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육상화 제작으로 육상계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1982년 대한육상경기연맹으로부터 받은 감사패와 대륙체육사 사장 황이성 선생 우리나라 최초의 러닝화 브랜드는 무엇일까? 코오롱이나 프로스펙스를 떠올리는 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무려 66년 전인 1946년부터 전문 마라톤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서방의 육상 선진국에서도 전문 스포츠화가 거의 드물던 시절 기술적 첨단을 달린 황이성 사장(1909~1998)의 ‘대륙체육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이성 사장은 원래 낙원동과 종로3가에서 양화점을 운영하는 구두 제작자였다. 그는 젊은 시절 씨름을 하다가 다리를 크게 다쳐 불편한 몸이 되었지만, 누구보다도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구둣가게엔 운동선수들이 심심찮케 찾아와 수제 운동화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워낙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기성품 운동화가 없어서 제대로 운동을 하는 선수들은 운동화를 맞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제구두 제작소에서 스포츠화 브랜드로
황 사장은 그런 주문을 좋아했다. 비록 자신은 운동을 즐기지 못하지만 선수들을 도움으로써 기쁨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구둣가게는 점차 운동화 전문 제작소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온갖 종목 신발을 다 만들었지만 점차 육상화만 제작하게 되면서 명실공히 러닝화 브랜드로 거듭나게 됐다. 이 때가 1946년이다.
‘대륙체육사’ 간판을 달고 나온 육상화로는 트랙경기용 스파이크와 로드레이스용 러닝화 ‘압-슈스(Up-shoes)가 있었다. 당시 스파이크 제작은 매우 고난도 기술에 속했다. 선진국의 스포츠화 회사들도 어려워하는 분야였다. 대륙체육사는 가죽 신발 바닥에 철판을 덧대고 가느다란 못을 철판에 박은 스파이크를 선보였는데, 스파이크 못을 주물로 떠내고 열처리하는 기술이 매우 뛰어난 수준이었다. 품질에 걸맞게 인기도 가히 폭발적이었다.
아식스 수장의 제휴 제안 '단호히 거절‘
처음에는 외국 제품을 참조해서 신발을 만들었지만 점차 독자적인 제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발의 다자인부터 각 부위 가공기술을 모두 황이성 사장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했기에 분업화와 선진기술 제휴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마침 대륙체육사의 명성을 듣고 일본의 오니츠카 타이거(아식스의 전신, 1958년부터 마라톤화 생산)로부터 기술제휴 제의가 들어왔다. 브랜드를 크게 성장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황이성 사장은 ‘나만의 길을 걷고 싶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의 업체와 손을 잡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존중받아야 할 결정이지만, 이로 인해 대륙체육사는 양산브랜드로 성장할 기회를 잃었다)
‘압-슈즈’ 전문 마라톤화의 대명사가 되다
스파이크에 이어 대륙체육사가 내놓은 제품은 로드레이스용 러닝화 ‘압-슈즈’였다. (업슈즈를 당시 스타일로 발음한 것) 이 제품은 출시되자마자 입소문을 타며 수많은 육상선수들에게 애용됐고, ‘마라톤화=대륙체육사’라는 등식을 러너들의 뇌리에 깊이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압-슈즈가 나오기 이전까지 육상선수들은 생산현장에서 신는 작업화나 조악한 운동화, 인반 가죽신을 개조해 만든 러닝화 등을 신고 달렸다. 국민영웅 손기정 선생만 해도 올림픽 무대에서 일본의 ‘마라톤 다비’를 신고 달렸다. 다비는 일본 전통 신발을 신을 때 착용하는 일종의 버선인데, 노동자들이 신는 노동다비처럼 밑창이 붙어있어서 신발을 따로 신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다. 마라톤 다비는 이 노동다비를 보다 편하게 개조한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니 러닝화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리 없었다.
이에 반해 압-슈즈는 가죽으로 만든 외피에 고무 밑창(초기에는 폐타이어를 재활용)을 댄 것이어서 혁신적이라 할 만했다. 오늘날의 러닝화에 비하면 딱딱하고 무거웠지만 당시 선수들은 대만족이었다. 손기정, 함기용, 최윤칠, 서윤복, 최충식, 이창훈 등 마라톤 영웅으로 기억되는 쟁쟁한 선수들이 모두 압-슈즈의 고객이었다. (하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