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서원(龜陽書院)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구양서원은 원주변씨 후손들이 변안렬(邊安烈)과 그 7대손 변경회(邊慶會)와 11대손 변극태(邊克泰)를 배향하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변안렬(邊安烈)은 자는 충가(忠可), 호는 대은이다. 조부 변순(邊順)은 고려에서 심양으로 옮겨 거주하였고, 심양후(瀋陽侯)가 되었다. 대은 변안렬은 변순의 아들인 변양(邊諒)의 2남으로 1334년(원통 갑술)에 심양에서 출생, 18세 때 원나라에서 무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혼인하여 환국할 때 대장으로 배행하였다. 지조가 높고 국량이 넓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무예도 출중하였다. 변경회(邊慶會)는 자가 군우(君遇), 호는 백산(栢山), 1549년(명종 기유)에 출생,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고, 탁월한 지절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가산을 모두 팔아 군량미를 조달하였고, 왜란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공신록에 등재되었다. 변극태(邊克泰)는 자가 여화(汝和), 호는 봉은(鳳隱)이며, 백산공의 현손이다.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에 있다. 백산(柏山) 변경회(邊慶會, 1549~1639)와 그의 4세손 봉은(鳳隱) 변극태(邊克泰, 1654~1717)의 효행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914년 세덕사(世德祠)로 창건하였다가 1924년 유림에서 구양이사(龜陽里社)로 승격시켰다. 그 후 1984년 후손 변교우(邊敎雨) 등의 제의로 평안북도 태천(泰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배향(配享)된 원주 변씨 시조인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 1334~1390)의 위패(位牌)를 모시기 위해 이곳에 전통한옥 9동 45칸을 건립하고 서원(書院)으로 올라섰다. 현재 대은 변안열, 백산 변경회, 봉은 변극태 3인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변안열은 선양[瀋陽] 출신 고려 공신이다. 1351년 18세 때 무과에 장원, 병란으로 선양에 가 있던 공민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본관을 원주(原州)로 하사 받았다. 공민왕 10년(1361) 안우(安祐, ?~1362)를 따라 홍건적을 토벌하여 2등공신으로 소부감판사가 되었다. 또 안우와 함께 개성을 되찾 아 1등공신에 올라 예의판서(禮儀判書)가 되어 추성보조(推誠輔祚)공신의 호를 받았다.
변경회는 자가 군우(君遇), 호가 백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다.
변극태는 자가 여화(汝和), 호가 봉은이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곡식을 퍼주고, 글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귀천을 따지지 않고 가르쳐주어 인자(仁者)와 현자(賢者)로서 존경을 받았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숭절사(崇節祠)·염수당(念修堂)·유정문(由正門)·동재·서재·전사청·장서각(藏書閣)·진덕문(進德門)·주소(廚所) 등이 있다. 순절사는 제사를 지내는 3칸 규모의 사우로 변안열과 변경회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염수당은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 회합 및 학문 토론 장소인 8칸 규모의 강당이다. 중앙은 마루로 되어 있고, 좌우측은 협실(夾室)로 되어 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던 기숙사이다. 정문인 진덕문과 내삼문인 유정문은 제사 때 제관의 출입문으로 쓰인다. 전사청은 제물을 마련하여 보관해두는 장소이다. 장서각은 서적 보관 장소로 사용되고 있고, 주소는 고지기가 거처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