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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금나라 태조 아골타는 권행의 후예
김영광 추천 0 조회 142 13.09.05 06: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금나라 태조 아골타는 권행의 후예

 

 

 

 

 

금나라 태조 아골타에 대한 몇 가지 기록들

 

 

 

 

1. 금나라 아골타는 권행의 후예임을 밝힌 김세렴의 해사록

 

 

                                                              김세렴

 

 

병자년(1636, 인조 14)

 

9월 3일(갑진)

 

 

 

흐림. 경주를 떠나 봉황대(鳳凰臺)에 올라갔다. 봉황대는 홍살문 밖에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다. 흙을 쌓아 만든 것이라 하는데, 이런 것이 성 남쪽에 거의 열이나 벌여 있어, 옛 도읍은 반드시 대의 남쪽에 있었음을 상상하게 된다. 반월성(半月城)이 남쪽에 있고, 김유신(金庾信)의 묘가 서쪽에 있고, 포석정(鮑石亭)ㆍ첨성대(瞻星臺)ㆍ금장대(金藏臺)가 모두 아득히 바라보인다.

신라(新羅)가 나라를 세운 지 천 년이 되었는데, 삼한(三韓)을 통합하고 한때의 문헌(文獻)이 찬연(燦然)하여 볼 만하였으나, 너무도 부지런히 부처를 섬겨, 절이 여염에 두루 찼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 계림금궤의 설[鷄林金櫃之說]이 비록 국사(國史)에서 나왔으나 야인(野人)의 말이라 상고할 수 없다. 지금 나라 안의 김 성(金姓)이 거의 신라의 후예이고, 김부(金傅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이름)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그 외손(外孫) 완안 아골타(完顔阿骨打)는 곧 권행(權幸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시조)의 후예인데, 중국을 분할(分割)하여 다스리고 백 년 동안 대를 이었으니, 어찌 신명(神明)의 후예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최고운(崔孤雲)의 상서장(上書庄)이 있던 곳을 물으니,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있다가 출발하여 낮에 구어역(仇於驛)에 닿으니, 현풍 현감(玄風縣監) 유여해(兪汝諧)ㆍ장기 현감(長?縣監) 양응함(梁應涵)이 와서 기다렸다. 현풍의 하리(下吏) 김흥룡(金興龍) 등 수십 인과 관비(官婢) 설매(雪梅) 등 수십 인이 와서 뵙고, 술과 안주를 대접했다.

이에 앞서 상사가, ‘현풍 현감이 일본으로 데리고 갈 아이를 보내지 않으니, 이는 우리 사행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라 하여, 삼공형(三公兄 조선 시대 각 고을의 호장(戶長)ㆍ이방(吏房)ㆍ수형리(首刑吏)의 세 관속)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내가,

 

“현풍의 하인들이 모두 옛날 현감이 오는 것을 기뻐하는데, 아전들을 형신(刑訊)하여 실망시키는 것은 부당하며, 지금 현감은 곧 나와 직무를 교대한 사람입니다. 옛사람은 직무를 교대한 사람을 존중하였으니, 억누르고 욕보이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상사가 웃으며 나의 말을 따랐다.

울산 부사(蔚山府使) 오섬(吳暹)도 와서 기다렸고, 좌병사(左兵使) 허완(許完)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였는데, 곧 나의 외당숙이다. 병영(兵營)까지 5리 못 미쳐 또 사람을 보내왔으므로 곧 병영에 들어갔다. 종사관이 뒤따라 도착하여 곧 울산으로 향하였다. 상사는 내일 바로 동래(東萊)까지 가려 하나, 멀어서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완안 아골타(完顔阿骨打) : 금(金) 나라 태조(太祖)의 이름. 완안은 여진(女眞)의 한 부족명이면서 아골타의 성임. 금 나라는 뒤에 중국에 들어가 송(宋) 나라를 물리치고 중국의 북쪽 반을 차지하였음.

 

 

 

2. 금나라 시조에 대한 안정복의 견해

 

 

 

안정복(1712~1791)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자는 백순(百順). 호는 상헌(橡軒)·순암(順菴). 이익의 문인으로, 그의 학문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특히 과거의 역사·지리학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세웠다. 저서에 《동사강목》, 《순암집》, 《가례집해(家禮集解)》이 있다.

 

 

동사강목 제7하

 

갑인년 문종 28년(송 신종 희령 7, 거란 도종 함옹 10, 1074)

 

 

○ 동여진(東女眞) 추장 오고내(烏古?)가 죽고 아들 핵리발(劾里鉢)이 자리를 이었다.

 

옛날 우리나라 평주(平州)

【안】 지금 영흥(永興)이니,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지금의 평산(平山)으로 썼는데 잘못이 아닌가 한다.

의 중[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숨어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가 금(金)나라의 조상(祖上)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평주의 중 김행(金幸)

【안】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錄)》에는 김행을 고려조의 공신 권행(權幸)이라 하였는데 어디에서 상고하였는지 알 수 없다.

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女眞) 여자를 취(娶)하여 고을태사(古乙太師)를 낳았고, 고을(古乙)이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다. 활라를 일명 오고내(烏古?)라 하는데, 여러 부(部)를 역속(役屬)시키니 요왕(遼王)이 생여진부 절도사(生女眞部節度使)로 삼았으며 기강이 점차 확립되어 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자, 아들 핵리발(劾里鉢)이 자리를 이었다.

그곳의 풍속은 흉노(凶奴)와 같아 여러 부락에는 성곽이 없어 산과 들에 분거하며, 문자가 없어 언어(言語)와 결승(結繩)으로 약속을 삼았다. 그 땅에서는 돼지와 염소ㆍ소ㆍ말 등이 많은데, 말은 준마가 많으며 간혹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것도 있다. 그곳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러운데 아이들이 능히 활을 잡아당겨 새나 쥐를 쏘아 맞히며, 장성하면 활 쏘고 말 달리지 않는 자가 없으므로 싸움에 익숙하여 경병(勁兵)이 되었다. 제부(諸部)가 각기 서로 자웅(雌雄)을 다투어 통일되지 못하였다. 그 땅은 서쪽으로는 거란과 접해 있고, 남으로는 우리나라의 경계와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 및 우리 나라를 섬기어 매번 와서 조회(朝會)하되 부금(?金 사금(砂金))ㆍ초피(貂皮)ㆍ양마(良馬)를 예물로 하므로 우리나라도 또한 은폐(銀幣)를 후히 주어 보내었다.”

【안】 당 형천(唐荊川 형천(荊川)은 당 순지(唐順之)의 호)의 《송감(宋鑑)》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금(金) 나라의 선조에 함보(?普)라는 자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고려에 살다가 60여 세에 그의 형 아고내(阿古?) 및 동생 보활리(普活里)와 이별하고, 생여진에 가서 완안부(完顔部) 복알수(僕斡水) 강가에 살면서 60세 된 여자를 얻어 아들 오로(烏魯)를 낳았으니, 함보가 금나라의 시조(始祖)가 된 것이다. 오로가 발해(跋海)를 낳고 발해가 유가(綏可)를 낳았다. 흑수(黑水)의 옛 습속에는 방[室]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水草)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 없이 옮겨 살았다. 유가가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있게 되었고, 사람들이 그 지역을 납갈리(納葛里)라 이름 하였는데, 이것은 한어(漢語)의 거실(居室)과 같은 뜻이다. 유가는 뒤에 헌조(獻祖)라 불렀다. 유가가 석로(石魯)를 낳았는데 석로는 여진에 서계(書契)가 없고 약속(約束)이 없어 검제(檢制)할 수가 없어서 차츰 법규[條敎]로 다스려 부락이 점점 강성해졌다. 이때에 오히려 문자가 있었는데도 관부가 세월(歲月)과 회삭(晦朔)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연수의 길고 짧음을 상고할 수가 없다. 뒤에 소조(昭祖)라 호칭하였다. 석로가 오고내(烏古?)를 낳았는데 능히 제부(諸部)를 역속 시켰다. 때에 요(遼)의 오국포섭부절도(五國蒲?部節度) 발을문(拔乙門)이 반(叛)하여 요가 이를 토벌하자, 오고내는 요병(遼兵)이 깊숙이 쳐들어와 그곳 산천(山川)의 험이(險易)를 모두 알아버릴까 두려워하여 곧 요에 알리고 발을문을 엄습해서 사로잡아 바치니, 요주(遼主)가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고 생여진부절도사(生女眞部節度使)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오고내가 요나라 국적에 매이기를 싫어하였으므로 요주는 사신을 보내어 이를 효유하였다. 이미 절도사가 되었으니 관속(官屬)이 있어 기강이 점차 확립되었다.”

《속강목(續綱目)》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부내(部內)에는 철(鐵)이 없어 이웃 나라가 갑주(甲?)를 가지고 가서 팔면 반드시 값을 후히 내놓았다. 철을 많이 사들인 뒤에는 궁시(弓矢)를 수리하고 기계(器械)를 구비하여 병세가 점점 떨치자 전후로 붙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다.”

 

 

3. 이덕무의 금열전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 박학다식하였으며 청나라에 건너가 학문을 닦고 돌아와 북학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박제가·이서구·유득공과 함께 사가(四家)라 이른다. 저서에 《청장관전서》가 있다.

 

 

 

송사전(宋史筌) 금열전(金列傳) -청장관전서 제23권 편서잡고 3(編書雜稿三)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개명은 민(旻), 한성(漢姓)은 왕(王)인데, 핵리발(劾里鉢)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나라씨(拏懶氏)이다. 선계(先系)는 말갈(靺鞨)인데, 말갈의 본호는 물길(勿吉)로서, 즉 고대 숙신국(肅愼國)이다. 당(唐) 초기에는 흑수(黑水)ㆍ속말(粟末) 두 말갈로서 함께 고구려에 부속되었다. 속말 말갈은 성이 대씨(大氏)인데 나중에 발해국(渤海國)을 세웠고, 흑수 말갈은 당 나라의 작위를 받아 발해에 속해 있다가 뒤에 거란(契丹)에 부속되었다. 그런데 남쪽에 있는 자는 거란에 입적이 되어 숙여진(熟女眞)이라 불리우고, 북쪽에 있는 자는 거란에 입적되지 않아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리웠다. 그 뒤 요주(遼主) 진종(眞宗)의 이름을 피해 여직(女直)으로 개칭하였는데, 이 생여진이 나중에 금(金) 나라가 되었다.

시조(始祖)는 보함(普函)인데, 나이 60여 세에 고려를 떠나 완안부(完顔部) 복간수(僕幹水) 유역에 정착해 살며 어떤 노부인에게 장가를 드니, 그도 60여 세였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으며, 경원 황제(景元皇帝)라고 추시(追諡)했다.

아들 오로(烏魯)의 시호는 덕황제(德皇帝)이고, 오로의 아들 발해(跋海)의 시호는 안황제(安皇帝)이며, 발해의 아들 수가(綬可)는 안출호수(安出虎水) 부근에 정착해 살았는데, 묘호(廟號)는 헌조(憲祖)이다.

 

 

4. 금(金)나라 시조(始祖) 함보(函普)에 대한 한치윤의 견해

 

 

조선 영조 때의 고증학자 한치윤(1765-1814)이 쓴 해동역사 제68권 인물고(人物考)편에 <금(金)나라 시조(始祖) 함보(函普)>에 대한 견해가 적혀 있다.

 

 

 

금(金)나라 시조(始祖) 함보(函普)

 

 

○ 금나라의 시조 함보는 고려 사람이다. 처음에 고려에서 왔을 적에 나이가 이미 60여 세였다. 그의 형인 아고내(阿古?)는 부처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러 있으면서 따라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후세의 자손들 중에 반드시 서로 모여서 살게 할 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갈 수가 없다.” 하였다. 이에 동생인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왔다. 시조는 완안부(完顔部) 복간수(僕幹水) 가에서 살고, 보활리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그 뒤에 호십문(胡十門)이 갈소관(曷蘇館)의 지역을 들어 태조(太祖)에게 귀의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삼형제로, 서로 이별하여 떠나갔다.” 하였는바, 대개 스스로 아고내의 후예라고 한 것이다. 석토문(石土門)과 적고내(迪古乃)는 바로 보활리의 후예이다. -또 《금사(金史)》 제66권 호십문열전(胡十門列傳)에 이르기를, “호십문이란 자는 갈소관(曷蘇館) 사람이다. 아버지인 달불야(撻不野)가 요(遼)나라를 섬겨 태위(太尉)가 되었다. 고영창(高永昌)이 동경(東京)에 웅거하면서 갈소관 사람을 불러들이려 하였으나, 호십문이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호십문이 그의 족인(族人)들을 불러 모의하기를, ‘우리의 먼 조상 세 분 형제께서는 모두 고려에서 나왔다. 지금 황제의 할아버지는 여직(女直)으로 들어가고, 나의 할아버지는 고려에 머물렀다. 그러니 고려로부터 가서 요나라에 귀의하겠다. 나와 황제는 모두 세 분 할아버지의 후예이다.’ 하였다. 호십문이 스스로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대개 스스로 아고내(阿古?)의 후예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시조는 완안부에 이르러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그 부(部) 사람들은 양 족속 간에 사이가 나빠 서로 싸웠는데, 이를 풀 길이 없었다. 완안부의 사람이 시조에게 일러 말하기를, “만약 이 원한 관계를 풀게 해서 양 족속들로 하여금 서로 죽이지 않게 한다면, 부에 나이 60인데도 아직 시집가지 않은 어진 여인이 있는데, 그와 짝을 맺어 주겠다.” 하였다. 이에 시조가 그러겠다고 승낙하고, 직접 가서 깨우쳐 주니, 원한 관계에 있던 집 사람들이 약속한 대로 지키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의 사람들이 신복(信服)하면서 청우(靑牛) 한 마리를 주어서 사례하였으며, 아울러 60세 먹은 신부에게 장가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시조가 청우로써 납빙(納聘)하는 예를 갖추고 신부를 맞아들였다.

그 뒤에 아들 둘을 낳으니, 장남은 오로(烏魯)이고 차남은 알로(斡魯)이며, 딸 하나는 주사판(注思板)이다. 이에 드디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천회(天會) 14년(1136, 인종14)에 경원황제(景元皇帝)라고 추시(追諡)하였다. 《금사(金史)》

 

살펴보건대, 《송막기문(松漠紀聞)》에 이르기를, “여직(女直)의 추장(酋長)은 신라 사람으로, 완안씨(完顔氏)라고 불리는데, 완안은 중국 말의 왕(王)과 같은 말이다. 형제가 세 사람인데, 한 사람이 숙여진(熟女眞)의 추장이 되었다. 완안은 나이가 60여 세로 여진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는데, 그 여인 역시 60여 세였다. 두 아들을 낳으니, 장남이 바로 호래(胡來)이다. 이로부터 3대가 전해져서 양가태사(楊哥太師)에 이르고, 또다시 아골타(阿骨打)에게 전해졌다.” 하였는데, 이것은 함보(函普)의 사적(事跡)과 유사하다. 또 이르기를, “금나라 황제의 9대조 이름은 감복(龕福)으로, 경원황제에 추시되었으며, 시조(始祖)로 불린다.” 하였는데, 감조(龕祖)는 바로 함보(函普)의 음이 바뀐 것이다. 《평산부지(平山府志)》의 인물조(人物條)에 실려 있기를, “본주(本州)의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으로 도망쳐 들어가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 사람이 금나라의 선조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평주의 승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에 여진에 들어가서 여진의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고을(古乙)이라고 하였다. 금나라의 시조 아골타(阿骨打)는 바로 이 사람의 후손이다.” 하였다. 다만 금준과 극수 중에 누가 함보인지는 상고할 수가 없다.

또 살펴보건대, 《금사》를 보면, 석토문(石土門)은 야라로(耶懶路) 완안부(完顔部) 사람으로 대대로 그 부의 장(長)이 되었고, 사경(思敬)은 본명이 살개(撒改)로 압라하(押懶河) 사람이고, -석토문의 아들이다.- 오연포로혼(烏延蒲盧渾)은 갈라로(曷懶路) 오고적혼산(烏古敵昏山) 사람이고, 오연골사호(烏延?沙虎)는 갈라로 극적혼산(克敵昏山) 사람이고, -포연혼(蒲延渾)의 형이다.- 오연호리개(烏延胡里改)는 갈라로 성현수(星顯水) -지금의 삼수부(三水府)이다.- 사람이고, 오연오리보(烏延吾里補)는 갈라로 선령(禪嶺) 사람이고, 오연포할노(烏延蒲轄奴)는 갈라로 사람이고, 완안아리불손(完顔阿里不孫)은 갈라로 태갑필랄맹안(泰甲必剌猛安) 사람이고, 완안중덕(完顔仲德)은 합라로(合懶路) 사람이라고 하였다. 대개 합라(合懶), 압라(押懶), 야라(耶懶)는 바로 갈라(曷懶)의 음이 와전된 것이며, 지금의 함흥(咸興) 이북 지역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석토문 이하의 여러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인물에 속한다. 그러나 고려조 때에는 함흥 이북 지방이 판도(版圖) 안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또 《금사》에 이들의 열전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기재하지 않았다.

 

[주D-001]완안부(完顔部) :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지금의 만주 아성현(阿城縣)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살다가 금나라를 세운 여진의 부족 이름이다. 오고내(烏古?) 추장 때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였고, 아골타(阿骨打) 때에 이르러서 금나라를 세웠다.

[주D-002]고영창(高永昌) : 요(遼)나라에 대항하여 발해(渤海)의 광복 운동을 벌였던 발해 지배층 유민이다. 고영창은 거란인들에 의해 발해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기병 조직인 발해무용마군(渤海武勇馬軍)의 지휘관으로 있다가 이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발해국(大渤海國)이라 하였으나, 뒤에 금나라에 의해 살해되었다.

[주D-003]여직(女直) : 여진(女眞)으로, 요나라 흥종(興宗)의 이름을 피휘(避諱)하여 이렇게 표기한 것이다.

[주D-004]맞아들였다 : 원문에는 ‘約之’로 되어 있는데, 《금사(金史)》 권1 세기(世紀)에 의거하여 ‘納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아골타(阿骨打) : 금나라 태조(太祖)의 이름이다. 태조의 이름은 완안민(完顔旻)이고, 아골타는 여진족식 이름이다. 오아속(烏雅束)의 뒤를 이어 완안부의 추장으로 추대되었다가 요나라의 지배에 반발해 독립 전쟁을 일으켜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주D-006]아지고촌(阿之古村) : 아지고는 아륵초객(阿勒楚喀), 즉 안출호(按出虎)의 이역(異譯)인 듯하다.《韓國史 중세편, 을유문화사, 1961, 375쪽》

[주D-007]다만 …… 없다 : 원문에는 ‘但金俊克守 未知熟爲函普 無所考’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但今俊克守 未知孰爲函普 無所考’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오연포할노(烏延蒲轄奴) : 원문에는 ‘烏延蒲轄路’로 되어 있는데, 《금사》 권86 오연포할노열전(烏延蒲轄奴列傳)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태갑필랄맹안(泰甲必剌猛安) : 태갑필랄은 지명(地名)이고, 맹안은 금나라의 행정 단위인 동시에 관직으로, 1000부(夫)의 장(長)을 말한다. 여기서는 행정 단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5. 권행(김행)의 신도비

 

 

 

권태사행신도비(權太師幸神道碑)

 

 

시대 조선

연대 1661년(현종2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기타문화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63호

크기 높이 219cm 너비 109cm 두께 37cm

출토지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소재지 (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한국)-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권시(權?) / 이경휘(李慶徽) / 미상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慶尙北道 安東市 西後面 城谷里) 산 11번지에 있는 권태사행신도비(權太師幸神道碑)이다. 1661년(현종 2년)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몸돌을 얹고, 머릿돌을 올린 일반적인 신도비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비문은 권행의 24대손인 권시(權?)가 짓고, 이경휘(李慶徽)가 글씨를 썼으며, 허목(許穆)이 전액(篆額)을 쓴 것으로, 원문은 권시의 문집인 『탄옹집(炭翁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안동 권씨(權氏)의 시조 권행의 원래 성은 김씨(金氏)였는데, 930년(고려태조 13년) 왕건(王建)이 고창군(古昌郡:경북 안동)에서 견훤(甄萱)을 맞아 싸울 때, 호족이었던 그가 왕건을 도와 크게 승리한 공으로, 왕건이 안동(安東)을 본관으로 하는 권(權)을 사성(賜姓)하고, 대상(大相)을 제수하며,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에 봉하였다. 신도비에는 권행이 공신으로 책봉된 배경과 비의 건립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신도비는 현재 중요 민속자료 183호로 지정되어 있는 능동재사(陵洞齋舍) 왼편에 있으며, 1971년부터 비각(碑閣)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權太師幸神道碑

[頭篆]高麗太師權公幸神道碑銘

[碑文]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權公神道碑銘

公諱幸本金氏與新羅同姓羅季與金宣平張貞弼守古昌郡甄萱入羅君弑國覆高麗太祖?救之屯郡北甁山柵與萱相持公與金張二人謀曰吾輩義不與萱共戴天顧力不能報?投王公共滅此賊遂以郡佐麗祖有甁山之捷義聲大振麗祖喜曰金幸炳幾達權可謂能權矣乃賜姓權拜大相陞郡爲安東府封食邑位至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卒葬于府西天燈山造火谷坎坐之原子仁幸官卽中生子??求爲本府吏數世爲戶長將校初豪傑割據郡縣麗祖旣統合使仍守其地長民者稱戶長統兵者稱將校遣王官監之此外吏之始也其後子孫益大以蕃珪組蟬聯奕世相望廟于府以祀公金公張公亦與焉權氏世主祀事廟有玉笙玉貫子朝衣服金帶象笏銀鉢匙箸漆杯盂皆我太師公所服用之物今七百餘年世傳之手澤猶宛然成化間十八世孫平昌郡事雍盡誠求之得誌石於墓傍爲加封樹有遺命?葬同原雍之子裕綽等立碣以表之萬曆戊子二十二世判書克智觀察嶺南合宗人祭之墓碣之?者買石新之嘉靖壬寅外裔金光轍爲府使卽其廟闢而新之二十一世領議政轍爲觀察使置祭田守戶辰府使紹增其田給穀

百碩?首吏姓權者掌之以供?盛又治乖域而歲一祭之癸亥府使應挺碑于廟萬曆癸丑二十四世吉川君盼觀察重修廟宇祭春秋以中丁今癸巳觀察使?創齋舍墓下?人戶守之己亥榮川郡守聖源禮祠展墓慨然曰子孫雖多向非平昌公塾知太師墓之在斯神道早有銘者何??之艱以吾太師公而尙闕顯刻玆非吾宗人之責乎?圖之僉曰諾凡後裔之遠近貴賤咸響臻卽?石府李侯卽外裔幹其事聖源及宗人屬?記其事噫我始祖當羅麗之際大義較著功烈卓然赫赫在人耳目名與天壤相?而前後爲方伯太守非姓孫則外裔也皆盡力于廟祀若丘墓創之修之苗裔之在玆土者典錢穀奉俎豆不絶今又立石墓隧使千萬世後皆知爲太師公之墓亦可見積德之盛也原上之墓第太師第二平昌第三則或稱平昌夫人之葬云其下西厓柳相公成龍先墓在焉亦外裔也遂爲之銘曰

量力達節?報?雪仁拯斯民慶衍後人麗祖賜姓陞封錫號丕視功載靡德不報

有翼其廟祀事孔明手澤傳寶金帶玉笙誰其尸之府中後裔謹守迭掌罔墜厥緖有田有穀有齋有碣諸公相繼創修罔缺載樹顯刻亦與有光其永有考余言匪?

二十四世孫 漢城府右尹 權? 撰

外裔 吏曹參議 李慶徽 書

外裔 司憲府掌令 許穆 篆

崇禎 辛丑 九月 日 立

 

판독자: 정해득

 

 

권태사행신도비(權太師幸神道碑)

 

 

공의 이름은 행(幸)인데 본래는 김(金)씨이니 신라왕과 동성(同姓)이었다. 신라 말엽에 김선평(金宣平)·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창군(高昌郡)을 지켰는데, 견훤(甄萱)이 신라에 들어와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전복시킬 때 고려(高麗) 태조가 구원에 나서 군 북쪽 병산(甁山)에 주둔하여 견훤군과 전투를 할 때 공께서 김·장 양공과 함께 꾀하기를, “우리들은 의리상 견훤과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서는 원수를 갚을 수 없으니 차라리 왕공에게 힘을 보태어 이 역적을 함께 섬멸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라 하여 드디어 고을 사람들과 고려 태조를 도와 ‘병산대첩(甁山大捷)’을 얻게 되어 의로운 소리를 크게 떨쳤다.

이에 고려 태조는 기뻐하여 “김행이 미기(微幾)를 밝게 살펴 권도(權道)에 통달하였으니 권도에 능한 사람이라 하겠다.”하며 이어서 권(權)으로 성(姓)을 하사하고 대상(大相)을 제수하며, 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켜 식읍(食邑)으로 봉하고 품계는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라 하였다. 돌아가심에 안동부의 서쪽 천등산(天燈山) 조화곡(造火谷) 남향(南向)에 장사지냈다.

아들은 인행(仁幸)이니 낭중(郎中)이고, 아들 책(冊)을 낳았다. 책(冊)은 본부의 향리가 되어 몇 세대동안 동안 호장이나 장교가 되었다. 처음에 호걸들이 각 고을을 나누어 점령하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가 그들을 모두 통합하고 그 땅을 지키게 하였는데, 그 장민자(長民者 백성의 웃어른)를 호장이라 칭하고 군사를 통솔하는 이를 장교(將校)라 하였으며, 중앙의 관원을 보내 감독하였으니 이것이 외리(外吏 외관직)의 효시였다. 그 뒤에 자손이 더욱 번창해져 높은 벼슬아치가 나오고 세상의 흠모가 대대로 이어졌으니 부(府)에 사당을 지어 공을 향사할 때 김공과 장공도 함께 모시되 권씨 후손들이 제사(祭祀) 일을 주관했다.

묘(廟)에는 옥퉁소 · 옥관자 · 조복 · 금대 · 상아홀 · 은 밥그릇 · 시저 · 칠한 잔 · 받침대 등이 있으니 모두 우리 태사공이 사용하시던 물건이었다. 지금까지 700여년을 대대로 전해온 손때가 아직도 완연하다.

성화(成化) 연간에 18세손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정성을 다해 찾다가 묘 곁에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봉문을 가토(加土)하고 표송(標松)을 심었다. 유언에 따라 같은 언덕에 부장하였고 옹의 아들 유(裕) · 작(綽) 등이 비를 세워 표지하였다. 만력(萬曆) 무자년(1588년)에 22세손 판서 극지(剋智)가 경상감사로 와서 종인들과 모여 제사를 올리고 묘비가 망가진 것을 새 돌로 다시 세웠다.

가정(嘉靖) 임인년(1542년)에 외손 김광철(金光轍)이 부사가 되어 사당터를 넓혀 새로 지었고, 21세손 영의정 철(轍)이 관찰사가 되었을 때 제전(祭田)과 묘직(墓直)을 두었다. 병진년(1556년)에 부사(府使) 소(紹)가 제전을 더 사고 곡식 100석을 공급하여 권씨 성을 가진 이방으로 하여금 그것을 관장케 하여 제수(祭需)에 보태도록 하며 또 묘역을 수축하여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올리게 했다. 계해년(1563년) 부사 응정(應挺)이 묘정(廟庭)에 비를 세웠으며, 만력(萬曆) 계축년(1623년)에 24세손 길천군(吉川君) 반(盼)이 관찰사가 되어 사당을 중수하고 춘 · 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최근의 계사년(1653년)에 관찰사 우(?)가 묘소 아래다 재사(齋舍)를 처음으로 건립하고 몇 집이서 수호케 했다. 기해년(1659년)에 영천(榮川)군수 성원(聖源)이 사당에 참배하고 성묘한 뒤 개연히 말하기를, “자손이 비록 많지만 전에 평창공이 아니시면 뉘라서 태사공의 묘소가 여기에 있는 줄 알았겠는가. 당연히 신도비를 세워야 할텐데 비명을 짓고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우리 태사공으로서 비석이 아직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일을 성취하자”고 하니 모두들 쾌히 동조했다.

무릇 후손이 원근(遠近) 귀천(貴賤)의 구분이 없이 모두 와서 돌을 다듬을 때에 부사 이연은 곧 나의 외손이라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성원 및 종인(宗人)들이 내게 그 일을 기록하라 위촉했다.

아! 우리 시조가 신라 말 고려 초를 당하여 대의가 드러나고 공열이 탁월함은 사람들이 모두 훤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서, 이름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빛나서 전후로 방백 수령이 성손이 아니면 외손들이라 모두 묘사(廟祀)와 묘소 일에 진력해서 창설하고 보수하며 여기에 사는 후손들이 전곡(錢穀)을 맡아서 제사를 끊임없이 받들며 이제 또 산소 앞에 비석을 세워서 천만년 뒤라도 모두가 태사공의 묘소임을 알게 하였으니 또한 가히 적덕(積德)의 갸륵하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산의 무덤은 제일 위가 태사공이고, 두 번째가 평창공이며, 세 번째는 평창공의 부인 무덤이라 하며, 그 아래에 서애(西厓) 정승 류성룡(柳成龍)의 부친 묘소가 있으니 또한 외손이 된다. 드디어 명(銘)하여 이르기를,

 

힘을 자랑하고 절의에 통달하고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었습니다.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건졌으니 경사로움이 후인에게 미쳤도다

고려 태조가 성을 하사하고 군을 승격하고 봉하여 내려주셨다네

공덕이 매우 높으시니 어찌 덕을 갚지 않으리까

날아갈듯한 사당이 있어서 공경한 마음으로 제사를 올리나이다

손때가 묻은 유물로 금대와 옥피리가 있도다

누가 제사를 주장하는가 부중에 사는 후손들이라네

교체하여 관장을 삼가 대마다 전해 감을 게을리 말지어다

토지가 있고 곡물이 있으며, 재실이 있고 비석이 있으며

여러분들이 계승하여 창설하고 중수함에 결함이 없어

공덕 새긴 비석을 세우니 또한 더불어 영광되도다

영세토록 상고됨이 있을테니 내가 잡된 말을 한 것이 아니로세.”

 

24세손 한성부우윤 권시(權?) 찬

외예 이조참의 이경휘(李慶徽) 서

외예 사헌부장령 허목(許穆) 전

숭정(崇禎) 신축년(1661년) 9월 세우다.

 

 

해석자: 정해득

 

6. 아골타가 마의태자의 후예라는 주장은 고증할만한 근거가 없음.

인터넷에서는 아골타가 마의태자의 후예라는 설이 마구 떠돌고 있는데, 이 주장을 뒷바침할만한 고증 문헌이 없다.

특히 함보를 경순왕과 송희부인 석씨의 사이의 아들 영(英)이라고 보고 영이 동생 분(마의태자)과 함께 신라부흥군을 이끌고 만주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대체 무엇인가??

금나라 시조가 마의태자의 후예라는 주장은 개인의 추측이고 억측에 불과하며 학문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설득력없는 오버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의 견해를 종합해 보건데, 김세렴의 의견과 같이 아골타는 권행(김행)의 후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2012년 3월 26일

 

 

경주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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