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여질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리' 혹은 '위치'를 차지하고,
그 '자리'에 따른 역할과 사명을 부여받아 살아갑니다.
‘자리’는 때로는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를 만들고,
빈부귀천을 형성하며, 우월감과 열등감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리’에 대한 열망은 출세와 입신양명의 성공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을 넘지 않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 것은 교양이요 미덕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자리 어느 위치에 있든지 타인을 존중하고, 먼저 배려하고 우러르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겸손과 인격을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루카 14,8-10)
이 비유 속에서 초대받은 사람의 관심은
온통 '자리'와 '대우'에 쏠려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잔치에 초대받은 이에게 중요한 것은
‘자리’가 아니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요, 자신에 대한
‘대우’가 아니라 초대해주신 분의 호의에 감사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를 초대한 혼인잔치에는 말씀과
성찬의 밥상이 너끈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몸으로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이 밥상은 윗자리에나, 맨 끝자리에나,
그 어느 자리에나, 모두 풍성합니다.
그러니 자리 밑에서 부스러기만 주워먹을 수 있어도 행복입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것만으로 이미 행복입니다.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대하신 분의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아는 것이야말로 축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여질 것입니다.”
(루카 14,11)
이는 사람의 ‘높고 낮음’이 자신의 욕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초대하신 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높낮이는 자신이 정하거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배정되는 것이며,
주어지는 것이요 부여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 문장의 종결어미는
‘낮아지고’ 혹은 ‘높아질 것이다’는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오히려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높이는 이가 높아질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여지고',
상대를 낮추는 이는 자신도 함께 낮추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려가 상대를 높이는 일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떨어져 땅에 뒹구는 이 가을의
낙엽처럼 돌아가 썩어 거름이 될 자리로 가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는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이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오늘의 말·샘 기도>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루카 14,8)
주님!
오늘도 잔치 상을 너끈하게 차려주시니, 기뻐하게 하소서.
또한 감사할 줄 알게 하소서.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이미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