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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들의 자취가 서린 역사유적 산책
지금 경제가 어렵다. 경제만이 아니라 나라 안팎의 정치정세도 어지럽다. 난국이라고도 하고, 국난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5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이어오며 숱한 난관과 역경을 극복해온 저력과 민족적 자긍심이 있다. 또한 역사가 오랜 만큼 전국 어느 고장엘 가도 선조들의 멋과 슬기와 애국 ․ 애족정신이 서린 유적과 사적지가 많다. 필자가 지난 40여 년 간 답사해본 사적지 가운데 찾아볼 만한 중요한 사적 몇 곳을 소개한다.
강화도 참성단 ․ 국방유적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북방리에 소재한 마리산은 강화도의 대표적 명산이며, 산 전체가 국민관광지이다. 본래 이름은 ‘머리산’이란 뜻의 ‘마리산’이지만 이를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마니산이 되어버려 옛 이름을 되찾자는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해발 468m 정상부의 사적 136호 참성단은 국조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전해오는 민족의 성지이다. 또‘삼국사기’에도 백제 ․ 고구려 ․ 신라의 왕들이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시대에 치열한 각축장이었던 강화는 고려와 조선시대엔 국난이 있을 때마다 임시수도 역할을 했을 만큼 국방의 요충이었다. 강화가 최초로 고려의 수도가 된 것은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39년간. 중국대륙을 석권한 몽골군이 고려를 침범하자 당시 집권자 최우가 강화로 천도했던 것이다. 그뒤 충렬왕 17년(1290)에도 거란의 침략으로 조정이 2년간 강화에 피란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유적이 사적 132호 강화산성, 133호 고려궁터, 224호 홍릉, 369호 석릉 등이다.
또 조선 인조 3년(1625) 정묘호란 때 임금이 40일간 강화도로 피란했고, 11년 뒤 병자호란 때도 왕자와 대신들이 강화로 피란했었다. 강화도는 또한 ‘강화도령’으로 이름난 철종이 태어나 무식한 시골 총각으로 살다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루아침에 임금으로 벼락출세를 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살던 집터가 바로 읍내 관청리 용흥궁터이다.
강화의 수난사는 근대를 거쳐 현대까지 이어졌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 1875년의 운양호사건, 1876년의 강화도조약으로 열강의 침범에 이어 쇄국의 빗장이 풀리고, 수탈과 개명의 근대사가 시작된 곳이 강화도였다. 이러한 근대사 여명기 국난극복의 현장인 강화국방유적은 1977년 대대적인 보수․정화공사를 거쳐 복원․단장됐는데, 이에 관한 모든 자료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강화읍 갑곶리 갑곶돈대에 건립한 강화역사관에 집대성, 전시되고 있다. 국방유적 가운데 초지진은 사적 225호, 덕진진은 226호, 광성보는 227호, 갑곶돈대는 306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김해 구지봉 수로왕 ․ 왕비릉
영남의 젖줄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경남 김해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삼한시대엔 구야국이란 부족국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 이후 532년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할 때까지 10대 491년간 왕통을 이어왔다.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뒤 금관군이라고 부르다가 680년 문무왕이 금관소경을 두었고 757년 경덕왕이 김해소경으로 개칭함으로써 비로소 김해라는 지명이 비롯됐다.
김해시 구상동의 구지봉은 사적 58호.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 탄강의 역사적 현장이며, 국문학사의 첫머리를 빛낸 고대가요 ‘구지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야트막한 구릉인 구지봉 정상부엔 김수로왕 출생에 얽힌 전설의 황금알 6개와 그것을 보호하는 용을 새긴 돌우물이 있다. 또 그 곁엔 ‘대가락국 태조왕 탄강지지’란 석비가, 그 남동쪽엔 조선조의 명필 한석봉이 ‘구지석봉’이라고 써서 새긴 고인돌이 있다.
김해시 서상동의 수로왕릉은 사적 73호. ‘삼국유사’에 따르면 수로왕이 199년에 158세로 죽어 대궐 동북쪽에 장사지내고 수릉왕릉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양천 허씨, 인천 이씨 등 김수로왕과 허황옥 황후의 후손들이 해마다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이곳에서 제향을 올린다. 구지봉과 가까운 구산동의 수로왕비릉은 사적 74호. 수로왕비 허황옥은 본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16세 때 하늘의 계시에 따라 돛배를 타고 가락국으로 찾아와 수로왕의 왕비가 됐으며, 189년에 157세로 죽어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김해 허씨는 두 왕자에게 모후의 성을 따르게 하여 허씨가 됐다고 한다. 수로왕비릉 앞엔 허황후가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이 모셔져 있다.
단양 온달성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와 백자리 사이 남한강변에 우뚝 솟은 성산은 해발 427m. 그리 높지도 험하지도 않은 산이지만 우리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난 역사의 현장이다. 이는 이 성산 정상부의 온달산성이 고구려의 용장 온달 장군의 마지막 싸움터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남정 길에 올랐다가 이곳 온달산성(아단성)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오랜 세월 이어온 우리 역사에서 빛나는 이름을 남긴 명인은 많지만 ‘바보’ 소리를 들으면서도 역사의 무대를 유유히 가로질러간 인물은 평강공주와의 로맨스로 더욱 유명한 온달 장군밖엔 없을 것이다.
사적 264호인 온달산성은 길이 1.5km, 높이 8.5m, 너비 3.6m로 동문과 남문터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남굴이라고도 부르는 온달굴은 천연기념물 261호이다. 이 밖에도 영춘 일대에는 활거리 ․ 비마루 ․ 진거리 ․ 군관나루 ․ 쉬는돌 ․ 대진목 등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와 관련한 전설이 서린 지명이 많다. 온달이 실지회복의 한을 품고 전사한 온달산성과 남굴 일대에선 1996년부터 단양군 주관으로 온달문화제란 지역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논산 황산벌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의 전몰로 잘 알려진 황산벌은 현재 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를 가리킨다. 백제의 도성 소부리(부여)의 마지막 방어선인 이 황산벌에서 계백과 5천 결사대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침략군 5만 대군과 맞선 것은 서기 660년- 백제 의자왕 20년, 신라 무열왕 7년 음력 7월 9일이었다. 그날 김유신은 10배의 우세한 대군으로 일시에 적진을 짓밟고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신라군은 백제 결사대의 무서운 기백과 투혼을 당할 수 없어 패하고 물러나기를 4차례나 거듭했다. 계백 장군이야 말로 쓰러져가는 나라의 잔병 겨우 5천으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신라의 5만 정예 대군을 맞아 4전 4승의 신화를 이룩한 용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죽을 곳과 때를 스스로 찾을 줄 알았던 진정한 군인의 귀감이었다. 계백장군은 전쟁이라는 극한상황 속에서도 소년 화랑 관창의 기개와 용기를 아껴 두 번씩이나 살려서 돌려보낼 만큼 도량 넓은 덕장이기도 했다.
1천300년 전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가 장렬하게 전몰한 비극적 역사의 무대 황산벌은 이제 백제의 후예들이 포도와 인삼을 가꾸며 살아가는 삶터로 변해 역사의 무상을 되새기게 한다. 육군 제2훈련소 인근인 황산벌 한쪽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 기슭에는 계백장군묘가 있어 백제 망국의 한서린 역사와 참 군인의 길을 말없이 일러주고 있다.
진도 삼별초유적 ․ 명량해협
전남 진도는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섬이다.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를 잇는 길이 484m의 진도대교가 가로지른 명량해협은 우리말로 울돌목이라고 부르는데,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불과 12척의 보잘것없는 군세로 133척에 이르는 왜적의 대함대를 무찔러 세계해전사상 유례없는 대승을 거둔 빛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해남에서 진도로 건너가는 뱃길의 들머리인 고군면 벽파리에 이충무공전첩비가 세워져 있다. 또 진도대교 바로 건너편에도 명량대첩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이곳이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현장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진도는 이에 앞서 고려 원종 11년(1270)부터 그 이듬해까지 배중손 ․ 김통정 ․ 노영희 장군들이 이끈 삼별초군이 주체적 독립왕국을 세우고 몽골 오랑캐군에 맞서 피어린 항쟁을 벌이던 뜻 깊은 곳이다. 벽파리에서 진도읍 쪽으로 약 4km를 들어가면 군내면 용장리. 이 마을 뒤에 사적 126호 용장산성이 있다. 무상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지금은 거의 다 무너져버렸지만 성벽 일부와 대궐터 및 용장사터가 남아서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싸우다 죽었던 삼별초 용사들의 비장하고 용감한 기개와 한 서린 역사를 말없이 일러주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터는 산성의 총연장거리가 12.85km. 성내 면적은 약 258만 평이며, 그 안에 석축으로 된 12개소의 건물터가 남아 잇다. 또 그 주변은 420m의 토성이 둘러싸고 있으며, 대궐터 아래엔 삼별초항쟁 당시 마시던 우물이라고 전하는 샘터 하나가 남아 있으나 지금은 모두 잡초 무성한 쓸쓸한 폐허로 변해 찾는이의 가슴을 비감에 젖게 한다.
한편 진도의 가장 남쪽 마을인 임회면 남동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적 127호 남도석성은 삼별초항쟁의 지도자 배중손 장군이 여몽연합군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은 곳이다. 삼별초항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려는 자주성을 빼앗긴 채 원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렸다. 하지만 삼별초 용사들은 비록 무력으로는 졌으나 자주․자유․주체를 위한 항쟁의 깃발을 힘차게 휘날린 불굴의 정신으로써 영원한 승리를 거뒀다고 하겠다.
여주 영릉 ․ 명성황후생가
경기도 여주는 고구려 때 골내근현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황려현으로 바뀌었고, 고려 때엔 여흥이라고 개칭했다. 조선조로 접어든 1469년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을 이곳 능서면 왕대리로 이장하며 여주목으로 승격시켰다. 여주엔 조선조 4대 임금인 세종의 영릉과 17대 임금인 효종의 영릉(寧陵) 등 2기의 왕릉이 있는데, 이 두 능을 합쳐 ‘영녕릉’이라고 부르며, 사적 195호로 함께 지정했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은 풍수지리상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지관들 사이에선 그 덕분에 조선왕조의 국운이 100년이나 더 연장됐다는 설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능은 본래 서울 대모산에 있었는데 예종 때 이곳으로 천장했다. 영릉 정문을 들어서면 재실 ․ 세종대왕동상 ․ 세종대왕기념관 ․ 훈민문 ․ 홍살문 ․ 정자각 ․ 봉분 등이 차례로 나온다. 세종대왕은 두 형인 양녕대군 ․ 효령대군을 제치고 1418년 22세 때 왕위에 올라 54까지 32년간 재위하면서 한글창제를 비롯하여 국방 ․ 과학 ․ 농업 ․ 교육 ․ 음악 등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겨 조선조 500년간 으뜸가는 성군으로 꼽히고 있다. 효종의 영릉은 세종의 영릉 왼쪽 언덕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왕비 인선왕후와 쌍릉으로 조성된 이 능도 원래는 동구릉에 있던 것을 현종 때 이장한 것이다.
여주의 대표적 명찰인 신륵사는 여주대교 건너 북내면 천송리, 여주 사람들이 여강이라고 부르는 남한강변에 있으며 주변이 신륵사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사철 찾는 사람이 많다. 이 절은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고려 우왕 2년(1376) 당대의 고승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입적함으로써 명찰의 반열에 오르게 됐고, 또 나중 세종대왕의 영릉이 이곳으로 천장한 뒤 신륵사를 원찰로 삼음으로써 더욱 발전하게 됐다. 보물 225호 다층전탑, 180호 조사당 등 보물 7점과 극락전 등 귀중한 불교문화재가 많다.
구한말 국운이 기울어가는 풍운의 시대와 맞서 싸우다가 비명에 간 명성황후의 생가가 여주읍 능현리에 있다. 경기도문화재 46호. 생가 옆의 ‘명성황후탄강구리비’는 고종의 친필이며 역시 경기도문화재 41호로 지정돼 있다. 명성황후는 16세에 고종에게 시집가 시아버지요 정적인 대원군을 몰아내고 국정의 일선에 나섰다가 일제의 마수에 의해 살해당한 비운의 국모요 왕조사 최후의 여걸이었다.
영월 장릉 ․ 청령포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서북쪽 3km 지점 동을지산 중턱의 사적 196호 장릉은 조선조 6대 임금 단종의 능이다. 장릉이 이처럼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까닭은 그가 숙부 세조에게 쫓겨나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원통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영월이란 깊고 험준한 산중의 작은 고을이 충절의 고장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도 단종이 비극적 최후를 맞은 슬픈 역사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청령포는 시퍼런 강물이 굽이져 흐르며 삼면을 감싸돌아 반도의 형상을 이루고, 뒤는 깎아세운 듯한 험악한 절벽으로 가로막힌 창살 없는 천연의 감옥이다. 이렇게 무서운 곳에 갇혀 외로운 귀양살이를 했으니 어린 단종의 하루하루는 피눈물로 얼룩진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1455년 6월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빼앗긴 단종은 그해 사육신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듬해 6월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청령포로 유배당했다. 청령포로 유배당했던 단종은 그해 늦여름에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처소를 읍내 관풍헌으로 옮겼다가 1457년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그때 겨우 17세였다. 단종의 시신은 강물에 버려져 아무도 거두지 않았으나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 고장 호장 엄흥도에 의해 동을지산에 모셔지고, 뒷날 단종이 복위되자 장릉으로 명명한 것이다. 영월군은 해마다 청명 전후 사흘간 비명에 간 단종과 충신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단종제를 베풀고 있다.
금산 칠백의총
충남 금산읍 금성면 의총리의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8월 중봉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끈 7백 의병이 금산을 점거한 왜적을 무찌르다가 장렬히 전몰한 뒤 그들의 시신을 한군데 모신 국난극복의 성역이다. 7백 의사는 그해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하고 이어서 금산을 수복하려다가 1만 5천여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원 순국했다. 칠백의총 경내엔 일군순의비 ․ 종용사 ․ 칠백의사순의탑 ․ 기념관 등이 있다.
한편 금성면 양전리엔 의병장 제봉 고경명의 순절비가, 진산면 흑산리엔 권율 장군의 이치대첩비가, 복수면 곡남리엔 조헌의 유적인 수심대가 있다. 또 부리면 불이리엔 고려말의 충신 야은 길재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 청풍사가 있다. 그리고 남이면 석동리의 보석사 의선각은 조헌과 더불어 순국한 서산대사의 제자 영규대사가 머물던 곳이다. 영규대사는 공주 계룡사와 금산 보석사를 오가며 불도를 닦다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승병장으로 나섰는데, 보석사 들머리에 영규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의병승장비가 서 있다.
진주 남강 의암
경남 진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진주성 촉석루요, 촉석루 하면 그 아래 남강에서 왜장을 껴안고 투신 순절한 의기 논개가 연상될 것이다. 경남도문화재자료 8호 촉석루는 한산대첩․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을 기록한 빛나는 역사의 현장인 사적 118호 진주성 안에 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대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 장군의 무적함대를 피해 육로로 곡창인 전라도를 침범하려는 왜군을 막는 관문 역할을 했다. 1592년 음력 10월 6일부터 진주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민 ․ 관 ․ 군 3천 800명이 6일간 치열한 공방전 끝에 2만이 넘는 왜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그 이듬해 5월 20일부터 시작된 제2차 진주성싸움에선 의병장 김천일, 충청병마사 황진, 경상우병마사 최경회 등이 관군과 의병 6만5천, 피난민 6만여 명과 함께 12만이 넘는 왜의 대군에 맞서 11일간 처절한 혈전을 벌인 끝에 모두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진주성 촉석루 옆의 의기사는 이때 왜군 장수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고귀한 한목숨을 바친 논개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사당이다. 경남문화재자료 7호. 촉석루에서 남강변으로 내려가면 그때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투신․순절한 바위 의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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