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고려사 : 세가 우왕 9년(1383) 계해년• 정월
계축일. 나하추[納哈出]가 문카라부카[文哈刺不花]를 보내 과거의 우호관계를 회복할 것을 요청했다.
○ 우왕이 근비(謹妃)의 궁전에 가 나희(儺戱)판을 벌였다. 다음날에도 왕이 궁궐 밖에서 기생 놀이판을 벌였는데 마침 찬 바람이 몰아치자 우왕이 손수 피리를 불다가 기생들에게, “손이 얼어서 피리를 불기가 매우 괴롭다.”라고 말했다. ○ 정몽주(鄭夢周) 등이 요동(遼東)까지 갔으나 도사(都司)측에서는 황제의 지시를 내세우며 입국을 거부하고 예물만 접수했다. 황제의 지시는 이러했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보호해주며 해와 달이 만물을 비추듯이 백성의 주인이 된 사람은 그 강역의 크기에 관계없이 동일한 원칙으로 백성을 다스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예나 지금이나 어찌 임금 한 사람이 두루 잘 키워낼 수 있겠는가? 앞서 삼한의 군장이 신하에 의해 시해 당한 후 여러 차례 사신이 와서 평상시처럼 조공을 하겠다고 말하기에 짐이 또한 재삼 거절했으나 자꾸 찾아와 졸랐다. 특별히 세공에 어려운 조건을 붙이면 조르기를 그치리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굳이 요청하면서 또한 지난 몇 년간의 빈약하기 짝이 없는 부스러기 공물을 합해 계산하는 등 몰래 우리를 우롱하고 있다. 그러나 삼한 지역은 중국의 동쪽 아득한 바다 저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짐이 본 중국의 책에 의하면 그 지역 사람들은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도 전혀 고맙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화란만 꾸며 낸다 했으니 지금 일시적으로 신하가 되게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요(遼)를 지키는 그대 장수들은 우리 강토를 굳게 지켜서 그들과 힘을 겨루거나 응징하려 들지 말라. 그들이 이제 몇 년간 바친 공물을 합쳐 하나로 계산해서 지시대로 했노라고 억지를 쓰고 있으니 그 속내가 매우 성실하지 못하다. 사신이 그곳에 도착하면 전처럼 입국을 거부해 돌려보내고 스스로 알아서 제 나라를 다스리라고 이르도록 하라.”
○ 호발도(胡拔都)가 와서 이성(泥城 :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군)을 침구했다가 화살을 맞고 달아났다. ○ 문하부(門下府)에서 글을 올려 송경(松京)으로 돌아갈 것을 건의했다. 정사일. 우왕이 도보로 근비의 궁전으로 갔다. ○ 우왕이 놀러 나갔는데 백관들이 시위하자 그것을 싫어해 말을 달려 환궁했다. ○ 요동도사(遼東都司)에서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왔다.
“고려가 우리 명나라를 신하로서 섬기는 이상 나하추와 우호관계를 유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보에 따르면 나하추가 문카라부카(文哈刺不花)를 보내 우호관계를 회복할 것을 요청하자 귀측에서는 그를 후하게 예우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행위는 상국을 섬기는 뜻에 어긋납니다. 그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으려거든 문카라부카를 체포해 우리에게로 압송해 성의를 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뒤에 가서 환란을 겪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 2월
무인일. 우왕이 활과 화살로 무장한 채 교외에서 말을 달렸고, 다음날에도 교외로 나가 사냥판을 벌였다. ○ 승려 혼수(混修)를 국사(國師)로, 찬영(粲英)을 왕사(王師)로 각각 임명했다. ○ 우왕이 양주(楊州 :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에서 고기잡이를 구경했다. ○ 우왕이 한양(漢陽)을 출발했는데, 당시 군사와 백성들이 들에서 노숙하는 것을 너무 고통스러워 한 나머지 떠날 즈음에 오두막을 불태워 버림으로써 다시는 오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 양광도 안렴사(按廉使) 유극서(柳克恕)와 교주도 안렴사 최자(崔資)에게 어구(御廐)의 말 한 필씩을 주었다. 유극서와 최자는 모두 간특한 아첨꾼으로 남의 비위를 잘 맞추었는데 우왕이 한양으로 왔을 때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진수성찬을 마련했고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바쳐 환심을 샀기 때문에 왕이 말을 내려준 것이다. 기축일. 우왕이 송경(松京)으로 돌아와서 재신(宰臣) 박원경(朴原鏡)의 집을 임시 궁전으로 삼았다. 신하들이 채색비단을 둘러친 누각에다가 온갖 놀이판을 벌여놓고 왕을 맞이했으며 성균관의 학생들이 왕을 예찬하는 가요(歌謠)를 바치니 우왕이 학생들이 왜 이리 적은가고 물었다. 염흥방(廉興邦)이, “옛날에는 양현고(養賢庫)에 비축해둔 재물이 넉넉해 학생들을 양성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이 다투어 입학했으나, 지금은 재물이 바닥나서 양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학생수가 적은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우왕이, 풍저창(豊儲倉)의 미곡을 지급해 학생들을 양성하라고 지시했다. ○ 우왕이 화원(花園)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열어주었는데 밤이 깊어서야 마쳤다. ○ 유만수(柳曼殊)를 경상도 원수(元帥) 겸 합포도순문사(合浦道巡問使)로, 나세(羅世)를 해도원수(海道元帥)로 각각 임명했다.
• 3월
기유일. 우왕이 큰 거리에서 말을 달리다가 어떤 사람이 피해 달아나는 것을 보고는 뒤쫓아가서 철여의(鐵如意)로 마구 때린 후 혜비전(惠妃殿)으로 갔다. ○ 전리총랑(典理摠郞) 배중륜(背仲倫)의 처가 친척되는 승려 운규(云珪)와 정을 통한 후 함께 연안부(延安府 : 지금의 황해남도 연안군)로 달아나자 그들을 체포해 국문한 다음 배중륜의 처는 장형에 처해 관비(官婢)로 삼았으며 운규는 옥사했다. ○ 우왕이 임치(林) 등 열 명과 함께 말을 타고 혜비전으로 갔다가 다시 노영수(盧英壽)의 집으로 가는 길에 말을 달리며 활로 개를 쏘았다. 또한 안일원(安逸院)으로 갔는데 그곳은 비구니가 사는 절이었다. ○ 가뭄이 계속되자 금주령을 내렸다. ○ 전 부정(副正) 우길봉(禹吉逢)이 자기 처를 살해하고 도주하자 체포해 국문하였다. ○ 경상도 안렴사 여극인(呂克諲)이, 하양(河陽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영주(永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군)·보령(報令)·화령(化令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하동(河東 :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등지에 놀리고 있는 땅이 있으니 그 곳을 둔전(屯田)으로 삼아 군량을 보충하게 할 것을 건의하자 왕이 받아들였다. 허락을 받은 여극인이 남의 조업전(祖業田)이나 밭갈이 소를 빼앗는 바람에 생업의 터전을 잃은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 우왕이 이인임(李仁任)의 집에 갔다. ○ 전 낭장(郞將) 정원보(鄭元甫)가 과거 천령(川寧)의 안집사(安集使)를 사칭한 죄로 투옥되었다가 도주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거창(居昌)의 안집사를 사칭하며 부임해 사리(私利)를 도모하다 처형당했다. ○ 조민수(曺敏修)를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임견미(林堅味)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임견미·도길부(都吉敷)·우현보(禹玄寶)·이존성(李存性)을 제조정방(提調政房)으로 각각 임명했다. ○ 우왕이 교외에서 매사냥판을 벌였다.
• 4월
○ 우왕이 국사(國師)와 왕사(王師)를 높여 책봉하고는 화원(花園)에 나가 멀리서 그들에게 예를 행하였다. ○ 삼사우사(三司右使) 임성미(林成味)가 죽자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 가뭄이 계속되자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했다. ○ 죽성군(竹城君) 안극인(安克仁)이 죽자 문정(文定)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 과거에서 김한로(金漢老) 등을 급제시켰는데 우리 태종(太宗(李方遠))이 병과(丙科)에서 7등으로 뽑혔다. ○ 우왕이 도성 동쪽 교외에서 말을 달리고 불일(佛日) 들판에서 놀았다. ○ 우왕이 석전(石戰)놀이를 구경했다.
• 5월
○ 우왕이 성균관(成均館)에 지시해 사서(四書)를 올리게 했으나 『논어(論語)』 몇 장만 읽고는 책을 덮어버렸다. ○ 우왕이 보원고(寶源庫) 기우단(祈禑壇)에 가서 직접 북을 치며 비를 빌었다. ○ 우왕이 비가 오는데도 놀러 나갔다. ○ 전 판사(判事) 한중보(韓仲寶)가 일찍이 제주 안무사로 있을 당시 왕의 지시라고 거짓말을 하며 제 욕심을 채우려 하다가 순군옥(巡軍獄)에 하옥되었다. 그의 동생 상호군(上護軍) 한중량(韓仲良)은 평소 형 한중보와 사이가 나쁘던 차에 마침 한중보가 처벌을 받게 되자 좋아라 하며 형의 과거 악행을 적은 익명의 투서를 이존성의 집에다가 몰래 보냈다. 이에 한중량도 함께 하옥시켰다가 함께 장형에 처한 후 변방으로 유배보냈다. ○ 척성군(陟城君) 박원경(朴原鏡)이 죽었다. ○ 경상도 안렴사로부터 진주(晋州 :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등지에 서너 줄기가 달린 보리 이삭이 났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 우왕이 몰래 호곶(壺串)에 가서 말을 방목하는 현장을 둘러보았는데 숙위(宿衛)하는 사람들조차 아무도 그 행방을 알지 못했다. ○ 지문하상의(知門下商議) 민백훤(閔伯萱)이 죽었다. ○ 어떤 사비(私婢)가 아들 세쌍둥이를 낳자 쌀 20석을 내려주었다. ○ 전 판사(判事) 조호(趙湖)가 토지문제를 놓고 환관과 다투었는데 환관이 우왕에게 호소하자 왕이 조호를 장형에 처한 후 수안군(遂安郡 : 지금의 황해북도 수안군)으로 유배보냈다.
• 6월
○ 밀직사(密直使) 김보생(金寶生)이 죽었다. ○ 우왕이 연복정(延福亭)에서 사흘 동안 사냥판을 벌였다. ○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의 화척(禾尺)과 재인(才人)들이 왜적을 가장해 평창(平昌 : 지금의 강원도 평창군)·원주(原州 :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영주(榮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순흥(順興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횡천(橫川 : 지금의 강원도 횡성군) 등지를 노략질했다. 원수(元帥) 김입견(金立堅)과 체찰사(體察使) 최공철(崔公哲)이 그 중 50여 명을 체포해 참수하고 그들의 처자식들을 각 주군(州郡)에 분산해 예속시켰다. ○ 대간(臺諫)이 번갈아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우리 태조께서 삼한을 통일하신 이후 왕위를 이은 자손들은 모든 일에 있어 반드시 옛날의 규범을 본받았으니, 종묘제례나 빈객을 접견하는 일 외에는 절대 밖으로 함부로 나들이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영릉(永陵 : 충혜왕)에 이르러 선조들의 규범을 따르지 않고 간신(諫臣)의 말을 무시하면서 날마다 군소배들과 어울려 동네 길거리를 쏘다녔는데 그 소문이 상국에 들어가 결국 악양(岳陽 : 지금의 중국 후난성 위에양시)으로 유배당함으로써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겪게 되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절제 없이 놀러 다니시면서 몇 사람만 수행시킨 채 온 사방으로 말을 달리시니 신민(臣民)들은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위로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아래로 선조들을 본받아 나들이를 절제하시고 시위에 의장을 갖출 것이며 외출하는 일을 삼감으로써 신민들의 여망에 부응하시고 종묘사직이 오래 존속되도록 하소서.”
○ 왜적이 경상도(慶尙道)의 길안(吉安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안강(安康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기계(杞溪 :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영주(永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신녕(新寧 :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장수(長守 :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의흥(義興 : 지금의 경상북도 군위군)·의성(義城 :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선주(善州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등지를 침구했다. ○ 우왕이 화원(花園)에서 재상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왜적이 단양(丹陽 : 지금의 충청북도 단양군)·제주(堤州 :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주천(酒泉 :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평창(平昌)·횡천(橫川)·영주(榮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순흥(順興) 등지를 침구했다. ○ 왕안덕(王安德)을 양광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전의령(典儀令) 우하(禹夏)를 경상도(慶尙道)로 파견해 원수(元帥)들이 왜적을 제대로 방어하고 있는지 감찰하게 했다. ○ 내시 김강(金剛)이 황보가(黃甫加)의 딸을 처로 삼으려다가 실패하고는 엉뚱한 일을 트집잡아 우왕에게 호소해 그를 순군(巡軍)에 수감하게 했다. ○ 나세(羅世)를 경상도 조전원수로 임명했다. ○ 왜적이 내륙까지 침구해 오는 바람에 충주(忠州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개천사(開川寺)에 보관해 두었던 사적(史籍)을 죽주(竹州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七長寺)로 옮기게 했다. 무술일. 노영수의 생일을 맞아 우왕이 화원에서 잔치를 열어 주었다.
• 7월
○ 한양부윤(漢陽府尹) 장하(張夏)가 왜적의 첩자 세 명을 체포했다. ○ 왜적의 침구가 잦아지자 지방에 있는 한산(閑散)·봉익(奉翊)·통헌(通憲)들에게 명을 내려 다들 정벌에 나서게 했다. ○ 우하(禹夏)가 병마사들을 독려해 의성(義城 :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세 명을 목 베었다. ○ 지순주사(知順州事) 황안신(黃安信)이 군량 수송을 감독하던 중 쌀 75석을 도용했던 사실이 발각되자 해당 관청에서 의법조치하려 했으나 그가 의비(毅妃)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관직만 박탈했다. ○ 왜적이 대구(大邱 : 지금의 대구광역시)·경산(京山 :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선주(善州)·인동(仁同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지례(知禮 :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금산(金山 :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등지를 침구했다. 우왕이 안동부사(安東府使) 이충부(李忠富)에게 어구(御廐)의 말을 내려주면서, “있는 힘을 다해 적을 막아 태실(胎室)을 보호하라.”고 격려했다. ○ 윤가관(尹可觀)을 경상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임명했다. ○ 우하(禹夏)의 독려를 받은 병마사들이 예안(禮安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왜적과 싸워 여덟 명을 죽인데 이어 순흥(順興)에서도 여섯 명을 죽였다. ○ 요심(遼瀋)의 초적(草賊) 40여 기가 단주(端州 :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를 침구해 오자 단주만호(端州萬戶) 육려(陸麗), 청주만호(靑州萬戶) 황희석(黃希碩), 천호(千戶) 이두란(李豆蘭) 등이 서주위(西州衛)와 해양(海陽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등지까지 추격해 괴수 여섯 명을 죽이니 나머지는 모두 도주했다. ○ 교주강릉도 도체찰사(都體察使) 최공철(崔公哲)이 왜적과 방림역(芳林驛 :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에서 마주치자 여덟 명을 죽이고 그 병장기 및 말 59필을 노획했다.
• 8월
초하루 임신일. 서운관승(書雲觀丞) 지거원(池巨源)이 일식(日食)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으나 끝내 일식은 없었다. 중방(重房)에서 처벌을 건의했으며 이에 70도의 장형에 처하게 했다.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조인벽(趙仁壁)을 동북면 도체찰사(都體察使)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한방언(韓邦彦)을 상원수(上元帥)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김용휘(金用輝)를 서북면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전 판도판서(版圖判書) 안은조(安恩祖)를 강계만호(江界萬戶)로 각각 임명했다. 당시 명나라에서 자기들을 불성실하게 섬긴다고 힐책하면서 누차 국경을 침범했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로 대비한 것이다. ○ 우왕이 정비전(定妃殿)에 갔다가 임견미(林堅味)의 집으로 가면서 시가지에서 마구 말을 달렸다. ○ 왜적이 거령현(居寧縣 :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장수현(長水縣 : 지금의 전라북도 장수군) 등지를 함락시킨 후 군사를 나누어 전주(全州 :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를 침구하려 하자 전주부원수(全州副元帥) 황보림(皇寶琳)이 여현(礪峴)에서 싸워 패퇴시켰다. ○ 문하평리(門下評理) 문달한(文達漢)을 양광도 도찰리사(都察理使)로, 지문하사(知門下事) 안경(安慶)을 도안무사(都安撫使)로, 보안군(保安君) 박수년(朴壽年)을 도순위사(都巡慰使)로 각각 임명했다. ○ 왜적 1천 3백여 명이 춘양(春陽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영월(寧越 :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정선(旌善 : 지금의 강원도 정선군) 등지를 침구했다. 임오일. 우왕이 임치(林)의 말을 빼앗아 타고 노영수의 집으로 가자 임치와 환관들은 모두 걸어서 따라 왔으며 또 정비(定妃)의 궁전에도 들렀다. ○ 조운의 책임을 맡은 만경(萬頃)의 안집사(安集使) 김서원(金瑞元)과 진무(鎭撫) 한복(韓福)이 조운선이 풍랑에 침몰했다는 핑계를 대고 쌀과 베를 빼돌렸으므로 감옥에 수감한 후 국문했다. 계미일. 우왕이 정비(定妃)의 궁전에 들렀다가 밤에 또 다시 찾아 갔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 좌사의(左司議) 권근(權近) 등이 왕이 함부로 놀러다니는 것을 경계하는 글을 올렸다. 우왕이 전에는 동네 거리를 마구 말로 달리면서도 대간(臺諫)들의 눈치를 보았는데 환관들이, “대간(臺諫)도 모두 주상께서 임명하신 자들이니 뜻에 거슬리면 갈아 치우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렵겠습니까?” 라고 부추기는 통에 이때부터 우왕이 갈수록 대간을 가볍게 생각해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서 절제 없이 놀이와 사냥을 일삼았다. 권근이 다시 동료들과 함께 강경하게 간언하자 잔뜩 술에 취한 왕이 그들을 활로 쏘려 했다. ○ 왜적이 임실현(任實縣 : 지금의 전라북도 임실군)을 침구했다. ○ 우리 태조(太祖 : 이성계)가 호발도(胡拔都)의 군대를 길주(吉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대파했다.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김유(金庾)를 명나라로 보내 성절(聖節)을 축하하게 하는 한편 시호를 내려줄 것과 왕위계승을 허락해 줄 것과 나라 사정을 알리는 표문을 전달하게 했다. 또한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자용(李子庸)을 시켜 천추절(天秋節)을 축하하게 했다. 선왕의 시호를 요청하는 표문은 이러했다.
“역명(易名 : 시호)을 하사하는 은혜를 내리는 것은 제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은전이며 별세한 부친을 현창해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자식된 자가 해야 할 효도입니다. 저의 부친인 전 왕 왕전(王顓)은 일찍이 조상의 봉작을 계승해 먼 번국을 다스리던 중 상국이 개국하자 천명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서 상국 조정을 흠모한 나머지 앞장서 귀부했으며 그 후 일곱 해 동안 변함없이 부지런하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여 갑자기 이 태평성대를 떠나게 되었으니 너무도 막막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렇듯 상국을 공경하고 받들었으니 응당 시호를 내려주셔서 고인을 현창해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십년이 경과하도록 천자로부터 분부가 전혀 내리지 않기에 외람되나마 다시 한 번 폐하께 간절한 소망을 아뢰는 바입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제 부친의 충성을 애틋이 여기시고 저의 마음을 불쌍히 여기사 특별히 시호를 내려주심으로써 고인의 혼백을 표창해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되면 저는 마땅히 부친이 행했던 그대로 변함없이 충성을 바칠 것이며 폐하께서 제시하시는 규범에 따라 이 나라 백성들을 영원히 보호할 것입니다.”
왕위계승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표문은 이러했다.
“관작을 내려 은혜를 베푸는 것은 성군이 행하는 전례(典禮)이며 부친의 작위를 계승하는 의례를 거행하는 것은 자식의 효심에서 우러나온 일이오니 더욱 황송한 마음으로 감히 황제폐하께 호소 드립니다. 제가 듣건대, 『시경(詩經)』의 찬고(纘考)는 선왕(宣王)이 한후(韓侯)를 우대한 사실을 노래한 것이며, 『효경(孝經)』에서 양명(揚名)을 칭송했던 것은 공자가 증자(曾子)에 대해 말한 것으로 예부터 이러한 일들을 미덕으로 여겨 왔던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순(舜)임금이 문덕으로 교화했던 것을 본받으시고 탕(湯)임금이 천하만민에게 은덕을 베풀었던 일을 거울삼아 제후들에게 관작과 봉토를 내려주심으로써 천하를 태산(泰山)과 같이 안정시키고 백성들에게 복록을 내려주심으로써 이 시대를 태평성세로 만드셨습니다. 이로써 마침내 천하만방이 폐하께 충성을 바치게 되었으며 천하에 아무도 소외된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자는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아득히 먼 땅에서 외롭게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면서 그저 천자께서 계신 먼 곳을 쳐다보며 분부가 내려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형편입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효도하는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려는 저의 지극한 소원을 가련히 여기시고 또한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기려는 미미한 저의 정성을 양찰하시와 특별히 큰 은혜를 내려주심으로써 저로 하여금 왕업을 계승하게 해 주실 것을 엎드려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되면 저는 번국 제후의 책무를 다해 영원히 봉토를 보전하면서 폐하의 만수무강을 항상 축원하겠나이다.”
나라의 사정을 알리는 표문은 이러했다.
“아득히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모든 일들을 환히 꿰뚫고 계시니 전혀 다른 불만은 없사오나 외람되게도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게 되어 너무도 황송하오며 다만 허락이 내리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하잘것없는 저희나라는 상국의 개국을 맞아 다른 나라에 비길 수 없을 만큼 큰 은택을 받았사오나 갑자기 선왕이 별세하는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어 그 후 십년간 수많은 곤란을 겪어 왔습니다. 홍무(洪武) 11년(1378) 저의 신하 심덕부(沈德符) 등을 파견하여 마필과 금은 및 각종 그릇 등의 물품을 바치게 했는데 귀국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온 폐하의 조서에는, ‘올해 공물로 바칠 말 1천 필은 집정(執政) 배신(陪臣)이 절반이 가지고 입조하게 하라. 그리고 내년에는 금 1백 근, 은 1만 냥, 좋은 말 1백 필, 세모시 1만 필을 바치되 이것을 상례로 하라.’ 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지시대로 숫자를 채우느라 무진 노력했습니다만, 온 천하가 알다시피 저희나라에서는 금은이 산출되지 않으며 땅이 좁아 마필도 부족한 형편입니다. 게다가 요동도사에서 길을 막는 바람에 그나마 부족한 물건들마저도 폐하께 바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홍무(洪武) 15년(1382)에 다시 있는 힘을 다해 금은과 베와 마필을 원래 바치기로 한 수에 맞추어 마련한 다음 저의 신하인 김유(金庾)·홍상재(洪尙載)·김보생(金寶生)·정몽주(鄭夢周)·이해(李海)·배행검(裴行儉)을 시켜 그 공물을 가지고 상국 조정으로 가게 했습니다. 일행이 요동(遼東)의 첨수참(甛水站)까지 가서 입국 허가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요동도사에서 서천호(徐千戶)를 보내, ‘올해의 세공(歲貢)은 몇 년 분을 합쳐 하나로 했으니 그 뜻이 불성실하다. 과거처럼 입국을 불허하고 그대로 돌려보내라.’ 는 황제폐하의 지시 공문을 보여주기에 김유 등이 결국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그 해 6월에 다시 주겸(周謙)을 보내 입국을 허가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그냥 귀국했습니다. 또 8월에는 저의 신하 유번(柳藩)으로 하여금 황제께서 운남(雲南)을 평정하신 것을 하례하는 표문을 가지고 가게 했으나 역시 입국을 저지당하고 그냥 귀국했습니다. 11월에는 저의 신하 정몽주를 시켜 표전(表箋)을 지니고 홍무 16년 신년을 하례하러 보냈으나 역시 입국을 저지당한 채 귀국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성절(聖節)과 천추절(天秋節)이 다가 왔으니 마땅히 전례에 따라 하례하는 표문을 올려야 할 터인데 저의 신하들이 예전처럼 입국을 저지당한 채 돌아오게 될까봐 두려워서 저와 온 나라의 신민들은 진퇴양난의 심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다만 바라는 바는 제가 미미한 성의의 표시로 보낸 물품이 반드시 전달되는 것이니 비록 엄하게 꾸짖으시더라도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이제 저의 신하인 중대광(重大匡)·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김유 등으로 하여금 표전을 가지고 상국 조정을 찾아가 하례를 올리게 하는 바입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제 부친이 충성을 바쳤으나 아직 시호를 받지 못한 것을 민망히 여기시고, 또한 제가 아직도 왕위계승의 허락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애련히 여기사 특별히 조서를 반포하셔서 상국 조정을 왕래할 수 있게 입국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되면 저는 절대 딴 마음을 품지 않고 오로지 제후로서의 법도를 지켜 영원무궁토록 항상 황제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겠습니다.”
이에 앞서 우리 사신이 요동을 거쳐서 갈 때마다 저지당해 입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김유 등으로 하여금 배편으로 명나라에 가게 했다.
○ 우리 태조가 국경 수비에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전략을 왕에게 제출했다.
“북계(北界)는 여진(女眞)·달달(達達)·요심(遼瀋) 등의 땅과 맞붙어 있어 실로 국가의 요충지이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때라도 반드시 군량을 비축해 두고 군사를 양성해 불의의 사변에 대비해야 합니다. 현재 그 지역의 거주민들은 그 무리들과 서로 교역하며 나날이 서로 친해져 이제는 서로 혼인(婚姻)관계까지 맺게 되었으며 그 족속들은 그들의 땅에 거주하면서 우리 백성들을 유인해 가는 한편 이민족의 길잡이가 되어 끝없이 침구해 오고 있습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처럼 이러한 근심은 동북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지형의 유·불리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법인데, 저들 군대가 바로 우리 서북지역 근처에 진을 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냥 방치해 둔 결과, 많은 이익이 있다는 사탕발림의 말로 우리 오읍초(吾邑草)·갑주(甲州 : 지금의 량강도 혜산시)·해양(海陽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의 백성들을 꾀어 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적들은 단주(端州 :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독로올(禿魯兀 :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지역을 급습해 인명과 재물을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우리 요충지의 지리적 조건을 저들이 환히 꿰뚫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지역 방위의 임무를 맡고 있는 터에 도저히 이러한 사태를 좌시할 수 없어 국경수비에 관한 전략을 다음과 같이 보고 드리고자 합니다. 적의 침구를 막기 위해서는 훈련된 군사를 일시에 동원하는 것이 필수 조건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적이 침구해 오면 먼 지역에 흩어져 있는 훈련 받지 않은 군사들을 급히 불러모아 대처하는 형편이라 그들이 도착할 무렵이면 적들이 이미 약탈을 끝내고 물러가 버린 뒤입니다. 또한 전투를 벌이더라도 기동과 무기 사용법에 익숙하지 못한 군사들을 데리고 어찌 승리할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금후로는 군사들을 잘 조련해 군율을 엄격히 적용하고 지휘체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불시에 일어나는 사태에도 신속하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또한 군대의 생명은 군량의 보급 여부에 달려있는 법이라 비록 백만 대군이라도 하루치 군량만 있으면 하루살이 군대가 되는 것이며, 한 달치 군량만 있으면 한 달살이 군대가 되는 것이니 하루라도 군량이 없어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 지역의 군사들에게는 과거 경상도와 강릉교주도의 양곡을 수송해 공급하다가 지금은 도(道) 내에서 거둔 세곡(稅穀)으로 대신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수재와 한재로 인해 공적·사적인 모든 양곡이 바닥을 드러내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떠돌이 중들과 무뢰배들이 불사(佛事)를 핑계로 권세가(權勢家)의 편지를 함부로 받아다가 주군(州郡)에 들이대며 청탁을 자행하고 있으며 또한 백성들에게 얼마 안 되는 쌀과 베를 빌려주고는 나중에 수십 배로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를 반동(反同)이라 부르는데 마치 빚을 받듯이 마구 거두어 가는 바람에 백성들은 이로 인해 굶주리고 헐벗게 됩니다. 또한 각 관아와 원수들이 파견한 자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접대를 받고 온갖 방법으로 샅샅이 수탈해 가니 대부분의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생업의 터전을 버리고 유랑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는 군량을 조달할 길이 없으니 부디 이런 행위를 일절 금지시켜 백성들을 안정시키도록 하십시오. 또한 이 지역의 주군(州郡)은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땅이 좁고 척박한데도 현재 경작지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다만 민호(民戶)의 숫자만을 가지고 조세를 부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지역 가운데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와 영주(寧州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는 비교적 땅이 넓어 부요한 지역이라고는 하나 모두 이민(吏民)의 지록(地祿)이어서 그 토지세(土地稅)를 관(官)에서 거둘 수 없으니 백성들에게서 거두는 것이 균등하지 못하여 군사들에게 공급하기에 부족합니다. 지금부터는 이 지역의 각 주(州) 및 화주와 영주는 경작하는 토지의 크기를 기준으로 세금을 매겨서 공사(公私)간의 모든 업무를 편리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군민(軍民)을 통괄소속시키는 제도가 없을 경우 위급시에 서로를 보호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에 따라 선왕께서는 병신년의 교서(敎書)에서 3가(家)를 1호(戶)로, 백호를 통으로 삼아 통주(統主)를 원수의 군영에 예속시켜 일이 없을 때에는 세 집이 차례로 번(番)을 들고 일이 생기면 함께 출동하며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각 집의 장정을 모두 징발하게 했으니 이는 정말 훌륭한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근자에는 이 제도가 폐지되어 군사와 민간인이 소속된 곳이 없어지는 바람에 징발령이 내리기만 하면 흩어져 사는 백성들이 산골짜기로 도망가 숨어버리니 그들을 불러모으기가 어렵습니다. 더욱이 요즘 가뭄으로 인한 기근으로 민심이 더욱 이반되자 적들이 재물과 곡식을 미끼로 우리 백성들을 불러들이는 한편 군사를 잠입시켜 재물을 약탈한 뒤 사라져 버립니다. 변방에 거주하는 가난한 백성은 국가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이 없으며 다들 이민족과 섞여 살기 때문에 이쪽저쪽의 형세를 관망하다가 이익이 되는 쪽만을 좇으니 실상 그들을 제대로 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선왕이 내렸던 병신년의 교지에 따라 다시 군호(軍戶)를 정해 함께 통괄 소속시킴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이탈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의 애환은 수령이 얼마나 정치를 잘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군사들의 강약은 장수들이 얼마나 지휘를 잘 하느냐에 달려 있는 법입니다. 지금 군현(郡縣)을 다스리는 자들은 권세가 출신들로서 집안의 세력을 믿고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군대는 군수품이 결핍되고 백성들은 생업을 잃어 민호가 줄어들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곧고 바른 사람을 공정하게 뽑아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고 불우한 백성들을 돌보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장수의 자질을 갖춘 사람을 택해 군대를 지휘하게 함으로써 국가를 보위하게 하십시오.”
○ 왜적이 옥주(沃州 :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보령현(報寧縣 : 지금의 충청북도 보은군) 등지를 함락시켰다. ○ 우왕이 기녀(妓女)들을 상시 궁중에 두었다가 그들이 요란하게 치장하여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모조리 쫓아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불러들였다. ○ 김사혁(金斯革)이 목주(木州 :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의 흑참(黑站)에서 왜적을 공격해 20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 우왕이 장단현(長湍縣 : 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에서 사흘 동안 사냥판을 벌였다. ○ 문하평리(門下評理) 지용기(池湧奇)를 전라도 도원수(都元帥)로 임명했다.
• 9월
임인일. 우왕이 전 전공판서(典工判書) 왕흥(王興)의 집에 갔는데, 마침 그때는 왕흥이 자기 딸을 변안열(邊安烈)의 아들인 변현(邊顯)에게 시집보내려는 하루 전날이었다. 우왕이, “그대가 딸을 시집보낼 것이라고 들었는데 내 명령이 내린 후에 시집보내라.” 고 억지를 쓰며 그의 딸을 나오게 하자 왕흥이 뜰에 엎드려, “신의 딸은 나이가 어리고 우둔하며, 또 어미까지 병들어 어딘가 나가 살고 있는데 제가 무슨 심정으로 사위를 맞겠습니까.” 라고 둘러댔다. 우왕이 눈을 부라리며 “네놈이 나를 속이려느냐?”라고 꾸짖은 후 다음날 왕흥을 불러, “네 딸을 시집보내지 말라.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처자들까지 처벌할 것이다.” 라고 협박했다. 이에 시중(侍中) 조민수(曺敏修) 등이, “변안열은 나라의 명장(名將)으로 그 공적이 매우 큽니다. 지금 그의 며느리 될 사람을 빼앗으면 장수와 신하 가운데 그 누가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전하를 위해 드리는 말씀이오니 부디 그 혼인이 이루어지도록 허락하십시오.” 라고 간언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서 왕이 왕흥의 집으로 행차했으나 왕흥은 집을 비우고 피했다. 우왕이 대노하자 왕흥이 어쩔 수 없이 명령대로 따르겠노라고 대답했다. ○ 지문하사(知門下事) 이을진(李乙珍)을 강릉도 도원수(都元帥)로 임명했다. ○ 사헌부(司憲府)에서 입직사(入直辭) 한복경(韓福卿) 및 각 성중애마(成衆愛馬)·설리별감(薛里別監)이 다들 왕을 시종하지 않아 결국 왕이 혼자서 시가지를 쏘다니게 했다는 죄목으로 탄핵하자 우왕이 불쾌하게 여겼다. 갑진일. 우왕이 왕흥의 부친인 왕복명(王福命)에게 혼례를 올릴 길일을 택해 보라고 지시했다. 왕복명이, “제 손녀가 병에 걸려 요양차 떠났는데 간 곳을 모릅니다.” 라고 응대하자 우왕은, “내가 이미 왕흥과 결혼을 약속했는데, 경이 어찌 명을 거역하는 거요?” 라고 윽박질렀다. ○ 일본국에서 포로로 잡아갔던 우리 백성 120명을 돌려보냈다. ○ 대호군(大護軍) 정승가(鄭承可)를 오도체복사(五道體覆使)로 임명해 군사들의 기율과 병기의 허실 및 전투준비 태세를 감찰하게 했다. ○ 사헌부(司憲府)에서 환관으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고 있는 조순(曺恂)이 우왕을 황음하게 만들었다고 탄핵해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유배시켰다. ○ 왜적이 강릉부(江陵府)의 속현(屬縣)들을 침구했다. ○ 왜적이 회양부(淮陽府 : 지금의 강원도 화양군)를 함락시켰다. ○ 중흥사(重興寺)에서 진병법석(鎭兵法席)을 여는 한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최융(崔融)을 시켜 명나라 도사 서사호(徐師昊)가 세웠던 비석을 부수어 버리게 했다. 그 비석을 세운 뒤로 전쟁이 끊이지 않은 데다 수재와 한재가 번갈아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 왜적이 금화현(金化縣 : 지금의 강원도 금화군)을 침구하고 평강현(平康縣 : 지금의 강원도 평강군)을 함락시켰다. ○ 개경을 엄중히 경비하게 하는 한편 평양(平壤 : 지금의 평양특별시)과 서해도(西海道)로부터 징발한 정예군을 개경으로 들여다 경비에 임하게 했다. ○ 전 정당상의(政堂商議) 남좌시(南佐時), 지밀직(知密直) 안소(安紹), 밀직상의(密直商議) 왕승귀(王承貴)·왕승보(王承寶)·정희계(鄭熙啓)·인해(印海), 개성군(開城君) 왕복명(王福命),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곽선(郭璇) 등을 파견해 왜적을 공격하게 했다. ○ 우왕이 상승국(尙乘局)에 갔다가 임견미(林堅味)·노영수(盧英壽)의 집을 들르고는 시가지에서 마구 말을 달렸다. 전리총랑(典理摠郞) 박덕상(朴德祥)과 마주치자 그를 구타한 후 말을 빼앗아 밤이 될 때까지 쏘다니며 장난질을 치자 시종하던 사람들조차 왕의 행방을 몰랐다. 길에서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왕이 직접 몽둥이로 치는 바람에 심지어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 왜적이 홍천현(洪川縣 : 지금의 강원도 홍천군)을 함락시키자 원수(元帥) 김입견(金立堅)과 이을진(李乙珍)이 전투를 벌여 다섯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 전국 151군데의 사찰에 진병법석(鎭兵法席)을 크게 여니 그 비용이 헤아릴 수 없이 엄청났다. ○ 적을 수비하기 위해 출정하는 병사들이 스스로 양식을 준비하게 했다. ○ 남좌시(南佐時) 등이 금화현(金化縣 : 지금의 강원도 금화군)에서 왜적을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왕승귀(王承貴)는 적의 화살을 맞았다. ○ 우왕이 이인임·노영수·이림(李琳)의 집을 차례로 들렀는데 이림이 마침 친척들과 잔치판을 벌이고 있자 이미 술에 취한 우왕이 이림 및 그 친척들을 데리고 궁궐로 돌아와 다시 술판을 벌이고 마음껏 놀았다.
• 10월
○ 도체찰사(都體察使) 최공철(崔公哲)이 낭천(狼川 :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에 당도하자마자 왜적의 기습을 받아 아들이 납치당했다. 을해일. 큰 비가 내리고 뇌성벽력이 쳤다. 병자일. 날씨가 어제와 같았는데 우왕이 비를 무릅쓰고 길거리에서 말을 달리며 닭을 잡고 개를 칼로 찔렀다. 또한 네 차례나 상승국(尙乘局)에 들렀으며, 세 차례나 노영수의 집을 찾아가 새벽까지 풍악을 잡혔다. ○ 체복사(體覆使) 정승가(鄭承可)가 왜적과 양구(楊口 : 지금의 강원도 양구군)에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물러나 춘주(春州 :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에 진을 쳤다. 그러자 적이 춘주까지 추격해 함락시켰으며 드디어 가평현(加平縣 : 지금의 경기도 가평군)까지 침구하자 원수(元帥) 박충간(朴忠幹)이 맞싸워 격퇴시키면서 여섯 명을 죽이니 적은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웅거했다.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 우인열(禹仁烈)을 도체찰사(道體察使)로, 전 밀직(密直) 임대광(林大匡)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임명해 청평산의 왜적을 치게 했다. ○ 이성만호(泥城萬戶) 조민수가 병마사(兵馬使) 박바얀[朴伯顔]을 시켜 요동(遼東)의 군사 정세를 정탐하게 했는데 박바얀이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안산백호(鞍山百戶) 정송(鄭松)이, ‘요동총병관(遼東摠兵官)이 명나라 황제에게, 달달(韃韃)이 문카라부카[文哈刺不花]를 고려에 파견해 요동을 협격하려고 획책하니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황제가 손도독(孫都督) 등을 시켜 전함 8,900척을 지휘해 고려를 정벌하게 했습니다. 손도독이 요동(遼東)에 도착해 요동의 군사를 세 개의 부대로 편성해 고려를 향해 함선을 출발시켰습니다. 그때 달달이 혼하구자(渾河口子)를 공격해 명나라 군사를 몰살시키고 혼하(渾河)에 진을 쳤는데 손도독의 부대가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왕이 보고를 받고는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국경수비의 작전을 세우게 했다. ○ 교주도(交州道) 안렴사(按廉使) 정부(鄭符)가 길에서 왜적 백여기와 마주쳤는데 적의 기습을 당한 정부가 숲속으로 피신하자 적들은 그를 따라갔던 관리와 휴대품과 인장을 깡그리 약탈해 갔다. ○ 각 창고(倉庫)의 노예(奴隸)를 시켜 전조(田租)를 거두어들이게 하자 그들이 백성들의 재물을 마구 침탈했다. ○ 각 도에 전민도감관(田民都監官)을 나누어 파견했다. 계미일. 우왕이 몇 기(騎)를 데리고 낙타교(槖駝橋) 근처에서 매를 놓아 참새를 잡았다. 밤에는 순작관(巡綽官)을 거느리고 정비전(定妃殿)으로 갔다. 을유일. 의비(毅妃)의 생일을 맞아 궁궐에서 재추와 원로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병술일. 왕이 새벽부터 놀러나가는 바람에 아회(衙會)에 출석했던 백관들이 왕의 소재를 알지 못해 결국 조회를 취소해 버렸다. ○ 대성(臺省)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간쟁했다.
“간언을 좇아 그것을 어기지 않는 것은 군주의 미덕이며 조심성있게 일을 처리해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간언을 듣지 않으면 군주의 덕이 훼손되어 과실이 드러나는 법이며 신망을 얻지 못하면 민심이 이탈해 정령(政令)이 먹혀들지 않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 언관(言官)의 건의를 모두 받아들여 간언을 좇는 군주의 미덕을 이루시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웃 나라에서 전쟁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는데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 내륙깊이까지 침구해 첩자가 횡행하니 무슨 변란이 일어날지 심히 우려됩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전하께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단기로 마구 말을 달리시니 저희들은 너무나 걱정한 나머지 재삼 간언하였으며 전하께서는 그때마다 그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환관과 내수(內竪) 및 경호군사와 마부들이 비위를 맞추느라 아첨하는 말로 예에 어긋난 길로 전하를 인도하여 도리어 전하로 하여금 무시로 나들이를 하게 함으로써 온 나라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잃게 하니 올바르지 못한 불충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내승별감(內乘別監) 및 쉬구치[速古赤]와 환관과 내수 가운데 해당자들을 엄히 국문하게 하여 후세에 감계가 되게 하십시오. 또한 언관(言官)은 왕명(王命)을 출납하는 일을 맡고 있으니 그 직무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반드시 정직하고 근면성실한 사람을 두 명 골라 그 임무를 맡겼던 것입니다. 현재 두 명을 더 배치했는데도 미처 직무를 완수하지 못해 전하의 출입상황을 백관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실정이니, 옛 제도에 따라 두 명을 골라 배치하고 그 나머지는 걸러내시기 바랍니다.”
소가 올라가자 우왕이 환관 김길봉(金吉逢)을 장형에 처한 후 이산영(泥山營)의 군졸로 충당하고, 내수 서양수(徐良守)를 쫓아내어 다시 도관(都官)에 예속시켰으며, 달아난 내승별감(內乘別監) 김천용(金千用)의 행방을 수색하게 했다. ○ 왜적이 안변부(安邊府 : 지금의 강원도 안변군) 흡곡현(歙谷縣 : 지금의 강원도 통천군)을 침구해 사방에서 약탈을 벌였는데 마치 무인지경을 가는 듯했다. ○ 밀직제학상의(密直提學商議) 조준(趙浚)을 강릉교주도의 도검찰사(都檢察使)로 임명했다. ○ 이을진(李乙珍) 및 부원수(副元帥) 권현용(權玄龍)과 병마사(兵馬使) 곽충보(郭忠輔)가 동산현(洞山縣 : 지금의 강원도 양양군)에서 왜적을 공격해 20여 명을 죽이고 말 72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자 적들은 잔당을 수습해 고성포(高城浦 :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로 퇴각해 정박했다. 진무(鎭撫) 김광미(金光美)를 보내 승첩을 보고하자 우왕이 이을진·권현용·곽충보에게 백금 각 50냥을, 힘껏 싸운 군사 세 명에게 은그릇 각각 1개씩을, 김광미에게는 말 1필을 내려 주었다.
• 11월
○ 전라도 도원수(都元帥) 지용기(池湧奇)를 그 지역의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임명했다. ○ 이을진으로부터 급보가 올라왔다.
“고성포(高城浦)의 왜적이 낮에는 배에 머물러 있다가 밤이 되면 해안에 상륙해 노략질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재 도내의 병력이 적고 군량이 떨어져 제대로 전투를 벌이지 못하고 지구전을 펴는 바람에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으니 응원군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무신일. 우왕이 정비전(定妃)에 갔고 다음날에도 또 갔다. ○ 통역관 장백(張伯)이 명나라로부터 귀국해, “황제가 진하사(進賀使) 김유(金庾)와 이자용(李子庸)이 제 때 도착하지 못했다며 법사(法司)에 하옥시켰다.” 고 보고했다. 이와 관련해 명나라 예부(禮部)에서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황제께서 이런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얼마 전 동쪽 멀리 있는 고려로부터 사신이 와서 복속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내심 거짓된 마음을 품고 밥 먹듯이 자꾸 여러 가지 불화를 조성하기에 짐이 허락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제 나라를 다스리라고만 말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찾아와 허락해 달라고 조르기에 짐은 그 정성이 지극하다고 여겨 세공(歲貢)을 정해줌으로써 저들이 성의를 표시할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그 후 다섯 해 동안이나 약속대로 세공을 바치지 않다가 지금 다시 경사(慶事)에 하례하러 왔다하니 성의가 가상하기는 하나 기일을 제 때 맞추어 오지 않았으니 우리를 심히 모욕한 것이라 하겠다. 그래도 사신을 보낸 일 자체는 고려국왕이나 그 나라 신하들의 잘못이 아니며, 사신이 일부러 우리를 깔보느라 기일을 넘겨 도착한 것이다. 지금 고려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면서 사대의 정성을 영원히 지키겠다고 말하지만, 그 사신이 예법에 어긋난 행동을 했으니 응당 법사(法司)에 송치해 법대로 처벌하라. 바친 예물은 기한을 어겼으니 접수하지 말고 다시 고려에 문서를 보내 다음과 같이 전하도록 하라. 그들이 꼭 복속을 허가받으려면 지난 5년 동안 세공으로 바치지 않은 말 5천 필, 금 5백 근, 은 5만 냥, 베 5만 필을 한꺼번에 가져오라고 하라. 이렇게 성의를 표시한다면 장차 우리 사신을 찾으러 군대가 출동하는 것을 면할 수 있으리라고 그들에게 일러라.’ 이상과 같은 황제의 지시를 받들어 귀국에서 바친 예물을 원래 봉인한 그대로 사신으로 보내온 배중륜(裴仲倫) 등으로 하여금 수령하여 뱃길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지금 귀국에서 다시 보내온 사신 최연(崔涓) 등 네 명 편에 공문을 들려 육로로 돌려보냅니다.”
○ 밀직(密直) 주의(周誼)의 모친 윤씨(尹氏)에게 쌀 20석과 콩 10석을 내려주었다. 무오일. 우왕이 정비전(定妃殿)에 갔다. ○ 왜적이 청풍군(淸風郡 :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을 침구하자 도순찰사(都巡察使) 한방언(韓邦彦)이 금곡촌(金谷村)에서 전투를 벌여 여덟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 문하평리(門下評理) 홍상재(洪尙載)와 전공판서(典工判書) 주겸(周謙)을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신년을 하례하게 했다. ○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정지(鄭地)가 각 도에서 전함을 건조하여 왜적의 침구를 방어할 것을 건의하니 왕이 따랐다. ○ 호군(護軍) ▶진여의(陳汝宜), 총랑(摠郞) 신운수(申雲秀), 전 판사(判事) 송문례(宋文禮), 전 소윤(小尹) 황성길(黃成吉)을 양광도·서해도·전라도·경상도로 각각 파견해 전함의 건조를 감독하게 했다. 무진일. 우왕이 정비전에 갔다가 중상리(中常里)의 민가에 화재가 났다는 말을 듣자 말을 달려가서 진압했다.
• 12월
계유일.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갑술일. 우왕이 정비전에 갔다가 궁녀들을 데리고 다시 남산(男山)에서 놀았다. ○ 우왕이 양부(兩府)의 백관들에게 명나라에 보낼 세공(歲貢)에 대해 의견을 묻자 다들 황제의 지시대로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따라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을 설치했다. ○ 지밀직(知密直) 도흥(都興)을 양광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임명했다. ○ 우왕이 궁녀들과 나란히 말을 타고 마을 거리를 쏘다녔다. ○ 경상도 부원수(副元帥)·밀직부사(密直副使) 윤가관(尹可觀)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정지(鄭地)를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楊廣全羅慶常江陵道都指揮處置使)로 임명했다. ○ 우왕이 노빈(盧斌)의 집에 갔다. 노빈은 노영수의 동생으로 우왕이 노영수의 집에 갔다가 노빈의 부인이 예쁜 것을 본 후 여러 차례 그 집에 간 것이다. 병신일. 우왕이 정비전에 갔으나 들어가지 못했다. 九年 正月 癸丑 納哈出遣文哈刺不花, 請尋舊好. 禑如謹妃殿, 作儺戱. 翼日, 禑以妓樂出遊, 時寒風甚烈, 禑手自吹笛, 謂妓輩曰, “手凍, 吹笛甚苦.” 鄭夢周等至遼東, 都司稱有勑不納, 止納進獻禮物. 勑曰, “天覆地載, 日月所臨, 爲烝民之主, 封疆雖大小之殊, 治民之道, 莫不亦然. 其盡大地之民, 亘古至今, 豈一主而善周育者也? 前者, 三韓酋長, 爲臣所弑, 弑後疊來, 奏朕臣貢如常, 却之再三, 不止. 特以歲貢難之, 必止, 今不止而固請. 乃以前數年, 零碎之貢, 合而爲數, 而暗爲愚侮. 然三韓之域, 奠於中國之東, 滄海之外, 朕觀我中國之書, 其方之人, 不懷恩而好構禍, 縱使暫臣, 亦何益哉? 爾守遼諸將, 固守我疆, 毋與較徵. 今以數年之物, 合而爲一, 稱爲如勑, 其意未誠. 符到之日, 仍前阻歸, 不許入境, 止許自爲聲敎.” 胡拔都來掠泥城, 中流矢走. 門下府上書, 請還松京. 丁巳 禑徒行, 如謹妃殿. 禑出遊, 百官侍衛, 禑忌之, 馳馬還. 遼東都司移文曰, “高麗臣事大明, 不宜與納哈出通好. 今聞, 納哈出遣文哈刺不花請好, 高麗厚禮以慰之, 其於臣事大明之意, 如何? 如欲免罪, 莫若檻送文哈刺不花, 以効其誠. 不然, 雖有後患, 悔之何及?”
二月 戊寅 禑帶弓矢, 馳馬于郊, 翼日又畋于郊. 以僧混修爲國師, 粲英爲王師. 禑觀打魚于楊州. 禑發漢陽, 時軍民甚苦暴露, 及行, 火其廬幕, 以冀不復來也. 賜楊廣道按廉柳克恕, 交州道按廉崔資, 廐馬各一匹. 克恕·資, 皆姦慧諂諛, 善伺候人意, 當禑之南遷, 剝民膏血, 窮極珍羞, 賂遺權貴, 以取媚悅故, 賜之. 己丑 禑還松京, 以宰臣朴原鏡第, 爲時坐宮. 設彩棚雜戱以迎, 成均學生獻歌謠, 禑曰, “學生何其少耶?” 廉興邦對曰, “往者, 養賢庫充羨, 能養諸生故, 人爭入學, 今匱乏, 不能養故少.” 禑曰, “其給豐儲倉米, 養之.” 禑宴群臣于花園, 夜分乃罷. 以柳曼殊爲慶尙道元帥兼合浦都巡問使, 羅世爲海道元帥.
三月 己酉 禑馳馬於市, 有人走避, 禑追及, 以鐵如意擊之, 遂如惠妃殿. 典理摠郞裴仲倫妻, 與族僧云珪通, 逃至延安府, 捕鞫之, 杖仲倫妻, 沒爲官婢, 云珪斃獄中. 禑率林等十餘騎, 如惠妃殿, 又如盧英壽第, 馳馬射狗. 又如安逸院, 院尼寺也. 以旱, 禁酒. 前副正禹吉逢殺妻逃, 捕鞫之. 慶尙道按廉呂克諲言, “河陽·永州·報令·化令·河東等處, 有閑曠地, 請屯田以助軍餼.” 從之. 於是, 克諲奪人祖業田, 或奪耕牛, 民失其業, 怨讟旁興. 禑如李仁任第. 前郞將鄭元甫, 嘗詐稱川寧安集, 繫獄逃, 又稱居昌安集, 赴任營私, 伏誅. 以曹敏修爲門下侍中, 林堅味守門下侍中. 以林堅味及都吉敷·禹玄寶·李存性, 提調政房. 禑臂鷹, 畋于郊.
四月 禑封崇國師王師, 出花園, 遙禮之. 三司右使林成味卒, 贈謚忠簡. 以旱, 宥二罪以下. 竹城君安克仁卒, 贈謚文定. 取及第金漢老等, 我太宗擢丙科第七人. 禑馳馬于東郊, 遊于佛日野. 禑觀石戰戱.
五月 禑令成均館進四書, 讀論語數章, 卽輟. 禑如寶源庫祈雨壇, 親自擊鼓以禱. 禑冒雨出遊. 前判事韓仲寶嘗安撫濟州, 矯旨縱欲, 下巡軍獄. 其弟上護軍仲良, 素與仲寶不友, 至是喜仲寶得罪, 其過惡, 投匿名書于李存性第. 幷下仲良獄, 並杖流邊地. 陟城君朴原鏡卒. 慶尙道按廉報, “晉州等處, 麥穗三四歧.” 禑潛至壺串, 觀牧馬, 宿衛者皆失所之. 知門下商議閔伯萱卒. 有私婢, 一産三男, 賜米二十碩. 前判事趙瑚, 與宦者爭田, 宦者訴禑, 杖瑚, 流遂安郡.
六月 密直使金寶生卒. 禑畋于延福亭三日. 交州江陵道禾尺. 才人等, 詐爲倭賊, 寇掠平昌·原州·榮州·順興·橫川等處. 元帥金立堅, 體察使崔公哲, 捕斬五十餘人, 分配妻子于州郡. 臺諫交章上言曰, “自我太祖統一三韓, 子孫相繼, 事必師古, 乘輿出入, 必因宗廟, 會同賓客等事, 未有無事而妄行者. 至于永陵, 不遵祖宗之法, 不從諫臣之言, 日與群小, 嬉遊閭里, 聲聞上國, 終有岳陽之行, 貽我無窮之恥. 今殿下, 遊幸無節, 從以數騎, 馳騁無方, 臣民缺望. 願上畏天命, 下法祖宗, 出入有節, 侍衛有儀, 無或輕出, 以慰臣民之望, 以永宗社之福.” 倭寇慶尙道吉安·安康·杞溪·永州·新寧·長守·義興·義城·善州等處. 禑宴宰相于花園. 倭寇丹陽·堤州·酒泉·平昌·橫川·榮州·順興等處. 以王安德爲楊廣道助戰元帥, 遣典儀令禹夏于慶尙道, 督察元帥禦倭勤怠. 閹人金剛欲娶皇甫加之女, 不果, 托以他事, 訴于禑, 囚巡軍. 以羅世爲慶尙道助戰元帥. 以倭寇闌入內地, 移忠州開天寺所藏史籍于竹州七長寺. 戊戌 禑以盧英壽生日, 宴于花園.
七月 漢陽府尹張夏捕倭反閒三人. 以倭寇方興, 令在外閑散·奉翊·通憲, 皆赴征. 禹夏督諸兵馬使, 擊倭于義城, 斬三級. 知順州事黃安信嘗監運軍糧, 盜用米七十五石, 事覺, 有司將置於法, 以戚連毅妃, 止令削職. 倭寇大丘·京山·善州·仁同·知禮·金山等處. 禑賜安東府使李忠富廐馬曰, “戮力防禦, 以保胎室.” 以尹可觀爲慶尙道助戰元帥. 禹夏督諸兵馬使, 與倭戰于禮安, 斬八級, 又戰于順興, 斬六級. 遼瀋草賊四十餘騎, 侵掠端州, 端州萬戶陸麗, 靑州萬戶黃希碩, 千戶李豆蘭等, 追至西州衛·海陽等處, 斬渠魁六人, 餘皆遁去. 交州江陵道都體察使崔公哲, 遇倭于芳林驛, 斬八級, 奪其兵仗及馬五十九匹.
八月 壬申朔 書雲觀丞池巨源, 告日食, 不果食. 重房請治其罪, 乃杖七十. 以門下贊成事趙仁璧爲東北面都體察使, 判開城府事韓邦彦爲上元帥, 門下贊成事金用輝爲西北面都巡察使, 前版圖判書安思祖爲江界萬戶. 時大明責事大不誠, 屢侵邊境故, 備之. 禑如定妃殿, 遂如林堅味第, 馳馬閭巷. 倭陷居寧·長水等縣, 分兵欲寇全州, 全州副元帥皇甫琳戰于礪峴, 却之. 以門下評理文達漢爲楊廣道都察理使, 知門下事安慶爲都安撫使, 保安君朴壽年爲都巡慰使. 倭賊一千三百餘人, 寇春陽·寧越·旌善等處. 壬午 禑奪騎林馬, 如盧英壽第, 及宦官, 皆步從, 遂如定妃殿. 萬頃安集金瑞元, 鎭撫韓福, 押漕轉, 托以漂沒, 竊米布, 囚鞫之. 癸未 禑如定妃殿, 夜又至, 不克入. 左司議權近等上書, 戒逸遊. 禑嘗馳騁閭里, 然猶忌臺諫, 宦竪等進說曰, “臺諫皆上所除, 如有忤旨, 替之何難?” 自是, 禑益輕臺諫, 無復忌憚, 遊戱畋獵無度. 近又與同僚極諫, 禑醉甚, 欲射之. 倭寇任實縣. 我太祖大破胡拔都于吉州. 遣門下贊成事金庾, 賀聖節, 請謚承襲, 陳情. 密直副使李子庸賀千秋節. 請謚表曰, “節惠易名, 是皇王之恤典, 顯親歸美, 惟人子之孝忱. 竊念, 臣父先臣顓, 早襲世封, 邈居藩服, 際昌辰之肇啓, 知景命之有歸, 慕義一朝, 率先款附, 輸忠七載, 罔或怠荒. 奈不弔於昊天, 而奄辭於盛代? 顧以委質而至此, 謂應賜謚而示終, 歲律已届於十更, 天語未蒙於一降, 肆陳愚懇, 再瀆聖聰. 伏望, 陛下憫先臣之誠, 哀孤臣之志, 特賜殊號, 以旌貞魂. 則臣謹當率考攸行恒, 無替於厥服, 順帝之則, 用永保於斯民.” 承襲表曰, “錫命推恩, 仰惟聖君之典, 踐位行禮, 實爲孝子之心, 敢此籲呼, 深增惶懼. 臣聞, 詩歌纘考, 宣王所以待韓侯, 傳稱揚名, 仲尼所以語曾子, 以斯爲美, 終古則然. 欽惟, 陛下体舜舞干, 師湯弛罟, 分茅胙土, 措天下於泰山, 斂福錫民, 躋一世於壽域. 遂致多方之面內, 而無匹夫之向隅. 如臣者, 方在弱齡, 卽喪嚴父, 對影海曲, 哀吾生之曷歸, 翹首雲霄, 望兪音之益切. 伏望陛下, 憐臣移孝爲忠之至願, 諒臣以小事大之微誠, 特霈洪私, 俾承先業, 則臣謹當之屛之翰, 永保箕封, 曰壽曰康, 恒申華祝.” 陳情表曰, “高高在上, 降監孔昭, 斷斷無他, 敷奏則瀆, 深切兢惕, 輒覬允兪. 伏念, 蕞爾小邦, 際於興運, 天休滋至, 非遠人之與京, 國步斯頻, 奄先臣之不祿, 肆嬰多故, 已至十年. 洪武十一年, 差陪臣沈德符等, 進獻馬匹·金銀·器皿等物, 回還齎奉詔旨, ‘節該今歲貢馬一千, 差執政陪臣, 以半來朝. 明年貢金一百斤, 銀一萬兩, 良馬一百匹, 細布一萬匹, 歲以爲常, 欽此.’ 祗承敎條, 靡遑啓處, 但金銀之不産, 遐邇所知, 而馬匹之未敷, 褊小攸致. 每被都司之阻, 尙稽天府之充. 洪武十五年, 再行儘力, 措辦金銀·布匹·馬匹, 輳足原奉之數, 差陪臣金庾·洪尙載·金寶生·鄭夢周·李海·裴行儉, 管押前赴朝廷. 到於遼東甛水站, 聽候閒蒙, 都司差來徐千戶, 錄示聖旨, ‘節該歲貢, 以數年之物, 合而爲一, 其意未誠. 仍前阻歸, 不許入境. 欽此.’ 金庾等欽遵回還. 當年六月, 再差陪臣周謙, 前去懇告, 亦蒙阻回. 八月, 差陪臣柳藩, 齎擎表文, 進賀平定雲南, 亦蒙阻回. 十一月, 差陪臣鄭夢周, 齎擎表箋, 進賀洪武十六年正旦, 亦蒙阻回. 卽目欽遇聖節·千秋節, 例合進呈表箋, 誠恐仍前阻回, 臣與一國臣民, 進退無憑, 驚惶失措. 所願微誠之必達, 雖加嚴譴而何辭? 謹遣陪臣重大匡門下贊成事金庾等, 謹奉表箋, 赴朝廷進賀. 伏望陛下, 愍先臣方進忠而未終, 哀孤臣欲繼志而弗獲, 特頒詔旨, 俾詣趨蹌. 則臣謹當不二不三, 謹修侯度, 時萬時億, 恒祝皇齡.” 先是, 我使行由遼東, 輒不得達故, 令庾等航海而往. 我太祖獻安邊之策曰, “北界與女眞·達達·遼瀋之境相連, 實爲國家要害之地, 雖於無事之時, 必當儲糧養兵, 以備不虞. 今其居民, 每與彼俗互市, 日相親狎, 至結婚姻, 而其族屬在彼, 誘引而去, 又爲鄕導, 入寇不已. 唇亡齒寒, 非止東北一面之虞也. 且兵之勝否, 在於地利之得失, 彼兵所據, 近我西北, 舍而不圖, 乃以重利, 遠啗我吾邑草·甲州·海陽之民, 以誘致之. 今又突入端州·禿魯兀之地, 驅掠人物. 以此觀之, 我之要害, 地利形勢, 彼固知之矣. 臣受任方面, 不可坐視, 謹籌邊策以聞. 禦寇之方, 在於鍊兵齊擧. 今也, 以不敎之兵, 散處遠地, 及寇之至, 倉皇招集, 比其至也, 寇已虜掠而退. 雖及與戰, 其如不熟旗鼓, 不習擊刺何? 願自今, 鍊兵訓卒, 嚴立約束, 申明號令, 待變而作, 無失事機. 又師旅之命, 繫於糧餉, 雖百萬之師, 有一日之糧, 方爲一日之師, 有一月之糧, 方爲一月之師, 是不可一日無食也. 此道之兵, 昔運慶尙·江陵交州之穀, 以給之, 今以道內地稅代之. 比因水旱, 公私俱竭, 加以遊手之僧, 無賴之人, 托爲佛事, 冒受權勢書狀, 干謁州郡, 借民斗米尺布, 斂以甔石尋丈. 號曰反同, 徵如逋債, 民以飢寒. 又諸衙門諸元帥, 所遣之人, 群行傳食, 剝膚槌髓, 民不忍苦, 失所流亡, 十常八九. 軍之糧餉, 無從而出, 乞皆禁斷, 以安百姓. 又道內州郡, 介於山海, 地狹且脊, 今其收稅, 不問耕田多寡, 唯視戶之大小. 和·寧於道內, 地廣以饒, 皆爲吏民地祿, 而其地稅, 官不得收, 取民不均, 餉軍不足. 今後, 道內諸州及和寧, 一以耕田多寡, 科稅以便公私. 又軍民非有統屬, 緩急難以相保. 是以, 先王丙申之敎, 以三家爲一戶, 統以百戶, 統主隸於帥營, 無事則三家番上, 有事則俱出, 事急則悉發家丁, 誠爲良法. 近來法廢, 無所維繫, 每至徵發, 散居之民, 逃竄山谷, 難以招集. 今又旱饑, 民心益離, 彼用錢穀, 餌以招納, 潛師以來, 虜掠而歸. 一界窮民, 旣無恒心, 又皆雜類, 彼此觀望, 惟利之從, 實爲難保. 乞依丙申之敎, 更定軍戶, 使有統屬, 固結其心. 又民之休戚, 繫於守令, 軍之勇怯, 在於將帥. 今之爲郡縣者, 出於權幸之門, 恃其勢力, 不謹其職, 以致軍觖其須, 民失其業, 戶口消耗, 府庫虛竭. 乞自今, 公選廉勤正直者, 俾之臨民, 字撫鰥寡. 又擇堪爲將帥者, 俾之摠戎, 捍禦國家.” 倭陷沃州·報寧等縣. 禑常置妓女于宮中, 惡其誨淫, 黜之, 未幾, 復召納之. 金斯革擊倭于木州黑站, 斬二十級. 禑畋于長湍縣三日. 以門下評理池湧奇爲全羅道都元帥.
九月 壬寅 禑如前典工判書王興第, 時興以其女, 妻邊安烈子顯, 期在明日. 禑曰, “聞汝將嫁女, 其俟予命, 嫁之.” 令出其女, 興伏於庭曰, “臣女幼騃, 且其母被疾, 避寓無方, 何心納壻?” 禑瞋目叱曰, “小竪欺我耶?” 翼日, 召興曰, “毋嫁汝女. 汝不從命, 罪及妻孥.” 侍中曹敏修等曰, “安烈爲國名將, 厥功甚懋. 今奪其婦, 將臣孰不觖望? 臣等爲殿下痛心, 乞許成婚.” 不聽. 至暮, 幸興第, 興已空其家而避之. 禑大怒, 興不得已對曰, “惟命” 以知門下事李乙珍爲江陵道元帥. 憲府劾入直辭韓福卿及各成衆愛馬·薛里別監, “皆不侍從, 致使上獨遊閭里.” 禑不悅. 甲辰 禑令王福命, 擇嘉禮吉日. 福命曰, “臣之孫女, 得疾避居, 未知所在.” 禑曰, “我旣與王興約, 卿何方命乎?” 日本國歸被虜男女一百十二人. 以大護軍鄭承可爲五道體覆使, 檢察軍容虛實, 戰守勤怠. 憲府論宦者禮儀判書曹恂, 導禑荒淫, 流于全羅道內廂. 倭寇江陵府屬縣. 倭陷淮陽府. 設鎭兵法席于重興寺, 命判書雲觀事崔融, 踣徐師昊所立碑. 盖以立碑之後, 兵革不息, 水旱相仍故也. 倭寇金化縣, 陷平康縣. 京城戒嚴, 徵平壤西海道精兵入衛. 遣前政堂商議南佐時, 知密直安紹, 密直商議王承貴·王承寶·鄭熙啓·印海, 開城君王福命, 判開城府事郭璇等, 往擊之. 禑如尙乘及林堅味·盧英壽第, 遂馳騁閭里. 遇典理摠郞朴德祥, 撻之, 奪其馬, 侵夜遊戱, 侍從皆失所之. 道遇人, 輒自杖之, 至有斃者. 倭陷洪川縣, 元帥金立堅·李乙珍與戰, 斬五級. 大設鎭兵法席于中外佛宇, 共一百五十一所, 供費不可勝計. 赴防軍士, 自備糗糧. 南佐時等擊倭于金化縣, 敗績, 王承貴中矢. 禑如李仁任·盧英壽·李琳第, 琳適宴族屬, 禑旣醉, 遂率琳及族屬而還, 置酒極歡.
十月 都體察使崔公哲至狼川, 倭突出, 掩擊擒公哲子. 乙亥 大雨, 震電. 丙子 亦如之, 禑冒雨, 馳騁里巷, 捕雞刺狗. 四至尙乘, 三至盧英壽家, 張樂達曙. 體覆使鄭承可與倭戰于楊口, 敗績, 退屯春州. 追至春州, 陷之, 遂侵加平縣. 元帥朴忠幹與戰, 逐之, 斬六級, 賊入據淸平山. 以贊成事商議禹仁烈爲都體察使, 前密直林大匡爲助戰元帥, 往擊之. 泥城萬戶曹敏修遣兵馬使朴伯顔, 覘遼東, 伯顔還言, “鞍山百戶鄭松云, ‘遼東摠兵官奏帝曰, 「韃韃遣文哈刺不花於高麗, 欲與攻遼, 請遣兵救之.」 帝命孫都督等, 領戰艦八千九百艘, 征高麗. 孫都督到遼東, 又三分遼東軍, 發船向高麗. 會韃韃擊渾河口子, 盡殺官軍, 屯兵渾河, 都督兵與戰, 不克還.’” 禑聞之, 命都堂, 議備邊. 交州道按廉使鄭符, 道遇倭賊百餘騎, 賊急擊之. 符脫入林閒, 從吏輜重印章, 皆被奪掠. 以倉庫奴隸, 因收田租, 侵漁百姓. 分遣田民都監官于諸道. 癸未 禑率數騎, 放鷹于橐駝橋畔, 捕雀. 夜率巡綽官, 如定妃殿. 乙酉 以毅妃生日, 宴宰樞·耆老于禁中. 丙戌 早出遊, 百官衙會, 失禑所之, 遂罷朝. 臺省交章, 諫曰, “從諫弗咈, 爲君之美德, 敬事而信, 爲國之急務. 諫不聽, 則君德虧, 而過失彰, 信不立, 則民心乖, 而政令廢. 殿下卽位以來, 言官所啓, 一皆聽從, 從諫之美, 一國擧欣. 近來, 隣國有警, 海寇深入, 往來反閒, 事變可畏. 殿下不擇晝夜, 單騎馳騁, 臣等憂危, 諫至再三, 輒賜兪允. 而宦官·內竪, 衛士·圉人, 逢迎諛說, 導上非禮, 反使殿下, 出入無時, 失信於國, 不忠不道, 莫此爲甚. 其內乘別監及速古赤·宦官·內竪之執事者, 請加鞫問, 以鑑後來. 且辭者, 出納王命, 其任匪輕. 是以, 古者, 必擇正直謹愼者二人, 以充其任. 今加置二人, 而反有所不逮, 殿下出入, 不以告百官, 請依古制, 擇置二人, 汰去其餘.” 啓, 禑杖宦官金吉逢, 充泥山營卒, 黜內竪徐良守, 還隸都官, 內乘別監金千用, 逃令索之. 倭寇安邊府歙谷縣, 四出虜掠, 如蹈無人之境. 以密直提學商議趙浚爲江陵交州道都檢察使. 李乙珍及副元帥權玄龍, 兵馬使郭忠輔, 擊倭于洞山縣, 斬二十餘級, 獲馬七十二匹. 賊收餘衆, 退泊高城浦. 遣鎭撫金光美獻捷, 禑賜乙珍·玄龍·忠輔, 白金各五十兩, 軍士之力戰者三人, 銀盂各一事, 光美馬一匹.
十一月 以全羅道都元帥池湧奇, 仍爲都巡問使. 李乙珍馳報, “高城浦倭賊, 晝乘舟, 夜登岸虜掠, 而道內兵少食乏, 未易與戰, 相持日久, 民甚苦之, 請濟師.” 戊申 禑如定妃殿, 翼日亦如之. 譯者張伯還自京師曰, “帝以進賀使金庾·李子庸, 過期而至, 下法司.” 禮部咨曰, “奉聖旨, ‘高麗遠自東鄙, 曩者來奏, 願聽約束. 其中懷詐, 多端視生隙如尋常, 朕所不納, 止許自爲聲敎. 向後, 數來請命, 朕將以爲誠意至極, 所以限定歲貢, 用表彼誠. 去後, 貢不如約五年矣, 今又以慶禮來, 誠則誠矣, 然非期節而至, 豈不侮之甚歟? 雖然, 以發使之事論之, 則非高麗國王陪臣之非, 乃使者故爲侮慢, 過期而至. 今高麗旣全臣妾, 永守事大之誠, 來使旣非朝禮, 當送法司, 如律令. 其所進禮物, 旣不依節而至, 勿納, 更與高麗文書. 必然願聽約束, 前五年未進歲貢, 馬五千匹, 金五百斤, 銀五萬兩, 布五萬匹, 一發將來. 乃爲誠意, 方免他日取使者之兵至彼. 欽此.’ 已將進獻禮物, 不動原封盡數, 責令原差來人裴仲倫等收領, 於水路回還. 今再令差來人崔涓等四名齎文, 陸路回還.” 賜密直周誼母尹氏, 米二十碩, 豆十碩. 戊午 禑如定妃殿. 倭寇淸風郡, 都巡察使韓邦彦與戰于金谷村, 斬八級. 遣門下評理洪尙載, 典工判書周謙如京師, 賀正. 知門下府事鄭地請造戰艦于諸道以備倭寇, 從之. 分遣護軍▶陳汝宜, 摠郞申雲秀, 前判事宋文禮, 前少尹黃成吉于楊廣·西海·全羅·慶尙道, 監造戰艦. 戊辰 禑如定妃殿, 聞中常里人家火, 馳馬救之.
十二月 癸酉 太白晝見. 甲戌 禑如定妃殿, 又率宮女, 遊男山. 禑令兩府百官, 議歲貢, 皆以一遵帝旨爲對. 於是, 置進獻盤纏色. 以知密直都興爲楊廣道都巡問使. 禑與宮女並轡, 遊閭里. 以慶尙道副元帥密直副使尹可觀, 仍爲都巡問使, 鄭地爲海道都元帥楊廣·全羅·慶尙·江陵道都指揮處置使. 禑如盧贇第. 贇, 英壽之弟, 禑嘗至英壽第, 見贇妻之美, 自是屢往焉. 丙申 禑如定妃殿, 不克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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