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09
3월27일[성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X5yavgYQEI
[서울대교구 주지환 요한바오로(돈암동 본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그래서 필요한 것이 어떻게서든 주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환하게 꿰뚫고 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당신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며 배신할 것인지? 누가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할 것인지? 누가 당신 홀로 체포 당하실 때,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놓을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만일 제가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었다면, 즉시 노발대발했을 것입니다. 급한 성격에 제자들을 총집합시켰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제자들을 일렬로 쭉 세워놓고 일장 훈시를 했을 것입니다. 한명 한명 이름을 불러대며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며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혹독한 배신감과 고독함, 그로 인한 극도의 산란함 속에서도 철저하게도 제자들의 배신을 함구하십니다. 결정적인 배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제자들이 계속 캐물었지만, 끝끝내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그런 태도를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 깊숙이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쉽게 해석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데 있어서 각 개인의 자유의지를 철저하게 존중해주신다고.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신다고. 당신을 철저하게도 배신하고 죽음의 길을 가는 것조차 본인의 선택에 맡긴다고?
실수도 하고 방황도 하면서 변화되고 성장하는 존재가 인간이니, 스스로 잘못을 인식할 때 까지 기다려주시는 예수님이시니, 그런 배신의 기회조차도 제자들에게도 체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영원하신 하느님,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에 비해 우리 인간은 너무나 가변적이고, 지극히 가벼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제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기세였지만,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의 잇속과 안위만을 궁리합니다. 어제 금강석보다 더 굳은 신념으로 결심하였지만, 오늘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마는 나약한 존재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너무나도 나약한 우리 인간 존재 곁으로 사탄의 강력하고도 집요한 유혹은 끝도 없이 계속됩니다. 우리의 취약함 부분을 거듭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어제의 대단한 결심을 오늘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제 당당한 주님의 제자였지만, 오늘은 배신의 참담함에 눈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어떻게서든 주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비록 오늘 죄와 배신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할지라도, 다시 한번 고개를 주님께로 돌리며 그분의 크신 자비를 구하는 노력입니다.
++++++++++++++++++++
<(2)우리 주님께서는 때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인류 구원 사업이 한 인간의 배신, 특히 당신이 사랑하셨던 제자의 배신으로부터 본격화된다는 것이 참으로 특별하고 아이러니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을 잘 알고 계셨기에, 마음이 무척이나 산란하셨던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직접 지목하지는 않으셨지만, 넌지시 한 마디 던지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몹시 근심하며 다들 스승님께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 또 벌어집니다. 이미 스승님을 배신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은 유다 역시 똑같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배신자 유다의 그 속 보이는 질문에 예수님의 마음은 더욱 참담해지고 암울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끝내 공개석상에서 결정적 배신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존중해주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그런 태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신다는 표현이 아니었을지...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때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축제의 무대는 지극히 성스러운 장소가 아니라 배신과 타락, 죄와 이기심이 난무하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한복판입니다.
뿐만아니라 오늘 우리의 거듭되는 배신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인을 위한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흔들림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장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등에 비수를 꽂힌 적이 있습니까? 가장 절친했던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한 적은 없습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치떨리는 배신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어찌 보면 유다의 배신, 베드로 사도의 배신, 요한 사도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의 배신은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사랑했던 제자로부터 배신당했지만, 그래도 그를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의 시선을 보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유다의 결정적 배신으로 인한 수난과 죽음의 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지만, 그것마저 아버지의 뜻임을 알아차렸기에,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a_JqmhvYeE
++++++++++++++++++
<인생이 무대라 여기면 평화의 길이 보인다>
무대공포증이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공포를 느끼지 않으려면 무대에 서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무대에 섰다면 무대공포증을 느끼는 것은 무대를 준비하고 그 위에 나를 세운 누군가를 배신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정해주는 역할을 거부한 가리옷 유다는 어떤 심판을 받았을까요? 예수님은 그를 두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무대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작가가 준 역할과 대사를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하면 트라우마가 생기고 무대에 오를 때마다 공포에 휩싸여야 합니다. 무대에서는 그곳에 올려준 이의 의도대로 잘할 자신이 없다면 언제나 공포 속에서 올라야 합니다.
가수 보아 씨는 이른 나이에 일본에서 데뷔하게 됩니다. 십대 중반의 나이에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쇼케이스 무대에서 음 이탈을 몇 번 일으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판의 목소리는 어린 보아를 주눅들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1년씩 늙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만약 무대에 오를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노래 부르며 음 이탈을 겪는 것은 두려울 게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대가 아니라면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양심상 죄를 지으면 하늘이 두려워지고 이웃에게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아무리 인생이 무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불안과 두려움, 긴장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냥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올려진 무대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영화 ‘버드맨’은 20년 전 버드맨이라는 영웅물로 유명했던 한 남자배우가 이전의 영광을 다시 찾고자 하는 노력을 그렸습니다. 전 재산을 털어 연극을 만들었고 다행히 흥행합니다. 그런데 정작 영웅이 되는 것은 연극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젊은 배우입니다. 자신도 그 연극에서 인정을 다시 받고 싶지만, 아무도 한물간 배우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의 귓속에서는 이전의 영광이었던 버드맨이 분명 이전의 영광을 다시 얻을 수 있다고 종용합니다. 그는 결국 진짜 권총으로 자기 얼굴을 쏩니다. 연극의 완성을 위해서.
연극은 자기 영광이 아닌 보는 관객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영화 블랙스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주인공은 자신 때문에 발레를 포기한 엄마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살인까지 불사합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만의 무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라는 유혹이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타인이 만든 무대에 서든지, 자기가 만든 무대에 서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유다는 자기 무대를 자기가 만들고 버드맨처럼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 하였습니다. 결과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해 공포에 휩싸여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무대라고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감독이 원하는 배역과 역할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공포로 살아갈 이유가 없어집니다.
배우 정유미 씨는 무대공포증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를 겪고 있습니다. 연기를 할 때는 정말 신들린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 서면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심지어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합니다.
대학생 때 연극 대사를 잊어버린 트라우마 때문에 그런다고 하지만, 사실 대인공포증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연기할 때는 그런 두려움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 배역이 주어지고 대사가 주어진다면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충실히 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그리고 혹시 심판이란 게 있어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는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그냥 이 무대가 창조되었고 그 창조자가 그리스도라는 분을 보내서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살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그대로 한 번 살아봅시다.
나쁠 게 없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면 그만입니다. 내가 이미 죽었으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사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 감독과 관객 모두에게서 영광을 받게 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대화의 소재가 끊어지면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일까요? 맞습니다. ‘군대’이야기입니다. 저는 1986년 1월 30일에 논산훈련소 25연대 8중대로 입소했습니다. 신학교 학부 졸업식에는 참석 못했습니다. 다행이 동창 신학생이 저의 졸업장을 대신 받아 주었습니다. ‘희비쌍곡선’이 있듯이 저의 군 생활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는 과정에서 저는 신학생이라는 이유로 성당 군종병으로 선발 되었습니다. 인사 담당관의 아들이 신학생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종병으로 성당에서 지내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합법적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있고, 성당이 외부에 있었기에 합법적으로 외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저는 3개월 만에 다른 부서로 가야 했습니다. 이유는 제가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잔디도 깎고, 성당도 청소하고, 화장실도 청소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잘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신부님께서 출장 가시면서 부대에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제가 그 지시사항을 어겼습니다. 저는 다른 부서에서 지내면서 오히려 신부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저를 엄하게 대하셨기에 저는 군생활을 무사히 잘 마치고 신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는 말년 병장 때입니다. 일석점호를 준비하면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낮에 저는 일직사관과 장기를 두고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본청 일직사령이 순찰을 돌면서 저희 내무반이 시끄럽다고 하셨고, 일직사관이 와서 조용히 일석점호 준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고, 일직사관에게 인사하는 과정에서 그만 본의 아니게 충돌이 있었고, 치아가 깨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서울로 와서 치료를 받았고, 그 뒤로 크라운을 씌었습니다. 어느덧 37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몇 번 크라운을 교체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큰 무리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일도 많았습니다. 저의 동기 중에는 ‘특수병과’들이 있었습니다. 참모식당에서 근무하는 요리병, 테니스장에서 근무하는 테니스병, 사령관 실에서 근무하는 번역병, 표창장과 상장을 쓰는 모필병, 저는 성당에서 일하는 군종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각자의 자리가 힘에 겨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 돕고 지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습니다. 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던 저는 동기들보다 3개월 먼저 1988년 5월 4일에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습니다.
지난 2월 14일에 시작한 사순시기도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 내일부터 우리는 파스카 성삼일을 지내게 됩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사순시기이지만 2024년 사순시기는 제게 특별한 사순시기가 되었습니다. 본당을 떠난 지 12년 만에 다시 본당신부가 되어서 사순시기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사순시기에 교회는 4가지를 권고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절제와 회개의 의미로 단식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우리들 또한 희생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선행을 베푸는 것입니다. 본당에서는 사순특강을 마련하였고, 매주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사순 제1주일에 우리는 유혹을 물리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순 제2 주일에 우리는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순 제3주일 우리는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순 제4주일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알았습니다. 사순 제5 주일에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려는 예수님의 고뇌를 보았습니다. 지난 성지주일에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파스카의 성삼일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 전례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삼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의 몸가짐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는지 묵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 앞에 자신의 양심을, 친구를, 하느님과 함께한 신앙을 팔아넘기는 것을 봅니다. 우리를 악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비우는 무소유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마태: 26,14-25: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없애려 하는 대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15절) 하자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내주었고 그때부터 유다는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유다는 바로 최후의 만찬 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 혼자 계실 때 그 일을 했다. 진리의 말씀이 배반당하는 시간은 그분 곁에 충실한 지지자들이 거의 없는 때다. 무교절 첫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17절) 제자들은 모여서 파스카 만찬을 나눌만한 집이 없었다. 재산을 모두 포기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개”라는 사람을 찾아가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18절) 하시며 축제를 준비하게 하신다. 그 아무개는 주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인 첫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우리 자신도 이제는 주님을 위해 손님방을 마련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셔서 파스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만찬 전에 그분은 유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면서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이 말씀 때문에 나머지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유다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제자들은 자신에 관하여 묻고 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2절). 이 근심을 없애주시려, 예수님은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3절) 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근심에서 구해 주고자 결정하셨을 때, 유다의 정체를 밝히신다. 유다는 시간을 주었지만 변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4절) 유다는 악마의 도구로 쓰이고 말았다. 이 불행은 유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넘겨지신 것은 악마 때문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데 도구가 된 자들도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25절) 하고 묻는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라고 했고 유다는 스승님이라고 한다. 주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을 배반한 정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25절) 하시며 빌라도에게 하신 말씀으로 유다를 책망하신다. 이는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 앞에서 빛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가리는 말이다.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나는 어떠한 자세로 그분을 따르고 있는가?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누군가는 자신의 사랑을 상대에게 고스란히 건네줄 결심을 하고, 누군가는 상대를 팔아넘길 결심을 합니다. 이 불공평한 관계는 비단 예수님과 유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극은 우리 주변에도 때로 발생하니까요. 뉴스는 거의 날마다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편리를 위하여 아기를 팔고, 딸을 팔며, 약자를 파는 사건을 보도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사랑을 팔아 버린 유다가 받은 돈은 겨우 “은돈 서른 닢”이었습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라는 문장을 그리스 말 성경에서 그대로 옮기면 “무엇을 나에게 줄 거요? 내가 당신들에게 그를 넘기겠소.”입니다. ‘무엇을’이라는 그리스 말 의문사를 문장의 첫머리에 배치하여 ‘거래’라는 인상을 먼저 부각시킵니다.
사실 성주간 월요일부터 계속 복음에 등장하고 있는 유다는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냄비나 접시에 담긴 음식을 서로의 숟가락이나 젓가락에 신경 쓰지 않고 함께 먹는 것처럼, 유다인들도 친한 관계에서는 비슷한 식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친밀함’을 자신의 주관적 판단으로 이용하고 배신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아무개”(그리스 말 ‘데이나’)라는 낱말이 등장합니다. 병행 구절(마르 14,13; 루카 22,10)이 그를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로 명시한 것과 달리 마태오 복음서는 특정 인물을 지칭하지 않아 그 “아무개”가 우리 자신일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습니다.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파스카 식사를 하실 자리를 ‘아무개’에게 부탁하셨듯이, 우리 안에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드실 만찬을 마련하여 드리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마태 26,14-16)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26,20-25) 여기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제자들의 말은, “주님, 그게 혹시 저입니까?”라는 뜻이고, 유다가 한 말은, “저는 아닙니다.”라는 뜻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른 것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선생님’이라는 일반적인 호칭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유다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을 모두 버렸음을 나타냅니다.>
“주님, 그게 혹시 저입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혹시 내가 배반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라고 불안해했다는 것인데, 그 불안감을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배반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쓴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고, 그들 자신들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아닙니다.”라는 유다의 말은 그냥 ‘빈말’이고, ‘거짓말’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의 말이 빈말이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라는 말은, ‘가족 공동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에게는 가족과 같은 이 공동체 안에서 배반자가 생겼다.”라는 뜻이고, 당신의 비통한 심정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배반이란 그만큼 큰 죄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도들 모두가 예수님께는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요한 20,17)
도대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가 받은 돈의 액수가 너무 적습니다. 비록 배반의 대가로 돈을 받긴 했지만, 그가 먼저 돈을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한 말입니다.(루카 24,19ㄴ-21ㄱ)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실망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유다는 실망이 좌절로, 좌절이 배반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마지막 단계까지 가서 실망했지만, 유다는 예수님께서 자꾸만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것을 보면서 일찌감치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버린 것 같습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가 먼저 예수님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실망했다면 그냥 떠나면 그만이지, 왜 배반을 했을까?”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을 떠나서 박해자들 편으로 넘어간 것은 자기만이라도 살 길을 찾으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2) ‘믿음’은 ‘희망’과 직결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으니,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도 모두 잃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희망’에 대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5)라고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 또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뜻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도 없는 것을 믿고 희망하기 때문에 인내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믿음도 희망도 인내심도 모두 버렸을 것입니다.
3)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잃은 것도 큰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잃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복음서 후반부에 나오는 유다의 모습들을 보면 사랑이 완전히 식어 있는 모습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없었으니, 그는 예수님 곁에 있는 동안에도 영혼 없는 빈껍데기 상태였을 것입니다. <사랑을 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마태오 복음에 따른 최후의 만찬 장면을 읽습니다. 첫 장면은 유다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주면 무엇을 해 줄지 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줍니다. 구약 성경의 배경에서 ‘은돈 서른 닢’은 율법에 따른 액수입니다. 탈출기 21장 32절에 “소가 남의 남종이나 여종을 받았으면, 그 주인에게 은 서른 세켈을 갚아야 하고, 소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즈카르야 11장 12절에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값어치로서 은 서른 세켈이 은유적으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구약의 예언이 유다를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한편 무교절 첫날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스카 음식을 차릴 장소를 묻습니다. 여기서 무교절 첫날은 파스카 양을 잡고 집 안의 누룩을 모두 치우는 날로 여겨집니다. 무교절은 파스카 준비일인 니산 달(오늘날의 4월) 열나흗째 날을 포함하여 여드레 동안 계속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전하라 명하십니다.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여기서 “나의 때”라고 옮긴 그리스 말 표현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며 완성되는 시간, 곧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영광을 받으실 구원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끝으로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유다는 예수님을 향하여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스승’이라는 호칭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을 향한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되는데(23,7.8; 26,49 참조), 복음서 저자는 이를 통하여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을 미리 전합니다.
=====================
[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 요한 신부님]
<회개>
하느님은 죄인에게 벌을 내리시고 의인에게 상을 주십니다. 또한 죄인을 벌하시기 전에 반드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때에 회개하면 무슨 죄든지 용서하시고,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 선택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때에 회개하는 것이 바른 선택입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개하도록 주신 기회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차례로 말하기를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 마음에 찔리는 그 무엇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제자들의 양심을 자극할 때, 이때가 바로 회개의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과 생각을 환하게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얼마나 간절히 유다가 할 말을 기다렸겠습니까?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의 기회는 이로써 지나갔습니다.
회개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께로 우리의 삶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밝은 빛을 비추실 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회개의 때입니다. 유다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고 지금 회개를 요청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성주간의 시간이 흘러갈수록 주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세상 여러 유혹과 그 갈등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주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성찰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거울을 보듯 오늘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를 다시금 읽어 봅니다. 이사야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고통받는 주님의 종이 어떻게 배신의 비열함을 넘어서는지를 노래합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지친 이를 격려하라고 고통받은 주님의 종에게 혀를 주시고 귀를 일깨워 듣게 하신다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도우심이, 사랑하던 사람들에게서 받은 비열한 배신과 그에 따른 깊은 상처를 이겨 내게 한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배신 없이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화답송에서 부르는 오늘의 시편이 답이 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열정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며 친형제들에게조차 이방인이 되더라도,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 감사 노래로 기리며 그분만을 찾는다면, 진정 하느님께서는 배신으로 상처받은 마음에 생기를 돋게 하시며 우리의 간청을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누군가를 향해 격렬한 미움과 원망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사소한 일인 것이 그 순간에는 우리의 마음을 덮쳐 마치 우주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직접 체험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소한 갈등은 번지고 번져 평생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뒤에서 마구 험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그러한 사람들의 표정을 떠올려 봅니다. 맑은 눈으로, 그리고 밝은 미소로 상대방에 대한 불만과 미움을 표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본인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적대감을 표하는 그 순간의 표정은 어둡거나 일그러져 있습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인간의 영혼을 크게 해칩니다. 그리하여 아무리 상대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한들 그로인한 분노와 미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손해입니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상대가 치루도록 할 수 있든 없든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후의 찝찝함, 혹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억울함.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을 갉아먹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는, ‘은돈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수석사제에게 넘깁니다. 우리는 며칠전 성주간 월요일의 복음에서 예수님의 발을 값비싼 향유로 닦아드린 마리아의 일화를 기억합니다. 그 순간 유다는 비싼 향유를 낭비한다고 마리아를 비난 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는 이 사건 바로 다음에 유다의 배신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러한 점에 있어서 유다의 배반과 마리아의 사건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향유와 은돈 서른 닢의 가치를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기, 은돈은 향유 값을 계산했던 데나리온과는 달리 세켈이라는 단위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1세켈은 단 나흘 치 품삯이었으니, 유다가 예수님을 넘긴 대가로 받은 돈은 약 120일치의 품삯에 불과합니다. 마리아가 닦아드린 나르드 향유 1리트라가 1년간의 품삯이었으니 그에 삼분의 일 밖에 미치지 않는 가치인 셈입니다.
이 은전 서른 닢은 당시 주인이 키우던 소가 남의 종을 들이받았을 경우 내는 배상금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유다가 예수님을 판 돈은 수석사제들이 예수님을 종에 견줄 만큼 하찮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상당한 복수심 혹은 미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약 예수님을 통해 돈을 벌 생각이었다면 유다는 몇 번의 흥정을 통해 돈을 더 많이 받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 대가가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유다의 내면에 돈에 대한 욕심보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행동의 이면에는 극단적인 회의와 갈등, 격렬한 분노가 있었으며 결국 이를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단순한 실망이나 거부감이 있었다면 그저 제자단에서 빠져 나오면 되었을텐데 그러지 않고 팔아넘기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에 거대한 미움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결국 이러한 그의 마음은 예수님의 죽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까지 이끌어 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뒤 그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거대한 후회와 죄책감 속에 제사장들을 찾아가 은전을 내던진 뒤 끝내 스스로의 목을 매달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도 한 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기며 이에 감동하는 열정적인 제자였을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그분의 사랑과 가르침에 기뻐하는 착한 제자였을 것이며 회계라는 직분을 통해 꽤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의 그의 모습은 이토록 잔뜩 일그러져 비참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다가 자기 성찰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매우 교만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주님께 나날이 다가가고자 했다면 그는 오히려 누구보다 사랑받는 제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죽음을 보며 우리들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과연, 유다는 회개를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입니다. 후회와 죄책감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정도였다면 마치 회개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란 ‘돌아옴’을 의미하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가 스스로의 목숨을 끊지 않았다면 사랑과 자비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돌아와 그를 안아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배반했던 베드로처럼 다시금 그를 받아들여 더욱 좋은 도구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자신의 죄를 갚아 나가기는커녕 스스로 주님이 주신 소중한 생명을 꺼버립니다. 다시 말해 끝까지 교만한 태도를 견지하며 죄 중에 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의 비극은 미움과 분노를 가진 자의 종말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진리보다 자신의 미움이 더 지혜로운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의 비극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사랑하여라”, “원수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권고가 결국 우리의 영혼을 위한 간곡한 사랑의 충고였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예수님의 수난을 기념하는 거룩한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오늘 만큼은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며 내 안에 타인을 향한 원망과 미움이 얼마나 쌓여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나를 미워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래도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어요’ 혹은 ‘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란 말이에요’, 또는 ‘저는 용서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아요.’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우리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둡고 일그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은 “저는 아니겠지요?”라며 예수님께 항변하는 유다의 말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끝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슬픈 얼굴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아멘.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6,24)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제자의 귀와 혀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50,4.5) 이런 종의 자세야말로 참된 제자의 표상입니다.
우리는 이미 유다의 배반을 알고 있기에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했지.’라고 그를 단죄하고, 본디 그는 그런 사람이었잖아 쉽게 단정 짓습니다. 유다가 은돈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전부터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12,4) 하고 유다가 말할 때, 성서는 부언해서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12,6)는 언급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신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다만 왜 이토록 유다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의도는 무엇일까요? 배신자가 받아야 할 죗값에 대한 응징인가 아니면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反面敎師로 삼으려는 것인지 깊이 성찰해 봐야 합니다. 혹여 우리 또한 “저는 아니겠지요?”(마26,22)라고 면피할 생각하지 마시고요.
『기억하렴 나의 서글픈 모습 새벽녘까지 잠못 이루는 날들 이렇게 후회하는 내 모습이 나도 어리석어 보여』좀 생뚱맞지만 엄정화의 「배반의 장미」의 가사 일부입니다. 배반의 밤,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은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6,21) 하고 말씀하십니다. 넘길 것이다, 는 그리스어 paradidomi는 본래 넘기다, 내주다, 건네주다, 는 의미의 단어로 유다의 배반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실 일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유다가 예수님을 적대자들의 손에 팔아넘기는 순간은 활동에서 수난으로 전환점이 되는 순간이 됩니다. 이로써 예수님 당신 자신이 주체가 되어 무엇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팔아넘김을 받은 이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당하신 것입니다. 이 순간이 바로 예수님 수난의 시작이고, 이 수난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는 시작이며, 아울러 수난이 복음이 되는 순간으로써 후대에 이를 수난 복음이라 부르게 됩니다. 팔아넘기는 유다에 의하여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좋았을 것이다.”(26,24) 하고 유다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러기에 이 표현은 단지 유다에게 저주를 퍼붓는 표현이 아니고 그의 불행한 결과를 언급하면서 또 다른 배신과 배반을 경고하려는 의도입니다. 유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출생은 본인의 선택이 아니지만, 예수님은 매몰차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좋았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의도를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유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제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배신한 까닭은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꿈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끝내 자기가 자기 자신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기에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물론 그가 매일 매일 귀를 열어 일깨워 주시는 스승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듣고 말씀대로 살았다면 그리고 그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수용하였더라면 배신하지는 않았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유다에 대한 저의 어쭙잖은 연민으로 마음이 혼란스러웠는데 이사야 말씀을 통해 잠잠해지고 위로가 됩니다. 내 생각 보다 주님의 생각이 월등하고, 내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이 正道임을 고백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55,8)라는 말씀은 유다가 들어야 했던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살아오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로 인해 고통과 어려움을 겪게 되기보다 인연의 관계로 인해 맺어진 가족이나 동료 친지들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이 더 많다는 사실과 이 순간이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만나는 접점이기도 합니다. 즉 내가 행한 일보다 나에게 행해진 일로 말미암은 수난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세월호와 이태원 희생자들이나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같이.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유다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겪게 될 순간에 자신보다 제자를 우선해서 배려한 예수님처럼 이 일어날 모든 일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부정이요 자기기만입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저희 임금님, 경배하나이다. 당신만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나이다.”(복음 환호송)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는 나이 들면서 늙을 운명이고, 병들 운명이며, 죽을 운명입니다.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습니다.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운명으로부터 피하길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이론적으로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인생 자체가 고통이고, 존재 자체가 고통이기에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을 그대로 적시하고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고통은 이 세상 창조 때부터 이렇게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창세 3,17)
따라서 고통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 견디면서 그 안의 하느님을 발견하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고통 속에서 함께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도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도 피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화려한 장신구가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 고통을 안고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가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 누구도 자기 고통을 대신 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날마다’입니다. 날마다 안고 지나가야 하는 고통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힘들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안락한 삶이라는 보증수표를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에서 어떤 끔찍한 일도, 나쁜 일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수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구원받는 존재이지, 환난과 고통에서 구원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스승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을 듣고 몹시 당황스러워합니다.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솔직히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도 의아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팔아넘길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특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들으면서 불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실제로 팔아넘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유다도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안락과 풍요로움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렇게 나 살아있음이>
마태오 26,14-25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다,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이렇게 나 살아있음이>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 26,24)
이렇게
나 살아있음이
누름이 아니라 섬김이요
앗음이 아니라 베풂이며
죽임이 아니라 살림이기에
이렇게
나 살아있음이
더불어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기쁨과 희망이기를
이렇게
나 살아있음이
더불어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조차
슬픔과 절망이 아니라
이렇게
나 살아있음이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아니겠지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는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창조하는 창세기 이야기와 이 사건을 알리는 예언들이 그리고 천장 벽화를 마친 뒤 20년이 지난 뒤 정면에 최후의 심판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모든 인간에게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즉 하느님이 인간의 절대적인 심판자라는 운명에 대한 것입니다. 왼쪽 벽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다 민족의 구원자 모세의 일생이, 오른쪽 벽에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전 인류의 구원자인 그리스도의 일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이 작업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단죄받은 이들이 느끼는 극한의 두려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는데 그가 처음 그린 그림에는 모두가 벌거벗은 채 그리스도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온몸이 다 드러난 최후 심판의 그림은 당대의 성직자들에게 반발을 불러왔는데 거룩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가 황제든 노예든 성직자든 평신도든 주님 앞에서 아담이 몸을 나뭇잎으로 가린 것처럼 남의 눈을 속이는 옷은 없을 것이라 경고했던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나는 걸려 넘어지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그날에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결정에 따라 벌거벗은 몸은 모두 옷으로 덧칠되었습니다.
아무리 감추어도 하늘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사실, 홀로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 앞에 벌거벗은 채 있습니다. 혹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과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셨습니다. 너는 네 속을 알고 있지 않으냐? 하는 말씀입니다.
유다는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제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살림을 맡아보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돈 관리는 아무에게나 시키지 않습니다. 신뢰가 있고 현명한 사람에게 맡깁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특별히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거기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열심히 따랐지만, 재물에 눈이 멀었습니다. 돈을 만지니까 돈의 편리함에 익숙해지고 재물의 유혹에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욕심은 화를 가져옵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 갈증에 시달리고 결국은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기고 맙니다. 유다는 자신을 속이면서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이 어디 유다 한 사람이었을까요?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주님의 뜻보다도 내 뜻을 고집하면서 저는 유다보다도 훨씬 더 헐값에 예수님을 팔아먹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을 때 “아니, 너 맞아!”라는 답변을 들을까 두렵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 처럼, 예수님 따라 살기”-
성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입니다. 앞서 주님의 첫째, 둘째 노래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신원과 더불어 우리의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를 통해 하느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신원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통해 우리 또한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거듭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다음 주님의 종의 고백은 그대로 예수님의 고백이요 교회 전통은 처음부터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귀를 열어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다.
...
나를 의롭다 하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자 누구인가?”
그대로 하느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육성을 듣는 듯합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이렇게 예수님처럼, 예수님따라 살면 되겠습니다. 성주간 예수님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 깊이 고뇌하셨을 것이며 이런 예수님 덕분에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다음 옛 어른의 말씀도 주님의 제자로서 사는 데 유익한 조언이 됩니다.
“내가 초대받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초대해야 한다. 마음을 얻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부터 꺼내라.”-다산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논어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제 자작 애송시 “하늘과 산”은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로 스승과 제자간의 깊은 상호보완의 사랑과 신뢰관계를 보여줍니다. 늘 읽어도 늘 새롭습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저에게 한결같은 불암산은 참된 제자의 모범도 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수없이 다짐하며 주님의 제자답게 살려고 노력한 정주의 삶이요 더불어 떠오르는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라는, 역시 여전히 새롭게 공감하는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
세월도 비켜가나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불암산이다.”-2006.4
말 한마디 천냥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정작 마음이 지치고 다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언이나 충고가 아닌 위로와 격려의 말이며, 예수님처럼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아는 제자의 혀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에 앞서 날마다, 아침마다 겸손히 귀를 열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배우고 실천할 때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관계와 더불어 비로소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겠습니다. 복음과 신약 서간에서도 이런 주님의 제자다운 모습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말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삶이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또 예수님처럼 순종의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8-9)
새삼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인생은 고난을 겪으면서 순종을 배워가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학생의 “순종의 학교”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필립비 서간 역시 비움과 순종, 겸손으로 요약되는 제자의 모범, 예수님의 모습이 감동스럽게 묘사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예수님보다 아름답고 거룩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은 제자가 참제자이자 참사람이요, 우리 믿는 이들이 평생 추구해야할 영원한 과제입니다. 이런 제자상과 비교하면 오늘 예수님의 제자 유다의 모습은 얼마나 실망스러운지요!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경각심을 촉구하며 반면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배신자 유다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다는 우리 제자들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인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했을 때 전전긍긍 반응하는 모습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위기중에 있을 때,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혼자 남겨두고 살기위해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의 유다에 대한 탄식이 우리에게는 깊은 충격과 더불어 크나큰 가르침이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 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비록 예수님의 죽음이 성서에 따른 것일지라도, 유다는 결코 그의 배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비교가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둘의 차이는 단 하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믿었고, 유다는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일화가 재미있어 인용합니다. 어느 총명한 어린이가 유다의 배반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유다는 목을 매단 나무를 잘못 골랐어요. 무화과나무를 골랐거든요.”
놀란 교리교사가
“그럼 뭘 골랐어야 했을까?”
물었을 때 어린이의 대답이 정말 기막힌 명답입니다.
“예수님 목에 매달렸어야죠!”
무화과나무에 매달려 자살할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예수님의 목에 매달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송과 더불어 주님께 용서를 빌었더라면, 그는 정말 베드로처럼 용서 받았을 것이라는 일화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를 믿지 않았음이 유다의 결정적 패착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따라 주님의 종이자 주님의 제자가 되어, 한결같이 경청과 순종, 비움과 겸손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요,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자의 귀와 입과 얼굴>
오늘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세 번째 노래인데
참 제자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얘기합니다.
우선 제자의 혀를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의 혀는 어떤 혀입니까?
우리는 혀를 흔히 세 치 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세 치 혀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고도 하고, 그러므로 혀를 함부로 놀려서는 안 된다고도 합니다.
사실 혀는 세 치밖에 안 되지만 치명적인 독을 뿜어내는 뱀의 혀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의 기를 살리는 제자의 혀가 될 수도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제자의 혀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제자의 혀는 스승이신 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제자의 귀로부터 혀도 있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시고,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매일 귀로 주 하느님의 말씀을 제자들처럼 들어서
마음을 채울 때 그때 제자의 혀가 되고 그 혀에서
지친 이를 격려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제자가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 제자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근본적으로 안 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스님의 말이 있지요. 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 사음수성독(蛇飮水成毒)이라는 말 말입니다. 소는 물을 먹어 젖을 만들고 뱀은 그 물을 먹어 독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같은 물을 먹는데 그 물이 소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젖이 되고, 뱀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존재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고,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기에 우리는 우선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종 노래는 제자의 입과 귀에 이어 얼굴을 얘기합니다. “나는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나의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제자의 얼굴은 모욕과 수모와 관련해서는 차돌과 같다는 말입니다. 모욕과 수모를 아무리 받아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누가 아무리 상처를 줘도 내가 받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준다고 다 받지 않습니다.
받고 안 받고는 내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받아놓고는 줘서 받았다고 남 탓을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받기 싫은 상처나 모욕을 내가 받는 것은 그것을 거절할 힘이 내 안에 없기 때문일 겁니다.
내면의 힘, 그것이 왜 없습니까?
참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참 자기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하느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받지도 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매일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제자의 귀를 가지고 하느님 말씀을 듣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자의 혀와 귀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까?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 26,15)
<탐욕의 배반!>
오늘 복음(마태 26,14-25)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말씀'입니다. 배신자 유다 이스카리옷이 '은돈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가치가 '은돈 서른 닢'(약1200만원)에 불과하다니???
마태오 복음은 다른 복음과는 달리,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를 '탐욕'에서 찾습니다. 성주간 월요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려는 마음으로 매우 값진 향유를 아낌없이 사용한 마리아의 모습과 큰 대비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에게 사는 길, 이제와 영원히 사는 길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와 땀과 수난과 죽음이 곧 부활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고 보면 유다의 배신 행위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도구였고, 필요했던 도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배반자 유다는 하느님의 자비로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배반과 다른 결정적 이유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한 후,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슬피 울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종종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이스카리옷 유다처럼 탐욕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현실 앞에 놓여져 있는 근심과 걱정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잊고 사는 배반을 하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육의 행실들, 곧 교만, 인색, 시기(질투), 음욕, 분노, 나태(게으름)로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성주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하는, 전례주년 안에서 가장 거룩한 주간입니다.
나의 육적인 충동들을 잠시 내려놓고, 극진한 사랑의 표징인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_jVz-fBtB8Y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 25)
닮고 따라갈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 마저
우리들이
팔아
넘깁니다.
자신을
속이는 일은
하느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예수님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거짓말이며
거짓
나눔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거래속에
창조주가
계십니다.
흥정은 빠르고
우리의
믿음은 더딥니다.
일어난 거래이며
일어날 십자가의
수난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신앙의 위기나
절망의
고비 때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긴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배신을
사랑과 용서로
받아 마십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을
차단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입니다.
유다의 거짓말이
유다의 인격은
아닙니다.
자신의 과오를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이 좋아야
진실로 좋은
관계입니다.
단호하게
잘라내고
단호하게
드려야 할
소중한 것이
무언지를
깨닫는
성주간입니다.
마음을 잘라내야
마음이 보이는
마음의 신비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은
일상을 살고있는
변덕스러운
우리자신들입니다.
스승님,
저가 맞습니다.
새롭게 다르게
주님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신앙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에게
묻는 시간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