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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묵상글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 희망의 증인으로 뽑힌 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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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희망의 증인으로 뽑힌 우리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보여주셨나이다.”
오늘 감사송인데 뽑힌 증인들 앞에서 십자가 죽음을 대비하여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음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나눔을 증인으로 뽑힌 우리로 정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두 번째 수난 예고를 앞두고,
그러니까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당신의 신적인 모습을
뽑힌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신 것인데 여기에 의도가 있습니다.
변모의 의도는 간단명료합니다.
당신이 돌아가셔도 절망하지 말라는 것이요 희망을 보라는 것이요,
가장 참혹한 순간에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표현을 씁니다.
눈앞이 캄캄하다. 앞이 캄캄하다.
이처럼 현재의 암울함이 눈을 멀게 하고 미래를 캄캄하게 하기 마련인데
이때 암울한 현재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는
미래의 눈, 희망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미래의 눈과 희망의 눈은 암울한 현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면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이고 현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미래의 눈과 희망의 눈은 현재의 암울함은 직시하고 인정한 다음,
그 다음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죽었는데 죽음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들은 훨훨 하늘나라에 갈 것이라고 하늘나라의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제자들이 당신 죽음을 보고 부활을 내다보라고
당신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왜 세 제자에게만입니까?
왜 세 제자에게만 보여주십니까?
그 의도와 이유도 분명합니다.
희망의 증인이 되라는 겁니다.
어느 공동체건 증인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미래 희망을 볼 줄 알면 증인이 필요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증인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다수는 미래 희망을 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현재로 돌아가 봅시다.
누가 우리 가정의 희망의 증인입니까?
누가 우리 공동체의 희망의 증인입니까?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는 암울하지 않다고요?
현재에 감사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 현재 암울하다고요?
그리스도인인 내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희망의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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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법정 스님은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지난 7월에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가진 해외 성지순례였기에 많은 기대를 했지만, 낮 기온이 44도에 달하는 엄청나게 더운 날씨에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44도가 되면 돌아다니지 않고 그냥 집에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지순례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저를 포함한 모두는 일정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순례에 임했습니다.
순례를 모두 마치고서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요? 땀을 비 오듯 흘리고, 뜨거운 햇빛을 피해서 그늘을 찾아가면서 ‘쉬고 싶다’라는 마음이 가득하기도 했지만, 순례를 마쳤을 때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고생했기에 더 행복도 크게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편하고 쉬운 것만이 행복을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많은 것을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야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베드로가 나서서 이 타볼산에 초막을 지어 머무르자고 이야기합니다. 그 영광 안에서 큰 기쁨을 느꼈고 이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 행복은 편하고 쉬운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더 큰 기쁨과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하늘의 구름 속에서 들렸던 소리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뿐이었습니다. 우리도 세상 것을 가지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면서, 이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하나하나 줄여나가면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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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친구란 무엇인가?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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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주시고,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습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마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루카 1,35)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미 빛나는 믿음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토록, 아버지께서는 변화의 힘을 주시고,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 7)
이는 당신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곧 우리가 어떻게 살 때 변화를 입을 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이며, 그렇게 살 때 변화를 입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말씀의 권능을 수락하는 일’이요, ‘말씀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에페 21-22 참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자신이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명’(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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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을 첫 번째로 예고하신 후(마태8,31-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가르침을 주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변한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입은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마르9,2-3). 사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세상의 빛(요한9,12)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당신을 힘겹게 따르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얼떨결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17,4).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영광스럽고 황홀한 순간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실 좋은 것을 보면, 차지하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영광은 차후의 일이니,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지금 당장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의 터에서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살아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귀한 체험과 뜨거운 감동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던 신앙 체험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불쏘시개 역할입니다. 불쏘시개의 역할은 불이 붙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체험은 하느님께 대한 굳건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키우고, 그 신앙의 결실인 사랑의 봉사로 이어지는 데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손희송). 황홀한 체험에 집착해서도, 안주하고 고집을 부려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상으로 내려왔듯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의미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체험을 함부로 자랑하지 마십시오. 삶이 그것을 말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곧 체험하게 될 부활의 표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코린 3,18). 요한 사도는 고백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3,2).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마음도 해와 같이 빛나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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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이무기가 용이 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뱀이 오백 년을 수행하면서 기다리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오백 년을 수행하면서 기다리면 마침내 용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무기도, 용도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다만 열심히 노력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긴 말입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이 났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사제가 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3가지를 배우고 수련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지식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영성을 닦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실천하기 위해 체력을 키웁니다. 모든 이무기가 용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신학생이 사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있어도 신심이 부족해서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신심이 깊어도 능력이 부족해서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능력과 신심이 좋지만, 건강 때문에 그만두는 일도 있습니다.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제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먼저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애벌레는 땅을 기어다니지만, 나비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모른다면 나비가 원래는 애벌레였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신학생이 사제가 되면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사제는 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본당으로 파견되어 사목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공동체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습니다. 모임의 자리에서는 상석에 앉게 됩니다. 한 말씀을 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먼저 배식을 받습니다. 버스에 탈 때도 앞자리에 앉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도 1인실을 사용합니다. 사제이기에 존중받고, 사제이기에 존중받습니다. 이렇게 사랑과 존중을 받는데, 익숙해지면 나비가 애벌레의 시기가 있었음을 망각하듯이, 왜 사제가 되었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제의 말과 행동에 바리사이의 자만과 율법 학자의 교만이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비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을 썩어가고 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빛이 났고, 옷은 새하얗게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이곳에 천막 3개를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모세, 하나는 엘리야 그리고 하나는 주님을 위한 천막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이무기가 용이 되는 성공의 이야기일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신학생이 사제가 되는 성품성사의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병자를 고쳐주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 풍랑을 잠재우고, 물 위를 걷는 표징이 아닙니다.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것입니다. 조롱과 멸시를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변모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었습니다. 교회는 전승에 따라서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데렐라처럼 신분이 변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들의 칭송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거친 손이지만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중인 이들에게 사랑의 미소를 보여 주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우리도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야 합니다. 기도의 산, 봉사의 산, 희생의 산, 나눔의 산에 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산에 오를 때 몸이 너무 무거우면 지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올라야 합니다. 욕심,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거룩해진 것은 내가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알아주고, 이웃들이 알아주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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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여름입니다. 많은 사람이 휴가를 즐기는 시기입니다. 누군가는 바다로 누군가는 산으로 누군가는 또 다른 휴양지로 휴가를 떠납니다.
그중 등산을 하며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산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신성시되는 장소입니다. 산은 그만의 기운을 가지고 있고 영험함을 지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우리 선조들은 조상의 묘를 고를 때 산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오늘 주님과 제자들 역시 산에 오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산 위에서 주님의 변모를 목격합니다. 주님의 변모 옆에는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있었습니다.
이는 분명 천상의 모습이었습니다. 너무 밝아 눈을 뜰 수 없는 상황과 분위기는 제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초막 셋을 지어 봉헌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엘리야와 모세와 대화하신 후 다시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말입니다.
산에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천상의 모습으로 머무르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다시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계신 곳은 바로 삶의 현자이기 때문입니다. 저 높은 산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변모는 우리에게 주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산을 내려와 우리와 함께하고, 우리 옆에 계심을 드러내 줍니다.
오늘도 산이 아닌 우리 삶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주님을 찬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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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와 성지순례
성지는 신앙의 유적지 혹은 신앙을 증거 한 사적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지순례는 그런 곳을 방문해 그곳에서의 일들을 다시 상기하고 그 정신과 신앙을 기도와 묵상을 통해 내 안에 체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곳 ‘갑곶순교성지’는 많은 분이 방문하시는 성지입니다.
저는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성지순례에 관해 이렇게 권합니다.
‘순례는 순례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순례는 이곳에서 기도하고 체험한 신앙과 기쁨과 감사함을 내가 사는 곳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채워 나중에 순례자 각자가 거처한 그곳이 성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권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곳이 ‘성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보시기에 거룩한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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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의 여정”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근심도 마라.
어려움 앞에서도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라.”(다산>
“곤궁에는 운명이 있음을 알고, 형통에는 때가 있음을 알고, 큰 어려움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성인의 용기다.”<장자>
두 어른의 말씀이 흡사합니다. 주님을 닮아 변모되어 가면서 믿음이 굳건해 질 때 우리 또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의 여정”’을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언제나 그랬다 시피 주님은 중요한 때는 최측근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대동하십니다. 오늘 복음 서두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성서에서 산은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자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장소를 상징합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시나이산, 엘리야의 갈멜산, 주님의 산상설교, 예루살렘 외곽의 갈보리(골고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루카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려 산에 오르셨고, 기도하시는데 모습이 변하셨다’고 말합니다. 기도중의 변모체험입니다. 기도는 믿는 이들의 모두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사랑도 그렇지만 기도에도 영원한 초보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은 둘 중 하나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주님을 나중에 우리의 천국 통과시 얼굴을 검사하실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닮았는지 또 닮지 않았는지가 판단의 잣대가 될 것이다. 기도는 사랑이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한결같이,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해 왔다면 주님을 닮을 것이다.”
제가 피정지도때 마다 기도에 대해 자주 강조해온 말마디입니다. 기도를 통한 주님의 변모요 우리 또한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면서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되어 갑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의 삶은 변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 애제자들에게 당신의 변모 체험을 선물하십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참 절묘합니다. 베드로의 멋진 신앙고백에 흡족하신 주님이셨지만 그것도 순간입니다. 스승이신 주님의 제1차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 놀란 베드로는 극구 만류했으니 자기가 상상해온 영광의 메시아와는 너무나 실망스런 수난과 죽음의 메시아에 베드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심한 꾸짖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말그대로 충격요법에 의해 베드로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함임을 깨닫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했던 제자들도 큰 충격의 상처를 받았음에 분명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의기소침한 침체된 분위기가 오늘 주님의 변모 사건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침체된 어둔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제자들을 배려한 주님의 각별한 변모사건의 은총입니다. 흡사 제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특별 산상 피정 시간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복음의 은총으로 빛나는 절정의 장면에 제자들 내면의 어두움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며 저절로 치유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미사중 감사송의 주옥같은 말씀이 참 은혜롭고 적절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모습이 온통 찬란히 빛나게 하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온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셨나이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이어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제자들입니다. 율법을 대표한 모세요 예언자들의 대표한 엘리야 두분은 에녹과 더불어 구약의 승천한 분으로 하느님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분들인데 이들과 대등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제자들은 스승이신 주님의 위상을 새삼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나눈 대화는 루가복음에서 보다시피 필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새로운 엑스도스 사건에 이어 부활의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후대의 우리들은 이를 알고 있지만 제자들은 이를 깨달았을리 만무했고, 그리하여 복음 말미에서 보다시피 당신이 부활할 때까지는 일체 함구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부활후에야 비로소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파스카 신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의 반응이 순박하기가 베드로답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또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호의가 이해는 됩니다만 주님의 뜻을 망각한 완전한 오해요 착각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의 은총을 독점할 수도 없거니와 신비체험에의 집착은 결코 도움이 못됩니다. 하느님 친히 베드로의 눈먼 열광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바로 베드로를 위시한 두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워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오늘 복음의 결론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산상에서의 주님의 변모신비체험은 끝났고 주님을 따르는 단조롭고 무미한 일상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변모신비체험의 추억은 제자들의 일상에서 샘솟는 내적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내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서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만남에서 주님을 닮아 변모되어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미 제1독서 다니엘서에서 예언되고 있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지금도 살아 계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주님을 닮은 우리의 변모와 더불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임을 믿고 깨닫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하루만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변모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저에게는 일상의 모두가 특히 이른 새벽 날마다 강론 쓰는 시간이,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 주님을 닮아 변모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우리가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 공동전례기도은총이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변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1요한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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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당신>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마르 9,8)
다만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만나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느끼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다만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다만
당신을
닮게 하소서
당신
지니신
무엇이 아니라
오직
당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
이루실
무엇이 아니라
오직
당신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당신
베푸실
무엇이 아니라
오직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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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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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거렸다.” (9,29)
오늘 복음의 배경은 산입니다. 산은 평지와 달리 높은 곳이며, 높다는 것은 하늘과 가깝다는 말입니다. 흔히 동양적인 관점에서 선인仙人과 속인俗人의 차이란 그 존재가 살아가고 있는 상태, 곧 사람이 생활하고 있는 곳이 산과 계곡에 따라 차이가 생깁니다. 산은 신성한 곳이고 초월적인 곳이며, 산은 모든 강물이 시작되는 곳이자 온갖 생명을 품고 있는 어머니 품과 같습니다. 높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며 소명받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장소로 알려졌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곳(탈3,1)도,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났던 곳(1열19,8)도 모두 산입니다. 그들은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소명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높은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았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번쩍인”(루9,29) 변모의 핵심인 빛은 곧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빛에서 나신 빛’(=니케아신경)이라고 고백합니다. 순수한 빛, 하느님이 계시는 곳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암흑과 어둠은 없고 완전한 빛, 광명만이 있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보다 마태오 복음에는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애졌다.”(17,2)하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빛으로 빛의 찬란한 광경을 목격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그의 동생 요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높은 산의 명징한 정기와 찬란한 빛으로 고양된 제자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지금껏 줄곧 스승이신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기적을 보면서 느꼈을 행복과 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느꼈을 행복은 전혀 차원이 다른 행복감이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이런 예수님 본 모습, 참모습을 목격한 베드로는 주체할 수 없이 벅찬 환희와 전율에 들떠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9,33)라는 표현은 그저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른 행복감에서 터진 감사와 찬미의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만일 우리 역시도 그 자리에서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면 베드로처럼 그렇게 주님께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이는 곧 ‘주님, 지금 제가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음이 얼마나 좋은지 더 이상 말로 표현 못하겠습니다!’라는 탄성은 다름아닌 빛에서 나신 빛 자체인 예수님과 함께 있음에 대한 베드로의 진솔한 행복감의 표현이라고 느낍니다. 그러기에 베드로의 ‘좋습니다.’ 표현의 의미는 놀랍다는 뜻인데, 지금껏 자신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그 순간의 기운으로 압도당해 무섭고 떨린 상태임에도 그 경험이 참으로 좋다는 뜻입니다. 이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지만, 참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행복감이었을 것입니다. 지복직관의 행복!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 조건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창조의 본래 목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인간 존재는 행복하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유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근심 없이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멸이나 무시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이라 부르는 그 자체를 느끼며 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참된 행복한 분이시고 참된 행복을 사셨던 예수님께서 산에서 놀랍게 변모하신 모습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고자 한 의도는, 다름 아닌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희망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초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당신의 변모 축일을 지내는 저희에게 당부하시는 것이 있다면, 비록 삶이 힘들고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삶을 충만하게 살고 허투루 살지 말며 철저하게, 처절하게 살면서 행복하게 살라는 당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동요나 여하한 주저함이나 머뭇거림 없이, 온몸과 마음과 정신과 심령을 다해 지금 여기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일을 온 존재로 몰두하며 온 힘을 다해 결단하며 살아갈 때 참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9,33)라고 말하는 베드로를 철부지 같다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산은 오르면 산에서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베드로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베드로에게 있어서 산에서 체험이 너무도 강렬했기에 여기에 머물고 싶습니다, 는 표현은 기도 생활을 통해 혹은 일상생활 가운데 하느님 체험을 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바람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만난 그 상태에서 오래도록 머물러 있고 싶은 게 인간의 강력한 소망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도 훗날 예수님의 부활 체험 이후 깨닫게 되었으니 이런 하느님 체험을 만끽하기 위해서 필연코 십자가의 길, 고난의 여정을 지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이제 영광스런 빛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난 뒤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9,35) 라는 말씀을 실천하고 그분의 뒤를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따랐던 제자들처럼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은 이제 그 어떠한 고통도 괴로움도 이겨낼 힘이 솟구칠 것이며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이 가신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느님과 하느님의 빛, 하느님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 보고 느끼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하느님의 완전한 영광의 빛 안에서 오래오래 머물게 될 것입니다. “주님, 당신 빛으로 빛이신 당신을 뵈옵게 하옵소서.” (시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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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 촛불 켜고 묵주 들 때에 주님 영광이 / 굿뉴스 게시판
박윤식 [big-llight] 2024-08-05 ㅣNo.174794
우리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의 40일 전인 8월 6일에 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낸다. 이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드러내시고자, 이 변모된 모습을 높은 산에서 미리 표징으로 보이셨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기도하려고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바로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서서히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제자들이 주위를 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서 계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실 때, 베드로는 그분을 꼭 붙들고 말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실망하는 제자들 마음을 아시고는, 세상 창조 이전에 갖고 계신 당신 영광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이셨다.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시며,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모세와 엘리야도 증언하였다. 이전에 일러 준 스승의 부활을 전혀 감도 못 잡는 제자들에게, 율법과 예언서를 상징하는 두 사람을 내세우고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장차 보여 주실 수난과 부활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 표징으로 부활의 믿음을 가지라면서.
사실 한적한 외딴 높은 산에 기도하러 오르심은 하느님 초월성에 대한 경외심과 그것에 대한 열망을 상징한다. 그 길은 우리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몸소 이끄신다는 점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당신 모습을 실제로 보여 주셨다는 대목에서, 초월은 우리의 의식과 감정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드러남’에 나를 내어놓는 것임을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세계 밖에 존재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건 감싸 주시면서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나무들을 감싸고 새들을 감싸고 들판의 풀들과 미물(微物)까지도 감싸 주시는 분이시기에. 세 제자는 예수님의 변모에만 놀란 것만이 아니리라. 만물 안에 숨겨진 창조주의 모습을 비로소 깨달았기에 감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변모 사건은 은총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현양에 앞서 모세와 엘리야가 보는 앞에서, 제자들에게 드러내신 거룩한 변모는 사랑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자비스러운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우리는 고통과 희생 없이 영광만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신비이다. 그러기에 거룩한 변모는 주님 십자가를 충실히 따를 때 우리가 받을 영광을 알려준다.
이처럼 우리도 제자들이 스승의 변모를 본 그 거룩한 영광이 언제였는지를 늘 묵상하자. 바로 기도하실 때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게다. 거룩하게 변모하려면 먼저 기도해야만 하리라. 우리는 종종 겉모습에만 초점을 둔다. 옷 하나 들고서는 거울 앞에서 요리조리 몸을 비틀면서. 그렇지만 정작 참모습은 곧장 기도 때에 드러난다. 그것도 촛불 켜놓고 묵주 들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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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미사의 감사송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의미가 무엇인지 뚜렷이 밝혀 줍니다.
주님의 변모는 그분께서 본래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시는 사건입니다.
장차 그분께서 수난과 죽음을 겪게 되셔도, 제자들에게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을 잃지 않게 하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마르 9,9)
이 변모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비로소 제자들에게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러니 아직 부활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님의 수난을 겪는 이들의 처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의 시점에서 다시 복음을 읽어 봅시다.
예수님께서 수난받으실 때 제자들은 그분의 부활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도 주님의 수난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전능하신 분께서 왜 그렇게 무력하게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셔야 하였는지 인간의 논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변모 때에 그 자리에 있었던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가 이를 보여 줍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을 이야기하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난 그 순간에, 그분의 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하리라는 것까지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수난과 죽음이 예수님의 무력함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서 참으로 하느님께서 오신 분이심을 보여 주는 표지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들의 증언이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주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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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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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우리가 오늘 들은 부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르코복음은 오늘의 말씀을
'엿새 뒤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뒤'라는 단어는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
오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다음
엿새 뒤에 변모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이야기,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이나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 출발점으로 볼 수 있지만
마르코 복음사가가 수난과 부활 예고에서
'그 뒤에'라는 시간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수난과 부활 예고에서 변모 사건까지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묶어 놓았습니다.
일주일은 우리에게
창조 이야기로 익숙한 시간입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창조가 완성되었습니다.
즉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완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그 사실을 적용하자면
수난과 부활의 예고는
변모 사건에서 완성됩니다.
말로써 전해주신 것을
실제 모습으로 보여주시면서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부활은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아니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수난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활이 가능한 일인가는
평소에 생각하기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를 보았어도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이야기,
수난과 부활 예고와
오늘의 변모 이야기에 똑같이
'다시 살아난다'는 표현이 있는데
비록 제자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정말 부활하신 다음에도
한 동안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부활은 정말 이루어질 것임을
변모 사건으로 몸소 증명하십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믿지 못하더라도
정말 일어날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미래에 언젠가 변모 사건을 떠올린다면
그때에는 온전히 이해하고
온전히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가능한 일임을
우리가 꿈꿀 수 있도록 미리 보여주십니다.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희망할 수 있게
용기를 주십니다.
변모는 당신의 화려함을 자랑하시는 것도
인간과 당신이 다름을 강조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변모는
우리의 변모를 앞서 이루시는 것이며
그렇게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좌절하기보다는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희망의 끈을 잡고 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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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원판 불변의 법칙!
평생토록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평생토록 같은 고백성사를 보고 있는 저 자신, 그리고 죽어도 안 변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한 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원판 불변의 법칙!’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법칙인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봐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짐하고 또 결심하면서 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지만, 아직도 진정성 있는 변화는 요원합니다.
아직도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젊은 시절의 미성숙과 불완전과 나약함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바람 한 줄기에도 심하게 요동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래고 질긴 악습을 아직도 끼고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저 위에서 오는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변화와 회개를 갈구하는 간절한 기도만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플러스 알파로 하느님 편의 개입과 도움, 은총과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변화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 다음, 겸손하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하느님의 손길에 완전히 내맡기는 전적인 봉헌이 필요합니다.
사실 변화되지 않고 사는 것이 편합니다.
굳이 애써 회심이나 회개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신 단 한번 뿐인 인생, 손톱만큼도 변화되지 않고, 전혀 성장하지도 않고, 부끄러운 이 모습 그대로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송구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 하느님의 은총 역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회개의 삶이 시작될때 뒤따라오는 하느님의 축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치 누에고치가 허물을 벗고 한 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분위기입니다.
회심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축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병고 역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은총의 장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또 다른 얼굴로 변모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모습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어여삐 받으실 우리의 봉헌입니다.
우리가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 이기적인 신앙을 떨치고 보다 이타적인 신앙에로 나아가는 것,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성숙된 신앙에로 성장하는 것,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
죄에서 해방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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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했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시해준다.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도 이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고 지향해 가면서, 삶의 어두운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하여야 한다. 그 영광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생략할 수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시련과 박해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아직은 천상에 초막을 지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상에서의 싸움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온갖 괴로움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순종함으로써 극복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수난과 죽음의 시련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천상 영광에 오르셨다.”(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 44.)
예수님의 변모 때의 찬란히 빛나는 옷은 신적 세계의 표지이며 기쁨과 승리의 상징이다. 구름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현존의 독특한 상징이다. 세 사도에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해 주셨다. 이 찬란한 변모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우선은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4절)와,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구약성경의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때가 도래하는 그 순간에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버지의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계시해주는 말씀이다. 사도들에게 그 신비를 이해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갈바리오 위에서 예수께 일어날 사건은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인대장이 고백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라는 고백은 오늘 아버지의 말씀의 반향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변모가 지니는 의미는 우리의 삶이 고통을 부활의 기쁨으로 누릴 기회로 삼을 수 있고, 그러한 자세로 영적으로 성장하며, 그 안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가능했다. 여기서 예수님의 고통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데 있던, 고통이었다. 고통의 신비란,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신비라는 것이다. 고통 자체가 신비일 수는 없다. 그 고통을 통해서 참된 부활의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고통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는 같은 것이다. 이것이 오늘 주님의 변모 축일을 지내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이 우리의 모습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꾸어줄 기회가 된다면, 그 고통은 하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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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은총만으로’와 ‘성경만으로’가 서로 모순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변모하십니다.
주님의 변하신 모습을 보는 것은 은총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면 큰일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은총만이 아닌 말씀이 필요함을 아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정받는 것에만 목을 매면 그 기쁨에만
머물러있게 됩니다.
내가 인정받기에 합당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은혜를 잃어버립니다. 빈센트 반 고흐나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자살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나의 가치는 내 행위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란 그리스도를 닮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려면 그분을 마치 ‘거울’처럼 보아야 합니다.
‘금쪽이’에 한 아이는 거울을 보며 자기 모습을 보니까 말썽부리던 자기 모습을 버리고 착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은총만을 바라는 이상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은총중독’이라고 불러도 될 것입니다.
은총중독은 ‘말씀 빈곤’으로 갑니다. 말씀 묵상은 하지 않고 기도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례가 많습니다.
미사 때 강론은 무시하고 성체만 영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얀세니즘은 17세기에 등장했습니다.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이프르(Ypres)의 주교인
코르넬리우스 얀센(Cornelius Jansen)의 신학적인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얀센주의는 원죄, 인간의 타락, 신성한 은혜의 필요성, 예정론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부패했으며 선택된 소수만이 은혜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도덕성과 종교적 실천에 대해 매우 엄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떠한 행위를 할 때, 그 목적이 오직 즐거움(영적 즐거움 포함)이라면 그런 행위는 모두 죄가 됩니다.
얀세니즘이 엄격해서 이단이 아닙니다.
은총만을 강조하니까 자연히 예정설을 주장하게 되고 말씀의 역할이 약화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제10권 제33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성가의 말씀(가사)보다는 목소리에 더욱 감화될 때, 나는 벌받을 죄를 지은 것이고,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음악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고백하나이다.”
이와 비슷한 ‘정적주의’도 있습니다.
은총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를 깨지 않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싱입니다.
정적주의는 17세기에 발생했으며 스페인 신부 미구엘 데 몰리노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정적주의가 왜 이단일까요? 말씀의 실천 동안엔 마치 운전할 때 기름을 줄어드는 것처럼 은총도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채웠으면 운전을 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때 은총이 줄어들고 마음의 평화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은총과 말씀의 균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영성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수도원을 개혁하는 데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기도에서 얻어진 에너지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거기에 쏟아부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아드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듣도록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성가는 노래 부르는 이의 목소리나 멜로디도 중요하지만, 가사를 음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개신교처럼 ‘말씀만으로’라고 한다면 이는 말씀의 씨를 키우는데 태양과 비는 소용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은총만으로’라고 한다면 씨를 뿌리는 일은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어떤 것만으로 구원이 된다고 말할 때 서로 모순을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하.사.시.를 읽으며 매일의 나의 방향을 잡습니다.
방향은 잡혀있지만, 도로를 벗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하.사.시.입니다.
그렇다고 성체조배를 하지 않을까요?
성체조배와 말씀 읽기는 병행되어야 합니다.
차를 위해선 기름도 필요하고 운전 능력도 필요합니다.
영혼이 은총이라면 몸은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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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2-10).”
1) 하늘나라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 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날마다 폭염 경보가 내리는 상황에서는,
폭염도 혹한도 없는 나라, 태풍이나 화산 폭발이나 지진 같은 자연 재난이 없는 나라를 상상하게 됩니다.
또 지금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전쟁, 테러 같은 일들을 생각하면, 전쟁, 테러, 갈등, 분열이 전혀 없는 나라를 상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평화 안에서 기쁨과 행복만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또 진짜로 그 나라가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물론 믿고 희망한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자격을 갖춘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루카 20,35).
그 자격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사람만 그 자격을 얻게 됩니다(마르 8,34).>
사도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일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바로 그 하늘나라의 행복을 직접 체험했다고 증언한 것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사도들에게 믿음과 희망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그 체험이 별로 작용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사도들이 선교활동을 하면서 박해를 받을 때에는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체험’이 금방 믿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오랜 시간 동안의 묵상을 통해서 믿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체험을 하고서도 믿음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2)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한 말인데, 인간의 언어로는 그 모습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 하얗게 빛났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를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다는 말은,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나눈 대화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관한 대화입니다(루카 9,31).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황홀해서 이곳에서 이대로 영원히 살면 좋겠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것이고, 자신들은 그냥 노숙을 해도 괜찮다는 뜻도 들어 있는 말입니다.
<그만큼 행복하고 황홀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라는 말은, 황홀경에 취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겁에 질려 있었다.” 라는 말은, 자신들이 체험하는 일들에 대해서 ‘깊은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뜻입니다.
3) 사도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것도
중요한 체험이고, 증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증언해 주신 말씀, 즉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신원보증’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에서 ‘그의 말’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활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분부는,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신원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할(증언할)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안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할(증언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신앙의 증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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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 복음의 내용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주님의 변모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즉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루시는 한편,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겪기 전에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먼저 체험함으로써, 앞으로 닥쳐올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힘과 용기를 얻도록 배려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오르신 높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거룩하게 변모하는 한편, 그분의 옷이 눈부시도록 새하얗게 빛났다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지요.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는 것은 그분의 본성이 빛이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빛이라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 앞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앞으로 그분께 닥쳐올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모세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보여준 예언자입니다. 엘리야는 세상 종말의 날에 마주하게 될 하느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하는 예언자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그분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와있음을 드러내는 ‘임마누엘’의 소명을 띄고 오셨음을, 그런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잘 따르고 지키면 세상 종말이 무시무시한 심판의 때가 아니라 고대하던 하느님 나라에 드디어 들어가게 되는 기쁨의 때가 된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지요.
그리고 하느님께서 직접 그 진리를 확증해 주십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뒤덮은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온 겁니다. 예수님이 당신으로부터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확인은 이미 그분 세례 때도 한번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확인에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권고가 추가됩니다. 오늘 잠깐 맛보기로 체험한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나중에 제대로 누리고 싶다면,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다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인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광은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야만, 주님을 위해 그리고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끌어 안아야만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또한 애벌레가 번데기에서 머무는 2주 남짓한 시간을 통해 나비로 변화되는 것처럼, 우리도 앞으로 보내게 될 40일의 시간 동안 주님의 말씀과 뜻을 충실히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닮은 자녀의 모습으로 변화되자는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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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이 가득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다니 7,9)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다니 7,10)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다니 7,13)
다니엘 예언자가 본 꿈의 환시 장면입니다. "연로하신 분"은 성부 하느님을,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성자 예수님을, 그리고 성부에게서 뿜어 나오는 불길은 성령이시니, 장엄하고 숭고한 성삼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자리입니다.
다니엘 예언서를 읽어 보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네 짐승들의 환시가 먼저 나오고 이어서 오늘의 대목이 나옵니다. 혐오스런 광경에 이어지는 영광의 장면이 극명하게 대비되지요. 놀라는 예언자에게 환시 속에서 천사가 먼저 등장한 네 짐승들과 나중의 천상 거룩한 법정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그 거대한 네 마리 짐승은 이 세상에 일어날 네 임금이지만, 결국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 그 나라를 이어받아 영원히, 영원무궁히 차지할 것"이라는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이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현장은 황제나 대사제의 대관식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성삼위 하느님께서 악을 물리치시고 사랑과 정의로 통치하시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며 언어와 민족과 나라가 다른 모든 이들이 성삼의 하느님을 섬기며 그 빛을 받아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거룩히 변모하신 높은 산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르 9,3-4)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본 빛이 사람의 손에서 나올 수 없는 색의 흰빛이었다고 전합니다. 앞서 읽은 다니엘 예언서의 장면이 꿈의 환시였다면 지금 이 순간은 현실이고 실재입니다.
게다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셨으니 제자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 각별히 친밀했던 이들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거룩한 사람으로 섬기는 성인들입니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르 9,7)
성부 하느님은 목소리로, 성령은 구름으로 성자 예수님을 에워쌉니다. 이 역시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이 충만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다니엘 예언서의 장면과는 달리, 이 순간에는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말을 거셨지요. 제자들은 관조자나 관찰자의 신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상대자가 되어 그분 말씀을 듣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이 세상과 분리된 어느 곳에 영광스러이 따로 떨어져 자리하시지 않고, 하늘을 뚫고 세상에 내려오셔서 인간과의 구체적 관계 안으로 들어오심을 상징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 말씀의 내용은 소개와 명령으로 간결히 이루어집니다. 즉 예수님을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소개하시면서, '그러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시지요.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증하시는 소개장은 "사랑"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무슨 신분이나 타이틀, 직업이나 주거지로 서로를 소개하는 것과 달리 하느님은 사랑의 관계로 아드님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분'라는 자격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영원무궁히 존중받고 섬김 받으셔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독백에 그쳐서는 안 되는, 명백히 응답이 요구되는 말씀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응답과 실천을 통해 이 말씀을 실현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의 말을 듣는 것. 이것은 하느님께서 말을 거셔서 그분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 모든 이에게 부여되는 거룩한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의 얼굴을 관상하는 오늘, 그분의 영광에서처럼 그분의 수난과 고통, 죽음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가난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우리 형제와 이웃의 얼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존중받고 환대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듣고 경청하며 이 사랑을 확인하고 키워나가야 하지요. 그리하여 예수님 영광의 빛이 우리 마음에 가득할 것이고,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영광을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실현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현실이 되시고 실재가 되어 가는 기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 영광의 빛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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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얗게 번쩍이는”
오래 전에 뉴욕의 한 공동체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모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켠에 연세가 드신 분이 한국에서의 당신의 화려한 경력(?)에 대해 소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천주교 신자가 되기 전에는 주위에서 알아 주던 말 그대로 ‘쪽집개 도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 일을 하다보니 자신에게도 식견이 생겼는데, 천주교 신자를 대번에 알아 보는 경지에도 올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보니 우리 일부 나쁜 신자 중에 관상이나 점을 보러 있기는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끝말에 자신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관상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은 거의가 천주교 신자였다는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개신교 불교 다 각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천주교의 특징은 보일 듯 말듯한 기쁜 얼굴이고 조용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나쁜 신자들을 놓고 이런 말을 하자니 그렇기는 하지만 그분은 바로 이 점이 가톨릭으로 들어와서 세례를 받고 이민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결론 때문에 오늘 예수님의 모습과 연결시켜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족집게 할머니의 말이 다는 아니겠지만 사람은 저 마다의 삶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쳐다만 보아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심술궂은 심통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보다 더 다양한 모습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얼굴’은 하루 아침에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덕이 있고 믿음이 있고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가득하다면 우리 얼굴은 기쁨이요 행복이며 참다운 평화일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목격한 주님의 기도하는 모습은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눈처럼 희게 빛나는 모습이었고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을 나누는 그 광경이 황홀해서 사도 베드로는 천막을 셋이나 그곳에 짓자고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묵시 중에 바라본 메시아의 모습도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양털과 같았습니다.
주님께서 높은 산에서 보여주신 그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수난과 죽음을 딛고 보여주시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다니엘이 예시한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맞이 할 영광을 이제는 주님께서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새겨진 미래의 부활의 주님 모습은 주님 죽음의 고통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두고두고의 위로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희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된 모습을 우리도 나누어야 하겠지요?
때로 고통스럽고 힘든 순간이 있다하더라도 그런 것들에 우리가 찌프러지지 말고 주님의 부활의 희망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닮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좋으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이제 우리가 살며 가져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 되도록 기도하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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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눈으로 볼 수 없는 구약의 하느님에 대한 표현을 다니엘의 환시를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다니엘은 다시 환시 속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나타나 하느님 앞으로
인도되는 장면을 또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민족들을 통치하는 영원한 권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새 증언판을 들고 내려 올 때 그의 얼굴이 빛나서
사람들이 쳐다보지를 못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백성들 앞에서는 너울을 가리고 하느님께 나아 갈 때는 너울을 벗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영역을 표현할 때 빛처럼 빛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 중에 요한, 야고보, 베드로만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그곳에서 주님의 모습이 새하얗게 변하시며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이 들려옵니다.
다니엘서에서 표현하는 하느님 아버지와 사람의 아들의 그 장면이 높은
산에서 있었던 예수님 변화되는 모습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산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제제들은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10절)의 의미를 몰라서 서로 물어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서야 제자들이 제대로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인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당장은 예수님의 부활을 못 깨닫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으면서도 부활의 참된 모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역할은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 다가오는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음을 맞아야 하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으며
또 믿을 수 있겠어요?
깨닫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이 사실 인간의 조건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도 그러한 가능성은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신앙인에게 있어서 주님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으면서도 때로 의심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인간으로서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체험하고 일생 그분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며 생을 마감했던
사도 바오로는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제자들에게다 당장은 이해되지 못했지만 장차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모습이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 논리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또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간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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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심흥보 베드로신부님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JkYX/514
가끔 기도할 때 느끼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매 순간 다르게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그 때처럼 오시지 않고 늘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지난 번 그 체험은 추억의 단편일 뿐, 그 편린이 오늘의 체험과 같을 수 없고, 그 편린들을 다 합쳐도 주님이시라고 확언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사고와 체험영역 안에 가둬둘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고정적인 한 개념으로 구체화시킬 수도 없고, 하나의 개념이나 명제로 정의하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저 추억들이 주 하느님을 만나고 연결하는 하나의 고리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산에 오르시어 새하얗게 빛납니다. 그 때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영광스럽게 변모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장면이 너무나 좋고 또 주님을 정성껏 모시겠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5)라고 제안합니다. 마르코 복음서 기자는 이러한 베드로의 제안을 두고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6절)라고까지 평가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는 베드로의 구체적인 제안에 이러저러한 반응 없이 그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라는 답변만이 들려왔다고 적음으로써, 베드로의 청원이 적절하지 않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합니다.
탈출기에 보면, 에집트에서 탈출한 후에 사막에서 교육을 받으며 머무는 동안, 주 하느님께서 매일 먹을 만나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날의 필요 이상으로 만나를 모아둔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에 “거기에서 구더기가 꾀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탈출 16,20)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광스럽게 받아 누리는 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과 같이 나누어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혼자 간직하려고 더 큰 창고를 짓고, 더 높은 담을 쌓기 시작하면, 잉여된 만나에서 구더기가 꾀고 고약한 냄새가 나듯이,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이웃에게 폐악을 끼치게 됩니다. 주님을 오롯이 흠숭하는 마음으로, 형제자매들과 공존의 길을 마련함으로써,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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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자의 삶
<2024.8.6> 아침을 여는 묵상 (렘 46:13~28절)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자의 삶❞
❚ 영원히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회개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기 때문입니다(13~17절).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애굽 땅을 공격해서 황폐하게 만들 것에 대한 예언이 주어집니다.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가 위험 지역으로 선포됩니다. ‘...네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14절)... 애굽의 이웃 나라들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는 애굽 역시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멸망할 것을 강력히 암시해 줍니다. 애굽의 패배는 전투 준비의 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그 전투가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장사들은 바벨론 군대의 칼날 앞에 무기력하게 쓰러지며 황급히 도망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의 군사들을 밀어내셔서 서지 못하게 하시며 넘어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 위에 엎드러지게 됩니다(15~16절). “애굽의 바로 왕이 망하였도다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17절)라는 표현은 “기회를 놓친 허풍쟁이”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칼날을 피해 고향으로 도망하는 군사들은 애굽 왕 바로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면서 그를 “기회를 놓친 허풍쟁이”라고 부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을 진정으로 신뢰할 때, 결코 좌절하거나 놀라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다가오는 모든 문제들을 처리하시고 궁극적으로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우리는 다윗이 부른 노래를 통해 위로 받아야 합니다.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 73:28)...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의 모든 삶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피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안전지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절대적인 풍요로움은 없기 때문입니다(18~26절).
애굽 왕 바로는 요란한 소리를 내는 ‘허풍쟁이’에 불과하지만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승리를 이끄시는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강력한 바벨론 군대의 공격 앞에 애굽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짐을 꾸리고 포로로 잡혀 갈 준비를 하는 것뿐이었습니다(18~19절). ‘아름다운 암송아지’(20절)...는 애굽의 부요함과 방탕함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풍요 속에서 쾌락에 빠져 있는 애굽이 북쪽에서부터 침략해온 바벨론 군대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갈대아 군사들이 아름다운 암송아지를 죽이고 난도질하니 애굽의 풍요는 끝날 것입니다(24절). 아몬은 남부 애굽의 수도인 ‘노’의 최고 신입니다. 자신들의 신을 의지하며 전투를 벌이는 애굽을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심으로 자신이 참 신이심을 증명하실 것입니다(25절). 그러나 애굽이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할 것이나 훗날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6절).
평화롭고 풍요로울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면 원수의 포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좋은 것을 다 잃어버리고 절망과 고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과 같은 평온하고 윤택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내 앞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자리하지 못하도록 더욱 신경 쓰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걸어나아가야 합니다. 각종 불화와 전쟁과 질병과 사고의 소문으로 이미 평안함이란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하나님만을 의뢰할 때, 폭풍 속에서도 고요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절대적인 풍요로움은 없기에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공의롭게 판단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27~28절).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예언이 등장합니다. 예언의 대상은 ‘내 종 야곱’, 곧 ‘이스라엘’입니다. 예언은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는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이 명령은 세 가지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포로로 끌려갔던 땅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그분의 종 야곱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셋째는 이스라엘을 파괴하고 백성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 나라들은 완전히 멸망할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요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범한 백성을 묵인할 수 없기 때문에 철저히 벌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여 복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전쟁에서 패하고 노예가 되어 끌려가지만 결국 구원을 얻는 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을 믿고 환난 중에도 찬송과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환난과 절망 가운데서 망할 자가 아니라 회복되고 더 큰 은혜를 입을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큰 환난을 만난다 할지라도 진정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절망과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일임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합니다. 공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애굽과 같은 평온하고 윤택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에 더욱 조심하여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의 세력이 자리하지 못하도록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렘 46:13~2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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