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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로 중국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았고
이 돈은 철강산업에 투입되어 중공업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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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만주사변과 함께 시작된 위기에서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여유를 누렸다.
군대에 징집된 아들이 부쳐주는 돈 때문에 주머니가 좀 두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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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처음부터 만주사변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대공황으로 궁핍하고 정치인들의 부패 스캔들로 심란한 상황에서
관동군의 통쾌한 승전보는 국민의 감성을 사로잡았다.
군부는 전선에서 돌아온 장교들을 강연장으로 보내 군국주의 열풍을 조성했다.
지식인들은 이런 열풍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오히려 앞장섰고, 라디오, 신문, 잡지도 전선 소식을 상세하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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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에는 경기도 좋아지고 완전고용까지 달성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한 후에 어느 도시 노동자는 이렇게 썼다.
[ 전국에 일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나도 처음으로 아버지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어.
열심히 일하니까 돈도 벌 수 있고, 전쟁이 꼭 나쁜 건 아닌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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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첫 6개월간 일본군은 승승장구했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통쾌한 승전보에 흥분하고 행복해했다.
천황도 ‘짐은 기쁘기 한량없다’고 담화를 발표했다.
/ 마리우스 잰슨 ‘현대일본을 찾아서’
2차 대전당시, 일본 군대는 아시아 최강이었고,
태평양 전쟁초기에는 중국, 필리핀, 인도차이나 반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만주사변, 태평양 전쟁초기까지
군대가 승승장구하자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크게 기뻐했다.
대학생 뿐 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에서 유학한 자칭 ‘자유사상가’,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들도 호들갑을 떨었다고 한다.
자기 땅에서 벌어진 전쟁이 아닌데다,
전쟁특수로 경기가 활성화되고
일자리가 생겨 돈도 벌 수 있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물론, 메이지 시대부터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고
교육, 언론을 계속해서 검열, 통제하고 사상의 자유를 줄곧 억압했으니,
무고한 국민은 없다고 하면 심한 비약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은 제 정신인데 일부 권력자들만 미쳐서
침략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근대 이후의 전쟁은 총력전이고
국민의 동의 없이는 도저히 전쟁을 치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