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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교회의 기능과 사역자론
1. 교회의 기능 웨슬리의 교회에 대한 정의(定意)에서 밝힌 교회의 기능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the pure word of God)이 전파되는 것이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분부에 따라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는 것이다. 웨슬리는 “도대체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보이는 교회는 신실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그 기능은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선포하며, 성례를 정당하게 집행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보이는 교회에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산 믿음으로 이 믿음이 없이는 보이는 교회든 보이지 않는 교회든,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둘째는 순수한 말씀의 설교이다. 왜냐하면 설교가 없다면 믿음은 약해지고 마침내 죽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셋째는 성례의 정당한 집행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 방법으로 믿음을 북돋우시기 때문이라 했다.(J.Wesley, “이성적이며 종교적인 인사들에 대한 간곡한 호소”, p302) 첫째, 순수한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 웨슬리는 순수한 말씀인 복음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하심을 믿었다. 웨슬리에 있어서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으로 여기서 확신 있는 믿음에 이름을 알았다. 그러므로 웨슬리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전도방법은 순수한 말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순수한 말씀이 설교되는 곳에 변화되어지는 성령의 역사를 웨슬리는 믿었으며 또한 체험하였다. 웨슬리에 있어서 복음적 설교의 표준은 성경이며, 웨슬리는 본문 중심으로 설교하였다. 웨슬리는 “누가 온전한 성서적 의미에서 복음적 목회자인가, 어떠한 교파에 속하였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선포하고 영광에 이르는 복음 전체 곧 의인(義認)과 성화를 설교하는 자만이 복음적 목회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합치신 것을 분리하지 않으며,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함께 선포한다”고 하였다.(J.Wesley, Thought’s Concerning Gospel Ministers,1770. 일기11.14. 참조) 데이비스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보이는 교회 내에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의 신적 근원과 보호”라 하면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존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도되고 치리되어야 하고, 이 말씀은 전 세계의 구원에 충분하다고 지적했다.(Ibid,p68) 또한 말씀의 설교는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기도, 찬송, 성경봉독 등 다른 요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고 했다.((Rupert E. Davies, Methodists and Unity, p58, 68) 또한 윌리암은 웨슬리가 순수한 말씀의 선포가 신앙을 일으켜 교회를 유지시킨다고 하였다.(Colin W. William, “John Wesley’s Theology Today“,1962. p143)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례(Sacrament)는 성만찬과 세례로써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정당한 통로인 것이다. 웨슬리는 “은혜의 수단”이란 설교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인 매개로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수단(means ordained by God)이 존재하는가?” 묻고, 선행적 은총은 은혜의 수단으로 기도 및 성서연구와 함께 성례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성례전이 “내적인 은혜의 외적 표상이요, 그것을 받는 수단”이라 하였다.(설교집, pp186) 또한 “신생”(新生)이란 설교에서, “성례전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라 묻고, “내가 의미하는 성례전은 내적이며 영적인 은혜로 된, 외적이며 가시적인 표징을 뜻 한다”고 답하였다. 또한 “성례전의 역할은 무엇인가?” 묻고, “성례전의 역할에는 둘이 있다. 하나는 외적이고 자각적인 특징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것을 의미하는 내적이며 영적인 은혜이다”고 답하였다.(“신생” 총서2권, p212-213) 웨슬리에 있어서 성례전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와 믿음의 외적 표시이며 또한 이러한 은혜와 믿음을 받는 수단이다. 웨슬리는 성례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현존함을 의심 없이 믿었다. 콜린 윌리암스(Colin W. Williams)는 “교회의 객관적 거룩성은 성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에 있는 것으로, 이는 성직자(Clergy)와 신자들(Believers)의 믿음과 생활과는 전혀 구별된 것”이라 하였다.(op cit, p145) 또한 폴크너(John A. Faulkner)도 “웨슬리는 성례전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the Real Presence of Christ)를 의심 없이 믿었고, 그 임재란 영적(spirit)이지 물체적인(corporeal) 임재가 아니다”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영적인 방식의 성례전이라 하였다.(J.A. Faulkner, Wesley as Sociologist, Theologian, Churchman, p89)
웨슬리는 “계속적 성찬의 의무”란 글에서 그리스도인의 성찬 참여의 의무를 다루고 있다. 웨슬리는 먼저 성찬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인 점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를 행하는 유익이 크기 때문이라 하였다. 즉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현재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하고 새롭게 만드는 것”이라 하였다. 셋째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서 죄 사함 받을 뿐 아니라 영혼이 힘을 얻어 강하여져 완전에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웨슬리는 성찬을 “우리 영혼의 양식”이라 하면서 “우리 육체가 떡과 포도주로 강하게 되듯이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표시에 의하여 강하여진다”고 하였다. 넷째는 이를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 하였고, 다섯째는 성만찬의 의도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계속해서 기념하는 것”이라 하였다. 웨슬리는 성찬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됨으로 그리스도인은 계속적으로 성찬에 참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이하, 웨슬리, “계속적 성찬의 의무”,pp79-90) 웨슬리는 빈번한 성만찬에 반대하는 이론에 반론하고 있다. 첫째, 성찬받기에 “나는 합당치 못하다”는 데 대해서, 하나님이 받으라고 명하시는데 “나는 합당치 못하다”고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하였다. 둘째, 거기에 필요한 만큼 준비할 시간이 없다는데 대해서, “만일 네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작정했다면 너는 주의 식탁에 나아가기 적합하다”고 하면서 순종하는 것이 자기반성보다 낫다고 하였다. 셋째, 계속적인 성찬은 존경심을 감소시킨다는 대 대해서, 하나님의 명하신 것을 존경심이 감소된다 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반론하고 있다. 넷째, 성찬에 대해 기대한 만큼의 유익이 없다는 데 대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내가 유익을 느끼든 못 느끼든지 실행해야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계속 참여하는 동안에 유익은 발견케 될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더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하여, 하나님이 명하시면 됐지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을 핑계하고 받지 않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호와드는 웨슬리에 의하면 성만찬은 “선행적 은총과 칭의와 성화의 규례”로서, 하나님께로 인간을 이끄시는 칭의와 성화의 수단으로 중요성을 갖는다고 지적하였다.(S.A. Howard, op cit, p103) 또한 윌리암은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과거의 고난을 표현함으로 기념적인 것이며, 이 고난의 첫 열매를 현재적 은총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되고 장차 도래할 영광에 대한 보장이 되는 주요한 수단이다.(Colin W. Williams, op cit, p159)
2) 웨슬리의 세례론 웨슬리는 “세례에 대하여”란 글에서 세례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것으로 “하나님과의 계약 속에 들어가게 하는 입회 성례전”이라 하였다. 웨슬리는 세례가 할례 대신에 마련된 것으로 ”할례가 하나님께 계약의 표시와 인장이었듯이 세례도 그러하다“고 했다.(이하, 웨슬리, ‘세례에 대하여“, 논문집 p63) 세례의 재료는 물로서, 물은 “씻어 내는 상징”이라 하였다. 웨슬리는 세례 방법에서 담갔다가 건지는 침례만이 성서적임을 찾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세례는 “씻거나 담갔다 건지거나 뿌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 중 어느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모범이 성경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또한 결정적인 모범도 없다고 했다. 요한의 세례도 담갔다가 건진 것인지에 대해서 성서에서 증명할 수 없다 하였고, 빌립의 세례도 물의 결정적인 깊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석하고 있다. 웨슬리는 “세례”는 “담갔다가 건진다는 뜻이 아니라 씻거나 닦는다는 뜻”이라 하였고, “사도들이 허다한 무리에게 세례를 줄 적에 담갔다가 건지기보다는 물로 ‘씻거나’ ‘뿌리거나’ 혹은 ‘부었을 것’이라 했다. 이것은 죄를 씻는다는 세례의 상징적 의미를 잘 나타낸다”고 하면서, “물의 양이 문제 되지 않는 것은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양이 문제 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결론적으로 세례 주는 방식이 성경에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두 가지 다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세례란 “성령에 의한 중생의 표시와 보증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물로 씻는 것을 제정하신 성례전”이라 했다.(웨슬리, “신생”, 총서2권 설교집, p212) 웨슬리는 세례의 유익에 대해서는 다섯 가지로 논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를 적용하여 원죄를 씻어 버리는 것이라 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공로가 세례 받을 때 우리에게 적용된다고 하여, “칭의의 정규적 수단”이라 했다. 둘째, 하나님과 계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셋째, 세례 받음으로써 “우리는 교회에 입교하게 되고 따라서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고 하였다. 넷째, 우리는 “본성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 했고, 다섯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결과로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세례는 단지 교회에 입교하는 것 이상이라 하였다. “세례는 여기 있는 교회에 입교시키듯이, 내세의 영광으로 들어가게 한다”고 하였다.(웨슬리, “세례에 대하여”, pp64-67) 웨슬리는 세례가 교회의 입교의 수단이고, 외적 세례는 내적인 세례의 수단으로 주님이 부탁하신 근원적인 위임이라 하였다.(마28:19-20)
웨슬리는 세례의 대상을 논하면서 성인은 물론 유아까지도 세례의 대상임을 밝히고 있다. 특별히 유아세례의 타당성을 다섯 가지의 근거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어린이들도 원죄로 세례의 대상이다. 즉 “어린 아이도 원죄로부터 씻겨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래적 대상”이라 하였다. 둘째로, 어린 아이들도 복음적 계약에 있음으로 그 계약의 영원한 인장인 세례를 받을 권리가 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도 상속자의 권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며 또한 어린 아이들이 계약의 인장인 할례를 받아 계약 백성이 되듯, 새 계약의 인장인 세례 받을 권리가 있다. 셋째로, 어린 아이도 “그리스도께 와야”하므로 세례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교회에 입교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넷째로, 사도들이 어린 아이에게 세례를 주었다면 어린이들도 세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주라 하였으며, 전 가족이 세례 받을 때 어린 아이만 제외되었다고 할 수 없음을 논하고 있다.(행16:33, 고전1:14-16) 만일 어린 아이에게 세례 주라고 한 언급이 성서에 없다고 주장한다면 웨슬리는 여인에게 세례 주라는 언급은 있는가?고 묻겠다고 하였다. 어린이들도 전 가족과 함께 세례 받았다. 다섯째로, 만일 어린이에게 세례 주는 것이 기독교회의 일반적 실천으로, 사도들도 실천한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유아세례가 모든 장소와 모든 시대의 기독교회의 일반적 실천이었으며, 하나님의 교회에서 1천7백 년 동안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는 사실이 유아세례가 그리스도의 뜻임과 사도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웨슬리, “세례에 대하여”, pp64-67)
2. 웨슬리의 사역자와 목회론
첫째, 웨슬리의 목회관 웨슬리는 1744년 제1회 연회 때 “목회의 임무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영혼을 돌보는 것”이라 하였다. 웨슬리는 평신도 사역자들의 임무를 “교역자가 없는 경우에 양떼를 먹이고 지도하며 가르치고 다스리는 것”이라 하여, “먹이고”(feed), “지도하고”(guide), “가르치고”(teach), “다스리는”(govern) 것이란 개념을 강조하였다.(“감리교 초기 연회록“, 총서8권, p261) 보우머(John C. Bowmer)는 웨슬 리가 여기서 “감리교의 목회 연구”에 기본적인 것을 설명했다고 지적하였다.(John C. Bowmer, Pastor and People, p198) 웨슬리는 목회란 하나님께서 영혼을 위탁하신 것, 책임 맡기신 것으로 그들을 하나남의 말씀에 따라 돌보아야할 사명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보우머는 하나님께서 위탁하셨다는 데서 웨슬리가 말한 목회자의 권위(authority)의 근원이 있으며, 이는 책임(responsibility)과 권한(power)의 이중적 근원이라고 분석하였다.(ibid, p190) 로우슨(A.B. Lawson)은 웨슬리의 회심의 직접적인 결과가 교리적인 변천이 아니라 복음전도의 긴박성을 주었다고 하며 그의 목회관의 변천을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로우슨은 목회자와 평신도는 직능으로서는 구별되지만 기능에서는 동일함을 지적하고 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아 “전도”(Lay-Preachers)들을 세운 것이다. 성직자는 성례전을 집행하지만 평신도는 설교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우슨은 이러한 점이 초대교회를 이상으로 삼는 웨슬리의 견해에서 온 것이며, 감리교의 특성이 되어 평신도 전도인을 두어 순회 전도케 하고 지역 목회를 담당케 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A.D. Lawson, pp27-29) 웨슬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사명을 충실히 감당키 위해 속회(Class Meeting), 신도반(Band), 선발 신도회 및 참회자반 등을 두었고, 평신도 사역자들을 임명하여 평신도 전도인(조사), 속장, 유사, 병자 심방인을 두어 양떼를 먹이고 치리하고 가르쳐 돌보는 목회를 실천하였다. 웨슬리는 3개월에 한 번씩 회원표(Ticket)를 주어 믿음 생활에 충실치 않고 품행이 불량한 자를 회원에서 제명시켜 엄격한 목회했음을 볼 수 있다.(노종해, “웨슬리 연합신도회 설립과정 연구”, cf, Fredrick A. Norwood, “Church Membership in the Methodist Tradition“) 둘째, 목회자의 자격과 권한
보우머는 감리교회에 있어서 목회자의 자격과 권한을 웨슬리에 근거하여 네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이하, John C. Bowmer, Pastor and People, pp209-219) 첫째는 세속과의 분리이다. 목회자는 세상적 활동과 세속적인 일에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이 점에서 목회자는 성별된 직책(sererated order)인 것이다. 그래서 보우머는 “감리회 설교자들은 세속적인 일에서 성별됨이 제일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하나님의 소명(the Divine Call)이다. 감리교 목회자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체험하고 응답해야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명체험이 있을 때 외적인 위임이 효과 있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1746년 제3차 연회 때 전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가?”라고 시험해 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교회의 근원은 하나님께 소명에 있는 것이지 대중인기의 선택(popular election)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회중이 그들의 목회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여 하나님의 소명을 중요시 하였다. 셋째,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다.(Invested with Authority) 보우머는 “웨슬리안주의(Wesleyanism)에서 목회자의 권위가 최상임을 의심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고 하면서, “목회자와 평신도들과 분담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absolute authority)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보우머는 이러한 목회자의 권한를 열거하고 있다. 즉, 1) 먹이고 치리하는 것이다.(feed and rule) 하나님의 부름 받은 목회자는 교회를 먹이고 치리해야 한다.(마28:19-20, 요20:21-23, 벧전5:2) 2) 성례를 집행하는 권위가 있다. 목회자(pastor)는 양무리에게 성례전을 정당하게 집례해야 한다. 세례 받을 자를 판단해야 하며 성만찬에 참여할 자 또는 추방할 자를 판단해야 한다. 3) 회원을 받아들이고 제명할 권한을 갖는다. 세례 참여자와 마찬가지로 회의 입회 허락자와 제명자를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기능은 평신도와 분담하거나 넘겨 줄 수 없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목회자의 지도하에 설교로 보좌할 수 있으나 이러한 목회자의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다.(ibid, p216) 4) 교리를 가르치고 해설할 권위를 가진다. 감리교 교리의 저장소는 웨슬리의 44편의 설교집과 성서강해 등임을 보우머는 지적하고 있다. 넷째로, 순수성(purity)과 권한(power)을 보호해야 한다.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보호 관찰할 사명을 지닌다는 것이다.
셋째, 목회자의 자격과 성품론 여기서는 웨슬리의 “성직자에게 보내는 전서”를 중심으로, 목회자의 자격과 갖추어야 할 성품을 다루고자 한다. 그는 목회자가 재능과 은총의 두 가지면을 갖추어야 함을 다루고 있다.(웨슬리, “성직자에게 보내는 전서”, 총서9권, 논문집. pp96-111) 1.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재능 1) 좋은 이해력, 선명한 식별력, 건전한 판단 및 사고력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재능을 갖추어야 “자기를 돌보는 사람들의 다양한 상황을 이해”할 수도 있고, 사탄의 계교에 대항해서 그들을 인도할 수 있다. 2. 목회자가 습득해야 할 능력 1) 자신이 소명 받은 중요한 사역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즉 자기의 직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3. 목회자에게 있어야 할 하나님의 은총 1) 목회자의 의도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영혼 구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웨슬리는 무엇보다도 의도는 순수해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림과 영혼 구원에 전적인 헌신이 있어야함을 강조하였다. 직위나 수입이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되며 수입에 따라 움직여서도 안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 영혼 사랑에 전념해야 한다. 웨슬리는 이러한 목회자의 재능과 성품을 갖추기 위해 계속 기도해야할 것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세 마디를 명상 주제로 삼고 나가자고 권고하고 있다. 즉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우리와 우리 양떼의 위대하신 목자의 뜻을 행하는 모든 선행에 우리를 온전케 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모든 일을 우리 안에서 이루신다”는 말씀이다. 웨슬리는 “이것이 같은 주님 안에서 당신들의 형제이며 종인 나의 염원이요 기도인 것이다”라고 하며 끝맺고 있다.(rch)
------------ 참고문헌 웨슬리 사업회, 죤 웨슬리 叢書 1-10권, 新敎出版 1981. -書評- 노종해,, Moravian and Methodist,(Towlson), 神學과 世界 제7집, 監理敎神學大學 1981
노종해(CM리서치)/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188 |