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째 날
'해뜨기 전 동대구역에 모였던 우리는 수학여행에의 설레임으로 시끌벅적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 나는 가정형편상 마음을 접고 있다가 어머니가 가까스로 마련하신 여행 경비를 들고 출발 당일 극적으로 합류한 것이다.'
52년이 지난 지금, 그 날의 추억을 되새기려 오랜만에 강릉행 무궁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밖에는 완연하게 봄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어지는 들판에는 한창 파종 준비를 하고 있었고 기차길옆에는 개나리와 벛꽃 등으로 환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안동이 고향인 나는 학창시절 가끔씩 중앙선 열차를 타곤 했다. 그 때 대구에서 안동까지 3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꽤나 빨라져도 산천의 풍경은 여전히 고즈녁하다.
텅빈 객실에서 수학여행의 기억을 추슬려 보지만 별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영동선의 구부러진 철길이나 손바닥만한 앙증맞은 기차역사들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강원도계를 넘어서니 옛날 또아리굴이라는 터널은 16.2km나 되는 솔안터널로 바뀌어져 있었다.
하지만 태백삼척 탄광지대를 지나 동해안 묵호읍에서 마주치는 탁트인 바다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드디어 강릉에 도착했다.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외가인 오죽헌(烏竹軒) 일대를 돌아 보았다. 시화에 능했고 현모양처의 귀감이었던 신사임당은 이곳 몽룡실에서 율곡을 낳고 교육했다고 한다. 문득 그녀가 결혼후 떠나온 친정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사친시(思親詩)가 떠오른다.
"산첩첩 내고향 천리이언만
꿈속에도 언제나 고향생각뿐
한송정 물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앞에는 한줄기 바람
갈매기 모래위를 모였다 흩어지고
고깃배 바다위로 오고 가는데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예나 지금이나 고향과 혈육에 대한 사랑은 어쩔 수없는 인간의 본능이라 생각해 보며 경포호반으로 발길을 돌린다.
# 2일째
아침 일찍 설악동으로 들어가고 있다. 멀리 눈쌓인 설악산이 눈에 들어온다. 이윽고 신흥사(神興寺) 주차장에 내려 사위를 둘러보니, 쭉쭉 뻗은 산세와 힘차게 흐르는 쌍천이 어우러져 별세계에 온 듯하다.
얼마 만에 오는건가? 10여년도 더 된 것 같지만, 언제나 새로운 느낌이다. 극락보전의 아미타불을 참배하고 곧바로 계조암으로 향했다.
계조암(繼祖庵)은 612년 자장율사 (590~658)가 건립하여 자장, 동산, 봉정 3조사가 수도하신 곳으로 이후 원효와 의상조사로 계승된 바위굴이다. 그 앞마당에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힘을 써도 항상 일정하게 흔들린다는 흔들바위가 있는데, 고등학교 수학여행때 여기서 사진을 많이 찍었던 기억이 난다. 계속 1km정도 올라가면 설악의 명물 울산바위가 나온다. 해발 873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장장 4km나 펼쳐진 설악산의 상징과도 같은 바위군들이다. 이번에 생전 처음으로 그 정상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올라가는 길은 힘들었다. 수많은 돌과 계단들로 이루어져 있어 숨이 찻다. 계단에서 헉헉거리고 있으니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You OK?" 하면서 안위를 물어올 정도였다. 더구나 정상에 다가갈수록 급경사가 심하여 평소 고소공포증이 좀 있는 나로서는 실족의 두려움과도 싸워야 했다. 드디어 천신만고끝에 정상에 올랐을때 주위에 펼쳐진 당당한 산군들과 속초 동해바다를 내려다 볼수 있는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항상 부족했던 용기의 힘을 몸소 체험한 듯했다.
우리 학교의 슬로건은 박력(迫力)이었다. 옳다고 믿는 것을 용기있게 밀고 나가라는 뜻이리라. 그러면 인생에서 용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용기(勇氣)란 수난하에서의 품위를 의미한다고 하였고, 미국의 젊은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는 그의 책 '용기있는 사람들(Profile of courage)' 에서 용기란 당리당략, 이해 집단이나 심지어는 대중의 반대에도 굴복하지 않는 양심에 따른 행동이라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박력이 가지는 정신은 이 후 세상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데 큰 힘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지난 50여 년 동안 숱한 고난을 이겨냈을 우리 친구들은 더욱 자랑스럽다.
울산바위에서 내려와 신흥사에 이르니, 옛날 수학여행때 묵었던 숙소의 위치가 궁금했다. 한 방에서 십수 명이 밥먹고 딩굴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모두 철거되어 버렸지만, 그 때 여관 옥상에서 함께 찍은 사진은 아직도 내 앨범속에 남아있다.
# 3일째
옛날 마고선(麻故仙)이라는 신선이 하늘로 올랐다는 비선대(飛仙臺)로 향했다. 시원스레 흘러 내리는 계곡을 따라 1시간쯤 올라가니 눈에 익은 풍광이 들어왔다. 아! 비로소 고등학교 수학여행때 물놀이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그 때 장난치다가 급류에 미끌어져 웅덩이에 빠졌던 적도 있고~ 내가 앉아 쉬었던 거대한 너럭바위는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있었다.
다시 용기를 내어 비선대 윗쪽 금강굴 (金剛窟)에 가보기로 했다. 돌과 철계단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나서야 미륵봉 절벽 중앙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석굴에 도달했다.
민중교화승이었던 원효대사(617~686)가 수행기도하였다는 이 곳에 올라서니 전망이 확 트이면서 공룡능선, 천화대능선, 천불동계곡 등 잔설에 쌓인 설악산의 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보기 드문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렇지만 옛날 스님들은 오르기도 어려운 이 절벽에서 어떻게 수행하셨을까? 궁금하기는 하다. 바위 틈새로 흐르는 금강굴 약수를 두어 바가지 마시고 절벽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왔다.
오후에는 내친김에 비룡폭포(飛龍瀑布)가 있는 계곡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옛날 폭포수속의 용이 처녀를 제물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 비룡폭포는 높이 16m의 그리 크지 않는 폭포지만 아랫쪽의 육담폭포와 함께 줄기차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람한 물소리를 뒤로 하고 계속 발길을 재촉하여 900여 계단을 오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는 토왕성폭포(土王城瀑布)가 절벽을 타고 아스라이 뿜어져 내리고 있었다. 총길이 320m의 3단 연폭으로 마치 선녀의 비단을 늘어 뜨린 듯한 자연의 자태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자연, 그리고 그 앞에 선 인간...
산에서 내려와 파전 안주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다시 인간계로 돌아온 기분을 즐긴다. 위대한 자연의 품에 안겨 본 하루였다.
# 마지막 날
양양의 낙산사(洛山寺)로 갔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거처하신다는 중국의 보타낙가산에서 이름을 따온 낙산사는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한 우리나라 유수의 관음기도도량이다. 특히 동해 바다를 끼고 세워진 홍련암(紅蓮庵)과 의상대(義湘臺)는 예로부터 관동8경의 하나로 수려한 바다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2005년 대화재로 새로 단장한 원통보전과 보타전, 그리고 해수관음불상을 거쳐 홍련암에 이르니 뛰어난 문예와 함께 이 지역 불교 중흥을위하여 많은 일을 하신 무산스님(1932~2018)의 시조(詩調)가 걸려 있다
"밤늦도록 불경을 보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그래, 끝없이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앞에 서니 이심전심이랄까~ 웬지 모를 허무함을 느낀다.
나는 원래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별로 없지만, 그 수학여행에서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던 한 친구가 생각난다.
티없이 맑은 눈에 언제나 해맑은 표정의 순둥이였다. 항상 미소띤 얼굴에 화내는 법도 모른 바보? 같은 녀석이었다.
중학교때부터 이어온 인연으로 고등학교 내내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는데, 졸업후 그가 재수할 때 동촌에 있던 그의 집에서 잠시 재회했었으나, 이듬해 다시 찾아 갔을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백혈병! 전화가 서로 없던 시절에 자주 연락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황망히 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오랜만에 서가의 앨범에서 초점도 맞지 않는 빛바랜 사진들을 들여다 보고 있다. 그 해 수학여행에서 함께 찍은 사진에서 그를 추억한다. 그가 그립다.
https://youtu.be/dEsIscaZiHc?si=ceDpBYqG8MzF6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