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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쉐카이나 코리아 원문보기 글쓴이: 하토브
세르베투스의 재가 칼빈에 대하여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1509년( 1511년 설도 있음)에 태어나 1553년 42세로( 또는 44세로)
화형을 당한 의학자요, 천문학자요, 지도학자이며, 기상학, 법학, 해부학, 약학, 지리학,
수학에 능통한 학자였으며, 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로 불리웠습니다.
다음의 해설들은 위키피디아의 자료를 번역한 것이며 괄호 ( ) 안의 글들은 제가 해설로
추가한 말들입니다.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피레네 산맥지역의 나바르, 아라곤 태생의 의사요 천문학자였습니다.
그는 혈액이 폐로가서 산소를 가득 받아온 다음 좌심방으로 들어오고, 좌심방에서 좌심실로
가서 온몸으로 공급된 다음 다시 돌아오면 우심방으로 들어오고 우심방에서 우심실로,
우심실에서 폐로가서 산소를 공급받아 다시 좌심방으로 돌아오는 심폐순환 원리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라곤 지방의 공증인으로 지냈으며 하급 관리의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가 카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개종자 가문의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하였으며 나중에 히브리어를
배웠는데 아마도 유대인 혈통의 외가에서 배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기독교 개혁운동에
참여하였으나 비삼위일체론을 발간한 이후로부터 칼빈과 개혁운동가로부터 이단으로
비난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출생에 관해서는 1511년 스페인의 아라곤의 시게나의 신도시인 빌라누에바에서
9월에 출생했다는 설과 1509년 나바르의 투델라 설이 있습니다. 나중에 그는 프랑스
파리 대학에 유학하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면서 미쉘 드 빌라누에바로도 불리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르베투스는 언어에 재능을 가졌으며 15세에 프란시스 수도회의 후안 드 퀸타나 라는
이름의 사람 동호회에 가담하였고 1526년도에 툴루즈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당시에 금지된 서적들인 프로테스탄트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퀸타나가 샤를르 5세의 고해성사 신부가 되자 세르베투스도 그의 비서로서 왕실
수행원으로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샤를르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대관식을 가질 때에도 참석하였으며 독일 이탈리아등을 여행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교황과 그 수행원들의 거만함과 화려함에 분노하였으며, 개혁운동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세르베투스가 언제 왕실 수행원직을 그만두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1530년 스위스 바젤에 있는 요한네스 외콤파디우스( 성경 번역학자)를
방문하였으며 10개월 가량 머물면서 지방 출판사의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무렵 그는 이미 자기의 신학적 신념들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1531년 5월 그는
마틴 부써( 개혁운동가로 유명함) 와 볼프강 파브리시우스 카피토를 스트라스부르
( 알사스 로렌 지방의 독일계 도시)에서 만났습니다.
두달후 1531년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의 오류에 관하여( De Trinitatis Errobus) 라는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다음해 1532년에는 Dialogorum de Trinitate < 삼위일체에 관한 대화>
라는 책을 발간하였으며 그것의 보충자료인 De Justitia Regni Christi ( On the Justice of
Christ’s Reign) < 그리스도의 통치의 사법정의에 관하여> 라는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종교재판소의 핍박이 있은 후에 세르베투스는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 이름을
< 미쉘 드 빌레뉴브 Michel De Villeneuve >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1533년 파리의 꼴레쥬 드 칼비에서 공부하면서 그의 프랑스어판 < 톨레미의 지리학>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책과 그의 편집본인 성경책을 그의 후원자인 휴즈 드 라
포르뜨에게 증정하였습니다.
리옹에 있는 동안에는 의료 자선가인 Symphorien Champier( 심포리앙 샹피에) 가 후원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레온하르트 푹스에 대항해 샹피에를 옹호하는 약학 논문
In Leonardum Fucsium Apologia ( Apology Against Leonard Fuchs) 를 썼습니다.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그는 몇개의 책들을 더 발간하였는데 의학과 약학을 다루는 책들이었으며
Syriporum Universia Ratio ( Complete Explanation of the Syrups) ( 시럽에 관한
완전한 설명) 이라는 책이었고 그것은 매우 유명한 책이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간격을
띄우고 1536년 세르베투스는 파리로 돌아와 의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파리에서 그의
스승들로는 실비우스, 페르넬, 요한 빈터 폰 안데르나흐 ( Sylvius, Fernel, Johann Winter
von Andrenach) 등이었는데 이들은 Andrea Vesalius 와 함께 세르베투스를 해부학에
있어서 가장 훌륭하고 유능한 조교로 칭찬하였습니다. 이 무렵에 그는 콤플루텐스의
사본(Manuscript of the Complutense) 이라는 책을 썼으나 발간되지 않았으며
그것은 그의 의학에 관한 개요였습니다.
세르베투스는 그가 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화성이
달에 의해 덮여질 것을 예측하기도 하였고 그가 가르치는 것에 더하여 이것은 의학
선생들 사이에 많은 시기 질투를 야기하게되었습니다. 그의 강의는 의과 대학장
쟝 타골( Jean Tagault) 에 의해 정지되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그에 대항해 미쉘 드
빌누에브의 천문학 강해에 대한 변증과 어떤 의사에 대하여, 라는 글을 썼습니다.
(Apologetic Discourse of Michel de Villeneuve in favor of Astrology and against
a Certain Physician) 바로 그 의과 대학장은 나중에 파리대학에서 세르베투스에 대해
사형을 주장하였습니다. 세르베투스는 키케로에 의한 점성술 ( De Divinatione by Cicero)을
가르친다고 제소되었습니다.
마침내 선고된 형벌은 그가 그 논문을 철회하는 것으로 감형되었습니다.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것의 위험과 어려움들 때문에 그는 몽펠리에로 가서
그의 의학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하였고 아마도 그의 스승 실비우스 덕택에 그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스승도 동일한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마침내 거
기서 1539년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 세르베투스가 화형당하기 14년 전). 그후로
그는 샤를리외에 살았으나 어떤 시기하는 의사가 매복하였다가 세르베투스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그 싸움에서 자기를 공격한 사람들중의 하나를
검으로 싸우다가 부상케하였습니다. 그는 그 일로 감옥에 며칠간 갇혔었습니다.
비앙느에서의 직업
마침내 세르베투스는 의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는 비앙느의 대주교 삐에르 팔머의
가정의가 되었고 또 귀 드 모기롱이라는 도피네( 프로방사의 신교도 중심지)의 부지사의
가정의도 되었습니다. 인쇄업자 쟝 프렐롱 덕택에 세르베투스와 칼뱅(칼빈)은 교신하기
시작하였는데 쟝 프렐롱은 칼뱅(칼빈)과 세르베투스 둘다의 친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칼빈은 샤를 드 에스뻬빌이라는 가명을 썼고 세르베투스는 앙리 2세의 귀화정책 칙령
( 1548-1549)에 따라 프랑스 시민이 되어 드 빌뉴브 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1
553년에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또다른 책을 발간하였는데 < 반- 삼위일체론> 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회복 ( Christianismi Restitutio: Restoration of Christianity)
라는 책이었는데 예정론을 날카롭게 배척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장점이나 가치도 고려하지도 않은채 미리서부터 지옥 불못으로
영혼들을 던져넣는다는 생각으로서 비난하였습니다.
세르베투스는, 그 대신에, 하나님은 아무도 생각이나, 양심이나,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비방하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책에는 처음으로 심폐순환 이론의 설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저술한 칼빈(칼뱅)에게는세르베투스의 당시 최근의 책은 그가 개인적으로
견지한 기독교의 믿음과 그가 정립된 기독교 교리라고 밀어부친 이론들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칼빈은 그의 책의 사본을 그의 답변으로서 보내주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즉각 그
것을 돌려주면서 거기에 철저히, 세밀하게 비판적인 관찰의 비평들을 달아서 보내주었습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에게 편지하기를 <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으며
당신을 핍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당신이 건전한 교리를 그토록
무례하고 뻔번함으로 욕하는 것을 보았을 때 강철처럼 강건할 것입니다. >
때로는 그 교신은 더욱 가열되어서 마침내 칼빈이 그것을 끝낼때까지 그러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에게 몇개의 편지들을 더 보냈습니다.
그리고 칼빈도 그것들에 대해 공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칼빈과 세르베투스의 대립은
그의 견해들에 근거하였다기 보다는 세르베투스의 음조에 근거하기도 한것처럼 보였으며
칼빈은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보았습니다.( 하토브 주: 이 부분은 사실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참혹하게 죽이도록 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칼빈은 그의 상처받은 자존심에 대한 의도들을 밝혔는데 그의 친구 윌리암 파렐에게
1546년 2월 13일에 보낸 편지가 그것입니다.
세르베투스가 나에게 긴 분량의 그의 날뛰는 헛소리를 보내왔네. 내가 그가 여기에
올것을 동의한다면 나는 그에게 내 말을 주지 않을 것이네.
만일 그가 여기에 오면, 나의 권한이 가치를 갖고 있는 한 나는 그가 살아서 떠나도록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네.
“ Servetus has just sent me a long volume of his ravings. If I consent he will
come here, but I will not give my word; for if he comes here,
if my authority is worth anything, I will never permit him to depart alive
(Latin: Si venerit, modo valeat mea autoritas, vivum exire nunquam patiar).[23]
세르베투스의 투옥과 처형 ”
1553년 2월 16일 미카엘 세르베투가 비앙느에 있는 동안 그는 기욤 드 뜨리라는
부유한 상인으로서 제네바에 난민으로 거주하며 칼빈의 친한 친구로 있던 사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의 사촌인 앙또아느 아르니라는 여자가 리옹에 살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보낸 편지가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종교재판관 마띠외
오리를 대신하여 세르베투스와 발다사르 아르놀레라는 사람 곧 기독교의 회복이라는
책의 인쇄업자도 심문을 받았는데 그들은 모든 혐의를 부인하였고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습니다. 아르니는 오리 종교재판관에 의해서 드 뜨리에게 보다 많은 증거를
요청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1553년 3월 26일 세르베투스가 칼빈에게 보냈던
기독교의 회복의 몇 원고 페이지가 드 뜨리에 의해서 리옹으로 보내졌습니다.
그해 1553년 4월 4일 세르베투스는 로마 카톨릭 기관에 의해서 체포되었습니다
( 하토브주: 로마 카톨릭은 그러한 체포권을 갖고 있던 무시무시한 조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앙느에 수감되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그로부터 3일후에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6월 17일 세르베투스는 미쉘 드 빌레뉴브 라는 이름으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제네바의 설교가 쟝 칼뱅(존 칼빈)이 보내준 17개의 편지들 덕택에
그는 그의 책들과 함께 화형되도록 선고되었습니다
( 하토브주: 이것은 칼빈이 그를 제네바에서 처형하도록 제소하기 전에도
그의 처형을 위해 노력하였음과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종교재판소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음과 로마 카톨릭과 협력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인형(허수아비)와
그의 책들이 함께 그의 부재중에 불태워졌습니다. (하토브: 허수아비 화형식)
그후에 세르베투스는 납득이 안가는 이유로 제네바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곳은 칼빈과
그의 개혁주의자들이 그를 비난하던 곳이었습니다.
1553년 8월 13일 그는 제네바에서 칼빈이 행하던 설교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설교가 끝난후 체포되었고 다시 수감되었습니다.
( 하토브주: 칼빈이 설교시간에 그를 알아보고 경찰에 요구하여 체포하도록 하였음).
그의 모든 소지품은 몰수되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재판과정에서 제네바에 있는 여관에서 체포되었다고 밝혔습니다.
프랑스 종교심문관들은 세르베투스가 처형될 수 있도록 송환되어질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 제네바측에). 칼빈은 자기의 대적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 스스로를 견고한
기독교 정통교리의 수호자로서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 그는 자기의 명령대로할수
있는 모든 수단들을 다하여 세르베투스를 정죄하는것을 밀어부쳐야 했습니다.
칼빈의 미묘한 건강은 세르베투스에 대해 자신이 직접 출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 하토브주: 칼빈의 나이 44세로서 건강을 이유로 출석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약간
위선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됨). 대신 니콜라스 데 라 폰테느 라는 난민
( 외국인으로서 일시 거주자신분)이 세르베투스의 기소에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칼빈에 의해 고용된 칼빈의 비서였으며 세르베투스를 제소하는 죄목들을 열거하고
주장하였습니다.
칼빈이 직접 나서지 않은 바에 대한 타당성 있는 이유들중의 하나는 당시 제네바
형법은 중죄 사범의 재판 경우에는,
원고도 재판 진행중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의 연약한 건강과
국가 행정상 끊임없는 필요성 때문에 제네바 행정에서 오랫동안 결석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니콜라스라는 칼빈의 비서가 모든 기소
요구를 담당하였는데 실제로는 칼빈이 세르베투스 참소의 절대적 주역이었습니다.
니콜라스는 피난민 불법체류자와 같은 신분으로서 칼빈의 어떤 권위나 지시도
무시할 수 없는 신분이었고 칼빈에 의해 고용된 비서였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소송심리에서 세르베투스는 40 개 죄목들로 기소되었는데 주로는 두가지 죄목이
가장 컸습니다. < 비삼위일체 교리를 전파하는 죄> < 유아침례를 반대하는 죄> 가
그것들이었습니다. 유아침례에 관하여 세르베투스는 말하기를 < 그것은 마귀의
발명품으로서 모든 기독교를 파멸시키기 위한 지독한( 지옥같은) 오류입니다> 고
말하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검사장은 심문에 이상하게 들리는 혐의도 제기하였습니다.
기이하게 들리는 심문은 < 그가 결혼했는가? 그리고 그가 안했다고 답하면,
왜 결혼하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나이가 40여세이니까.> 였습니다. 세르베투스는
답하기를 탈장이 오래동안 지속되어 특별히 성생활을 할수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또다른 질문은 <그가 유대인들을 좋아하고 터키인들은 좋아한다는 것과 그들을
변호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교리가 유해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기독교 교회들이
붙들고 있는 교리를 반박하기 위하여 코란을 공부한 적이 있는지, 그외의 다른 불경스러운
책들로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에 관한한 사람들이 삼가해야 할 책들도
공부한 적이 있는지> 였습니다. 칼빈은 자기가 < 흉악한 신성모독> 이라고 정의하는
죄를 저질렀으므로 세르베투스가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었습니다. 칼빈은 이러한
감정을 파렐에게 편지로 세르베투스가 체포된지 1주일쯤 후에 표현하였습니다.
칼빈은 거기서 기록하기를
< 칼빈이 인지된 후에, 나는 그가 억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의 친구
니콜라스가 그를 중대 범죄 혐의로 소환하였으며 그는 Lex talionis( 동해 복수법) 에
따라 자기 자신을 담보로 내놓았습니다. >
.
다음날 그는 세르베투스에 대하여 40 개 혐의를 제시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는
그것들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환되었습니다. 그는 뻔뻔스럽게 저를
욕하였고 그는 제가 그에게 혐오스러운 것처럼 저를 간주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철면피에
대해서는 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귀도 신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정도의 광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과연 많은 신들이 개개 마귀들에게
있었다고 하면서 신성이 나무나 돌과 본질적으로 의사소통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최소한 사형판결이 내려지기를 희망합니다만 형벌의 혹독함은
경감되기를 원합니다.
세르베투스는 당시에 제네바의 시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법적으로 그는 최악의
경우에 추방될 수 있었습니다. 제네바 정부는 그러한 법적 현실을 무시할 수 있는 어떤
가능한 변명과 구실을 찾기 위해 다른 스위스의 개혁 도시들 ( 베른, 쮜리히, 바젤,
샤프하우젠) 등과 협의하였습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정죄함과 그의 교리를
억압하는 것이 옳다고 선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서 성취할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세르베투스의 저술을 강한 어조로
비난했습니다( 하토브 주: 루터는 세르베투스보다 7년 먼저 죽었습니다. 루터의 여러 교리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정죄한다면 루터도 불태워져야 했습니다).
세르베투스와 멜랑흐톤은 서로 매우 적대적인 견해들을 가졌습니다. 리버티노 라는 분파는
일반적으로 칼빈이 주장하는 어떤 교리나 모든 것에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사안에 대해서는 세르베투스를 화형시키는데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칼빈은 그것대신
참수형을 강조하였습니다만). 사실 세르베투스를 정죄한 제네바 공의회는 페린에 의해
주재되었는데 그가 최종적으로 세르베투스를 두가지 죄목 < 삼위일체 부인>
< 유아침례 반대> 라는 죄목으로 화형시키도록 판결하였습니다. 일부학자들은 칼빈과
다른 목사들이(장관들이) 당시에 화형만이 유일한 법적 소구권 방식임을 알고서
그가 화형대신에 참수되기를 요구하였다고 말합니다.
다른이들은 주장하기를 칼빈 자신이 세르베투스가 화형되도록 요구하였으며 그것도
푸른나무로 태워져서 오랫동안 서서히 불태워져 고통을 최대한 늘리도록 할 것을
요구하였고, 화형대신 참수형의 자비를 요구한 것은 세르베투스였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러한 청원은 1553년 10월 27일 거절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르베투스는 산채로
태워졌는데 그의 책들 더미 위에서, 제네바 가장자리의 샹펠 언덕에서 태워졌습니다.
역사가들은 그의 마지막 말이 <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내게 자비 베푸소서>
였다고 말합니다.
많은 이들은 칼빈이 개인적으로 세르베투스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하면서
칼빈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사람은 바로 25인의 제네바 공의회 의원들이었고 칼빈은
행정적인 권한이 없었으며 제네바의 판사도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칼빈의 파렐에게 보낸 편지가 이에 대한 반박으로 충분하게 보입니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지배하는 종교기관들이 이단이라고 판정하는 사람들은 처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누구든지 이단자와 신성모독자들을 처벌하는데 있어서 잘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범죄에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권위에 있어서
여기에 아무런 의문이 있을 수 없다.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 그분이 교회에 어떤
법을 갖고 계시는지는 분명하다, 세상의 끝날까지.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지독한
극형까지 요구하신다.우리가 모든 인간들의 사고 위에 그분의 사역을 올려놓지 않는 한,
그분의 영광을 위한 싸움에 관한한, 심지어 우리의 친족도 아끼지 않고, 누구의 피도 아끼지
않으며, 모든 인본주의나 인간성도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
리에게 그렇지 않다면 그분께 합당한 공경이 취해지지 않은 것이다. >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처형되던날 10월 27일 집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그 사건에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날 분명히
정죄 심판될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프랑스 왕 시종에게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The strongest recorded statement from Calvin on the Servetus affair is a 1561
letter from Calvin to the Marquis Paet, high chamberlain to the King of Navarre,
in which he says intolerantly:
1561년 칼빈이 마르키스 나바르 왕 고등 시종에게 보낸 편지;
"Honour, glory, and riches shall be the reward of your pains; but above all,
do not fail to rid the country of those scoundrels, who stir up the people to
revolt against us. Such monsters should be exterminated, as I have exterminated
Michael Servetus the Spaniard."
영광과 존귀와 부귀가 당신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라로부터 저들, 우리를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람들을 동요시키는
불한당들을 제거하는데 실패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괴물들은 근절되어야 합니다,
제가 미카엘 세르베투스, 스페인인을 멸절시켰던 것처럼요.
하토브 평
(1)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대하여 많은 장로교인들은 칼빈을 옹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세르베투스는 처형되었어야 마땅한 인물이었다고 말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칼빈은 그 사건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2) 세르베투스는 < 삼위일체>에 관하여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한 세르베투스의 많은 문헌들이 불태워졌고 그의 진술기회가
우리에 충분히 없는 까닭에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3) 그러나 유아침례에 관한한 칼빈은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었으며 유아침례는
아직 믿음이 없는 갓난아기를 침례함으로서 기독교인 이름을 붙여주고,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행사로서 사탄의 중요 전술임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수십억의 불신자들을 교회안으로 끌어들이는 교회 무력화 전술입니다.
(4) 예정론은 그러한 유아침례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믿는자들의
자녀들은 언젠가는 구원하시도록 하나님이 예정해놓았기 때문에 유아들을 침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 신학에서 유아침례와 예정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로부터 거룩함을 도출받는다고
하였습니다.
( 칼빈 기독교 강요 4권 16장 15절)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혈통으로
나지 않는다는 요한복음 1장 13절 말씀에도 어긋납니다.
(5) 칼빈은 유아침례를 위해 침례중생주의 혹은 세례 구원론을 펴고 있는데 그의
기독교 강요 4권 16장 22절에서도 밝히듯이 어린이들은 먼저 물로 거듭나야 하며,
침례가 바로 죄들을 사함받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물침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 4-16-22)
Baptism is given for the remission of sins.
칼빈의 유아세례에 관한 수많은 교훈들은 참으로 믿기 어려울 만큼 엉뚱한 것입니다.
(6) 칼빈은 침례든 세례든 상관없다는 말로 세례를 옹호했습니다( 기독교 강요 4권15장 19절)
침례는 교회의 minister 들만 할수 있다 하여 성직자제도를 전제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 4-15-20)
(7) 칼빈은 재침례에 반대하였는데 즉 유아침례로 족하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4-15-18)
반대로 재침례파들은 유아때 받은 침례는 무효이며, 거듭난 이후에 다시 침례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칼빈 자신은 로마 카톨릭에서 유아침례 (유아세례) 받은 것외에는 거듭났다는
간증이나 그가 거듭난 이후에 침례받았다는 간증을 내놓은 것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8) 칼빈은 예정론을 펼쳤는데 그중에는 인간은 거듭나기 이전에는 완전부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 하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완전부패함이 성경적으로 맞습니다. 그러나 그 완전부패는 완전 무능과는
다릅니다. 완전히 부패하였지만 복음을 들으라 하면 들을 수 있습니다.
듣고 과연 그러한가 하여 분별할 수 있으며(행 17:11) 주 예수를 믿으라 하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행 16:3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가서 그들이 구원얻기로
예정되어 있는지를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항상 < 주 예수를 믿으라> 고 외쳤던 것입니다.
(9) 칼빈의 예정론의 또다른 요소는 제한 속죄론이며 그것은 예수님의 속죄는 믿기로
예정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 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를 위해 속죄하셨다고 가르칩니다(요일 2:2)
또한 주님은 십자가에서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해주옵소서, 저희는 자기들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 룩 23:34) 하여 제한속죄가 아니라 무한 속죄를 위해 피흘리셨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10)칼빈의 예정론의 최대의 문제점은 이 세상의 절대 다수의 사람들, 90% 이상의 대다수는
안믿도록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해놓고,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믿기로
배척하고, 그 결과 수많은 범죄를 행하도록 하나님이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정해
놓으셨으며 그것이 그분의 기쁘신 뜻과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님에 대해 잘못 대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보코하람과 ISIS, 하마스 같은 집단들이 기독교인들을 죽이도록
창세전부터 예정해놓으셨으며, 심지어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도록
하나님 스스로가 그렇게 예정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정론은 분명히
하나님을 잘못 대변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믿는자들,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의 운명을 설명하는데는 그다지 문제가 많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원래의
고유 예정과 일치하기 때문으로 분별됩니다.
(11)칼빈의 예정론은 어거스틴을 400회 이상 인용하면서 작성된 것으로서,
하나님을 인류 세계의 수많은 죄악을 범하도록 설계하고 계획하며 인류안에 죄를
짓도록 입력시키는 죄의 근원자가 되는 것으로 묘사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칼빈주의자들은 이점을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은 죄의 근원자가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12)이러한 예정론에 대해서 세르베투스가 잘못을 지적한 것은 옳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의 지적의 음조는 상당히 도발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수련의 과정을 겪어야할 사안들이라 믿어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를 불태워 죽였어야 되었겠습니까?
(13)칼빈 옹호자들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전혀 실권이 없었고 세르베투스의 죽음에
아무 상관이 없다고 변명합니다.
그들은 칼빈은 그저 목사였고 당시 공의회에서 결정한 사안이라 말합니다.
(14)그러나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처음 목격했고, 그를 경찰에 알려서 체포하도록하였으며,
그를 기소하도록 40가지 죄목을 모두 그의 비서인 니콜라스에게 가르쳐주고 제시했으며,
사실상 칼빈이 검찰이 되어 세르베투스를 처형하도록 줄기차게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제네바에서 칼빈의 권위는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겠습니까?
적어도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목을 자르도록 참수형을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15)칼빈의 주장들이 모두 옳았고 정당했다 해도, 제네바 시민이 아닌 세르베투스를
그냥 추방시켰으면 충분했다고 믿어집니다.
만일 그것으로 부족했다면 몇대 때려서 내보냈으면 되었습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오기 전부터 그를 죽이겠다는 살인욕구를 그의 친구
파렐에게 이미 분명히 밝힌바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도, 행테도 아닙니다.
반대로 칼빈의 유아침례 교리가 사탄의 전술이라는 이유로 칼빈을 불태워서야
되겠습니까?
칼빈의 세르베투스 처형 개입의 증거는 그가 프랑스 국왕 시종에게 보낸 편지로
증명됩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세르베투스를 처형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한
살인자를 굳이 옹호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성경 한권이면 충분합니다!
(16) 오늘날 칼빈의 교리를 좇는 집단이 바로 장로교 교단입니다. 장로교는 스코틀랜드와
한국에 주로 성행하고 있으며 미국내에서는 침례교의 1/20 가량의 교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반이스라엘 보이콧 운동을 열심히 행하는 한편 하마스와 손을 잡고 있습니다.
그러한 장로교의 분파가 바로 한국의 장로교 집단인 것이며 오늘날 기독교인 범
죄자들중에도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이제 칼빈주의와 예정론 등에 대해서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 실상을
살펴서 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주 하나님의 은혜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함께하기를 바라겠습니다.
2015. 5. 8일 하토브
첫댓글 이글 40 여명이상 보셨는데 제가 실수로 삭제가 되어 다시 곧 올립니다.
세르베투스의 성경관을을 보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그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자이였으며 당시의 시대상은 로마카톨릭 뿐만아니라 유럽대부분의 나라가 정교일치였던 시대였습니다. 제네바시에서 칼빈이 정교일치를 구현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이 정교일치를 추구했었고 칼빈과 상관없이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오면 처형을 당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를 제네바에서 방치하면 로마카톨릭에의 세력에 공격을 받을 빌미를 주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당시에 시대상을 오늘날의 잣대로 보기는 어렵죠.
시간이 있으면 칼빈의 기독교 강론을 영문으로 꼭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한국은 장로교 가 제일 많으므로..이에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책에 한장에는 거듭남이란 바로 세례받을때 일어나며
성령은 나중에 세월중에 들어 오신다고 가르칩니다.
즉 물과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리라 를 물을 세례받을때 물로..가르칩니다.
침례냐 세례 냐는 자유롭게 선택해도 좋다고 가르치고..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것은
구원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세르베투스는 이 기막힌 이단교리의 장본인인 칼빈을 비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화형 시켰습니다. 이 2개댓글은 하토브님 댓글을 옮겨온것 입니다.)
님께서는 장로교를 비판하기 이전에 제가 올려놓은 말씀에 아멘을 해보십시요..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구절에도 아멘을 못하시겠다면 킹제임스가 절대권위 최종권위라는 님들의 주장을 스스로 부인하시는 격이 됩니다.
@긍휼또긍휼 절대권위 최종권위는 잘 모르겠구요. 영킹은 미국에서 5학년 정도 아이들이 읽을수있는 수준이고 niv 는 중학생 수준 정도 라고 하며 영어성경선생님이 추천... 지금까지 하고 있고..
또 하토브님이 영킹이 베스트 라고 인정 하시고..
흠정역 읽으니 참 좋구요. 저도 추천합니다.
긍휼님의 예정론에대해 올리신글 읽다가 예정론을 반박하는 사람들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근데 제 컴이 몇시간이나 고장상태라 이렇게 늦게 글 가져오게 됐구요 저녁도 안 먹었고 내일 예배땜에...
@희망43 흠정역이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임을 저도 믿습니다. 하지만 멀쩡히 흠정역과 모든 성경에 나온 예정에 관한 말씀에는 아멘을 못하시겠다는건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님들께서 장로교를 비판한다고 하나님께서 칭찬을 하실 것이라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장로교 어디에서도 세례를 받을때 거듭남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가르치는 장로교회는 들은바가 없습니다. 제대로된 장로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요.
@긍휼또긍휼 요일 2:2 절말씀.
그분 자신은 우리의죄들을 위한 속죄희생 이시며
우리의 죄들만을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위하심이라.
요나서 3:10 절.을 보면
하나님이 내리려던 재앙징벌을 안 내리기로 마음을 바꾸십니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안 내리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는데
내리겠다고 말하신것은 쇼 였습니까?
아니면 원래는 내리기로 예정해 놓았는데 니느웨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계획이 달라져 버렸습니까?
아마 예정론 입장에선 행 4: 27~28 절 등이 언급되기를 바랄겁니다.
(그곳 하토브님 댓글였음)
@희망43 하나님께서 뜻 가운데 정하시면 절대 바꾸지 않으시는 '뜻'이 있고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돌이키시는 '뜻'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을 하지 않았고 헬라어전공을 하지 않아서 명쾌히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그 변치않으시는 하나님의 뜻과 상황에 맞게 그 마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뜻이 헬라어 어휘자체가 다릅니다. 궁금하시다면 헬라어 원어성경을 찾아보십시요.
@긍휼또긍휼 그 말씀 자체에 아멘 합니다.긍휼님이 올리신.
그러나 성경 전체의내용과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하나님의사랑을 제가 경험했고 제가 지금껏 아버지하나님을 알아 오는데
저는 예정론을 안 믿으면 사형이다. 라면 예정론을 반대하며 죽겠습니다.
왜냐면 모든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하므로 복음을 들어야 하므로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애끓는 심정 이기에...
확실하게 증명되지도 않은 글로서 칼빈을 욕보이기 위한 행동은 온당치가 않습니다.
희망43님의 필명답지 않게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한 모습을 보이시는데,
진실을 찾아 자신의 교리를 내려 놓으시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