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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 10] 초기 불교의 교단 / 정병조
초기 불교교단의 형성과 발전은 과연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겪었는가. 또 초기 승가의 규율은 과연 어떠한 것들이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초기 불교교단의 형성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이는 십대제자에 대해 서술한다. 위대한 성인에게는 언제나 그 가르침을 따르는 신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불교는 그 성격상 출가 승려들과 재가신자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두 그룹이 나중에 승가로 불리게 되는데, 이 승가의 조직과 발전에 있어서 십대제자의 활약이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통적으로 십대제자들은 각각 부처님의 덕성 가운데 하나씩을 뛰어나게 전수받았 다고 하여, 이를테면 '다문제일의 아난다', '천안제일의 아나율' 등으로 부르는데, 그들 중에서 사리불과 목건련 이 가장 연장자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원래 이교도였다. 그들은 산자야가 이끄는 회의론파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5백 명의 제자와 함께 불교교단에 귀의함으로써 불교가 비약적으로 발전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 두 제자는 부처님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두 제자의 세속적인 연령이 부처님보다 열 살 정도 더 높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 교단 통솔 마하가섭
따라서 부처님의 열반 후에는, 남은 여덟 제자 중에서 마하가섭이 교단을 조직하고 통솔하는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다. 마하가섭이 교단 내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부처님이 입멸할 당시 마하가 섭이 그 장례식에 참석할 때까지 장례의식의 집행을 늦추었다는 기록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마하가섭은 먼곳에서 석가의 입멸이라는 비보를 듣고 황급히 쿠시나가라로 왔다. 그리고 공손히 세 번 절하여 예배를 드리고 나서 마하가섭의 집전으로 드디어 다비의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마하가섭은 선종의 초조로도 알려져 있다. 선의 수련방법은 물론 인도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을 종파로서 확립시킨 것은 중국이다. 중국에서 '선종'이라는 혁명적이고 위대한 가르침의 종파가 발달하게 되었는데, 그 선종에서는 부처님의 마음의 법을 이어받은 제자가 바로 마하가섭 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이심전심'이니, '염화시중'이니 하는 고사성어들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언젠가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었을 때,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는데,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그때 마음과 마음의 이어짐에 그 교두보 역할을 한 제자가 바로 마하가섭이었다고 믿는 중국적인 전통도 여기에 기인한다. 아무튼 이 마하가섭은 불멸후의 교단을 수습하는데 가장 중요한 책임을 졌던 제자라 할 수 있다.
2. 지계제일 우팔리
다음으로 우팔리이다. 통상 지계제일 우팔리라고 부른다. 계율을 잘 지키는 데 있어서 으뜸가는 제자이다. 우팔리 존자가 계율을 잘 지키는 제자가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원래 부처님의 제자 열 사람을 가문별로 분석을 해보면, 거의 대부분이 귀족적인 상층계급에 속한다. 그러나 우팔리만이 천민 수드라 출신으로서, 출가 전에는 이발사였다. 우팔리가 불교에 입문하는 수계식을 할 때, 부처님이 머리를 깎아주면서 '그대는 이러이러한 세속의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을 주었다. 우팔리는 그 때 부처님이 주었던 계율을 지킴에 있어서 으뜸이었기에, 지계제일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3. 천안제일 아니롯다(아나율)
또, 천안제일 아니롯다(아나율)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에 대해 불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언젠가 아니롯다는 부처님이 설법할 때 졸았다고 한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래서는 안 된다. 출가한 사람은 게으름을 쫓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아니롯다는 참으로 부끄러운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이 앞섰다. '내가 삼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출가하였는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리고 부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다니......' 이렇게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밤낮 부릅뜬 눈으로 정진하였다. 그런 아니롯다를 부처님은 여러 차례 만류하였다. "아니롯다여, 공부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 다. 아니롯다여, 쉬어가면서 하라." 그러나 아니롯다는 굳은 결심으로 밤낮 열심히 공부하다가 그만 몹쓸 안질에 걸렸다. 결국은 시력을 상실하여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까지 이해할 수 있는 천안이 열렸다. 즉 심안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그를 천안제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 본존불 주변에는 열 분 제자가 선 채로 부처님을 시립하고 있다. 그중 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아니롯다가 눈을 감은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4. 다문제일 아난다
그 다음으로 다문제일 아난다를 들 수 있다. 아난다는 개인적으로는 부처님의 이종사촌 동생이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 출가하여 부처님을 시봉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난다는 그림자처럼 부처님 곁을 맴돌면서 근40년을 지냈다. 그 공덕으로 부처님이 제자들이나 일반 대중들을 위해 설법할 때, 가장 많이 설법을 듣고 기억하는 제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대장경을 편찬하는 일이 있었을 때, 아난다는 다문제일답게 부처님의 가르침들을 술술 외우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경전을 편찬하는 주요한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그밖에 아난다는 여인의 출가를 허용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부처님은 초기에는 여성의 출가에 대하여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아난다의 간청으로 인하여 비로소 여인의 출가가 허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5. 밀행제일 라훌라
십대제자 중에서 대개 마지막으로 열거되는 라훌라에 대 해서 몇 가지 언급해보면 라훌라는 부처님의 한 점 혈육 친아들이었다. 흔히 그를 밀행제일이라고 한다. 라훌라는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연유로 처음에는 교만한 면모를 보였다. 하루는 부처님이 이를 알고 라훌라를 찾아갔다 그리고 라훌라에게 발을 씻기도록 한 뒤, 그 물을 마시라고 했다. 그러자 라훌라는 발을 씻어 물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마실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너도 이 물과 같다. 이 물은 본시 깨끗한 것이었는데, 이제 더러워졌다. 너 또한 왕의 손자로 태어나 출가하였는데, 수행은 멀리하고 계도 지키지 않으니, 삼독의 때가 마음속에 가득하여 마치 이 더러운 물과 같다." 그런 다음 부처님은 그 물그릇을 힘껏 발로 차버렸다. 그리고는 라훌라에게 그 물그릇이 깨지는 것이 걱정되느냐고 묻자, 라훌라는 그 물그릇은 값이 싸기 때문에 걱정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너도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해를 끼쳤으니 이 그릇처럼 그들로부터 사랑이나 아낌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라훌라는 자기의 행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깊이 뉘우친 후, 깨달음을 위해 열심히 정진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라훌라 존자를 바로 밀행제일의 제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상으로 부처님의 십대제자를 모두 언급하지는 못했으나, 초기 불교교단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몇몇 제자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교단의 구성과 생활 불교의 교단을 '상가(sangha)'라고 한다. 원래 상가란 '화합된 무리들, 다투지 않고 평화와 자유를 이상으로 살아가는 무리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고귀한 의미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가라는 말의 음을 그대로 따서 승가라고 옮기게 된 것이다.
칠부중(七部衆)
이 승가는 다음과 같은 일곱의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전한다.
첫째, 비구스님이다.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로 맹세하고 구족계를 받은 스님을 가리킨다.
둘째, 비구니스님이다. 비구스님과 동일한 조건을 갖춘 여성 수도자들을 가리킨다.
셋째, 사미이다. 대략 20세 미만의, 어렸을 때 출가했던 남자스님들이다.
넷째, 사미니이다. 20세 미만의 여성 출가자들이다. 다섯째, 식차마나이다. 비구니가 되기 직전의 2년간의 수도생활을 하는 여자스님들로 18-20세까지의 여성 출가 수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섯째, 우바새이다 이들은 재가의 남자신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곱째, 우바이이다. 재가의 여자신도들이다. 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지만 세속에서 생활을 영위한다. 위와 같은 일곱 그룹을 합하여 칠부중(七部衆)
이라한다. 그중에서 사미, 사미니, 식차마나를 빼고 통상 사부중이라고 말하고 있다. 흔히 보이는 '사부대중이 화합 하고....'라는 설명에서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네 그룹이 포함된다. 그들이 불교의 승가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골격이 되었던 것이다.
장로체제
그러면 부처님의 입멸 후, 초기의 불교교단은 어떻게 운영되었을까? 불교교단이 아무리 권위주의가 배격되었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의 입멸 후에는 정신적인 의지처라고나 할까, 그를 대신할 만한 기구나 조직, 혹은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단에서는 합의 의결기구를 만들었다. 그것은 교단 내에서 덕이 높은 스님들로 구성된 일종의 장로(長老)체제라고 볼 수 있는데,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공화체제적 성격을 띤 것이다. 이것을 승가갈마(상카캄마)라고 불렀는데, 바로 이곳에서 교단내의 모든 일들을 합의의결하여 통솔하였던 것이다
안거
부처님 당시부터 승가의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몇 가지 법회의식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안거(安居)라는 것인데, 안거란 여름철의 일정기간 동안 바깥 출입을 삼가고 스님들이 한곳에 모여서 수행하는 법식을 가리킨다.
인도지역에서는 우기의 두 달 동안만을 지냈으나, 북방 불교 문화권에서는 여름뿐만 아니라 겨울에도 안거를 지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1년에 두 차례 동안 한 곳에 머물러 수도한 안거기간이 있는데, 겨울철의 수도를 동안거, 여름철의 수도를 하안거라고 한다. 요즘에도 듣게 되는 안거의 결제란 깨달음을 추구하기 위한 집단생활에 들어간다는 말이고, 해제란 그 공부를 끝내고 만행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이다. 아마도 초기의 불교교단은 이 안거기간을 제외한 나머지 10개월 동안은 모든 스님 들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전국을 유랑하면서 불교의 위대한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참회의식 '포살'
또 하나, 초기부터 교단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하게 행해진 법식이 있다. 그것은 '포살'이라는 법회의식이다.
포살이란 일종의 참회의식이다. 사실, 참회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싫든 좋든, 또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소간의 죄를 저지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신, 구, 의 삼업이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옮기는 한 걸음에도 개미가 10년 동안 지어놓은 집이 무너지는 수가 있다.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이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 아있다는 것 자체가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지은 죄를 참회하는 것이다. 포살은 참회의식이다.
이 포살이라는 불교적 참회는 독특한 방식으로 행해진다. 우선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그날의 교수 아사라로 지적된 사람이 한 사람씩 불러 세워서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참회의식이 진행 된 것 같다. 이를테면, 불교에서 말하는 오계, 즉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고주라는 다섯 가지 계명을 신, 구, 의로 나누어서 각인에게 물어본다. "지난 반달 동안에 이 사람의 말 속에 서 남을 죽이려고 하거나, 남을 죽였으면 하는 발언을 들 은 적이 있는가?" 만약에 그런 적이 없으면 대중은 물론 침묵할 것이고, 있다면 지적을 받고 참회를 해야 한다. 이렇게 모두 돌아가면서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도록 되어 있었다.
불교경전 중에 <포살경>이 있다. 그 속에는 놀랍게도 어느 땐가 부처님의 직접 포살의식을 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자신이 만든 교단, 그 자신의 제자들 앞에 무릎을 끓고 지난 반달 동안의 잘못들에 대해 지적해 달라고 허하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포살경>은 앞에서 언급한 불교는 결코 권위주의적인 색채를 지니지 않는 교단이라는 설명의 구체적 증거가 될 것이다.
포살법회는 반드시 2주일마다 한 번씩 거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포살법회의 점을 찍은 것을 역산하여 부처님의 생멸 연대를 환산하는 방법이 생길 정도였다.
평등
불교교단의 기본적인 이상은 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관련된 부처님의 말을 언급해 보자. 어느 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강물줄기가 흘러갈 때에는 거기에 많은 이름들이 있노라. 혹은 아무나, 혹은 잠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모든 강물줄기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되면, 오직 한 이름, 바다라고 하는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바다에는 오직 한 맛, 짠맛 밖에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대들은 출가 이전에는 혹은 브라흐만이었고, 혹은 크샤트리아였고, 혹은 바이샤, 수드라였다.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오직 출가 승려, 그 한 이름으로 불리워지리라." 사실, 그 당시의 신분사회에서 불교교단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평등 적인 분위기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불교의 승가는 당시의 엄격한 카스트 사회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이에게는 평등이 보장 되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또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사람은 바라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고귀하거나, 수드라로 태어났기 때문에 열등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그가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서 고귀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비천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말들은 초기의 교단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핵심이 되는 승가라는 그룹이 자유와 평등의 의지를 내세우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평등을 앞세운 불교교단이었기 때문에, 이 교단 내에 모든 구성원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 앞에서 평등하게 대우되었고, 교단 은 평등하게 운영, 유지, 발전되 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