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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
삼상16:1-13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두 번째 왕으로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실 때 사울은 정말 겸손한 왕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는 성실한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서 합당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를 뽑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울은 하나님 눈 밖에 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하나님께 돌려야 될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돌리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대신에 백성들의 눈치를 살피는 왕이 되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고 사울을 대신할 왕을 세우게 되는데 오늘 본문이 그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왕을 세우기로 작정을 하시고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으로 보내십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고 제사장들과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제사에 초청합니다.
그리고는 이새의 아들들을 하나하나 면접을 하는데,
큰 아들 엘리압부터 일곱째 아들까지 다 면접을 보았음에도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내가 택한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답답한 것은 사무엘 선지자입니다.
분명 이새의 아들가운데 내가 택한 자가 있다고 하셨는데 막상 아들들을 다 보아도 그들은 아니라고 하시니 얼마나 답답하였겠습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아버지 이새에게 묻습니다.
‘아들들이 다 왔느냐? 오지 않은 아들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막내아들이 하나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해서 마지막 면접을 보았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이 내가 택한 자니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십니다.
여기에서 한 번 생각해 보야 할 것이 왜 아버지 이새는 막내아들 다윗을 데려가지 않았을까요?
그 유명한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제사를 집례 하는데, 아들들을 데리고 오라는 초청을 받았을 때 얼마나 영광스러웠겠습니까?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몰라도 어째든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누구를 데라고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많았을 것입니다.
누구 하나는 남겨서 양을 돌보야 하는데 누구를 남길 것인가? 많은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민 끝에 결국 막내아들 다윗이 남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무엘 선지자가 아들들을 면접하는 장면을 보면 그 이유가 나타납니다.
장자 엘리압이 제일 먼저 사무엘 선지자 앞에 소개되었을 때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할 정도로 사무엘 선지자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엘리압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당대에 최고의 하나님의 종이었던 사무엘도 사람을 외모로 보는 잘못을 보였습니다.
하물며 다윗의 아버지 이새야 더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새는 자기 아들들의 외모를 보고, 겉모양을 보고 막내아들 다윗을 집에 남겨두고 다른 일곱 아들들을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올바른 삶인 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1.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 ‘코람 데오와 코람 스마트 폰’으로 되어 있었는데, 제목을 보면서 무슨 내용인가 쉽게 짐작이 갔습니다.
예배시간에 ‘코람 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코람 스마트 폰’ 스마트 폰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교회의 성도들이 예배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 폰 앞에서 고개 숙이고 스마트 폰을 검색하는 것에 몰두하는 현상을 우려스럽게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배나 우리의 삶이나 신앙생활은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의 삶을 향하여 잘 했다고 칭찬하고 인정하십니다.
그 삶이 진정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입니다.
아무리 사람 앞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그 삶은 실패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은 코람 스마트 폰 뿐 아니라 코람 인기, 코람 권력, 코람 명예, 코람 머니(돈) 의 삶을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에 사람에게 특별히 권력자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할 말을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정권이 바뀌었다고 예전과 반대되는 증언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어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 앞에서, 인기 앞에서, 명예 앞에서, 권력 앞에서, 돈 앞에서 살아가면 그 삶은 신앙적으로 실패한 삶이 되고 맙니다.
오늘 우리들은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칭찬받고 쓰임 받는 삶이 됩니다.
2. 둘째로, 우리는 외모의 편견을 깨야 합니다.
사무엘의 초청을 받고 아들들을 데리고 갈 때 누구를 남겨야 하고 누구를 데리고 가느냐 하는 문제는 이새에게는 매우 고민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버지 이새는 아들들을 잘 알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인간인지라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잘못을 범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누구보다도 아들들에 대하여 잘 알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아버지가 왜 다윗을 데려가지 않았을까요?
①나이가 적은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새는 제사를 드리는 중요한 일에는 어느 정도의 나이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가장 어린 다윗을 남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②장래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사무엘이 보았던 외모는 히브리어로는 눈, 눈빛의 의미입니다.
사무엘이 보기에 엘리압은 눈빛을 보아도 장래성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에 비하면 다윗은 별 장래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③나이가 적음에도 다윗이 양을 잘 쳤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면 많은 아들들을 데리고 가야 했는데, 그렇다고 양을 내팽길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한 명을 남기되 혼자서도 양을 잘 돌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다윗이었고 결국 다윗이 남게 되고 다른 형제들이 가게 되었습니다.
이 추론은 다윗이 참으로 성실한 사람이라는 반증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버지는 다윗을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아가야 할 아들로 생각하고 어릴 때부터 양을 적극적으로 맡겼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장신대 총장이었던 장영일 교수에 의하면 구약시대에 목동은 가장 하층계급에 속한 자였고 가장 못 배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가정에서도 제일 못난 자식에게 다른 것으로는 성공할 수 없으니 너는 양이나 쳐서 먹고 살라고 목동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다윗이 어릴 때부터 양을 치고 지금 가장 나이가 어린 아들임에도 양을 맡긴 것을 보면 다윗은 이미 어릴 적부터 별 볼일 없는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일에 소질이 없었고 양을 치는 일은 즐겁게 잘 하니까 너는 양이나 치면서 살아가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다윗은 별 볼일 없는, 별 특징이 없는 그저 그런 아들이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가장 확률이 적다고 생각한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부으시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외모의 편견을 깨트려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외모에 대한 편견을 깨트려야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외모의 편견도 깨트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십니다.(고전1:27-28)
그러기에 하나님은 지렁이 같은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셨고 룻과 밧세바와 같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양이나 치며 살아가면 딱 좋을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 두 번째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을 진대 ‘나는 이래서 안 된다’ ‘너는 이래서 안 된다.’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렇게 잘 났으니 잘 될 것이라’는 교만도 버려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편견을 깨트리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진실하게 인정받는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귀하게 사용하시고 잘했다 칭찬도 하실 줄 믿습니다.
3. 셋째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중심은 히브리어로 ‘레바흐’인데 이 말은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보면, '내면, 또는 양심, 속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외모를 보는 아버지에게는 별 볼일 없는 아들로 외면을 받았지만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을 맡기시는 큰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잘 몰라서, 제대로 사람을 보지 못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아시기에 하나님의 판단은 정확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외모나 용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진정한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직 어린 나이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높이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삶의 목표였고 삶의 기준이었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다윗은 많은 시를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시가 목동의 일을 하면서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쓰여 졌습니다.
누가 들으라고 쓴 것도 아니요 자기의 솜씨를 자랑하기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노래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싶어서 지은 시였습니다.
또한 다윗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귀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 있었지만 살려준 것입니다.
한 번은 다윗이 부하들과 함께 굴속에 숨어 있었을 때에 사울 왕이 혼자 굴속에 들어와 볼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은 다윗을 쫓던 사울 왕과 군대들이 너무 피곤하여 다 골아 떨어졌을 때 다윗과 부하가 사울의 진영으로 가서 사울왕의 창을 갖고 오는 장면입니다.
창을 갖고 올 정도로 그들은 완전히 골아 떨어졌습니다.
두 번 다 죽이려고 하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고 그러면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생각하기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기회같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옆에 있는 부하들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채근합니다.
다윗이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얼마든지 왕이 될 수 있었지만 다윗은 두 번다 사울 왕을 살려줍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의 중심에는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어떻게든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치관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이요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다윗의 마음, 다윗의 중심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처해있는 평소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 보고 안보고, 인정하고 인정안하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으로, 코람데오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더욱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어린 시절에 택함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되어 귀하게 쓰임 받고 칭찬받고 상급을 받는 교우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024.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