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인가? 이제 결단하라는 말이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환경에서 돌아서라는 말이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말이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로부터 돌아서라는 말이다.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 신앙에서 알곡신앙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삶에서 결단을 요청하고 계신다. 여기서 ‘돌아서라’는 말은 이별하라는 의미와는 조금 다른 것이다. 아예 관계를 끊어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을 ‘본받지 말라’는 뜻이다. 그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돌아서는 삶의 지혜’를 실천하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때이다. 소경 바디매오처럼 주위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해 돌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결단이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그녀는 ‘옷자락을 만지는 용기’를 통해서 인생을 치유 받았다.
20세기 초반에 세계적인 약 100대 기업이 100년이 지난 오늘날 고작 10여개 정도만 살아남아있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하고,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 구습에 얽매어 머물러있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교훈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대형 교회가 100년 이상 지속된 적은 없다는 사실을 아는가? 유럽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교회들이 지금은 박물관으로, 납골당으로, 창고로 이미 변해있는지 오랜 일이다. 1928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1943년 빈손으로 일본에 건너가 MK신화를 일군 유봉식 회장.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돈 버는 비결을 말해주었다. ‘돈 벌고 싶으세요? 머리를 숙이세요.’ 돈 버는 비결도 겸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경건의 능력도 겸손에서 시작되고 겸손으로 유지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알고 돌아서는 지혜를 발견하지 못하면 똑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우리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 회개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알고 돌아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2년 5월 3일자 ‘타임(Time)' 지에 소개된 한국교회 부흥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이 때 타임지는 이런 추세로 한국 교회가 부흥해 간다면 2000년대에 이르러 전 국민의 42%가 회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21세기 지금 한국 교회의 현 주소는 어떤가?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말세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세가 가까울수록 교회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주목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말세의 사람들을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제대로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급성장 속에서 받은 크나큰 축복 앞에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급성장 속에서 우리들의 잘못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유해지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점점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알고 돌아서는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세를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갈수록 악해지고 이기적인 세상으로 변해갈 것이다. 바울은 사단의 활동이 더욱 증가하는 말세의 때가 되면 알맹이가 없는 가짜 경건이 범람하게 될 것을 지적했다.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의 종교로 전락하는 것은 말세에 나타날 중대한 징후라고 했다. 그렇다면 교인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드는 실체와 알맹이는 무엇인가? 바울은 본문에서 경건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경건의 능력은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말한다. 이제 경건의 모양만 추구하는 성도들이 되지 말고, 경건의 능력을 추구하는 알곡이 가득한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모양에서 돌아서서 능력으로 채워야 한다. 우리의 구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