게 수여하는 노벨상을 제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895년에 작성된 그의 유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남은 실현 가능 재산 전체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나의 유언집행인이 안전한 증권에 투자한 자본은 기금을 구성하고, 그 이자는 매년 전년도에 인류에게 가장 큰 이익을 안겨주었을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상금 형태로 분배되어야 합니다: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2,000억을 가진 부자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그 돈으로 온 인류를 먹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의 노벨상 제정은 그의 유산을 ‘죽음의 상인’에서 ‘인류의 은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물에 감사할 줄 알 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으로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여길 때 사람은 그것으로 세상의 배를
불리는 일에 사용하게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 됩니다.
먼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물고기를 잡는 기술이든, 공부하는 기술이든, 예체능의 능력이든 그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 그것을 봉헌하면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십니다.
나는 그 일의 일꾼이 됩니다.
이것으로 은총의 통로가 되고 이 은총의 통로가 됨으로써 그 은총을 주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이 때문에 5천 명을 먹이는 기적 안에서 정작 놀라는 것은 빵과 물고기를 봉헌하고 그것을 다시 나누어주는 자기 자신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고 계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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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14-20).”
1) 제자들이 자신들의 배고픔보다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한 것은 ‘사랑’인데, 그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군중을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제자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의 건의에는 예수님을 걱정하는 마음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쉬시지 않고 계속 일하시는 것이 걱정스러우니까 일단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건의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자신들의 배고픔도 의식했을 것이고, 예수님과 자신들의 먹을거리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도 생각했을 텐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대책이 없었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무 대책이 없을 때, 또는 해결 방법이 전혀 안 보일 때,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해결책이 있다면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그럴 때에는 청원기도는 안 바쳐도 됩니다.
감사기도는 바쳐야 하지만.>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라는 제자들의 말은, 몹시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그런데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음을 말씀드리는 ‘기도’와 같습니다.
2)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표현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이지만, 뜻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마라.”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을 배고픈 상태 그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 예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뒤의 15장에 있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이 말씀은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 있는 말씀인데,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으로, 또 ‘치유의 은총’으로 사람들의 영적인 허기와 갈증을 해결해 주셨는데, 이제 육신의 배고픔도 해결해 주려고 하십니다.
3)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몹시 당황스러운 명령입니다.
그들에게는 돈도 없고 빵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정을 잘 아시면서도 그런 명령을
하신 것은, 당신이 따로 생각하신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에 “내가 마련해 줄 테니.” 라는 뜻이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라는 제자들의 말은, 뜻으로는 “저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먹여야 하는 상황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4) 기적이란,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없었어도,
주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빵과 물고기를 재료로 삼아서 기적을 일으키셨고,
그 ‘기적의 빵’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빵을 받아서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명령이 말씀하신 그대로 실행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명령을 신앙인들이 잘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의 빵’을 군중에게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셨고, 그것을 받은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 공동체는, 즉 교회는 사람들의 사정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는(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바치는) 공동체이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의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만일에 세상을 향해서 담을 쌓아놓고서 신앙인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일이 되고, 또 사랑 실천을 외면하는 일이 된다는 점에서도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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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시는 예수님이 사람과 상황을 대하시는 방식과, 세상의 논리와 법칙에 따라 사는 제자들이 사람과 상황을 대하는 방식이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제자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수님께 몰려드는 군중을 자기들이 쉬는 걸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기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루 종일 시달리다 이제 겨우 밥 도 먹고 숨 좀 돌리려고 외딴 곳을 찾았는데 거기에 미리 가서 진을 치고 기다리는 모습이 징글징글했겠지요. 그래서인지 ‘관료적’인 태도로 그들을 대합니다. 종일 그들에게 시달리느라 지치고 힘이 드니 이제 그들을 좀 돌려보내자고, 그들도 밥 때가 되어 배가 고플테니 마을로 가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시라고 예수님을 재촉합니다. 군중들을 나와 상관 없는 ‘남’이라고 여겼기에 시간이 늦어 치유를 못 받는 것도,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것도 ‘그들의 사정’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나와 다른 이의 삶을 철저히 분리하는 다분히 바리사이적인 모습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다니는 군중들을 가엾이 여기십니다. 참된 목자이신 주님께 군중들은 당신이 사랑으로 보살피고 돌보아야 할 ‘양떼’로 보였지요. 그들을 아무 대책 없이 돌려보내면 그들은 또 다시 ‘목자 없는 양들’의 처지가 되어 방황하고 고통받을 것을 아셨기에, 그들의 배고픔이 곧 당신의 배고픔이고 그들의 아픔이 곧 당신의 아픔이었기에, 당신이 직접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기로 하십니다.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 손해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키려 했던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당신이 가진 것을 다 내놓으셔서라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재물은 손에 움켜쥐고 지켜야 할 목적이 아니라 베풀고 나누어야 할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상황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능력과 조건 안에서 상황을 바라봅니다. 지금 그들이 가진 음식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습니다. 그 정도 가지고는 장정 만도 오천명이 넘는 군중들이 먹기에 어림도 없지요. ‘계란으로 바위를 칠 바’엔, 어차피 해낼 수 없는 미션에 도전하느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할 바엔 차라리 안하는 게 낫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그들이기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안되는 하찮은 양의 음식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없는 것만 보려고 드니 그들의 삶은 늘 부족하고 불평과 불만만 가득하게 됩니다. 참으로 서글프고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소중히 여기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그분께는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손에 쥔 것이 아무리 미소하고 보잘 것 없더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누리지 못했을 것임을 아시기에 논리적 계산보다, 불평 불만보다 먼저 감사를 드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나에게 없는 것만 바라보며 절망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빈 자리, 그래서 풍성하게 가득찰 가능성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당신 손에 있는 모든 것은 원래부터 하느님의 것이니 그 부족함마저 하느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실 거라고 믿으셨기에,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 없이 기꺼이 내어놓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런 예수님의 감사와 의탁과 순명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열 두 광주리’나 되는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사람과 상황을 바라봐야 할지는 자명하지요. 예수님처럼 자비와 공감의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봐야겠습니다. 감사와 신뢰의 마음으로 상황을 바라봐야겠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삶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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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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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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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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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두는 삶
<2024.8.5> 아침을 여는 묵상 (렘 45:1~46:12절)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두는 삶❞
❚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사신 주님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 어떠한 삶을 바라보는 삶이어야 합니까?
➲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어야 합니다(45:1~5절).
네리야의 아들 바룩은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을 기록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룩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룩은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다고 부르짖었습니다(3절). 하나님은 바룩의 탄식을 들으셨고, 예레미야에게 당신의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세운 것을 허물겠고 내가 심은 것을 뽑겠다. 유다 땅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하겠다...”(4절,쉬운성경).. 이는 곧 우주의 주권자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바룩과 함께하셔서 생명을 보호해 주겠다(5절)고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분은 죄로 신음하고 슬퍼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바룩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삶의 문제에 연연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나아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신뢰하기를 기대하십니다. 비록 이 땅에서 힘겨운 싸움을 싸우고 살아가지만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며 끝까지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며 값진 인생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땅의 것이 없어서 괴로울지라도 주님이 주신 영생으로 인해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탄식밖에 나오지 않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복된 백성으로 살 수 있는 소망의 근거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어야 합니다(46:1~9절).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51장까지 전개됩니다. 먼저 애굽을 향한 심판 예언이 선포됩니다. 여호야김 제 4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애굽 왕 바로느고가 갈그미스에서 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전쟁에서 패한 바로느고에 관한 예언이 주어집니다(1~2절). 애굽의 군대는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예비하여 싸울 것입니다. 투구를 쓰고 창을 들고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나아가는 기세는 나일 강의 창일함 같습니다. 그로 인하여 인접 국가들이 두려워 떱니다. 애굽 왕 바로느고는 군사들을 선동하며 부추깁니다. “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 없이 달려라...” 애굽의 동맹국들도 함께 나오라고 도전합니다.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들까지 선동합니다.
당시 애굽의 전력은 매우 막강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적도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력을 가지고도 바벨론 군대에 패하여 도망한 것은 역사의 주권자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개입하여 그들을 두렵게 하신 까닭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국가의 흥망 성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상황과 현실만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환난과 고난의 그 너머에서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가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어야 합니다(10~12절).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10절)... 애굽이 막강한 병력과 전술에도 불구하고 바벨론과의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하게 될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애굽은 승리를 의심치 않을 만큼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 날을 교만한 애굽 군대를 궤멸시키는 복수의 날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애굽은 약을 아무리 많이 써 보아도 결코 낫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될 것입니다(11절). ‘...용사가 용사에게 걸려 넘어져 둘이 함께 엎드려졌음이라...’(12절)... 애굽의 수치스러운 패배를 조롱하며 강조합니다. 즉, 애굽은 열국 가운데 수치를 당하게 되고 애굽의 통곡은 온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12절).
아무리 큰 위세를 떨쳐도 하나님을 떠나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애굽은 대단한 호기와 견고한 신념을 가졌으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하나님을 당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완전한 인생은 결코 믿음과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을 완전하게 이끌어 가실 분이심을 믿고,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탄식밖에 나오지 않는 이 세상에서도 복된 인생으로 살 수 있는 소망을 갖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만이 유일한 구원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의지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45:1~46:1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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