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갑부 李光明의 득남
묘향산으로 들어간 운룡은 이후 한동안 발자취를 감추고 깊숙이 들어앉아 세상을 관조(觀
照)할 뿐이었다.
운룡은 그로부터 3년 뒤인 무인년(戊寅年.1938)에는 의주 천마산 영장사(靈藏寺) 말사인
영덕사(靈德寺)로 거처를 옮겨 지냈다. 이 무렵 운룡은 식량사정이 여의치 못해 굶기를 밥먹
듯 하며 곤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비몽사몽간에 백발 노인 한 분이 나타나 '평양의 이광명(李光明)이 자식이 없어 치
성을 드리고 있으니 그에게 편지 한 장 써서 보내라'고 일려주는 것이었다. 노인은 운룡이
곤궁에 처할 때마다 홀연 나타나 도와주곤 하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평양의 갑부 이광명은 만석(萬石)이 넘게 추수(秋收)하는 소문난 부자였으나 슬하에 자식
이 없어 걱정이 태산 같았다. 여자에게 무슨 결함이 있어서 자식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소실을 맞아들여 도합 일곱 명이나 되었지만 한결같이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이광명은 명산 대찰마다 사람을 보내 시주하고 기도 드리게 하였는데 어느날 꿈에 산신
(山神)으로 보이는 백발 노인 한 분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천마산 영덕사에 잠시 머물고 계신 관음불(觀音佛)께서 네게 아들 형제를 점지할 것이니
정성껏 공양하도록 하라."
이광명은 꿈을 꾸고 나서 무슨 좋은 소식이 있겠지 하고 기다리던 차에 무인년 연초에 영
덕사의 운룡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무인년(戊寅年.1938) 동짓달 모일에 큰아들을 얻게 되니 이름을 이××라고 하고
다음 해(己卯.1939)에 얻게되는 차남은 이름을 이××라고 부르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광명은 편지를 받아보고 나서 즉시 영덕사로 사람을 보내 운룡에게 식량과 노자돈을 두
둑히 전하고 자신의 집을 방문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운룡이 이광명의 집에 도착하자 이광명은 물론이고 일곱 부인은 서로 자기가 아이를 낳도
록 해주기를 고대하며 다투어 운룡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 한동안 이광명의 집에 머물
면서 대접 잘 받고 영덕사로 돌아가는 날 이광명은 거약의 노자와 식량, 옷 등에 수레에 실
어 딸려 보냈다.
무인년 동짓달 모일에 과연 운룡의 말대로 큰아들이 태어나고 이듬해 잇따라 작은 아들이
태어나자 이광명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 손수 사람을 시켜 퇴락해 가는 영덕사를 중수(重修)
하였다.
뒷날 운룡은 앞으로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일본국은 패망하게 되고 이 지역은 좌익(左翼)
천지가 될 것이니 그 때를 대비해 미리 남쪽으로 옮겨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광명에게
알려주었다.
"이곳은 좌익이 씨를 뿌렸고 이남은 우익이 씨를 뿌렸으므로 반드시 씨를 뿌린대로 결실
을 보게 될 겁니다. 일본국이 패망하고 일본인들이 물러가게 되면 좌익 진영에서는 부자
(富者)들이 화(禍)를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었다가 제 이야기가
생각나거들랑 속히 손을 쓰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광명은 운룡의 이야기를 듣고는 한동안 묵묵부답이더니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
냐'며 난색을 표하는 것이었다. 운룡은 그 일에 관해서는 더 이상 아무말 않고 있다가 이광
명과 헤어져 그 뒤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백두산 원시림 속 깊은 골짜기에서 냇물의 사금(沙金)을 일어 금을 모으는 일은 그리 어
렵지 않았다.
운룡은 동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동지 몇 사람과 국경을 넘어 백두산 속으로 깊이 들어와
초막을 얽어 삶의 본거지를 마련해놓고는 틈틈이 사금을 채취하여 그것으로 식량을 마련하
였다.
냇물에서 금이 많이 섞인 것으로 보이는 모래를 퍼서 쌀 일 듯 일면 금이 모여진다. 부지
런히 금을 모아 놓으면 정기적으로 금을 수집하는 장사꾼이 찾아와 다음에 찾아와 다음에
찾아올 때까지 먹고 살 정도의 쌀과 소금을 주고는 금을 가져간다.
금은 세상에서 귀한 물건이지만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도망해 다니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애국투사들에게 있어서 먹을 것만큼 소중하지는 않았다. 장사꾼들은 약
간의 식량을 주고 금을 가져가면 그것으로 그만일 다름이다.
애국투사들의 쫓기는 처지를 잘 알기 때문에 비록 금의 가치와는 비교도 안될 값어치의
쌀과 소금만을 주고도 빼앗다시피 금을 가져가곤 하였다. 세상에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
떤 짓이든 서슴지 않고 하는 부류들이 적지 않았다.
사금 수집상 역시 동족의 어려운 처지를 십분 이용하여 부(富)를 축적하는 전형적 인간상
의 하나였다. 현상금을 노려 일본 경찰에게 애국투사를 밀고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시대
이니 만치 그것은 별 것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毒)이 오를 대로 오른 애국투사들이다. 그리도 많은 이득을 취하면서도 너무나
적은 식량을 주고 '고약한 마음씨'를 언제까지나 너그럽게 이해할 애국투사는 아마 없을 것
이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약간의 식량을 지고 찾아온 사금수집상 일행은 금값을 더 치
르라는 애국투사들의 요구를 일축한 대가로 한적한 원시림 속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할 정도
로 두들겨 맞았다. 사금 채취의 생활은 그것으로 끝난 셈이다.
애국투사들은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떠나갔다. 국경을
넘어 동만주로 가기도 하였고 소련 땅으로 건너간 사람도 있었다.
운룡은 갑산. 삼수를 거쳐 낭림산맥을 타고 묘향산에 접어들었다. 머물 만한 곳을 찾아 헤
매는 동안 거의 끼니를 때우지 못하고 굶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어느 허름한 암자에 도착하였는데 운룡은 그곳에서 겨울을 나기로
작정하였다. 몹시 허기가 지기도 하였고 날씨도 계속 추워지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돌아다
니며 찾아볼 형편도 못됐다.
설령암은 묘향산 산능선의 바로 밑에 위치한 기도 처였으므로 은둔처로는 더없이 좋은 장
소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월림(月林) 주재소에서 순사가 나온다 하더라도 당일 왔다
가 갈 수 없는 거리였으므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올 수 없는 곳이다.
새벽에 출발하여 온다 하더라도 최소한 큰절에서 하룻밤 묵어야만 왔다갈 수 있는 오지인
데다 가을에 접어들면 길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더더욱 왕래가 어렵게 된다. 특별한 사연
이 있는 기도 객들만이 약간의 식량을 갖고 불공드리기 위해 설령암을 찾을 뿐이다.
설령암에 처음 당도하였을 때 암자를 지키는 스님도 없었고 기도객들이 다녀간 지도 꽤나
오래된 듯 썰렁한 분위기였다.
운룡은 세 평쯤 되어 보이는 방을 치우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추위가 워낙 심한 곳이
라 이중의 벽에 문도 이중으로 되어 있었으며 바깥벽에는 두치 이상 두께의 송판을 재놓았
다.
법당은 세 평쯤 되어 보이는 방의 크기에 비해 부엌이 무척 널찍해 보였다. 한쪽 구석에
는 때다가 남은 장작이 쌓여 있었고 가마솥을 비롯 밥짓는 데 필요한 그릇류와 불공에 사용
되는 제기류 몇 점이 때묻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도금이 바랜 조그만 불상(佛像)이 설령암의 시공(時空)을 주재하는 주불(主佛)로 좌정하여
있다. 어느 정성스런 스님의 바랑 속에 모셔져 특별 호송되어온 듯한 주불은 오는 손 막지
않고 가는 손 만류하지 않으며 공(空)의 실상(實相) 그대로, 바람처럼 뒷전에 앉아 세상을
관조하고 있다.
가슴 속에 온갖 한(恨)과 간절한 원념(願念)을 안고 찾아오는 숱한 사람들의 소리 없는
언어를 보면서 때로는 아미타 여래도 되었다가 때로는 관음불도 되고 또 때로는 그들이 원
하는 이름 모를 신(神)이 되기도 한다.
운룡이 설령암에 도착한 이튿날 불공을 드리기 위해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가 절에
왔다. '설령암의 부처님께 기도 드리면 아들을 나을 수 있다'는 현몽을 얻고 부랴부랴 식량
등을 준비하여 올라 왔다는 것이다.
이들 내외는 운룡을 보자 비록 입고 있는 옷은 남루하였지만 쏘는 듯한 안광(眼光)과 선
풍도골(仙風道骨)형의 풍모로 미루어 비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였다. 20대 중반의 운
룡에게 선생님이라는 깍듯한 칭호와 함께 각별하게 정중히 대하는 것이었다.
운룡은 그들 내외가 오던 날 불공을 마치고 모처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백두산 금점판
을 떠난 뒤 심산 속으로만 이동하는 바람에 25일간 곡기(穀氣)라고는 입에 대보지 못하다가
이날 비로소 처음 식사를 하게된 것이었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밥은 참으로 냄새가 구수하
였으며 입에서 씹을 여가도 없이 녹는 듯하였다.
"김 선생님께서는 웬 밥을 그리 많이 자십니까? 평소의 식사량이 이렇습니까?"
운룡은 계속 밥을 떠 넣으며 '한 스무댓 새 굶었더니 지금까지 거른 끼니만큼 오늘 하루
에 다 먹는 모양'이라며 껄걸 웃었다.
"선생 내외분은 그래 저 나무부처나 돌부처에게 기도하여 무슨 효험이 라도 있을 것 같
소?"
운룡은 중년 부부 가운데 부인의 몸에 이상이 있음을 간파하고 농삼아 물어본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마주 대하고 앉더라고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당
연했다.
"저희는 산신님의 현몽을 틀림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현몽은 저희 내외의 정성
어린 지금까지의 기도 덕택이라 생각합니다. 옛말에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이
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이제 저의 내외 나이가 모두 50을 바라보니 이번에 부처님께서 점
지하지 않는다면 어찌 아이 얻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운용은 중년 남자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이곳에 찾아온 기연(機緣)에 대해 생
각하고 산신(山神)에 대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운룡은 전생(前生)에 이(李)씨 성을 가졌
을 때의 아버지가 모(某)산의 산신으로 와 있으며 어려운 고비 때마다 음(陰)으로 돕는 것
을 알고 있었다.
"선생! 이제 불공(佛供)은 끝났소. 또 곧 강추위가 몰아칠 것 같소. 속히 하산하는 것이
좋을 듯 부르오. 여기 내가 적어주는 화제(和劑)를 갖고 사서 동네의 용한 의원에게 보여
주고 그대로 약을 지어 달라고 하여 복용케 하시오. 복약 기간 중 절대로 내외관계를 갖
지 말고 정성껏 복용하면 얼마 안 가서 태기(胎氣)를 느끼게 될 거요."
운룡은 포태약(胞胎藥) 처방과 각 약재의 법제방법 등을 자세히 적어 중년 남자에게 주었
다.
"태기가 느껴지거든 이 설령암의 '거지'에게 쌀이나 두어 말 보내도록 하시오. 된장 고추
장 약간과..."
중년 남자와 그 부인은 몹시 기뻐하면서 가져온 쌀과 반찬 등을 모두 남겨 놓고 하산 길
을 재촉해 내려갔다. 이듬해 봄, 산 속의 길에 얼음이 풀리고 눈이 녹기 시작하자 이들 중년
남녀는 희색이 만면하여 짐꾼 한 명과 같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설령암으로 운룡을 찾아왔
다.
"김 선생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택에 이렇게 늦게나마 자식을 보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일러주신 약을 쓰고 아내의 몸이 우선 건강해졌고 곧이어 아기를 갖
게 되었습니다. 쌀 서 말과 반찬을 좀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노자 돈도 마련하였으니
저희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받아주십시오. 저희 내외에게는 김 선생님이 바로 부처이십니
다."
중년 부부는 운룡에게 진심으로 치하하고 추후 틈을 보아 다시 찾겠다고 다짐한 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다.
삼가 여백(삼생대오)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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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야기(10) (평양 갑부 이광명의 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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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0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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