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持經功德分 第十五
지경공덕분 제십오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初日分에 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中日分에 復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後日分에 亦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야 如是無量白千萬億劫을
以身布施하야도 若後有人이 聞此經典하고 信心不逆하면
其福이 勝彼어든 況書寫受持讀誦하야 爲人解說가
須菩提여 以要言之컨덴
是經은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하나니
如來 - 爲發大乘者說이며 爲發最上乘者說이니라
若有人이 能受持讀誦하야 廣爲人說하면
如來 -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하리니
如是人等은 卽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何以故오 須菩提여 若樂小法者는
着我見 人見 衆生見 壽者見일새
卽於此經에 不能廳首讀誦하야 爲人解說이니라
須菩提여 在在處處에 若有此經하면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의
所應供養이니 當知此處는 卽爲是塔이라
皆應恭敬 - 作禮圍邀하야 以諸華香으로 而散其處하리라
수보리여,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를 하고,
낮에 다시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를 하고,
저녁에 또한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를 하되
한량없는 백천만억겁 동안 몸으로 보시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으로 거역하지 아니하였다면
그 복덕이 저 몸을 보시한 복덕보다 수승하니라. 하물며 경을 베껴 쓰거나,
받들어 지니고 독송하거나, 남을 위해 해설을 해 주는 공덕이랴.
수보리여, 요점만 말한다면
이 경은 불가사의하여 가히 측량할 수 없는 가없는 공덕을 지니고 있나니,
여래는 대승(대승)의 마음을 발한 자를 위하여 이 경을 설하며
최상승(最上乘)의 마음을 발한 자를 위하여 이 경을 설하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경을 받들어 지니고 독송하고
널리 남을 위해 설하여 주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사람은 가히 헤아릴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없는 불가사의한 공덕을 모두 얻어 성취하게 되느니라.
이러한 사람은 곧바로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지고 나아가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작은 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견(我見)과 인견(人見)과 중생견(衆生見)과 수자견(壽者見) 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 경을 능히 들으려 하지 않고 받아 들이려 하지 않으며,
독송을 하거나 남을 위해 해설을 해주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여, 어느 곳이든지 이 경이 있는 곳이면
일체 세간의 천인과 인간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을 하느니라.
마땅히 알아라. 이 경으 있는 곳은 곧 탑이 되나니,
모두가 공경하여 예배를 드리고 주위를 돌며 갖가지 꽃과 향을 뿌리느니라.
제14「이상적멸분」에서는
모든 상을 떠날 때 불교의 최고 목표인 열반의 경지에 저절로 이르게 됨을 설하셨고,
제15「지장공덕분(持經功德分)」에서는
경을 지니는 공덕이 어느 정도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과연 경을 지니는 공덕은 얼마나 큰 것일까?
「지경공덕분」의 내용을 풀어서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아침에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를 하고,
낮과 저녁 때에도 그와같이 보시를 하여, 하루 세 차레식 백천만억겁 동안 보시를 하였다면
그 공덕이 어떻겠느냐? 그야말로 무량하기 그지없으니라.
하지만 이보다도 금강경, 곧 위없는 깨달음의 마음을 발하게 하는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어 거역하지 않는 사람은 더 큰 복덕을 얻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의 내용을 완전히 요달해야만 무량복덕이 생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는 마음을 내어 거역하지 않으면’ 무량겁동안,
그것도 하루에 세 차례씩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몸을 보시한 공덕보다 크다고 한 것입니다.
확실히 믿어 비방만 안하고 비평만 안할 수 있어도 무량공덕을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그와 같은 믿음속에서 사경(寫經)을 하고, 언제나 받들어 지니고 독송을 하고
남을 위해 해설을 해주는 공덕이야 어찌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바로 ‘믿음(信)’입니다.
과연 ‘믿는다’ 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 ! 참으로 그렇구나’ 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접하고 이렇게 확신을 하면 그야말로 무량공덕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 참으로 그렇구나’ 하는 확신과는 관계없이,
무량공덕이 있다고 하니 읽고 사경하고 해설도 해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공덕이 탐이 나서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덕을 얻고자 하는 기대심리로 금강경을 수지독송 하여서는
절대로 무량공덕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경문을 통하여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이 경전은 불가사의하여 가히 측량할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지니고 있다.
이 경은 아무에게나 설하는 경전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승의 마음을 발한 사람을 위하여 이 경을 설하며,
최상승(最上乘)의 마음을 발한 자를 위하여 이 경을 설하느니라.”
곧 금강경의 설법 대상이 대승인이요 최상승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대승이 무엇이고 최상승이 무엇인가?
대승(大乘)은 큰 수레입니다.
많은 중생이 함께 타고 해탈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큰 수레입니다.
결코 ‘나’ 혼자나 ‘나’ 와 가까운 사람만이 함께 탈 수 있는 작은 수레가 아닙니다.
그리고 최상승은 좋고 싫고, 더럽고 깨끗하고, 즐겁고 괴로운 등의
상대적인 것을 모두 넘어서서 부처의 경지로 돋바로 나아가는 불이(不二)의 수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나’ 의 행복, 내 가족의 불행타파를 위해 기복적으로 불교를 믿는 이가 대부분입니다.
어찌 이러한 우리를 대승의 마음을 발한 불자라 할 것이며,
최상승의 마음을 발한 불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우리가 대승과 최상승의 마음을 발하였다면,
모든 집착을 비우고 모든 상을 떠나게 하는 이 경을 읽는 순간에
크게 느끼고 크게 깨달아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며,
동시에 무량공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법[小法] 좋아하는 우리는 확고한 믿음 위에 서지를 못합니다.
‘나’ 의 성취, ‘나’ 의 행복, 내 가족의 행복 추구에 갇혀 금강경을 접하기 때문에,
모든 집착과 상을 벗어던지도록 하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번 돌이켜 보십시오.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의 4상(相) 중에서 아상을 벗을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일체상을 벗어버리도록 하는 금강경의 가르침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무량공덕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넓게 쓰면 복덕이 뒤따르고, 마음을 좁게 쓰면 복덕이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 라는 작은 법만을 좋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나’ 가 윤회와 죄업의 근본이 되고 있는데도 그 법을 놓아버리지를 못합니다.
이 때문에 정말 박복하고 보잘 것 없는 근기(根機)가 되고 있는데도
끝없이 ‘나’ 라는 작은 굴레 속에서 아등바등하며 살아갑니다.
조그마한 일을 하나 해놓고도 남이 모를까 걱정이 되는지,
세치의 짧은 혀로 ‘내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어’ 하는 자랑을 늘어놓아
복을 모두 부수어 버립니다.
이것이 ‘나’ 의 근기가 약하고 그릇이 작고 기운이 모자라고
복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의 주인공인 선재(善財)동자는 53선지식들이 일러주시는
가르침을 체득하기 위해 고행을 쌓고 또 쌓았으나 지칠 줄을 몰랐습니다.
한결같은 구도(求道)의 정신으로 일관한 선재동자는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의 수기를 받고 보현보살과 함께
부처님의 부사의한 경계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선재동자와 같은 큰 근기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나’ 의 굴레 속에 빠져 사는 요소법자(樂小法者)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작은 법을 즐기는 요소법자에게
어찌 무량공덕이 찾아들겠습니까?
정녕 무량공덕을 얻기를 원한다면 먼저 ‘나’를 바꾸어야 합니다.
‘나’ 의 마음을 대승과 최상승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바뀌면 금강경의 법문이 막힘없이 ‘나’ 의 것이 되고,
금강경에 대한 확실한 믿음도 저절로 서게 됩니다.
물론 요소법자에다가 ‘나’ 의 굴레에 갇혀 사는 것이 습관화된 우리가
대승의 마음을 갖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실망할 일은 아닙니다.
대승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바로 ‘나’ 의 의지요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대승심으로 살겠다는 결심 아래 꾸준히 대승의 경전을 독송하고
사경하고 뜻을 새기다 보면, 마음이 차츰 대승심으로 바뀌면서
믿음의 주춧돌이 놓이게 되고,
믿음의 주춧돌이 놓이는 만큼 공덕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기도의 한 방법으로 금강경을 독송하거나 사경을 할 때에도 이 원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 의 마음을 대승심으로 바꾸어 기도를 하면 훨씬 빨리 쉽게 기도성취가 되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정성 성(誠)’ , 이 한 글자는 잊지 마십시오.
비록 금강경의 뜻을 잘 알지는 못할지라도 정성을 다해 임하면
볼가사의한 공덕이 생겨나게 됩니다.
☆
중국 명나라 때 강백달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15세에 문둥병에 걸렸고, 병이 차츰 심하여져서
진물이 흐르는 악취를 풍기자 부모 형제가지 기피했습니다.
가족들은 의논 끝에 동네에서 떨어진 깊은 산중에 움막을 지어
강백달을 버렸습니다.
모두가 싫어하는 문둥병에다가 가족까지 자기를 버렸으니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16세에 강백달이 죽기만을 기다리며 근근히 목숨을 이어가던 어느 날,
한 스님이 지나가다가 혀를 차며 말했습니다.
“한창 활기 왕성할 나이인데 무슨 업으로 모진 병을 얻어 고생을 하는고?
그래, 너는 살고 싶으냐?”
“예,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으면 병이 나아야 하는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병이 낫고 다시 살 수 있을텐데….”
“스님,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꼭 내가 시키는대로 할 수 있겠느냐?”
“병이 나아 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스님은 강백달에게 금강경 사구게(四句偈)를 적어 주었습니다.
무릇 있는바(相)은
다 헛되고 망령된 것이다
만약 모든 상(相)이 상 아님을 보면
곧바로 부처님을 보게 되느니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구절을 잊지 말고 부지런히 외우면 틀림없이 병이 나으리라.”
“이것만 외우면 됩니까? 이렇게 쉽습니까?”
“그래, 하지만 정성껏 마음을 모아야 하느니라.”
강백달은 사구게를
병을 낫게 해주는 주문으로 생각하고 부지런히 외웠습니다.
밤이 되면 깊은 산중에 혼자 있는 두려움 때문에 더 열심히 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획—’ 하는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호랑이가 앞쪽에 마주 앉는 것이었습니다.
눈에서는 파란 불을 내뿜으며….
‘아이쿠, 이제 죽었구나.’
도말칠 수도 피할 수도 없게 된 강백달은 눈을 꼭 감고
‘범소유상 개시허망…’ 만 죽으라고 외웠습니다.
그리고 호랑이가 다가와
몸을 혓바닥으로 핥는 것을 느끼는 순간 삼매에 들었습니다.
얼마 뒤 눈을 떴을 때
호랑이는 간데 없었고, 문둥병은 완전히 나아있었습니다.
너무나 좋아 집으로 달려가자,
부모님과 형제들은 기급을 했습니다.
“저것이 가족을 원망하고 저주하다가 죽어, 귀신이 되어 원한을 갚으러 왔구나.”
강백달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자,
가족이 모두 참회를 하였고, 이 사실이 동네에 전해지자
온 동네 사람들이 금강경 사구게를 외워 재앙을 없애었다고 합니다.
강백달은 금강경 전체를 독송하지 않았습니다.
사구게 하나만을 확고히 믿고 외웠습니다.
마침내 호랑이가 나타나자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
열심히 외우다가 죽자’ 는 마음가짐으로
죽을 힘을 다해 외우다가 삼매에 빠져들었고,
깨어났을 때에는 문둥병이 완전히 나아 있었습니다.
이렇듯 사구게만이라도 지극한 정성으로 외우면
뜻밖의 영험과 공덕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물며 정성을 다해 금강경 전체를 독송하거나 사경을 한다면
어찌 그 공덕이 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금강경 그 자체 속에 공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어느 곳이든지 이 경이 있는 곳이면
일체 세간의 천인과 인간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을 하느니라.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이 있는 곳은 곧 탑이 되나니,
모두가 공경하여 예배를 드리고 주위를 돌며 갖가지 꽃과 향을 뿌리느니라.”
이는 제12「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에 이어 비숫한 내용을 거듭 말씀하신 것으로,
금강경이 있는 자리는 부처님이 계시는 자리와 같고,
부처님을 모셔 놓은 탑이나 법당과 같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신 것이다.
이제 이를 증명하는 옛 이야기 한 편을 음미해 봅시다.
☆
수나라 말기에 중국 익주의 심본현 왕자리라는 동네에
성이 구씨(具氏)인 선비가 있었습니다.
구씨 선비는 평소에 금강경을 즐겨 외어 깊은 진리를 터득하였습니다.
어느 날 선비는 마을의 동쪽에 있는 들판에 서서,
하늘을 향해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이상하게 여긴 동네 사람들이 까닭을 물었습니다.
“선비 어른, 하늘을 향해 무엇을 쓰고 있습니까?”
“금강경을 쓰고 있노라.”
“왜요?”
“천상의 사람들이 와서 이 경을 읽고 공경심을 내도록 하기 위함이야.”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 말씀을 이해하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뒤부터 비가 와도 그 자리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들에 나갔던 사람들이 소나기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비를 피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30년의 세월이 흐른
당나라 고조(高祖)의 무덕연간(武德年間, 618~628)에,
인도에서 온 스님이 그 동네를 지나가다가
구씨 선비가 글씨를 썼던 곳에 이르러 끊임없이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거기에는 부처님도 없고 탑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공중을 향해 그토록 열심히 절을 합니까?”
동네 사람의 질문에 오히려 스님은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모두가 이 동네에 사시는 분들이시오?”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절을 하는 까닭을 모르십니까?”
“예, 왜 절을 하십니까?”
“이 자리에는 금강경이 쓰여져 있어
언제나 천상 사람들이 와서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올립니다.
그런데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다니
참으로 안타깝구려. 절대로 이 자리를 더럽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스님이 떠나간 뒤 동네 사람들은
그 자리에 깨끗한 정자를 지어 신성시 하였으며,
그 정자에 있으면 가금씩 인간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매우 아름다운 풍악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허공에 쓴 글씨가 수 십년이 지난 후에도
지워지지 않고 천인들의 공양처가 되었다는 것!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바로 이것이 금강경의 불가사의입니다.
금강경은 결코 종이 위에 먹으로 쓴 하나의 책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빛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빛과 힘은 아무나 발현시킬 수가 없습니다.
온 우주에 가득 충만되어 있는 진리의 빛과 힘을 발현시키는 것!
그것은 바로 ‘나’ 의 몫입니다.
평소에 금강경을 즐겨 외워 진리를 터득한 구씨 선비.
그 분이 썼기에 능히 기적같은 일을 이룬 것처럼,
우리도 최상승법을 설한 금강경의 가르침을 잘 새기고 확실히 믿어
모든 상과 집착을 벗어버리면
불가사의한 무량공덕을 발현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중생을 부처의 경지로 끌어 올리기 위해
부처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설하신 금강경.
23천여 년 동안 수많은 불자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 금강경.
이 금강경의 법문을
정성껏 공부하고 새기고 받아들여서 꼭 무량공덕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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