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사업 마을 단위로 키우고 …2주택자에도 혜택
17세기 지어진 빈 돌집 객실로
향토 음식 ‘밤 요리’ 발굴하고
호밀농사·방앗간 운영 등 활기
입소문 타고 관광객 발길 늘어
스위스 티치노 칸톤의 코리포 마을 전경. 빈집을 활용해 마을호텔을 만든 이후 소멸 위기 지역에서 전세계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문화재를 보호하는 방식은 여러가지다. 그림이나 공예품·서적 같은 물품은 박물관 수장고에 고이 모셔두면 된다. 마을 전체가 지켜야 할 문화재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1975년 스위스 정부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아 ‘역사적인 정착지’로 선정된 티치노 칸톤(州)의 코리포는 ‘마을호텔(Albergo diffuso·흩어진 호텔)’을 방법으로 삼았다.
코리포는 17세기에 지은 돌집 60여채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마을로, 1950년대 이후 고령화와 인구감소로 급격히 쇠락했다. 1976년 문화·역사 보존을 위해 설립된 ‘폰다치오네 코리포 재단’은 스위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여러 문화기관에서 지원금을 받아 지역소멸을 막기 위해 노력을 쏟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인구는 계속 줄어 2010년께는 평균 연령 75세 10명만이 남았다. 골머리를 앓던 재단이 돌파구로 택한 것이 바로 마을호텔이다.
마을호텔이 들어서면서 방치되고 부서진 돌집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재단은 시와 은행 등에서 우리나라 돈으로 60억원 정도를 지원받아 빈집 12채를 사들였다. 그중 10채는 객실로, 나머지는 안내소와 회의실로 고쳤다. 프런트가 있는 식당은 이곳에 있는 유일한 새 건물인데,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한다. 마을호텔 개·보수를 맡은 파비오 지아코마 건축가는 돌과 나무 등 자연재료를 사용하고 전통 건축 방식을 적용해 옛집과 비슷하게 지었다. 전체 마을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다. 마침내 2019년, 빈집이 즐비하던 마을은 수백명의 관광객을 맞이하게 됐다.
마을호텔 책임자는 요리사 출신의 제레미 게링 총괄매니저다. 직원을 뽑는 공고에 지원했다가 연고가 없는 코리포까지 오게 됐다. 그는 낯선 마을에 정착하는 것이 두렵기보단 설렜다고 회상했다.
“스위스의 첫 마을호텔이라는 점이 끌렸습니다. 요즘엔 이곳처럼 객실 규모가 작고 건축이나 운영 방식이 독특한 호텔이 유행이거든요. 분명 문을 열자마자 주목받는 호텔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뒤이어 인근 도시에서 20∼30대 직원들이 채용되면서 조용하던 마을에 활기가 돌았다.
객실은 간소하게 꾸몄다. 투숙객이 객실보다는 밖으로 나와 마을을 누비길 바라서다.
1970년대까지 마을 주변에는 밤나무 숲이 울창했다. 자연히 밤파이 같은 밤을 이용한 요리가 발달했는데, 인구가 줄면서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게링 총괄매니저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향토 음식 발굴에 나섰다. 밤 요리는 물론 지역농산물로 만든 갖가지 음식을 식당 메뉴로 선보였다. 저녁 특식으로 나오는 양고기 스테이크나 치즈 요리는 전통 스타일을 현대식으로 변주한 메뉴다. 음식이 주목받으면서 덩달아 농업도 기지개를 켰다. 밤나무 숲이 복원될 예정이고 호밀밭은 지난해부터 수확이 시작됐다.
양 목장을 열겠다고 나선 주민도 있다. 한 마을주민은 “버려졌던 방앗간이 단장을 마치고 얼마 전부터 다시 돌아가고 있다”면서 “방앗간이 문을 열면서 호밀농사를 짓겠다는 이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고 일러줬다. 마을호텔이라는 든든한 판매처가 생기면서 책 속에 남을 뻔한 지역문화가 다시 살아나 숨 쉬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지난해 코리포를 찾은 방문객은 2000여명에 이르렀다. 올해도 7월말까지 벌써 1000명을 넘어섰다. 입소문이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독일·인도에서도 관광객이 온다. 별장을 구입해 한두달씩 머무는 이들도 꽤 많다. 끈끈하게 관계를 맺은 생활·관계 인구도 크게 늘었다. 마을주민이자 폰다치오네 코리포 재단 회장인 마르코 몰리나리씨는 “주말이면 골목에서 사람들 말소리가 들려온다”면서 “마을호텔이 들어온 이후 지방소멸 걱정을 덜었다”고 전했다.
유일한 신축인 프런트가 있는 건물. 전통 가옥과 비슷하게 지어 튀지 않고 잘 어우러져 있다.
인구 10명의 마을에서 수천명이 찾는 관광 명소로 상전벽해 수준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어려움은 없었을까. 게링 총괄매니저는 주민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을호텔에선 곳곳에 흩어진 빈집이 객실입니다. 그러다보면 투숙객이 실제 거주민이 사는 집 옆집에 숙박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주민들이 손님들을 반갑게 맞아주지 않으면 마을호텔이 결코 잘될 수 없습니다.”
코리포 마을호텔은 원주민을 설득하기 위해 주거환경 개선에 힘을 쏟았다. 빈집 정비뿐 아니라 노후한 배수관·가로등·도로를 고쳤다. 잡초가 무성한 주변 풀숲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유 정원으로 가꿨다. 또 투숙객과 주민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었다. 게링 총괄매니저는 마을 단위 정비가 성공 전략이라고 일러줬다.
코리포 마을을 소개하거나 관광 명소를 알려주는 안내소이자 접견실.
“마을호텔을 준비할 때 호텔 시설로 쓰일 건물만 정비하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닙니다. 원주민들이 직접 혜택을 체감할 수 있도록 마을 전체 인프라를 개선해야 합니다. 코리포처럼 보존 가치가 있는 곳이라면 더욱 이러한 접근이 중요합니다.”
마을호텔에서 거둔 수익 일부는 재단에 돌아가고 이 비용은 고스란히 마을 보호에 쓰인다. 현재 빈집 두채가 수선을 기다리고 있다. 공사 비용이 부족했는데, 호텔이 명성을 얻으면서 기금 지원이 줄을 이었다. 게링 총괄매니저는 “아직 방치된 빈집이 꽤 많다”면서 “코리포마을의 모든 건물을 정비해 사람의 온기로 채울 것”이라고 계획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