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지나인이 아니라, 전남
해남의 청주 한씨가문의 노비출신인 고려인이다!
해남을 떠나 지나대륙으로 이주한 주원장은
원나라 말기 농민반란인 홍건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고려인 참모진들과 함께 명을 세우고
청주 한씨인 고려 여인을 황후로 삼았다
영락제의 어머니가 고려인 이유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나라다
따라서 주원장의 아들이 황제에 즉위하여
광개토태왕의 연호인 '영락'을 사용한 배경도
고구려처럼 세계 중심국이 되어 지구촌을
환하게 비추겠다(명)는 의지를 담았다고 본다.
해군제독 이정화로 하여금 거대한 함대를 만들어
세계를 항해하여 명을 세계에 알리게 한 배경이다
고로 대륙조선설은 역사날조 논리라 할 것이다!
명나라를 확장하려던 영락제
얼굴이 전형적인 한국인
명나라 2대 황제인 영락제 '주체'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태어 났다. 주체의 어머니는 고려 여자였다. 청주 한씨 족보에도 영락제의 어머니가 청주 한씨인 고려인이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주체는 여러 점에서 2대 조선왕 이방원과 흡사하다. 넷째 아들이고 문학적 재능이 있고 우두머리 자질이 있고, 가족 형제를 제거시키고 왕이 되고… 그런다고 조선왕 이방원이 명나라 2대 황제 영락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영락제는 세계 최대의 궁성인 북경의 자금성을 축조했다. 만리장성을 개축하고 대운하를 확충했다.
정화에게 사상 최대의 대선단을 주며 동남 아시아,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 해안을 점령하게 했다. 영락제 자신은 몽골, 중앙아 초원과 사막을 원정했다. 만주 여진족과 열도 왜구도 정벌했다.
자금성을 짓고 거대한 정화 대함대를 만드느라 지나는 물론이고 이웃나라들의 목재까지 고갈되었다. 스페인, 네덜란드의 대항해는 오늘날의 세계를 이룩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명나라의 대항해는 실익을 전혀 거두지 못했다. 영락제가 하는 일은 백성들을 고달프게만 했다. 그들은 과중한 세금에 허리가 휘고 식량마저 빼앗게 굶기가 일쑤였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성인 자금성이 불 타서 재가 되었다. 불이 났다는 사실은 고의적인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고의로 불을 질렀거나 불타는 것을 방관했음을 의미한다.
영락제가 인심을 잃어 버리매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자 베트남과 몽골이 명나라에게 도전했다. 영락제가 몽골과 싸우다가 죽었다. 영락제의 명나라는 강력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 때 티무르가 명나라로 쳐들어 가다가 도중에서 병사했다.
이 때 영락제가 티무르와 싸웠다면 사로 잡히거나 죽고 말았을 것이었다. 고려는 티무르처럼 강력한 국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최영과 이성계가 합심하면 영락제의 침공을 막아낼 수는 있었다. 그러니까 고려가 요동을 점령했으면 명나라가 어찌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티무르와 명나라, 이정화의 해외 원정
공민왕이 평정한 지역, 최영 묘
"요동을 정벌하라!"'는 왕명을 거역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가 그 정벌을 기획한 최영을 죽였다. 최영이 죽을 때, "내 무덤에서 풀이 나지않으면 이것은 나의 요동정벌 기획의 옳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의 무덤에서 600년간 풀이 나지 않았다.
두 인물이 명확히 나라가 서로 다른 왕들임에도
명나라 영락제가 조선왕 이방원이라고 주장하는
대륙조선론자들은 망상증세 환자들이 아닌가?
이정화는 명나라 해군제독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사람인양 날조하는 역사논리는 지나국과 일본의 역사날조와 동일행위다
명나라 기병의 모습. 정도전 등은 고토 회복의 열망을 바탕으로 명의 압박에 맞서 요동정벌을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명은 이미 전성기로 접어들어 있었고, 군사 경제적으로 조선보다 월등히 강하였다. 주원장의 뒤를 이은
명나라 황제 영락제가 사신을 보내 조선왕 이방원에게 혼인하지 않는 이쁜 처녀들을 보내라는 조선왕조실록 내용이다
조선말 국호를 '대한'으로 바꾼 황제를 칭한 고종이 밝힌 이성계 즉위 당시의 조선 영토
영토의 면적(사방 둘레)이 1만리 정도가 된다. 그러나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제후로
승인받고 즉위한 이방원 때는 조선영토가 압록강을 국경으로 한반도로 국한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