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영주성 '승은문' 고고학 발굴기 :古颍州城“承恩门”考古发掘记
출처: 폭스바겐 고고학 작성자: 刘建生 蔡波涛 고고학 중국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 발굴 초기에 성벽과 벽이 푸양에 노출되었고 옛날에는 잉저우라고 불렸습니다.
진나라는 루인현을, 서한은 성을 쌓기 시작했고, 북위는 잉저우, 당나라는 뒤를 이었고, 송나라는 순창부를 설치하고, 성은 남동쪽으로 이전했습니다. 명홍무 연간(1368-1398)에 이승중(李勝重)의 첨사를 지휘하여 높이 1장 8척, 환4리, 북문근영하(北門近英河), 어왈승은(额恩), 동문(東門)은 '달회(達淮)', 서문(西門)은 '통변(通邊)', 고루(鼓樓)는 옛 남문, 소서문(小西門)은 '망호'로 옮겨 세워져 북쪽으로 옮겨져 '대조문'으로 바뀌었습니다.
부양성 안에는 현재 남아있는 동쪽성벽길, 서쪽성벽길, 남쪽성벽길, 그리고 신천하로 둘러싸인 지역이 고성의 범위로 여겨지고 있으며, 성벽 밖에는 해자가 남아있습니다.
푸양성 지역에서는 과학적인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담장, 성문, 성내 배치 등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구조 발굴 푸양시 해방북로취안허대교 건설에 협력하기 위해 안후이성 문화재고고연구소는 푸양시 문화재관리국, 푸양시 박물관과 함께 2017년 6월부터 8월까지 푸양의 고대 성벽과 관련된 프로젝트에 대한 구조적인 고고학적 시추 및 발굴을 수행했습니다.
이 발굴은 토지 취득, 철거 및 현장 건설 폐기물 문제로 인해 제한되며 발굴 가능한 면적은 총 발굴 면적이 300제곱미터로 작습니다. 발굴을 통해 성벽기 1개소, 집터 7기, 노면 2조 등의 유적이 드러났고, 일부 자기와 토기, 건축 부재 등의 유물도 출토되었습니다.
노출된 성벽의 기초는 대체로 북서-남동향이며 발굴 지역에 노출된 길이는 22.5m, 너비는 4.9m입니다. 벽의 후기 회분 구덩이를 청소한 후 벽 구조의 중요한 단면을 얻고 이 단면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아래로 도랑을 시굴했으며 깊이가 약 3m인 단면은 17층으로 세분될 수 있으며 바닥 벽의 잔존 높이는 약 1.5m이고 다음은 흙벽 기초입니다.
▲ 성벽의 남쪽벽과 바닥벽의 축조방법은 성벽의 기단 바깥쪽에 조석을 깔고, 먼저 큰 벽돌을 2단으로 쌓아 양쪽을 감싸고, 규격이 다른 작은 깨진 벽돌을 채우는 것으로, 깨진 벽돌은 청나라 이후의 민가용 벽돌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닥 아래의 토양 강화 벽의 기초는 깨진 벽돌층과 순수한 토양층 사이의 간격이며 두께는 약 0.7m이며 7개의 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아래로는 문화층이 쌓이고, 문화층 안에서는 송원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어 송원시대로 추정되며, 지하수위가 높아 흙을 깨끗이 치우지 못했습니다. 남쪽 담장 바깥쪽에는 7개의 벽돌집 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청나라 때부터 최근까지 연대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집터의 북쪽 벽은 모두 성벽의 남쪽에 붙어있습니다. 두 가지 출구 모두 성벽 북쪽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L1은 줄무늬 돌과 벽돌을 혼합하여 만듭니다. 길이 14.4m, 폭 약 4m. L2는 길이 약 17m, 너비 약 1.2m의 벽돌 포장 가장자리가 양쪽에 있는 수직 벽돌 포장 도로입니다.
▲ 성벽 남쪽 가옥건축
▲ 성벽기 북쪽 도로 L1과 L2 출토유물은 주로 자기, 주로 명청시대 청화자, 그릇, 접시, 잔 등이며 건축부재는 주로 호랑이무늬 기와, 벽돌 등이며, 연전이나 명문전(铭文砖)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잉저우 고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문헌 및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잉저우 고성의 북성은 서한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2천 년 이상 동안 재건되었습니다.
명나라 때 전국적으로 대규모 축성운동이 일어났고, 영주성 명청시대에도 고토성, 벽돌성, 탁북성, 증남성, 성문복구 등을 거치면서 성의 규모와 구조가 확충되고 보완되어 군사방어 기능이 강화되어 근대기 여러 전쟁에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항일전쟁 때 일본군 항공기의 폭격을 피해 성 안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국민정부는 잉저우 고성의 지표면 위 부분을 철거하고 성벽 아래 부분은 거의 보존했습니다.
이 발굴의 수확은 기본적으로 문헌에 기록된 관련 내용과 일치할 수 있지만 위치가 잉저우시의 '청언먼'이 있는 것으로 잠정적으로 간주됩니다. 이 발굴 및 정돈된 성벽은 청나라 초기보다 이른 시기가 아니며, 원래의 성벽이 파괴되어 급하게 건설된 것으로 보이며, 그 아래의 흙벽의 기초는 명나라 때 송원 지층을 눌러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 발굴로 드러난 면적이 한정되어 있고, 성벽, 노면 등 중요한 유물의 본체 보존을 위해 발굴지구를 계속 아래로 정돈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탐사 및 발굴 작업을 통해 검증되어야 할 단서가 많이 남아있고, 푸양고성에 대한 관련 연구가 더욱 완벽해질 수 있습니다. 이 성벽의 발견과 발굴은 영주부, 순창성 등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문제를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대규모 발굴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북성문인 '승은문'의 위치, 형태, 구조, 성곽의 변천 등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벽은 도시발전의 중요한 역사적 기억이자 문화적 상징이며, 성벽자체를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이 중요한 문화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분류:고고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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