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집에서
몰아치는 겨울바다의 칼바람을 멀리 힘겹게 날갯짓을 하고 있는 갈매기들의 모습을 통해서 느끼며 시화호 제방을 건넜다.
영흥도 심리포 바닷가의 소사나무 군락이 멀리 보인다. 허나 예전에 찾았던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다리가 놓이면서 외지인들이 찾아들어 곳곳을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헤치고 주변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을 되는 대로 지어놓았기 때문이다. 한적하게 걸을 수 있는 해변마저도 소사나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울타리를 쳐놓았다. 아무리 여유를 갖고 걷고 싶어도 어디에도 쉼을 허락 받을 만한 곳은 찾을 수 없다. 그나마 남겨진 해변마저도 찾는 이들이 두려워선가. 안으로 자신들을 굳게 잠근 표정이다. 그래선지 섣달에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나그네들을 반기지 않는 듯하다.
변하지 않은 것은 동장군이 만든 겨울 바다의 성엣장을 타고 넘어 몰아쳐 오는 섣달의 칼바람뿐. 하지만 옷깃을 여미고 자라목처럼 움츠려도 파고드는 바람은 망가진 해변의 상처에 대한 책임을 묻는 듯 온 몸을 얼어붙게 하며 우리 일행들을 거부했다. 가뜩이나 아쉬운 마음인데 매서운 바람은 걷고 싶은 마음의 여유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심전심 일행은 누가 차에 오르자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차안으로 몸을 피하는데 일치를 보았다. 그리곤 소개했던 찻집으로 가자는 성화에 이내 그곳을 뒤로했다. 수업시간에 잠시 소개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그곳에 가자는 성화를 받게 된 것인데 찾아가는 나의 마음이 좌불안석인 까닭은 왜일까. 분명하지 않지만 4년이나 지난 것 같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찻집이 그 모습 그대로 있을지. 하도 빨리 변하는 세상인데…. 혹여, 장사가 안돼서 업종을 바꿨던가 아니면, 분위기를 바꾸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들도록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작은 언덕을 넘어서니 멀리 찻집이 보였다. 그 순간 더 불안해진다. 멀리 보이는 입구에 없었던 간판도 생겼고, 길가에 세워진 철문도 없었던 것이기에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한 마음이 조바심을 더하게 한다. 학생들에게 소개할 때 수도권에 단 하나밖에 없는 찻집이라고 했는데…. 불안한 마음과 함께 차를 세웠다. 주차장도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주변까지도….
다행인 것은 건물의 외모는 그대로였다. 문 앞에 이르러서야 조금은 안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문 앞에 있던 글귀들이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다가서며 조용히 문을 열었다. 순간 이제까지 불안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평온함이 느껴진다. 역시 아무도 없는, 그러나 변함없이 조용히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의 선율은 그곳에 들어서는 이들로 하여금 평안함과 쉼을 느끼게 한다.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페치카에는 장작이 타고 있다. 이 역시 예전 그대로다. 나무 타는 특유한 냄새가 추위와 함께 자연스럽게 일행을 그 앞으로 불어 모은다.
일행들도 순간 탄성을 지른다. 도심주변에 수없이 많이 생겨나는 찻집들, 어쩌면 찻집이라기보다는 시간이 남는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해서, 돈 쓰고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든 그런 찻집들의 분위기에 익숙했던 이들이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지를 수밖에 없었던 탄성, 어쩜 그들에겐 그런 분위기가 충격이었을지. 아니면, 모든 사람들의 본성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안식과 쉼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의 찾는 이 없는 조용한 분위기. 그곳이 원래 목장이었기에 창밖으로는 작지만 목가적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다. 이어지는 클래식음악의 조용한 선율은 이내 안식을 느끼게 한다. 적당히 조정된 볼륨, 창밖의 눈 덮인 초지草地와 멀리 뵈는 농가들. 가만히 앉았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그냥 전원의 한 가운데 있음을 느끼게 한다.
주인장은 손님이 들어왔으나 아직도 어색하다. 왠지 차를 끓이고 서빙할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보다는 거기 페치카 앞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어야 할,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여인. 주줍어선가 손님들과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여인. 서빙하는 이가 따로 없이 주인장인 그녀가 혼자 모든 일을 한다. 그녀는 이내 나를 알아본다. 허나, 나는 그녀를 전혀 알아 볼 수 없었다.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일까.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만도 대하기 버거운 사람이기에 찻집의 주인장을 기억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서일까. 하기사, 이 찻집을 찾았던 것이 언제였던가. 그래서인지 더 기뻤다. 그 땐 주인장이 새롭게 일을 막 시작했을 때인데, 이 분위기가 좋아서 한마디하고 갔던 손님을 몇 년이 지나서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일행은 페치카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사회교육원생들이기에 인생을 살만큼 산 이들이다. 해서인가 지나온 삶의 보따리들을 끌러놓는다. 공부를 시작하고 새롭게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제까지 몰랐던 다른 세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 산다는 이야기.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보따리는 벌써 일행의 마음을 하나로 묶기에 충분했다.
일행이 머무는 몇 시간 동안 두 사람의 방문객이 있었을 뿐 찾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일행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너나없이 찻집에 대한 느낌을 끊어질 듯 이어간다.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선율 외에는 적막할 만큼 조용한 분위기에 이따금씩 페치카의 장작이 타면서 튀는 소리가 그 적막을 깨는 유일한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진 밖에는 지나는 불빛도 서있는 불빛도 없다. 실내는 더욱 아늑하고 선율에 지배당한 분위기다. 사람들의 말소리조차 잦아든다. 허나, 누구도 자리를 뜨려하지 않는다.
왜, 모두들 이 분위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았는가. 정신없이 살아온 지난 시간을 비로소 느낄 수 있어서가 아닐까. 매일의 삶이 무엇인가를 쟁취하고, 또 경쟁하는 가운데 만족을 얻으려는 수고가 이어지기에 한순간도 여유를 가지고 자신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지 못해서가 아닐지. 반복되는 경제적 정신적인 여유를 용납하지 않는 삶의 현실은 자신의 삶의 의미조차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도록 해서였을 지도 모른다. 해서인가. 끝내 남편들, 혹 아내들을 동반해서 꼭 한번 찾아오겠다는 말이 일행들 모두의 입에서 나온다. 그것은 단지 이 찻집이 다른 찻집보다 인테리어가 좋거나 고급스럽기 때문이 아니리라.
20대의 청년시절 내가 자주 찾던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오디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었고, 혹 있다 해도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수준의 기계들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해서, 도시에는 음악전용 감상실이 있었고, 이 촌놈은 가끔씩 그곳을 찾곤 했다. 몇 십원이었는지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듣고 싶은 곡을 신청하면 얼마 후 LP판이 튀는 소리와 함께 신청한 곡이 흘러나왔다. 극장식으로 의자를 배열해서 전면의 스피커를 향하게 놓았기에 마치 공연장에서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신에 찻집의 분위기는 어디도 없었다. 그래도 이따금씩 그곳을 찾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음악을 듣던 일이 아련하다. 허나, 시대의 변천은 그러한 감상실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했으니 몇 차례의 이전을 하더니만 어느 날 완전히 일반 커피숍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 날 이후 나는 아쉽게도 그 감상실을 기억에서 지워야 했다.
그러나 내게는 오랜 동안 쉼터가 되어주었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던 곳이기에 지금도 그 근처를 지나노라면 행여 그 이름이라도 확인할 수 있을지 두리번거리게 된다. 허나, 요즘은 무엇에 쫓기는지 그곳을 찾아보는 것조차 엄두도 못 낸다. 내 20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상황인 만큼 번민과 갈등이 많았고, 혼자만의 고뇌를 해소할 길 없어 자주 찾았던 그곳, "심포니"는 지금은 잊혀진 채로 이지만 나에게 있어 당시의 쉼터였고,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나만의 사색의 공간이었기에, 나는 거기서 세상을 그렸고, 인생을 그릴 수 있었다.
해서인가. 여기 작지만 큰 기쁨을 다시 찾게 해주는 찻집이 변함없이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찻집을 지키고 있는지 그 속내는 모른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만큼 큰 기쁨과 쉼을 줄 수 있다면, 그는 단지 찻집을 경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복을 나누는 사람이 아닐까. 행여, 경영상의 문제로 문을 닫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를 하면서 찾아가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 더하다. 언제 찾아도 삶에 쫓기는 사람들의 잃어버린 기쁨과 쉼을 찾도록 하는 찻집으로 남아 있었음 하는 바람은 나만의 욕심일까. (2003. 12. 17) - 수정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