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해
체험으로 만난 불교에 희열…
2005-02-16
일찍 찾아온 질풍노도의 시절,
벽에 발린 신문기사에서부터
벽장 뒤에 숨겨 논 삼촌들의 성인물 소설까지
수십 독을 하고도
갈증 나던 활자 탐식증은
60년대 벽촌 국민학교 도서실의 책으로
채우기에는 부족할 참이었다.
그러나 탐독에만 급급했을 뿐
체계적 배열과 의미배분의 적절한 조절 없이
잡식으로 혼돈된 정신은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배출구를 찾아 허덕일 뿐이었다.
마침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섯 살 위의 형님이었다.
회색 누더기와 삭발,
일상과 상식을 초월하는 격외의 질문들은
폭발 일보 직전에 있던
나를 예리한 칼끝처럼 찔러왔다.
나는 불교를 향해
장마철 터진 둑으로 쏟아지는
급류처럼 몸으로 내달렸다.
나는 불교를 몸으로 먼저 만났다.
체험으로 느끼던 그 시절의 환희와 희열은
지금도 소름으로 다시 돋아나곤 한다.
나는 그렇게 한 인간이 종교의 핵심에 도달하는 지름길로 운 좋게 바로 들어섰었다.
그러나 타고난 품성이 문제였다.
따져 묻기를 좋아한 탓에
희열과 환희의 체험을
논리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 했다.
체험을 심화시키는 실천 대신에
언어를 동원해
그것들을 환원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체험의 자기만족에 머물지 못하고
굳이 논리적 설득력을 확보하려 든 것은
자기이해를 위함인 동시에
나를 남에게 공유시키고 싶어 했던
무의식적 충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체험을 지나
불교를 학문으로 걸어온
이유라면 이유다.
이처럼 자기만족적 체험보다는
논리적 정렬로 남을 설득하려 든 탓에
나의 불교학 편력은
주마간산식 두루 섭렵이었다.
발심수행장에서 격발되어
밀린다 팡하의 논리적 분석에 설복당하고,
금강경의 파사현정적 공관(空觀)의
통쾌함에 눈물 흘렸으며,
기신론과 유식의 정치(精緻)함에
무릎을 꿇고,
중관의 완벽한 논리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화엄을 펴고 망망대해의 바다를 보았고,
조사선의 초월적 단도직입에 마음 설레었다.
이렇게 10여년이 흘렀을 때,
전통적 방법에 의한 이해와 교수에
한계를 느꼈다.
그곳엔 도무지 ‘지금’과 ‘여기’에 대한 해석이 없었다. 세상에서는 민주화, 노동, 통일, 분배 등의
사회정의에 대한 욕구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고
지식인, 학생, 기독교인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데도
불교는 여전히 방석 위에서
지그시 눈감고 앉아 있었다.
모두들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수 백 년 전의 언어로
내면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우리가 좆아야 할 옳음에 대해
불교라는 이름으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때 근대적 학문방법을 만났다.
라모뜨
(E. Lamotte, trans. by Sara Webb-Boin, History of Indian Buddhism, 1988)나
나까무라
(中村元, 〈自我と無我〉, 平樂寺, 1981)나
듀몰린
(Heinrich Dumoulin, trans. by James W. Heisig & Paul Knitter, Zen Buddhism : A History. vol. 1, China, 1988)을
만났을 때 뒤늦게나마 새롭게 가야 할 길이 보였다.
불교대학의 석사과정까지,
한국불교의 전통적 주류였던
조사선에 몰두하면서
근대적 학문방법에 대한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영어권의 연구성과가 거의 반영되지 못하던
당시 불교학의 지평에 대한 안타까움과
70~80년대 기독교가 보여주던
사회참여의 열정에 비례된
불교의 역사인식에 대한 회의는
내 관심을 불교학을 넘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학으로 이끌었다.
노스
(J. B. Noss, Man’s Religions, 6th ed. Macmillan[현재 10th ed.], 〈세계종교사〉, 현음사, 1986)를
읽으면서 나는 종교학이라는 방법으로,
즉 다른 종교에 비춰 불교를 보기 시작했다.
‘86년 이후 줄곧
길희성
(〈보살예수〉, 현암사, 2004)을
바라보지만 조족지혈 아득할 뿐이다.
나는 불교를 체험으로 만나서
천성 탓에 학문으로 향했다.
내가 여전히 학문적 방법으로나마
불교를 하는 양보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내게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체험의 전율적 희열이 사위어든 이후
여전히 내게 정신적 자유를 담보해 온 것은
세계와 인간을 연기법과 무아와 중관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이해다.
그리고 그것의 실천인 자비는
내 인격과 삶의 최후의 보루요 위안이다.
나는 불교학이 지혜와 자비로 성취할
궁극적 자유와 평화를 위한
고갈되지 않는 영원한 동력이라고 믿는다.
윤영해/동국대 교수
[불교신문 2105호/ 2월18일자]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997#:~:text=%EC%9C%A4%EC%98%81%ED%95%B4,%C2%A9%EB%B6%88%EA%B5%90%EC%8B%A0%EB%AC%B8
첫댓글 정신적 자유를 담보해 온 것은
세계와 인간을 연기법과 무아와 중관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이해다.
그리고 그것의 실천인 자비는
내 인격과 삶의 최후의 보루요 위안이다.
나는 불교학이 지혜와 자비로 성취할
궁극적 자유와 평화를 위한
고갈되지 않는 영원한 동력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