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10
3월28일[주님 만찬 성목요일(성유 축성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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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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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삼일 예식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단어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건너감(Pascha)입니다!>
가톨릭교회 각종 전례 시기 가운데, 절정이자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성탄 시기도 큰 축제이지만, 이를 훨씬 능가하는 중요한 시기가 성삼일입니다. 그 어떤 때보다도 더 몸과 마음을 정돈하고 집중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사흘간의 교회 전례를 우리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극도의 고통과 번민, 수난을 통과하시고, 죽음 속으로 깊이 들어가신 후, 마침내 영광스러운 부활로 건너오신 파스카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가장 본질이요 핵심, 전부입니다.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그리스도 신자로서 다른 그 어떤 신앙 행위나 신심 행위보다 몇백 배, 몇천 배 중요한 이 성삼일 예식에 만사 제쳐놓고 반드시 참석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풍성한 가치와 의미, 중요성을 내포한 예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만찬 성 목요일 미사와 현양 제대 앞 성체 조배, 주님 수난 성 금요일 십자가 경배 예식과 십자가의 길 기도, 그리고 마침내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미사, 이 모든 예식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단어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건너감(Pascha)입니다.
이번 성삼일 기간 우리는 또다시 건너가고, 넘어서고, 극복하는 노력을 거듭해야겠습니다. 나를 넘어 이웃에게로, 이웃을 넘어 주님께로 건너가야 하겠습니다.
어제의 죄와 허물로 가득한 부끄러운 나를 넘어 주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죄사함을 받아 말끔해진 나로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끝끝내 용서하지 못해 생지옥을 살고 있는 나를 넘어 통 큰 용서를 통한 자유와 해방을 만끽하는 새로운 나로 건너가야 하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누군가로부터 서비스를 받고, 케어를 받는 나에서 서비스를 베푸는 나, 극진히 섬기는 나, 이웃의 발을 씻겨주는 나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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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AFRgFtup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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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씀으로 목욕한 사람인가?>
오늘은 사제들의 생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위해 사제직을 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찬례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예식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발을 씻어주는 행위는 분명 사랑의 행위로써 구원과 직결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고 온전한 어른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며 하느님 자녀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모가 주는 양식으로 부모처럼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는 목욕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리고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시며 유다만이 목욕을 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목욕을 하지 않은 채 성체를 영하는 것은 구원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체를 영하기 전에 하는 목욕은 무엇일까요? 성찬의 전례 전에 말씀의 전례가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유다는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성체를 영해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먼저 깨끗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보면 말씀으로 깨끗해진 이는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줌이 아니면 구원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기도 어렵지만, 받기도 어렵습니다. 사랑받으면 고마워해야 하고 또 사랑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기 더 어려운 이유는 내가 사랑받지 못한 처지를 하느님과 이웃을 원망하며 즐기고 있었는데 그 즐거움을 빼앗긴다는 데 있습니다. 지옥도 분명 하느님을 원망하며 이겨 먹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도 십자가의 고통이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케이티 파이퍼(Katie Piper)는 영국의 장래가 촉망되는 아나운서였습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시샘한 한 스토커에 의해 그녀는 얼굴에 염산 테러를 당합니다. 심하게 일그러진 그녀는 자기 얼굴을 보며 살 의욕을 잃습니다. 부모와 함께 지내며 자살 생각까지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녀가 세상에 나가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렇게 자신 안에 갇히는 게 지옥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으려면 먼저 부모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 자체로 지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녀는 용기 있게 세상 밖으로 나갔고 그 용기에 감탄한 사람과 혼인하고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고쳐주는 재단을 설립하기도 합니다.
빛을 피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어둠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거부하면 어떤 존재가 될까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사랑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지옥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사랑받아봐도 소용없습니다. 이것을 위해 말씀으로 깨달아 목욕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 『순전한 그리스도교』로 유명한 C. S. 루이스는 사랑을 피할 곳은 지옥뿐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안전한 투자는 어디에도 없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쉽게 상처받는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라. 그러면 분명 당신의 마음은 괴로움으로 찢어질 것이다.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다면 그 어떤 사람에게도, 심지어 그 어떤 동물에게도 마음을 주지 마라. 이런저런 취미와 사소한 사치들로 당신의 마음을 꽁꽁 감싸라. 이기심이라는 관 또는 장식함 속에 당신의 마음을 집어넣고 단단히 걸어 잠가라.
그러나 당신의 마음은 안전하고 깜깜하고 움직임도 없고 바람도 없는 그 장식함 속에서 변할 것이다. 그것이 다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깨뜨리거나 꿰뚫거나 또 바로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비극 또는 적어도 비극을 맞이할 위험을 피하기 위한 대안은 이런 지옥살이뿐이다. 천국을 제외하고, 당신이 사랑에 따르는 모든 위험과 동요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지옥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발을 씻어주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도 되고 세례성사는 물론이요, 고해성사도 됩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갈 곳이 지옥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말씀으로 목욕을 한 사람입니다.
먼저 말씀으로 목욕하지 않으면 성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성사를 영하지 않거나 성사를 영해도 유다처럼 소용없게 됩니다. 먼저 말씀으로 왜 성사가 아니면 지옥인지 깨닫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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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부터 교회는 파스카 성삼일을 지내게 됩니다. 성서는 파스카에 대한 의미를 3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파스카는 ‘지나가다.’라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 가서 예배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파라오는 모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이집트에 내렸습니다.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이집트의 모든 맏배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Mezuzah)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 표시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맏배를 치는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맏배를 구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의 문에는 문설주(Mezuzah)가 있는데 그 안에는 양의 피가 아니라 신명기 6장의 ‘들어라 이스라엘아!’가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앙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넣어놓은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너희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라.” 그렇습니다. 파스카는 단순이 양의 피를 바르는 것이 아닙니다. 파스카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파스카는 ‘건너가다.’라는 의미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바뀌어서 파라오는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앞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홍해바다’가 있었습니다. 뒤에는 막강한 파라오의 군사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 그러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오늘 너희가 보는 이집트인들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지팡이로 바다를 치니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무사히 홍해바다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파스카는 지팡이로 바다를 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할지라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세 번째 파스카는 ‘넘어가다.’라는 의미입니다. 지나가고, 건너가는 것은 장소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넘어가는 것은 존재의 의미입니다. 굳이 지나가고, 건너가지 않아도 됩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넘어가는 것은 존재의 의미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가는 것은 존재의 의미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것은 존재의 의미입니다. 죽음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것은 존재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땅위를 기어 다녀야 했던 애벌레는 죽음과 같은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차원의 삶을 만나게 됩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실 때 ‘부활’의 존재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파스카는 장소를 의미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신약의 파스카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내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존재가 바뀌면 세상은 그만큼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장소로 이끄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굳게 간직한다면 이 땅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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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3,1-15: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교회는 주님 만찬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다. 이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을 드러내셨다. 제자들과 그 후계자들은 예수님의 당부에 따라 이 만찬을 미사로 재현한다. 탈출기에서는 야훼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한 파스카, 즉, 죽음의 재앙이 건너간다는 과월의 축제로, 이를 영원한 법으로 삼아 대축일로 지내라고 하신다. 사도 바울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최후 만찬 때에 행하신 성체 성혈의 의미와 그 의식을 우리가 행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밀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되는 이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1절) 예수님께서 건너가심은 세상에 계실 때, 하느님의 고귀함을 벗고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으며, 우리에게 맞추어 당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이다. 즉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필리 2,7) 우리와 함께 계시던 분이 당신의 충만함(참조: 콜로 1,19; 에페 1,23)으로 돌아가신다는 의미이다. 제자들을 곧 떠나야 할 때가 오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분은 그 일로 그들의 사랑이 더욱 커지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아 그들이 장차 닥칠 끔찍한 일들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절) 여기서 끝까지는 그리스도다움을 뜻한다.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이 사랑은 만찬 때, 악마가 이미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은 후에 표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3절)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4절).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5절) 말씀이신 분,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분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분이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려고 무릎을 굽히셨다. 예수님의 이 모든 일은 그분의 겸손을 드러내고 있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손수 부으셨다. 어떤 좋은 일을 할 때는 겉으로만 보이는 행동만 할 것이 아니라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르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행위를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황송했다. 그래서 당황해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7절) 베드로는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8절) 한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8절) 베드로가 나중에 알게 되는 신비는 그들의 발은 곧 기쁜 소식을 전할 발이므로 그 발을 씻고 당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닦음으로써 아름답게 만드신 것이다. 이제 그들은 “나는 길이요”(요한 14,6)라고 하신 분께로 갈 수 있게 되었고, 또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깨끗한 발로 사람들에게 갈 수 있도록 아름답게, 제자들을 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비를 아직은 깨닫지 못하지만, 나중에 그것을 알고 나면 그 신비를 깨닫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9절) 하자 예수께서는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10절)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다. 예수님은 그를 다른 제자들처럼 영예롭게 대하시며 그에 대해서도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유다는 발을 씻어 주시는 그 사랑을 십자가의 못으로 갚아드리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12절) 하신다. 그리고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14절)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주인으로서 종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더러움도 씻는 것이다. 형제의 발 앞에 몸을 숙일 때, 겸손해지며 더욱 확고해진다. 이 겸손으로 교만해지려는 마음이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15절) 예수께서 먼저 당신의 모습이 사랑하고 봉사하는 모습이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이웃으로부터 멀리할 때가 아니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더 가까이할 때이다.
이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이 거룩한 밤에 이 제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천상 식탁에 앉을 때까지 당신의 말씀과 생명으로 우리 모두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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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무렵, 나자렛 회당에서 있었던 일을 전합니다. 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이어서 그랬을까요? 그 어떤 이야기보다 예수님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정리하여 줍니다.
첫째로, 그분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공동체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야말로 그분의 가장 중요한 일터였습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안식일’과 ‘회당’에 상응하는 그리스도교적 요소는 ‘주일’과 ‘성당’입니다. 과연 우리의 주일과 본당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자리가 되고 있는지요?
둘째로, “성경을 봉독”하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의 지표였고, 말씀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의 핵심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이 전하는 공생활의 첫 번째 가르침을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시작하신 부분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기름부음’이라는 축성을 통하여 성령께서 내리시고, 그 뒤에 사명과 임무가 수행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절망과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넷째로,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합니다.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호기심, 궁금함, 자랑스러움, 우려 등이 뒤섞여 있었겠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를 받는 존재시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는 매우 분명하게 이러한 일을 하는 “너희는 ‘주님의 사제들’이라 불리고, 우리 ‘하느님의 시종들’이라 일컬어지리라.” 하고 선언합니다. 위에서 열거된 예수님의 일은 곧 사제들의 임무이며 사명인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지속하는 사제들과 부제들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들의 헌신에 깊이 감사하며, 그 거룩한 임무를 한결같고 성실한 자세로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로 함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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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먼저>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2-15)
1)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은, ‘새 계명’을 주신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앞의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준 것처럼”이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사랑’을 ‘상징’하는 일입니다. <그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가리키는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에, 발을 씻어 주는 일만 하면 사랑 실천을 다 한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상징은 상징일 뿐입니다. 사랑 실천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실행해야 하는 일이고(마태 22,37),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마태 22,23)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사랑 실천의 수많은 방식들 가운데에서 아주 작은 하나의 방식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은,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신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본을 보여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의 사랑 실천은 신앙인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일이 되고,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이 됩니다.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는, “사랑 실천으로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여라.”입니다. 만일에 신앙인들끼리만 폐쇄적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이고, 죄가 되는 일이고, 예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사랑에는 울타리도 담도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우리는 예수님께서 배반자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음을, 즉 당신을 이미 배반한,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셨음을 기억해야 하고, 우리도 그렇게 실천해야 합니다.
2) ‘서로’ 라는 말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말입니다. 공동체는 사랑을 주기만 해야 하는 사람도 없고, 받기만 해도 되는 사람도 없는, 모두가 함께 사랑을 주고받는 ‘한 몸’입니다. <‘사랑’이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받기만 해도 되는 일도 아닙니다.> ‘주는 일’과 ‘받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는’ 사랑을 주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받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라는 말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에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서로의 발을 동시에 씻어 주려고 한다면, 무척 복잡하고 번거롭고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내가 먼저’입니다. 남이 먼저 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하면 됩니다. 그래도 또, 서로 먼저 하겠다고 나서면, 그것도 복잡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윗자리에 앉은 사람이 먼저, 높은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 먼저, 아이보다 어른이 먼저, 후배보다 선배가 먼저, 식구들보다 가장이 먼저 실천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물이 흐르듯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그리고 ‘모든 곳’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 사랑의 상징으로 ‘발을 씻어 주는 일’을 선택하신 것은 “사랑이란 ‘낮춤’이며 ‘섬김’이다.”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즉 세속 사람들의 사랑과는 달리 신앙인들의 사랑 실천은 낮춤과 섬김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낮춤’과 ‘섬김’이 없는 사랑은, 한쪽만의 일방적인 ‘좋아하는’ 감정으로 그치게 되고, 소유욕이나 집착으로 변질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사랑이 아닙니다. 반대로, 사랑은 없이 낮추고 섬기기만 한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 없는 ‘굴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란, 스스로 낮추고 섬기고 내려감으로써 상대방과 ‘같아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상대방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나처럼 똑같이 낮추고 섬김을 실천한다면, 누가 더 높지도 않고 더 낮지도 않은, 모두가 함께 똑같아지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모두 함께 낮추고, 모두 함께 섬기면서,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는 나라, 섬기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섬김을 받기만 하는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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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부터 우리가 지내는 파스카 성삼일은 일년 가운데 가장 거룩한 시기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인류 구원의 신비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열두 제자와 함께 파스카 만찬을 거행하십니다. 파스카 만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하느님 체험, 곧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이집트 탈출을 기억하여 현재화하고, 새 예루살렘을 재건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축제입니다.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며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고자 서둘러 떠나왔음을,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통하여 하느님 말씀의 빵으로 살아감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얻은 곡식으로 빵을 만들어 먹기에 그분께서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파스카 식사 때 마시는 포도주는, 이집트를 탈출하던 그 밤에 짐승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을 피하고 생명을 얻게 된 것과 시나이산에서 속죄의 피로 맺은 계약으로(탈출기 19장 3절-8절 참조)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을 기억하고 다음에 올 메시아를 기쁨 속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빵과 포도주의 축복에 이제 예수님께서 새롭고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시는 성체성사를 세우십니다. 빵을 들어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 말씀하시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하심으로써 당신께서 흘리실 피로 당신 스스로 어린양이 되십니다.
당신 목숨을 죽음이라는 대가로 내어 주셔서 많은 이가 죄에서 해방되는 속죄를 선사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파스카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심으로써 그들이 당신 죽음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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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에서는 성찬례 안에 제정된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가르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1코린 11,23-26 참조)과 함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강조됩니다.(《미사 독서 목록 지침》 99항 참조)
네 복음서 가운데 요한 복음서만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장면을 전해 줍니다. 복음의 내용은 강론 뒤에 하는 발 씻김 예식에서 구체적으로 행해집니다.
제자들의 발 씻김은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만찬 때 일어난 일입니다.(13,1-2 참조) 당시 전통적 관습에 따르면 발을 씻어 주는 행위는 종에게 맡겨진 일이었습니다.(1사무 25,41 참조) 스승이시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스스로 낮추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그들에 대한 헌신적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을 향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13,1 참조) 겸허하게 종의 신분을 취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뒤에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행위는 제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기준과 방향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스승이 보여 준 자기 헌신과 자기 비움의 모습은 제자들 서로의 관계에서도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발 씻김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현재의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의 표양을 보여 주셨고,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우리에게 과제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아는 것을 실천할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13,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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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성목요일 저녁에 거행되는 주님 만찬 미사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는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합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지상 명령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주님 만찬은 파스카 축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께서 조상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 시간이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통하여 당신 사랑의 징표를 남겨 주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몸과 피를 성체와 성혈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유다 풍습에 발 씻김은 하인이 주인에게, 부인이 남편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존경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발 씻김 예식은 성체성사의 신비를 밝혀 줍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는 우리가 스승의 모범을 따라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적막한 이 밤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구원의 신비인 파스카 사건과 이를 완성하는 사랑의 성사를 통하여 섬김의 삶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가슴에 깊이 새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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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반대자들의 손에 붙잡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마지막 가르침이 될 것이고, 그 자리에서 하시는 행동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마지막 표징이 되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동고동락하던 ‘한 식구’에게 배신을 당했으니 그분의 사랑이 실패한거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 겁니다. 예수님은 한 번 사랑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먼저 포기해도 당신이 포기하지 않는 한 실패가 아니라고, 언젠가 그 사랑은 반드시 열매를 맺을 거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을 드러내시지요.
첫번째 방식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발을 씻어주는 것은 통상 종이 주인에게, 신하가 임금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해드리는 행위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순명과 사랑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임금이시자 주님이신 분께서 제자들의 발을 먼저 씻어주십니다. 그들의 발에 묻은 더러움, 즉 죄를 씻으시기 위함입니다. 그 마지막 식사가 끝나고 예수님이 적대자들의 손에 넘어가시는 때가 오면, 제자들은 그 발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발을 씻어주십니다. 죄를 짓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미 너희를 용서했으니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잡을 용기가 생기면 언제든 그 발로 나를 찾아오라’는 초대입니다. 제자들이 그 초대에 응답하면 배신과 죄책감으로 깨져버린 예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겁니다.
그렇게 발 씻음으로 화해의 계기, 관계 회복의 기회를 미리 마련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집 나갔던 작은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마련했던 비유 속 아버지처럼, 당신께 돌아올 제자들을 위해 기쁨의 잔치를 마련하십니다. 비유 속 아버지는 그 잔치의 제물로 소를 내놓았지만, 예수님은 그 잔치의 제물로 당신 자신을 내놓으신다는게 다른 점이지요. 죄인의 입장에서는 죄를 뉘우치기도 전에 용서해주시고, 그런 잔치를 마련해주신다는 것만으로도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에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심지어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주시니 그 큰 사랑에 눈물이 앞을 가려 빵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용서하신 것은, 우리의 회개를 위한 기쁨의 잔치를 미리 마련하신 것은 그만큼 우리를 신뢰하시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사랑의 소명이 그만큼 크고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내세워 이득을 얻거나 자신을 드높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이라고 부른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이고,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그분의 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먼저 용서의 물로 우리 죄를 씻어주셨으니, 우리도 사랑과 자비의 물로 내 이웃 형제 자매들의 슬픔과 아픔을 씻어주어야겠습니다.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큰 사랑을 끝까지 완성해 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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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1)
오늘은 파스카 성삼일의 첫날인 성목요일입니다. 오늘 성목요일 전례는 복음 낭독 후 세족례 그리고 최후 만찬 전례로 이어집니다. 오늘 전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참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 계시네.」라는 노랫말에 다 함축되어 있다고 봅니다.
요한복음의 세족례와 공관복음의 최후 만찬 이야기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참사랑을 다른 시선에서 접근하고 표현하는 교회의 이해입니다. 사제의 강론 후 복음의 재현인 세족례를 거행합니다. 세족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현장 학습이며, 이 가르침의 주제는 바로 ‘섬김과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13,1)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히려 남아 있을 제자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예수님은 남김없이 세족례를 통해 다 쏟아내려 하십니다. 이 사랑의 첫 몸짓은 겉옷을 벗으신 것입니다. 겉옷을 벗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 본래의 신분이나 직책을 내려놓은 것과 같습니다. 결코 겉옷을 걸치고서는 어떤 일을 해도 진정성을 보여 줄 수 없으며,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행위로 비추어질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 예수님은 겉옷을 벗으신 것입니다. 마치 계급장을 떼지 않고서는 동등한 시선에서 만나고 소통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겉옷을 벗는 것은 또한 섬김을 위한 전제조건이며, 무릇 섬김을 살려는 사람은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참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연극적인 행위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겉옷을 벗음은 비움이며 낮춤이고 곧 섬김의 기본자세입니다.
겉옷을 벗으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종의 자세로 제자들 앞에 엎드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13,12.14~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다음에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포장되지 않은 길을 맨발이나 샌들로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더러워진 부분이 발이었기에 손님에 대한 환대의 표시로 발을 씻어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스승이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종처럼 낮아지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제자들에게는 혼란스럽고 충격적이었으며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13,8) 라는 표현에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읽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단호하시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13,8) 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스승과 제자 사이에 기 싸움이 아니라, 섬김을 받느냐, 받지 않으냐는 것이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느냐, 맺지 않느냐는 문제입니다. 아울러 세족례 후에 당부하신 말씀, 곧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라는 말씀을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섬김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이 떠난 다음, 제자들 상호 간에 누가 더 높고 더 낮은가로 인해 불화와 불목, 갈등과 상처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배려의 차원을 담고 있다고도 보입니다. 섬김의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굳이 발 씻김을 행하신 까닭은 더러운 길을 걷노라면 피할 수 없이 발이 더러워지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을 텐데 더러워진 발을 씻겨줌으로써 발과 보이지 않는 몸 전체와 더 나아가서 내적인 더러움에서 깨끗함으로, 상처받음에서 치유 받음으로, 죄스러움에서 죄 사함으로, 거듭나게 해주시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의 더러움과 수치스러움을 씻어주고 감싸주며 덮어 주려는 사랑의 본보기이었습니다. 즉 보이는 부분을 씻음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의 죄를 씻어주시는 聖事的성사적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부담스러우면서도 스승의 의도를 깨닫고 난 뒤 감사하며 그 사랑을 평생 잊지 못하고 스승의 본을 받아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으리라 믿습니다. 사랑받아 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섬김을 받아 본 사람이 섬기는 사람이 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섬김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며, 섬김은 참된 제자의 삶으로 이를 실천하기 위해 주님처럼 끊임없이 낮아지고 비우고 죽지 않을 때는 결코 실행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섬김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1코11,26) 고 당부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서로의 발 씻김을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섬김받음을 기억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따름노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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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13,1)
예전 바오로 6세 교황님은 교황청 평신도위원회 위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현대인은 스승의 말보다,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의 말을 기꺼이 듣습니다. 스승의 말을 듣는 것은 스승이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살아오면서 말보다 행동이 절실히 필요한 계층은 어린아이들과 어르신들이라고 봅니다. 관구장 소임을 마치고, 2007년 노인 병원에서 일하면서 느꼈던 점은 치매와 노환으로 입원해 계신 분들에게는 말이 필요하지 않고 다만 행동이 필요함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환자들에게 미음이나 죽을 떠 넣어드릴 때면 흘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수시로 닦아주어야 합니다. 때론 남자 어르신들을 목욕이나 머리를 감겨드리고 나서 닦아드리면 어르신들은 ‘아유, 시원해’하며 좋아하십니다. 사람은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 날마다 씻고 닦아야 하지만 혼자 힘으로 씻을 수 없을 때가 있고 그래서 누군가가 닦아줄 때 고마워하고 좋아합니다. 어린애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아프신 어르신들을 씻어주고 닦아주는 것은 사랑의 기본입니다. 간병인들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하루에도 수없이 환자들을 씻어주고 닦아줍니다. 저는 예전 요양병원에서 일하면서 사랑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가를 그리고 사랑은 언어 이전에 행동이다, 는 것을 배울 수 있었기에, 수도원을 떠나 2021년 12월부터 지금까지 ‘안성요양병원’에서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러나 요양병원의 환경이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이젠 제가 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는 공관 복음서들이 최후 만찬 이야기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 세족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요한복음서는 복음서 가운데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만찬에서 있었던 일을 새삼 길게 보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찬의 참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발 씻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13,1) 는 말씀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몸짓이며 행위였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종이나 노예가 하는 일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아비가일은 자신을 아내로 삼기 위해 다윗이 보낸 부하들에게 “이 종은 나리 부하들의 발을 씻어주는 계집종일 뿐”(1사무 25,41)이라고 자신을 고백합니다. 발을 씻는 것은 이처럼 종의 고유한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으며, 유다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배반하고 도망칠 것을 알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은 죄를 지었어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참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며, 그 죄를 씻어주시는 사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주십니다. 이는 겸손의 섬김이고 무언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랑을 보여 주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아버지에게서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며, 이로써 사랑은 주는 것, 곧 행동입니다. 사랑이신 아빠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생명의 전부인 사랑을 주셨고, 예수님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전부인 사랑을 끝까지 내어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는 사랑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또한 끝까지 이 사랑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도 당신이 하신 것처럼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13,12~15) 예수님께서 아빠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신 사랑으로 제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셨듯이 제자들에게도 당신이 하신 일을 그대로 되풀이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거저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즉, 그의 발을 씻으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호의를 거부한 것입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13,8) 어찌 보면 겸손해 보이지만 실상은 사랑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꼭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랑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을 요청하는 것도 사랑이요, 사랑이 만족스럽도록 사랑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용서할 수 있도록 자기의 죄와 더러움을 내보이는 것도 사랑이요, 씻기고 난 뒤의 그 기쁨과 고마움을 표함도 사랑입니다. 실상 우리와 주님의 관계는 죄와 용서의 관계요, 우리와 주님의 사랑은 씻기고 씻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씻김을 거부하는 것은 단절이고,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발 씻음에서 죄인도 사랑하시고 죄인의 사랑도 받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죄인도 사랑받고 죄인도 사랑할 수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사랑받지 못하면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조차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13,8) 어쩌면 사랑을 하는 것보다, 사랑을 받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받을 줄 알게 되면 주는 법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완전히 정화시키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전해 주시는 방법은 행동 곧 본을 보여줌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제자들의 가장 더러운 발까지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즉, 당신의 사랑으로 제자들을 정화시키신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의 낮아짐과 희생이지만 그 희생은 상대를 깨끗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당신의 말씀으로 깨끗하여지기를 원하시고, 실제로 발을 씻어주심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길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으로뿐만 아니라 발을 씻김으로 정화되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에게서 어떤 사랑으로 이룬 구원의 몫도 나누어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며 스승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셨듯이, 이제는 서로가 발을 씻어 주어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이 잡혀가서 십자가에서 죽임당하면, 예수님 없이 제자 공동체만 남게 되는데, 그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은 서로 발을 씻어주는 일, 곧 서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 자신을 낮추어 서로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그저 말로 가르치셨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고 난 이후에 그 말씀을 다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몸소 이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이 놀라운 일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복음서에 그대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명령하신 것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시는 가장 훌륭한 스승님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사제는 형제자매들의 발을 씻을 것입니다. 이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세족례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당신 몸과 피의 성체성사를 다른 의미로 나타내는 행동임을 기억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머뭅시다. 비록 모든 형제자매의 발을 다 씻지는 못하지만,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어주는 스승의 마음이 그 성체와 성혈에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합시다. 그리고 오늘 그 사랑의 성체를 내 안에 모시고 주님의 목소리를 기억하도록 합시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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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여름방학이 되면 제 바로 형님과 함께 시골에 가곤 했습니다.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또 배를 탄 뒤에 한참을 걸어가야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계신 시골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먼 거리였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 도착하고 나서는 너무 신났습니다. 개울가에 가서 놀기도 하고, 고양이, 개, 소 등의 동물 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올챙이 잡고 개구리 잡던 것 역시 큰 즐거움 중의 하나였지요. 이렇게 즐거운 일만 있지는 않았지요. 온몸에 달라붙는 모기떼로 인해 괴로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상황이 뭐가 재미있을까 싶습니다. 당시 시골에는 제 또래도 없었고 그래서 유일하게 놀 수 있는 대상은 같이 간 형뿐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컴퓨터로 인터넷 서핑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해주면, 아마 “저는 그런 곳에서 못 살아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긴 게임에 빠진 아이의 스마트폰을 빼앗아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화가 나서 불을 질렀다는 아이도 있더군요.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뭐가 재미있냐?’고 하겠지만, 제 기억 속에서 시골 체험은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뭐라 하셨는지 기억나지도 않고, 이분들의 음성도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래도 옛날의 몇 장면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 선명한 기억을 지금 흐뭇한 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모든 것이 자기 기억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소중한 순간이고 미래를 잘 사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더 많은 것을 가져야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화려한 것, 멋진 것보다 오랜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장면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장면에는 늘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따뜻하고 행복했습니다. 지금 내 자리도 먼 훗날 기억에 오래 간직될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을 지냅니다. 이날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바로 코 앞에 두고 있음에도 제자들을 향해 또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을 나눠주시는 주님을 봅니다. 그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느님께서 무릎을 꿇고 인간의 발을 씻겨 주시는 모습에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전해집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전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너무나 크기에 오늘의 전례를 통해 사랑을 다시금 바라보고 또다시 그 사랑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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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발 씻김>
요한 13,1-15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팔아넘길 자를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발 씻김>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부끄러워하지 말고
발을 내밀어요
괜찮아요
정성껏 곱게
씻어드릴게요
누구든
부끄러워하지 않게
서로의
발을 씻어주니
더할 나위 없이
참, 좋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발을 내밀게요
괜찮죠
정성껏 곱게
씻어주세요
누구든
부끄러워하지 않고
서로에게
발을 내미니
더할 나위 없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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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지치지 않고>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그분의 사랑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은 가슴을 애달프게 하고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떠나기 전에 더 잘해 주려고 합니다. 저며 오는 아픔을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헤어짐을 안타까워하시며 평소보다 더 간절히 그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생각이나 이론, 말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 행동이었습니다. 거창하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더러워진 발을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당신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발은 가장 더러운 부분입니다. 사랑이 큰 만큼 그곳을 닦아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구체적 행위입니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씻어주는 것, 닦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가장 아픈 곳에 함께하는 행동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서 사랑을 하겠다고 하면 그는 평생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정체를 파악하고 난 뒤에 하느님을 믿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의 정체를 다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이 깊어집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13,15)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언행일치의 삶으로 모범을 보여주셨으니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다 알아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안 만큼만이라도 실천하면 복이 옵니다. 그리고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았다면 아는 바를 미루지 말고 행동으로 옮기시길 바랍니다. 민첩하게, 그리고 후회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허리를 굽혀 발을 씻어주는 모습에서 그 일치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바닥으로 내려오심은 곧 우리와 같은 처지에서 행하는 봉사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닦는 행위는 용서와 자비를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더러운 발뿐이 아니라 더 추악한 죄를 씻어주십니다. 발을 내밀기도 전에 먼저 물과 수건을 준비하셨습니다. 항상 씻어주시고 무엇이든 용서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며 사랑과 존경을 표현 하였습니다. 우리도 가장 귀한 것을 내어놓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미 하늘 같은 스승이 제자들의 발치로 내려오셔서 용서와 자비, 사랑과 봉사의 행위가 계속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설정해 주시고 성체 성사를 통하여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주십니다. 성체는 당신의 살과 피를 몸소 내어 주시는 사랑 덩어리입니다. 그 사랑을 먹는 사람은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이 되어 우리를 풍요케 하십니다. 살아계신 생명의 빵으로 영원한 천상생명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비롯하여 다른 성사와 더불어 은총의 전달을 위해 성품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사제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당신의 살가운 사랑의 전달을 위해 사제를 선택하셨습니다. 허물과 부족함에도 다양한 성격의 소유자를 뽑아 당신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일을 하시기에 하느님의 능력이 더 간절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체성사와 더불어 성품성사가 제정된 날이기에 ‘사제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제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제를 영적인 아버지라고 합니다. 과연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권위만 내세우고 무작정 따라오라는 식의 아버지, 자기중심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열린 아버지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예수님처럼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자녀의 발을 씻겨주는 겸손의 아버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두를 품고 끝까지 사랑하는 가슴이 넓은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셨습니다. 자신을 팔아먹는 제자 유다까지도 사랑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밤에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사랑에 사랑을 더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에 차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따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만큼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스승이 사랑의 길을 걸으셨으니,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더 높게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모쪼록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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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사람의 영원한 본보기>
“그리스도 예수님”
-예닮의 여정-
“그리스도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제 예닮기도중 한 대목으로 주님 사랑을 고백하며 강론을 시작합니다. 성주간 수요일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가르침의 주제는 “인내”였습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공합니다. 말그대로 인내의 사랑입니다. 교황님은 참으로 주요한 덕이 인내이며 우리가 인내의 부족을 정직하게 인정하자고 말씀했습니다.
인내는 필요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인내로 부름받고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내했다면 신자들은 참으로 인내하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인내하는 본보기를 관상하라고 교황님은 우리를 격려했습니다. 인내는 제 “예닮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강조됩니다.
“주님,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아멘.”
오늘은 성주간 목요일입니다. 주님 만찬 성목요일 저녁미사로부터 시작된 성삼일 전례는 부활주일의 저녁기도로 끝납니다. 오늘의 강론 주제는 “참사람의 영원한 본보기-그리스도 예수님-예닮의 여정”입니다. 옛 어른의 오늘 3월28일 말씀도 참사람이 되는데 유익한 도움이 됩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나를 잃고 남을 잃는 길이다. 만장일치란 사람에 대한 모독이다.”: 다산
“군자(君子)는 조화를 이루되 같음을 강요하지 않고(화이부동和而不同)’, 소인(小人)은 같음을 강요하면서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동이불화同而不和)”:논어-
하나하나 고유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며 이런 생각을 지닌 이들이 군자요 참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사람이 되는 방법을 배웁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누구나 선물로 받은 인생이요 참사람이 되는 평생과제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는 공부보다 더 중요하고 힘든 공부도 없습니다. 저절로 참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과 더불어 부단한 분투의 수행과 노력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역시 사랑의 선택,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화입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참사람의 영원한 본보기는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에 살 희망이 생깁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로소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의 사람, 참사람의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우리 삶의 영원한 본보기인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드러납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참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새삼 사랑하라 주어진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선물하신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그의 규칙서 두 가운데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라.”(성규 4,21)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 72,11-12)
둘째, 서로 섬기십시오.
서로 섬기는 사랑, 겸손한 사랑, 순수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도대체 무릎을 꿇고 사람들 발을 씻어 주는 하느님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지요! 하느님 친히 예수님을 통해 그 사랑의 절정을, 겸손의 절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사랑의 영원한 모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며 남겨주신 참 좋은 선물, 참 사랑, 참 사람의 본보기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답고 거룩한 장면도 없을 것입니다. 영원한 감동과 더불어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마냥 부끄럽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적 사랑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입니다. 새삼 깨닫는 사실은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의 삶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임을, 또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생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주님의 진짜 유언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종파를 초월해 모든 인류에게, 특히 각계 각층 지도자들은 물론 나라나 세계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간곡한 당부가 섬김의 사랑입니다. 살아갈수로 날로 하느님의 집에 돌아갈 날이 가까워짐을 깨달을 때 섬김의 사랑에 박차를 가할 수 뿐이 없습니다. 새삼 제가 늘 강조하는 바, 깨어 내 인생여정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여,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여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겠는가 확인해 보자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삶의 깊이를, 하늘 나라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파스카의 미사전례를 사랑하십시오.
사랑의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면서 참 좋은 최고의 선물, 둘을 남겨 주셨습니다. 하나는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드리는 겸손한 사랑, 섬김의 사랑의 모범이요, 이어 하나는 이 거룩한 파스카 미사전례입니다. 탈출기에서 강조되는 공동체 전례인 파스카 축제입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자유에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입니다. 결코 잊어선 안되는, 반드시 파스카 전례를 통해 늘 기억을 새롭게 해야 하는 파스카 해방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온 공동체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이스라엘 공동체 형성에, 신원확립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것이 바로 끊임없이 거행되는 파스카 축제였습니다. 구약의 파스카 축제는 신약의 파스카 축제로 이어집니다. 과거의 파스카 해방 사건을 늘 현재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파스카 축제 인생을 살게 하는 파스카 미사전례은총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바로 파스카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의 참 좋은 파스카 축제의 미사전례요 바로 제2독서가 이를 입증합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적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문득 “나를 잊지 마세요(forget me not)”라는 물망초(勿忘草)의 꽃말이 생각납니다. 삶은 기억과의 전쟁입니다. 늘 세상 끝날까지 주님을 잊지 말고 기억하여 미사를 봉헌하라는 것입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구원의 기억을 늘 새롭게 하는 이 거룩한 공동미사전례의 은총입니다. 파스카 미사축제의 은총이 우리 모두 파스카의 꽃, 사랑의 꽃으로 살게 합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
사랑의 꽃이다
그만의
색깔, 향기, 크기, 모양으로
평생
끊임없이
세상 떠날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 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 사랑의 꽃이다."(2022.6.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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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기억이 끝나는 순간, 사랑도 끝난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복음은 얘기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표시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의 첫 번째 의미는
더러운 발까지 씻어주시는 사랑이고, 그 발로 도망칠 제자들의 죄까지 용서해주시는 사랑이며, 아무리 죄를 짓고 도망쳐도 포기치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이고 그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얘기는 안 나옵니다. 대신 두 번째 독서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얘기를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데 성체성사를 세우신 얘기는 요한복음엔 없지만 공관복음에는 모두 나오지요.
그러므로 끝까지 사랑하시는 또 하나의 표시가 바로 성체성사이고, 이때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함은 남김없이 다 바치는 사랑입니다. 주다 주다 더 줄 것이 없으니 목숨까지 다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목숨까지 다 내어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체성사는 남김없이 다 내어주는 사랑이지만 다른 한편 당신의 사랑을 남기시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목숨까지 남김없이 다 내어주시지만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도 남을 사랑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 우리 사랑의 표시로 유언과 유산과 유물을 자식들에게 남기지만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이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재현되도록, 곧 끝까지 계속되도록 성체성사를 남기신 겁니다.
그런데 재현되도록 그리고 끝까지 계속되도록 성체성사를 남기셨는데 그것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지 않고 그래서 계속되지 않는다면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어도 주님 사랑은 우리 안에서 끝까지 계속되지 않겠지요.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자들을 위해서만 남기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서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이라고 하셨는데 그 사랑하시는 당신의 사람들에서 우리가 제외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람들이라면 우리도 제자들처럼 그 주님의 사랑을 재현해야 할 것이고, 우리도 제자들처럼 주님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그런데 만일 우리가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주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이 아니고, 끝까지 남는 사랑도 아니며 그야말로 끝난 사랑입니다.
기억과 기념은 주님의 사랑을 재현케 하는 것이고, 주님 사랑이 내 안에서 계속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끝까지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죄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 지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은 미래 지향적인 것이고,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끝나지 않고 미래에도 계속되게 하는 것입니다.
기억이 끝나는 순간 사랑도 끝나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도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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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13,1)
<참사랑!>
오늘 복음(마태26,14-25)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말씀'입니다.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최후만찬)을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십니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오늘은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되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입니다. '파스카 성삼일'은 '오늘부터 주님부활대축일까지의 기간'인데, 한 해의 전례주년에서 가장 거룩한 기간입니다. 전례 등급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고, 이 기간에 교회는 믿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합니다.
파스카 성삼일 전례에 꼭 참석합시다!
파스카 성삼일의 첫날인 오늘은, 오전에 '성유축성미사'가 거행되며, '사제들이 서약을 갱신'합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가 거행됩니다. 예수님의 최후만찬인 '성체성사의 제정'을 기념하고, 제자들의 '발씻김 예식'과 수난 감실에서 '밤샘 조배'를 합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11,24)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11,25)
'성체성사의 제정과 발 씻김 예식과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인 참사랑의 표지'입니다.
나도 너에게, 그리고 너도 나에게 '하느님의 참사랑'이 되어봅시다! 그래서 우리 함께 부활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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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FRPX3XM-K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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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 14)
길을 묻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먼저 씻어주십니다.
섬기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섬기는 사랑이 있기에
우리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다가올 마지막
십자가 죽음에 앞서
사랑의 만찬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사랑할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참된 사랑은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첫시작은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참사랑입니다.
무릎을 꿇고
낮아지는 것이
파스카신비의
첫걸음입니다.
번지르르한
말만 있고
실천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빠스카 성삼일이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는 변화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복음의 요약은
발을 씻어주는
사랑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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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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